불안 속에 떨거나 불안을 활용하거나
동기 L과 오랜만에 점심을 먹었다. 가볍게 근황이나 나누려고 불렀는데 이야기하고 보니 마음만 더 무거워졌다. 둘 사이에 흘렀던 감정은 '불안'이었다. 회사에서의 성장에 대한 불투명성, 수명 연장에 따른 제2의 직업은 어떻게 가질 것인지 등등. 무엇하나 답하기 쉽지 않은 막막한 이야기들이었다. 점심때 나누었던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제 때 승진해야만 본사에서 더 오래 일할 수 있어"
승진이 본사 근속 기간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지만, 가만히 듣다 보니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L이 '승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히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조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높이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자리라도 지키기 위해서, 영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승진이 필요조건이라는 뜻이었다.
문득 승진이 계속 정체됐던 선배들 얼굴이 생각났다. 과장 정도까지는 어떻게 가더라도 그 이후 승진을 하지 못하면 어느새 후배를 팀장으로 맡게 된다. 개인의 자존심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직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된다. 유무형의 압박이 생기고 결국 본사에서 조용히 사라진 선배들이 여럿 있었다.
"앞으로 뭐 먹고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L의 직무는 지원 파트이다. 직무의 확장성이나 향후 성장 가능성에 한계가 있는 직무였다. 연차가 올라감에 따라 미래를 고민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나는 L이 '정서적인 실업 상태'라고 생각했다. 물리적인 고용은 유지되더라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따라 정서적으로는 실업한 것과 같이 막막하고 답답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더 늦기 전에 사업 부서로 가야 하나..." L은 부서 이동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지만 어디로, 언제, 어떻게 갈 수 있을지 몰라 답답해했다.
사실 나도 L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의자 뺏기 게임에 반강제로 참여하게 됐는데, 라운드가 지속됨에 따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과거 경제 성장기에 회사를 다녔다면 아마 회사가 계속 성장하고 그에 따라 승진 기회나 각종 '자리'들도 많아졌을 것이다. '회사의 성장 = 나의 성장' 등식이 성립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축소지향 사회다. 경제는 성장기가 아닌 하락기, 회사의 자리는 정체 혹은 줄어드는 시대다. 우리 회사도 마찬가지여서 각종 '자리'는 유지 혹은 감소하고 있다. 이에 따라 위로 올라가는 구멍은 점점 좁아지고 경쟁은 치열해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떻게 나아가고 생존할 것인가?' 뚜렷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생각을 무의식 중에 했던 것 같다. 당장 퇴사할 게 아니라면 어찌 됐든 조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까.
L과 헤어지고도 불안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았지만 곧 그 감정을 가라앉혔다. 도움이 됐던 건 이 생각이었다.
'다시 블로그 열심히 해야겠다'
마침 주말에 현재 맡고 있는 일의 몇몇 개념을 공부해서 블로그에 정리했다(https://culturenotes.tistory.com/59). 글을 쓰고 나니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명확해졌고 더 알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나아가고 있다는 감정이 생겼다. 그 감정을 떠올리니 마음속 깊은 곳의 흙탕물이 가라앉았다.
불안할 때는 가만히 있기보다는 뭐라도 하면 좀 낫다. 특히 커리어적인 불안함이 생길 때는 공부가 답이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직무 확장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일하면 전문가를 넘어 마스터가 된다. 회사 입장에서 마스터는 남겨야 한다"라고 말한다¹. 회사에서 생존하려면 적당히 알아서는 안되고 정말 그 일을 잘 알아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AI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하든 탑 10%가 돼라"² 고 말한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짜 실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환경이 불안함을 유발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음속에 불안한 감정이 생기는 건 부처님이 아닌 이상 쉽사리 막을 수 없다. 중요한 건 이미 생긴 불안함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이다. 하나의 길은 불안함에 떨며 한숨만 쉬는 길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불안함을 또 하나의 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러 번 말했지만 첫 책을 쓸 때는 커리어적인 불안함이 가장 컸던 시기이다. 불안할 때마다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불안함 자체는 막을 수 없지만 불안함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미 한번 불안이라는 감정을 잘 활용해 봤던 적이 있다. 다시 그때의 감각을 되살릴 때다.
<참고자료>
1. [지식뉴스 EP.54] "지금 당장 '이것' 바꾸세요"... 부자 되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특징 2가지 (ft. 김경일 교수, 인지심리학자) / 교양이를 부탁해
https://www.youtube.com/watch?v=IcJS1rtubII&t=1507s
2.AI 특이점은 이미 시작됐다, 살아남는 인간이 되는 방법 (김대식X송길영)ㅣ10분토론 /14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