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ianH Apr 01. 2020

하나. 느림의 맛

[파네트] 직장인의 조금 느린 빵 이야기

3월 17일, 향후 10년간은 할 일 없을 줄 알았던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대(大) 코로나의 시대, 마스크가 귀하신 몸 대접을 받고, 약국에서 줄 서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세상이 도래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직장인 한 명의 세계도 작은 변화를 맞이했다.  


출퇴근 시간을 아끼니, 조금 늦게 일어나게 된다. 

평일 6시 기상이 장기기억으로 저장되어 있는 내 몸이 어찌나 그 현상을 반기던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잘생겨 보이기까지 한다. 오전 일곱 시 반, 푹 자다 일어난 나를 반겨주는 해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재택근무로 메신저보다 전화가 더 많이 걸려오는 와중에도 오전은 심적으로 여유가 넘친다. 주변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니 조금 더 천천히 일해도 마무리가 깔끔하다.  

백미는 점심시간이다. 밥 한 끼를 단순히 때우는 시간이 아닌, 식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1시간이다. 모처럼 천천히, 꼭꼭 씹어먹는 쌀에서 녹아내리는 구수한 풍미를 느끼니 회사가 이제야 좀 다닐만하다.


느린 호흡으로 시작하는 오후 업무에는 느긋하게 내린 차 한 잔, 좋아하는 음악 리스트가 함께한다. 정신없는 동료들의 통화, 옆팀 사람들의 뜨거운 논쟁을 BGM 삼아 정신없이 보내는 평시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함께하니 낯섦과 즐거움이 공존한다. 그러다 보니 여유로운 간식 하나, 퇴근 후의 빵 한 조각이 감히 탐나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려본다.


빵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행복은 빵집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을 때 아닐까?

6시 땡,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20분 거리를 나선다. 빵 한 조각의 소소한 행복을 살 수 있는 빵집이 있음에 오늘도 감사함을 느끼며, 지하철 두 정류장 사이에 묘하게 낀 파네트로 향한다.


이 곳은 공덕동 모든 이들의 사랑방이다. 

부드러운 식빵 한 덩이 사러 오신 노부부, 달콤한 초코 크로와상이나 마카롱을 사러 온 젊은 커플, 혼자 집에서 갓 썰은 버터 프레즐을 구하러 천천히 걸어온 나까지 모든 이들이 웃음을 한가득 띄고 들어온다. 모든 이들의 얼굴에 핀 미소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도록, 파네트는 항상 작은 선물들을 준비해둔다.



1,200시간 동안 준비한 빵이라고 한다. 한 달 반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 동안 느리게 준비한 빵,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문구이다. 

입에 넣으면 부드럽게 녹는 일본식 탕종 식빵, 고메 버터의 향이 듬뿍 들어간 버터 프레즐, 스테디셀러 초코 크루아상, 신선한 바질소스와 토마토의 케미가 돋보이는 바질 토마토, 레몬향이 듬뿍 나는 시폰, 그리고 아직 먹어보지 못한 수많은 다른 빵들. 고르다가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손을 계속 뻗었다 마는데도 행복하다. 느릿느릿, 빵 진열대 앞에서 내가 먹고 싶은 빵을 고르는 순간 사라졌던 마음속의 여유를 잠시 되찾는다. 



어렵게 고른 빵 두 개를 들고 계산대로 향한다.

오늘의 선택지는 레몬크림이 발라져 있는 마들렌 그리고 선물용 레몬 시폰. 계산대로 걸어가는 3m도 안 되는 거리에서도 위기는 계속 찾아온다. 제과 코너에서는 보기만 해도 부드러운 케이크와 에끌레어들이 자기주장을 열심히 하고 있고, 눈을 돌려보니 달콤한 쿠키들이 예쁘게 포장된 채로 손님들을 유혹한다. 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는 완벽한 동선이다. 



계산을 마치고 잠시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오늘의 수확물을 꺼내본다. 먹고 갈까? 공덕동 빵의 메카에 와 있고, 급한 일도 없고 가는 길은 또다시 20분이다. 자기 합리화를 빠르게 끝내고 다시 느릿느릿 포장지를 벗긴다.

마들렌을 입에 넣어본다. 레몬크림의 상큼함이 자칫 느끼하기 쉬울 수 있는 마들렌의 기름짐을 잡아준다. 천천히 걷고, 고른 보람이 가득한 하루다. 선물용으로 산 시폰도 갑자기 꺼내고 싶어 지지만, 진열대에 남아있는 게 없는 걸 보고 조용히 다시 빵 봉투에 넣는다. 또 오면 되니깐.



집에 가기 전 잠시 돌아본 빵집이 밤길에 환하게 빛난다. '자연 발효한 건강한 빵을 내일도 다시 준비할게요, 천천히 오세요, 빵은 항상 많아요'라고 해맑게 외치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천천히 와도 되고, 먹어도 되고, 느릿느릿 빵 봉투 하나 들고 집에 가는 맛, 느림의 맛 in 파네트.

작가의 이전글 '살랑', 멀리 떨어진 식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