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자로서의 의식
예술가들은 세상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꿰뚫는 작품을 선보일 때가 있다. 그중에서도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은 디스턴싱을 포함한 인지치료가 '인간 의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대전제를 아주 잘 표현한 작품이다. 우선 작품을 먼저 살펴보자. 큰 창문이 있는 방이 있다. 창문 밖으로는 평화로운 풍경이 보인다. 방안에는 미술용 삼각대인 이젤이 놓여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젤 위에는 캔버스가 있고, 그 위로는 창문 밖의 풍경이 그려져있다.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은 바깥 풍경과 적절하게 겹쳐져 우리가 보았을 땐 마치 하나의 장면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캔버스 좌측은 커튼과의 경계가 조금 어색하고, 우측으로는 하얀색 모서리에 스테이플러 자국이 있다.
그냥 재밌는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쩌면 '순간을 포착하는 게 중요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상파 화가의 작품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아리송한 건 이 작품의 제목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대체 왜 이 장면이 '인간의 조건'인 걸까?
작품을 얼핏 보면 모든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실은 캔버스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큰 나무가 벌목된 상태는 아닐까? 젖소가 걸어다니고 있진 않을까? 어쩌면 오두막이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캔버스 위 그림이 실제 풍경을 정확하게 표상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 의식은 정확히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은 우리 의식에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가 경험하는 건 캔버스 위에 그려지는 것들뿐이다. 이 그림에는 다양한 것들이 담길 수 있다. 자신의 지각, 생각, 감정, 걱정, 예상, 기억, 신체감각, 실제로 벌어진 사건 등. 더 복잡한 것들이 담길 수도 있다. 어릴 적 경험, 경험화된 이야기, 비약한 근거로 추론한 결론들, 자신의 책임을 과하게 책정한 생각들, 부정적인 미래에 대한 예상. 우리는 이것들이 실제라고 믿고 살아간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 모든 것들이 이 세상을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여기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불안감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불안을 가질 뿐이다(I have some anixety). 하지만 우리는 이를 우리 자신으로 경험한다(I am anxious). '캔버스에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구나'가 아니라 '캔버스의 그림이 실제 세상이구나'고 받아들인다. 즉, 우리는 사건(I have some anxiety)과 지각(I am anxious)을 구분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혼동 때문에 우리는 심각한 괴로움을 겪는다.
이는 마그리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조건'이다. 인간 의식은 애초에 그렇게 작동한다. 결코 세상을 온전한 사실 그대로 바라볼 수 없다. 우리 마음속에는 저마다의 캔버스가 있다. 거기까진 괜찮다. 어차피 강아지가 보는 세상과 우리가 보는 세상도 다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정신건강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캔버스가 아주 강력한 편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캔버스 위로는 수많은 근심과 걱정, 의심과 자기비난이 떠오른다. 부족한 근거로 결론을 내고, 최악의 사건을 걱정하며, 큰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과거의 이야기로 자신의 자아를 규정하기도 하고, 느껴지는 감정에 '좋다, 나쁘다'는 가치 판단을 함으로써 그 감정에 기름을 붓기도 한다. 때로는 그림의 한 면만 끊임없이 바라보며 반추에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 경험들에 찰떡같이 달라붙어 그것이 '나'인 양 행동한다.
생각은 '나'가 아니다. 나의 의식에 어떤 생각이 떠오를 뿐이다. 감정도 '나'가 아니다. 나의 의식에 떠오른 감정을 내가 잠시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나의 몸조차 '나'는 아니다. 나는 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관찰할 수가 있다. 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내면의 경험을 바라보는 것, 특히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디스턴싱을 포함한 그 모든 인지치료의 가장 중요한 전제고,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통찰이다.
마음에 폭풍우가 몰아칠 땐 한 발짝 떨어져서(distancing) 캔버스를 가만히 바라보자. "지금은 이런 그림이 그려지고 있구나. 그림이 꼭 사실이진 않을 수도 있지." 익숙해지면 언젠가부터는 창밖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땐 정말로 마음을 담아 이해할지도 모른다. 사실 창밖은 늘 고요했다는 것을.
* 모네와 같은 인상파는 빛의 순간적인 포착을 중시했다. 참고로 르네 마그리트는 인상파 화가가 아니라 초현실주의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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