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냐?
"왜 사냐?"
늦은 저녁 퇴근길, 통화하던 친구가 물었다. 막 한강을 건너고 있을 즈음이었다. 평소라면 가볍게 답하고 넘어갔을 터인데, 우연히 한강 위에서 '생명의 전화'를 이용하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밤. 짙은 어둠. 권태로운 공기. 적막한 강. 잔인하게도 우아한 한강변 건물들의 주황빛 불빛들. 그 풍경 속에서 강 위에선 그는 깊은 수심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무얼 바라 사는 걸까? 삶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다. 얼추 다 알게 된 듯하고, 이제 이렇게 흘러가겠거니. 더 좋은 집을 사면 뭐가 달라지며, 더 애써본들 무엇이 달라지는지. 끝없는 의문에 답하다 보면, 정말 나를 채워줄 무언가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때론 삶이 아름다울 때도 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세상 물정 모르고 자고 있는 고양이.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글. 우연히 발견한 좋은 음악. 포근하고 부드러운 감각들. 도서관에서 밤 새우던 그 시간들. 부단히 노력해 마침내 얻어낸 그 무언가. 어쩌면 숱한 실패의 비참함까지도.
찰리 채플린은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본질적으로 한편의 비극이지만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 희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글쎄. 어쩌면 삶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언제나 희극이지만, 지금 여기서 먼 곳을 보면 비극이고, 또 멀리 가 뒤돌아보면 다시 희극인 게 아닐까. 삶은 아이러니다.
그러니 이렇게 답할 수밖에.
왜 사냐건 웃지요.
이처럼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조금만 더 첨언하면, 김상용은 친일 행적이 있는 시인이다. 그를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뻔한 전원시를 절묘하게 완성시켜주는 다소 허탈한 그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윤동주의 부끄러움, 수치심과는 또 다른 모습이지만, 암흑의 시기에 태평하게 전원시나 쓰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또 상황을 알고 보면 무언가 묘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