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10 ] 시선 너머If you were me5, 2010
언젠가 모 유명 남자연예인의 성폭행 사건이 불거졌을 때 그 즈음 알고 지냈던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그 연예인이 뭐가 아쉬워서 성폭행을 하겠냐.” 인기 가도를 달리던 그 연예인은 우리가 모르긴 몰라도 사적으로 친한 이성도 많을 것이며, 그가 원한다면 그를 거부할 여성도 거의 없을 텐데 굳이 억지로 성폭행을 해가며 이성을 취하려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 그 말의 요지였다.
성범죄를 저지를 필요가 없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도 공감하기 어려운데, 그것을 나누는 기준이 외적인 요소라는 건 공감할 수 없는 것을 넘어 두렵기까지 했다. 잘생겼으니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거란 말은 피해자가 예뻐서, 평소 옷차림이 자극적이라서 그런 일을 당했을 거란 말과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성범죄는 대부분 권력의 상하관계에서 비롯되지만, 성범죄가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따라붙는 “걔(가해자)가 뭐가 아쉬워서”, “걔(피해자)가 어디가 예뻐서” 따위의 뒷말들은 피해자에게 2차 가해로 다가온다.
한샘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눈 카톡 대화 내용이 피해자도 가해자의 스킨십에 동의했다는 일종의 ‘화간’이 아니냐는 의심을 낳는 걸 보며. 영화 <시선 너머>의 희주가 생각났다. 가구회사의 디자이너인 희주는 자신의 승진 여부를 결정하는 팀장 성규가 평소 자신의 허리를 슬쩍 감싸 안거나 손을 잡는 등 은근한 스킨십을 할 때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비추지 않는다. 희주가 팀장의 작은 신체접촉 하나에도 펄펄 뛰며 격렬하게 거부해야 했을까. 그랬다면 그날 밤 희주가 팀장과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맺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성범죄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권력 격차에서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애매함 때문이다. 동의하지 않은 신체 접촉의 불쾌함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불쾌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피해자는 위험 징조를 인식하지만 여기에 거부 의사를 밝혔을 때 받을 수도 있는 불이익을 감당할 수 있는지도 빠르게 파악한다. 신체적 자주권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장에서, 사회조직에서 최대한 불이익을 피해야 하는 것 역시 피해자에겐 생존의 문제이기에,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용인하는 범위도 넓어진다.
그리고 피해자가 생존하기 위해 짜낸 고통스러운 타협이 재판에선 ‘남녀 사이의 흔한 다툼’, ‘연애 과정에서 불거진 사소한 오해’로 작용한다. <시선 너머>에서 평소 희주가 팀장의 스킨십을 용인한 모습을 보아온 회사 동료들은 희주의 말을 믿지 않는다. 싫었다면 왜 거부하지 않았느냐. 결국 합의된 관계에서 상황이 뜻대로 안되자 팀장에게 누명을 씌운 게 아니냐는 동료들의 뒷담은 실제 성범죄 피해자들이 겪는 2차 가해를 보여준다.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성범죄 피해자의 이미지는 그 애매하고 복잡한 심리적인 결까지 다루지 못한다. 내가 가장 어이없어 실소가 나오는 묘사는 성범죄가 발생한 후의 피해자의 모습인데. 식음을 전폐하고 집에서 은둔하며 반 미친 상태로 결벽 증세를 보이는 묘사가 결코 우습다는 게 아니라, 마치 그 정도로 극단적인 행동을 해야 성범죄 피해자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시선 너머>에서 희주가 그랬듯 설령 직장에서 성범죄를 당했어도 다음날 그 직장에 출근해 아무렇지 않게 근무할 수 있다. 혼자 있을 땐 고통으로 몸부림 치고 토악질을 해도, 남들 앞에서 내가 이런 일 당했다고 모두가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살아가야 하기에. 대안이 없는 한 일은 쉴 수 없고, 사회생활도 해야 한다.
이렇게 처절하고 복잡한 피해자의 내상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한샘 사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ㅎㅎ’라고 쓴 카톡이 “성폭행 당한 사람 같지 않다”는 의심을 받는 세상에서.
* 참고 기사: 시사인 제533호 '성폭력 가해자는 남고 피해자는 떠난다'
영화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눈물과 고통만 삼키던 희주에게.
긴장이 풀리듯 몸이 따뜻해지고 속이 시원해지는 음식을 차려주고 싶었다.
영화식사 열 번째 레시피, 백합탕
백합탕 레시피
준비물: 해감된 백합 (1인분 9개), 홍고추 1개, 청양고추 1개, 대파 1개, 소금, 다진 마늘(생략 가능)
1. 해감된 백합을 냄비에 넣고 백합이 완전히 잠길 만큼 물을 넣고 펄펄 끓인다.
2. 백합이 완전히 벌어지기 시작하면 얇게 썬 대파와 홍고추, 대파, 청양고추, 다진마늘을 넣는다.
3. 소금을 조금씩 넣으며 간을 맞추면 끝.
영화 <시선 너머> (If you were me 5), 2010
국가인권위원회의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강이관, 부지영, 김대승 등 영화감독 5인이 인권을 주제로 제작한 단편 영화를 엮었다. 김대승 감독의 <백문백답>에서 전도유망한 디자이너 희주(김현주)는 회사의 팀장 성규(김진근)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그를 신고하지만, 경찰은 물론 회사 동료들로부터 의도적으로 성규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