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15 ] 피의 연대기, 2017
첫 월경은 13살 겨울에 시작됐다. 시작 ‘된 것’이 맞다. 내 몸이 월경을 하는 시점에 나의 판단이나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으므로. 하지만 이 신체적 변화에 대해 그 나이에도 아주 무지했던 편은 아니었던지라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단지 올 게 왔구나, 하고 담담해 하면서도 정작 생리대를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 임시대책으로 엉덩이에 깐 수건을 적시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가임기 여성으로의 삶이 그렇게 시작됐다. 나에게 생리는 내가 가임기라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지금은 고통을 견디며 조용히 폐경을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피의 연대기>를 보기 전까지, 1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내가 한 번도 생리를 근본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내게 있어 생리는 매달 겪는 일임에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남들이 알 수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었다. 생리통으로 아파도 누군가 어디 아프냐고 물으면 “몸이 좀 안 좋아서요”라고 뭉뚱그려 말했다. 생리대를 갈러 화장실에 갈 때도 파우치에 담거나, 가방에서 몰래 꺼내 누가 볼세라 황급히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생리대를 살 때면 생리대 문구가 보이지 않도록 검정색 비닐봉투에 돌돌 쌌다. 같은 여자끼리도 생리기간을 ‘그 날’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는 애인에게 생리란 단어를 꺼내기 부끄러워 시쳇말을 빌어 ‘마법에 걸렸다’라고 했다.
아 생리통 너무 아프다. 생리기간이라 운동을 못할 것 같다고 말하면 주변 남자들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그걸 왜 굳이 말하느냐는 반응이었는데, 반대로 굳이 숨길 이유가 무엇인지 언제부턴가 의문이 들었다. 인종과 시대를 초월해서 성별이 여자라면 겪는 당연한 신체 현상일 뿐인데. 변비나 설사는 스스럼없이 말하면서 (물론 절대 동급은 아니지만) 생리란 단어엔 마치 과하다는 듯 부담스러워하는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생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자기검열 또한 생리에 대한 제한적인 담론을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생리혈이 옷에 묻지 않도록 수시로 점검하거나 생리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게 하거나. 심지어 생리대를 평소에 미리 준비하는 행동 등은 여자라면 꼭 섬세하게 챙겨야 하는 일종의 ‘자기관리’로 인식되곤 했다. 이런 자기관리들의 공통점은 생리를 꼭꼭 숨기고 다른 사람에게 티내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 여자의 미덕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내가 하겠다고 하면 수도꼭지 틀 듯 1초 후 피가 줄줄 흐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잠든 때에도 24시간 계속되는 생리를 어떻게 통제하고 관리한단 말인가?
생리는 결코 불결하거나 수치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생리는 자기검열 혹은 도덕적 검열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긴 시간동안 생리는 남들에게,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터부시 되어온 걸까?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의 주제는 이 의문에서 출발한다. 연대기라는 제목에 알맞게 영화는 넓게는 고대 이집트와 성서에서 묘사하는 생리를 해석하고, 좁게는 감독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경험담을 공유한다.
똑똑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의 역사나 다름없는 생리를 다루려면 이야기가 장황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감독은 생리혈, 자궁근종, 처녀막, 생리대 등 많은 화두를 건드리면서도 결코 얕게 접근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길을 잃지 않고 일관적인 메시지를 끝까지 끌고 간다. 심지어 처음부터 강한 메시지를 던지기 보단 천천히 주제의식을 확장시켜감으로써, 피로감을 느낄 새도 없이 흥미진진한 이 대서사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피의 연대기>는 생리를 터부시해온 과거를 되짚고 그러한 과거가 만들어낸 오늘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보여준다. 생리에 대한 개방적인 담론이 형성되지 못한 현실은 비단 생리대 광고에서 생리혈이 파랗게 묘사되고, “생리 그거 오줌처럼 참을 수 있는 거 아냐?” 같은 어이없는 질문이 나오는 무지를 낳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억압은 상상력을 제한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범위에도 사람은 있다. 생리대가 없는 여성노숙자. 생리대를 살 경제적 여력이 없는 극빈계층의 삶. 생리대가 없어 신발 깔창을 댔다는 여학생의 사연이 뉴스로 나올 때까지, 그런 삶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 자체를 못한 건 개인의 단위를 떠나 사회 전체적인 불행이 아닐까.
인종과 시대, 빈부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가 겪어야 한다면, 생리는 생존의 문제다. <피의 연대기>를 보며, 사각지대의 생존을 상상할 수 없는 사회에선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생리란 여전히 한 달에 일주일은 견뎌야 하는 고통, 찝찝함. 예쁜 옷을 입을 수 없고 애인과 성관계를 못하는 기간일 뿐이지만, <피의 연대기>를 보고 새삼스럽게 내 몸에 애정을 느꼈다. 좀 더 당당해져도 괜찮을 것 같다. 타인이 불쾌해 할까봐 생리대를 감추거나 생리 중인 걸 숨길 필요도 없지 않나. 내 몸은 타인이 보고 싶어 하는 점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기에.
생리 기간엔 좀 참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평소보다 유독 더 당기는 단 음식은 먹고 싶은 만큼 먹기로 해요
영화식사 열 다섯번째 레시피, 핫케이크 (메이플 시럽 잔뜩 뿌려서)
<핫케이크 레시피>
준비물: 핫케이크 가루 200g (6장 분량), 버터, 달걀 1개, 우유 220ml, 메이플 시럽
(그 외에 요거트 등 먹고 싶은 건 아무거나 추가해 주세요)
1. 우유 220ml에 달걀 한 개를 풀고 잘 저어줍니다.
2. 시중에 판매하는 팬케이크 믹스 200g을 부어서 알갱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섞어줍니다.
(거름망으로 체에 걸러서 부으면 알갱이가 더 잘 섞여요)
3. 미리 예열해둔 프라이팬에 기름을 한번 두르고 기름이 거의 없다고 여겨질 만큼 키친타올로 닦아낸 후 반죽을 프라이팬 가운데부터 천천히 부어줍니다.
4. 약 2분 정도 굽다 보면 기포가 생깁니다.
5. 이때 뒤집어준 후 1분 정도 뒷면을 더 익히면 완성.
피의 연대기
For Vagina's Sake, 2017
감독; 김보람
여자의 월경에 대한 탐구 다큐멘터리.
범시대, 범세계적으로 여자들이 겪어온 생리의 연대기부터 현재 생리 담론의 현주소,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그야말로 '생리 얘기'로 꽉꽉 채웠다.
참고로 네이버에 등록된 이 영화의 명대사는
"아 X발 X나 귀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