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17 ] 라라랜드Lala Land, 2016
늦은 밤 이태원역을 지나는 지하철을 좋아한다. 그 날이 금요일이라면 더없이 좋다. 이태원역에 도착하기 한 두 정거장 전 쯤,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민 남녀 승객들이 우르르 들어오면 나는 설레기 시작한다. 진한 향수. 잘 그린 화장. 들뜬 입술. 깔끔한 코트. 이태원역에서 내릴 준비를 하는 친구 무리. 이들은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한다.
떠들썩한 클럽 분위기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지만, 애초에 그런 데에 같이 가 줄 친구들이 없다. (그런 친구들이 있었어도 내가 가지 않았겠지) 하지만 누군가 친구들과 한껏 꾸미고 놀러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아한다. 마치 예쁜 연예인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금요일 밤 이태원에 가기 위해 치장한 사람들을 보면 마치 내가 놀러가는 양 두근거리는 것이다.
<라라랜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도 미아(엠마스톤)가 친구들과 셀럽들이 모이는 파티에 갈 준비를 하는 장면이다. 일하러 가야한다는 미아에게 친구들은 말한다. "거기 오는 사람들 중에 네가 원하던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달리 말하면 배우로 성공하고 싶은 미아의 꿈을 이뤄줄 이른바 '연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데. 그런 식으로 미아를 설득하며 오색빛깔의 옷을 여기저기 두르고 분주하게 화장을 하며 준비하는 모습들이 나에겐 실제 파티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좀 궁상맞지만 파티에 가기 전 친구들과 화장을 하고 드레스업을 하는 게 내겐 흔하지 않은 일이니까. 그 소속감, 한바탕 웃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발끝까지 신경 썼지만 나중에 웃느라 엉망이 돼도 상관없을 것 같은 기분들. 이 장면은 OST를 들으면서 보면 더욱 즐겁다.
파티에 도착한 미아의 시선은 화려한 파티장과 고급스러운 풀(Pool), 내노라하는 사람들의 남다른 애티튜드에 압도당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화장실에서 문득 거울 속 자신을 발견한 미아는 돌연 외로움을 느낀다. 눈부시고 정신없는 파티. 그리고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 속에 완전히 스며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웃고 떠드는 군중 사이에서 뜻밖에 찾아온 공허함을 미아만 알고 있을까. 30분 전까지 눈물이 맺히도록 웃고 떠들던 내 모습이 낯설어지고 이제야 맨 얼굴과 마주했을 때 찾아오는 고독함, 그 묘한 외로움. 누구나 한번쯤 느끼지 않았을까.
이 장면의 OST명은 미아의 친구가 말했던 "거기 오는 사람들 중 네 꿈을 이뤄줄 사람"을 의미하는 'Someone in the crowd'지만, 장면의 끝에서 Someone은 결국 군중 속에서 소외된 자신을 발견한 미아로 귀결된다. 정확한 이름도 없이 무리 속에서 단지 someone일 뿐인 나의 존재. 파티에 가기 전부터 설렜다가, 즐거웠다가, 돌연 외로워지는 그 감정이 모두 담긴 이 장면의 OST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태원역을 지나는 밤의 지하철을 떠올린다. 가끔은 그 지하철에 탄 무리들 중 한 명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래봤자 뭐하겠나. someone in the crowd 밖에 되지 않겠지.
소란스러운 만남을 갖고 돌아온 날, 마음이 가라앉아 잠들지 못할 때.
영화식사 열일곱번째 레시피, 와인 한 잔
<라라랜드> (2016)
감독: 데이미언 셔젤
출연: 엠마스톤, 라이언 고슬링 등
영화 <위플래시>의 감독 데이미언 셔젤의 영화. 헐리우드 영화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세트장과 고전적인 영상미로 영화배우를 꿈꾸는 미아와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챤의 이야기를 담았다. (실제로 1950년대 헐리우드 영화들이 사용했던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 촬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