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화식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녀 Mar 19. 2018

자일스를 위하여

[ 영화식사 018 ] <셰이프 오브 워터>,  2018

좋아하는 감독이 오랜만에 호평 받는 영화를 만들어 한동안 기분이 설렜다. 머릿속에 많은 글감들이 떠돌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들과 <셰이프 오브 워터>의 공통점, 이 감독이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셰이프 오브 워터>의 시대적 배경과 상징 등등.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보니 머리에 남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자일스 (리차드 젠킨드). 나이 든 동성애자 화가이자 엘라이자의 이웃 친구. 이제 누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려줄까.     


<셰이프 오브 워터>의 리차드


기예르모 델 토로가 전작들을 통해 줄기차게 싫어해온 사람들을 꼽는다면 리차드(마이클 섀넌) 로 압축할 수 있다. <판의 미로>의 캐피탄 비달처럼, 자기 확신이 넘치고 삶의 목표가 뚜렷하며 성공적인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런 낙관적인 미래를 그릴 수 있을 만큼의 배경을 타고 났다. 리차드의 경우 그는 중산층 가정의 가장이자 백인 이성애자인데, 우주 유영에 성공함으로써 인류가 더욱 진보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기에 리차드 같은 사람들이 그린 미래의 상상도는 (그의 말에 따르면) ‘신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반면 기예르모 델 토로가 애정을 주는 대상은 그 상상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판의 미로>, <악마의 등뼈>, <비우티풀>, <오퍼나지: 비밀의 계단> 등 기예르모 델 토로는 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빚어냈다. 그 존재가 전작들에선 주로 유령이나 환상이었다면, <셰이프 오브 워터>에선 장애인, 동성애자, 흑인 등 이른바 주류 사회로부터 벗어난 타자들로 나타난다. 어린 아이부터 과학 너드와 추한 괴물까지, 사회에서 통상 나약하게 비쳐지는 인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점은 내가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다.


<셰이프 오브 워터>의 자일스와 엘라이자


그런 점에서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가 엘라이자 다음으로 애정을 담아 묘사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자일스가 아닐지. 그렇지 않고서야, 영화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음에도 자일스의 앞으로가 걱정되어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한 이 기분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해도, 옛 흑백영화를 좋아하고 짝사랑을 하기도 하며, 몇 없는 친구를 보살피고 챙겨주는 삶. 자일스가 진정 어른이라고 느껴졌던 장면은 그가 키우던 고양이 중 한 마리를 괴생명체가 잡아먹은 일화다. (동물 죽는 걸 몹시 싫어하는 내겐 정말 힘든 장면이기도 했다) 심지어 본인 역시 다치고도 화를 내기보다 먼저 도망친 괴생명체를 걱정하는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진짜 어른’과 닮아있었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을 잃은 장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좀 더 파국적인 상상은 자일스가 슬픔으로 절규하며 괴생명체를 죽이려고 들거나 엘라이자를 원망하는 장면일 텐데. 이때 자일스의 대사는 이렇다. “야생동물이잖아. 괜찮아.” 그리고 살아남은 고양이에게 말한다. “넌 운이 좋았구나.” 타임을 이해해 주면서도 피해를 당했을 때 내 감정부터 내세우지 않는 성숙함은, 자일스만큼 나이가 들고 혼자가 되어서야 가능해지는 걸까.      


자일스가 긴장된 얼굴로 들어서던 가게를 떠올린다. 짝사랑하는 가게 주인의 맛없는 키 라임파이를 매일같이 사던 그를 기억한다. 그 짝사랑하던 상대방에게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상처받은 얼굴로 엘라이자의 방문을 두드리던 그를 기억한다. 엘라이자는 사랑하는 연인과 진정 자유롭고 결함을 느낄 수 없는 삶을 찾았지만. 이제 맛없는 키 라임 파이를 먹으러 가던 설렘도, 단 한 명의 친구였던 엘라이자도 없는 자일스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와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조금 기대해 본다. 이번엔 동성애자를 혐오하지 않는, 더 좋은 사람을 짝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바라본다. 만약 기예르모 델 토로가 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일스의 나머지 삶을 생각해두었다면, 적어도 그의 여생이 혼자는 아니기를.






맛없는 키 라임파이 대신에 자일스에게 대접하고 싶은.  

영화식사 열여덟번째 레시피, 레몬 타르트


매거진의 이전글 썸원 인 더 크라우드의 썸원의 기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