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20 ] 몬태나Hostiles, 2017
* 브런치 무비 패스로 다녀온 <몬태나> 시사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자세히는 몰라도 묵직한 메시지가 있을 것 같은 영화들이 있다. <노예 12년>이나 <히든 피겨스> 같은 영화를 봤을 때, 역사의 결을 달리한 다른 인종이 봐도 아, 이 영화는 뭔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겠다는 예감이 든다. 다큐멘터리나 관련 서적을 보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단지 역사를 재연하고 설명하는 것만으론 영화의 의미가 완성되지 않는데, 내로라하는 백인 남성 배우들이 출연한 <노예 12년>이 백인 주류 사회에서 극찬을 받으며 세상에 나왔을 때 흑인노예, 나아가 인종차별에 대한 반성의 메시지도 좀 더 묵직해진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메시지라는 공감만으로도 영화는 유의미해진다. 나는 지금 <몬태나>가 그러지 못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한 여인이 죽은 아기를 안고 실성했다. 그녀는 인디언 무리로부터 남편과 세 아이를 잃었다. 20년 넘게 인디언과 싸워온 남자가 있다. 그는 ‘야만적인’ 인디언들이 자신의 동료를 어떻게 잔인하게 도륙 내는지를 모두 목격했다. 그 잔혹한 인디언 중 한 명이었던 옐로우 호크를 그의 고향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한다. 그 여정엔 이들의 목숨을 노리는 다른 부족의 인디언들도 있고, 인디언을 혐오하는 백인도 있다. 이 정도의 공평함이면 남자와 여자는 인디언과 화해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보고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건 가해자(백인)의 시각에서 그린 불균형적인 묘사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극을 진행하는 초점을 가족을 잃은 여인 로잘리와 동료를 잃은 남자 조셉에게만 맞춘다면, <몬태나>는 한 개인이 과거의 역경을 딛고 내면의 증오와 화해하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허허벌판의 자연에서 수시로 적에 노출되는 이들은 우연히 살아남을수록 그 연장된 생명의 무게를 느낀다. 살아남으려면 서로를 믿고 연대해야 한다. 개인의 실존을 위협하는 이 잔인한 무대에서 모두가 약자고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화해의 실마리가 잡힌다. 주인공 조셉으로 한정해 본다면 이 이야기는 그가 20년간 묵혀온 증오와 번민을 끊고 새 삶을 찾아가며 완벽하게 완결을 맺는다.
하지만 서부개척시대, 원주민이었던 인디언을 학살했던 비극을 소비하면서까지 개인의 고통을 다뤄야 했을까. 그것도 학살에 직접적으로 복무했던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물론 그 시대에 로잘리처럼 직접적인 학살에 기여하지도 않았는데 인디언에게 끔찍한 피해를 입은 백인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역사에 애당초 명백한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고, 그저 악하게 태어난 인간 본성의 원죄를 탓해야 하는 걸까.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상 최악의 전범국가라는 전 세계의 비난을 받으며 독일 국민들은 실의에 빠졌다. 원하지 않았던 전쟁으로 가족과 집을 잃은 건 독일 소시민들도 마찬가지인데, 유대인 학살 민족이라는 오명까지 얻게 됐다. 전쟁을 일으킨 국가 폭력만이 오로지 유죄라고 시민들이 외칠 때, 카를 야스퍼스는 강의를 통해 무고한 시민으로서 저지른 ‘죄’를 주장했다.
“우리는 그렇게 간단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 우리 자신을 재난의 희생자라고 쉽게 동정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겪는 고통에 대한 찬사나 위로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중략) 우리의 죄를 외부 사태나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말고, 가능한 한 지속적으로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결코 비참하다는 점을 들어 도피해서는 안 된다. (중략)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더 이상 독일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아닌, 오로지 개인으로서 신 앞에 설 수 있다.”
- 카를 야스퍼스, <죄의 문제> p.198, 앨피, 이재승 옮김
<몬태나>가 극단적으로 미국의 역사를 옹호하고 피해자로서 보호적인 묘사를 취하진 않았지만, 그런 비난을 피하고 균형을 찾고자 한 개인의 이야기로 도피했을 때 오히려 가해자 프레임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감독의 이러한 도피는 아무리 조셉이라는 백인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관대한 인물로 설정해도 영화의 한계를 덮을 수 없게 만든다. <몬태나>의 초점이 만약 옐로우 호크 추장에게 맞춰졌다면, 조셉은 <노예 12년>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진보적 백인 노동자처럼 영화 속 선악의 이분법을 허무는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을 것이다.
<레버넌트>처럼 이 영화가 폭력의 시대 한 복판에 내쳐진 사람의 생존기였다면 <몬태나>는 좋은 영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납작한 캐릭터의 인디언들과 달리 먼저 반성하며 먼저 용서하는 백인의 이야기로선, 아쉬움을 피할 수 없는 영화다.
이 맛인가 싶다가도 저 맛인가 싶은, 심심한 맛
영화식사 스무번째 레시피, 베이컨감자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