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식사 021 ] 아들의 방The son's room, 2001
시가 어렵다.
전하려는 말은 하난데 덧붙이고 덧붙여서 눅진해지게 써야 스스로 납득이 가는 성격 탓일까. 시는 어렵다. 문장이 멋있어서, 묘사가 탁월해서 기억해둔 몇 가지 구절은 있어도 그 시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덴 자신이 없어 해석을 찾아본다. 결국 나에게 시란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밑줄을 긋고 화자의 심정, 도치의 의미, 상징 등을 적어놓던 시절에서 변하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뭐든지 맥락이 있을 때 의미가 와닿는 법이다. 내가 외사랑에 미쳐있을 때 황지우의 시는 그 끓어 오르다 못해 넘치는 감정에 잔잔한 물이 되었다. 인연이 끝나감을 느낄 때 서영아의 시는 내 지난 날을 사랑이었다고 위로했고, 삶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아 공허할 때 김영랑의 시는 “허무한듸”라고 말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은유 없이는 본질을 나타낼 수 없다고 했는데, 도무지 바닥을 짚을 수 없는 감정의 본질을 잡아보려고 내 손이 허우적댈 때 시는 그런 내 손을 다정하게 잡아당겨 마음 어딘가를 짚어주곤 했다.
저녁 밥상에 아이가 없다.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후 종종 유가족의 밥상을 상상했다. 매년 아이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명절을 맞을 때마다. 시장에서 아이가 좋아하던 음식이 눈에 띌 때마다. 냉장고에서 무심코 꺼낸 반찬 하나, 생전에 아이가 좋아하던 반찬일 때마다. 이제 괜찮지 싶다가도 무너졌을 부모의 심정을 떠올리면 눈앞이 흐려졌다. 그리고 그때서야 이 시의 한 글자씩 스며든 물기 있는 슬픔과 단어 사이사이에 낀 처절한 고통을 알았다.
난니 모렌티 감독의 영화 <아들의 방>에서 아버지 조반니는 끊임없이 아들이 죽은 날 아침을 떠올린다. 그날은 아들과 조깅을 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환자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아 조깅 약속을 취소하고, 아들은 대신 친구들과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다가 그대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날 아침, 환자를 보러가지 않고 예정대로 아들과 조깅을 다녀온 자신의 모습을 조반니는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그가 아들의 죽음을 감당하는 방법은 그저 그날 일요일 아침에 아들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경우들을 계속 상상해내는 것 뿐이다. 그러한 시뮬레이션이 정교해져 갈 수록 아들이 죽은 현실은 선명해진다.
영화 <아들의 방>은 아들을 잃은 가족이 슬픔을 조용히 체화하는 결말로 향한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시선만큼이나 관조적이지만 이는 감독 역시 가족의 죽음과 슬픔에 대해 뚜렷한 정답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겨우 정상적인 일상으로 회귀한 가족의 모습은 극복이라기 보단, 단지 남은 삶을 사는 것 뿐이다. 그럭저럭 일상생활은 할 수 있지만 가슴 속에 아들의 방은 그대로 놔둔 채 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간다. 아직 죽은 아이의 방도 정리하지 못했을 세월호 유가족도 있을 것이다. 아이가 입던 옷, 앉던 의자, 덮고 자던 이불, 손때가 남은 교과서까지. 누군가는 평생 가슴 한 켠에 아이의 방을 두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가끔 생각나 문을 열어도 아이의 방에 아이가 없다는 것. "저녁 밥상에 아이가 없다"던 시처럼 몇 번을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돌아오기만 하면 수백 번이고 차려 주고 싶었을 따뜻한 밥 한 끼
영화식사 스물한번째 레시피, 미역국과 밥 한 상
<아들의 방>
The son's room, 2011
이탈리아의 거장 난니 모렌티 감독의 영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평범했던 가정에 찾아온 후유증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OST로 나온 Brian eno의 'By this river'가 유명하다.
2001년 깐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