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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Jul 23. 2018

무너지는 가족, 새로운 연대

[ 영화식사 022] 어느 가족Shop lifters, 2018

*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본래 세 개의 기둥이 우뚝 선 도깨비 굴뚝은 어느 위치에서 보는지에 따라 한 개로 보이기도 하고, 두 개로 보였다가 다시 세 개로 보인다. 갈등이 시작됐을 때 도깨비 굴뚝은 두 개가 되고 인물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지자 굴뚝은 세 개가 된다. 모든 갈등이 해소된 뒤 주인공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한 개의 굴뚝이 우뚝 솟아있다.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의 <굴뚝이 보이는 곳>(1953)

고쇼 헤이노스케의 50년대 작 <굴뚝이 보이는 곳>은 전후 일본의 무너진 일상을 회복하고 공동체 정서를 재구축하려던 시도가 엿보이는 대표적인 쇼민게키(서민극)다. 사실상 전쟁으로 기존의 가족 공동체를 상실한 류키치와 히로코는 새 부부의 연을 맺고, 갑자기 등장한 아기를 중심으로 하숙생 겐조와 노리코가 함께 하며 유사가족의 틀을 잡는다.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 도깨비 굴뚝은 전쟁 이후 더 복잡하고 다양해진 관계들을 휴머니즘의 시선으로 포용하는 전형적인 은유다. 등장인물들은 혈연으로 이뤄진 관계는 아니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애정과 공동체로서의 연대는 가족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느 가족> 스틸컷. 오사무와 쇼타

오사무와 쇼타는 마트나 동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훔친다. 국내엔 <어느 가족>으로 번안된 영화의 원제는 훔친다는 의미의 ‘만비키’ 가족인데, 훔친 물건들로 생활을 이어가는 가족은 쇼타가 훔쳐온 샴푸 브랜드를 불평하는 등 태연하게 ‘만비키’ 행위를 묵인한다. 할머니, 남편, 아내, 어린 자식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그 누구와도 혈연관계가 아니지만 어쨌든 ‘시바타’라는 성을 공유하며 가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구성원 역시 제도권의 정형화된 가족 구성을 훔친 것이기에, 마트에서 훔친 물건으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일은 이들이 배덕감으로 고민할 만한 일이 아니다.      


불꽃 축제를 보기 위해 마당 쪽으로 가족들이 고개를 빼든 장면에서 환하게 불을 밝힌 주택단지와 어두운 골목 만비키 가족의 극명한 대조는 이들의 삶이 애초에 도둑질에 문제의식을 가질 만한 세계에 속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때 불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그냥 소리만 들어”라고 하는 오사무의 대사는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멀리서 들리는 소리를 통해 추측할 뿐인 불꽃처럼, 직접 닿아본 적 없는 먼 제도권의 세계와 만비키 가족의 세계 간의 거리를 암시한다.

      

<어느 가족> 스틸컷

영화는 낭만을 지양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제도권이 비제도권의 결핍을 대하는 낭만적인 시선을 냉소하듯 단숨에 영화의 채도를 낮춘다. 아키가 유사성행위 업소에서 만난 남자와 정서적으로 감응하는 장면과 바닷가에서 할머니 하츠에의 마지막 모습은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낭만의 인플레이션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감성은 쇼타의 일탈로 만비키 가족의 진상이 밝혀진 후 맥없이 끊어진다. 오사무와 노부요가 부부가 되기 전 저지른 살인이나 하츠에가 아키를 데려온 내막 등이 밝혀졌을 때 이들은 더 이상 선하고 가여운 대상이 아닌 우리의 불편한 이웃이 된다.      


평론가 로빈 우드가 말한 정상성이란 “기존 권위에 의해 승인된 지배 이데올로기의 세계”이며, 그 세계에서 이탈한 자들은 ‘타자의 낭만’이라는 제도권의 동경의 대상이 되거나 공포영화 속 괴물의 형상으로 정상성의 세계에 진입을 시도한다. 만비키 가족의 이중성을 통해 이 온도차를 능수능란하게 전환하는 감독은 마치 특이한 것이 옳은 것 같고 그것을 소박한 행복쯤으로 여기는 나태한 감성을 냉소하는 것 같다.


<어느 가족> 스틸컷

어쩌면 쇼타는 자신이 무엇을 훔치고 살고 있는 건지, 또 어째서 훔쳐야만 하는 건지 의문을 갖고 일부러 붙잡힌 걸 수도 있다. 성을 따르고 관계구성을 훔치는 것만으로도 제도권이 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가족의 형태를 이룰 수 있는가. 진짜 질문은 다음이다. 어째서, 제도권으로부터 승인된 가족을 이루어야 하는가. 고쇼 헤이노스케가 <굴뚝이 보이는 곳>을 통해 전쟁으로 무너진 가족 공동체를 회복하고자 했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문턱을 높여 제도권의 구성원만이 가능했던 정형화된 가족을 넘어 새로운 연대의 다양성을 제시한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오사무와 쇼타는 다시 만난다. 아키는 텅 빈 집으로 돌아오고 유리는 난간 너머 누군가를 발견한다. 다시, 복원이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다. 훔쳐서 유지해왔던 가족의 형태를 버리고 새로운 연대를 이루고자 이들은 다시 모일 것이다. 오직 연대와 관계를 통해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불완전한 우리 삶의 생존법이라면, 이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해도 괜찮지 않을까. 형태는 다르나 본질은 변하지 않았던 도깨비 굴뚝처럼.

      




"고로케, 먹을래?"

오사무가 유리에게 건넨, 어쩌면 가장 쉽고도 어려웠을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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