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헐크가 된 날

나는 씩씩해졌다.

by 김자유


액션 영화의 주인공들은 종종 각성을 한다. 그러면 스토리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 역시 그랬다.

당시 나는 결혼 생활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고, 제대로 자기 주장 하나 못하는 내 자신이 가장 못마땅했다.

그럼에도 도대체 어느 타이밍에 한마디 했어야 하는지, 어떻게 말했어야 했는지 아리송했다.

도저히 메트로놈의 박자에 맞추지 못하는 피아노 연주처럼 늘 뒤늦게 감정이 튀어올랐다.



나는 감정 뚝딱이였다. (챗GPT 생성 이미지)




여덟 살쯤 된 딸아이와 손을 잡고 명동 구경을 간 날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고 해서 맥도날드에 들어갔는데 바닥이 미끌거려 순간 휘청했다.

물청소를 하고 제대로 닦지 않은 듯했다. 아이에게 손을 뻗으며 “조심해, 미끄러워”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가 넘어져 쿵 하고 세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것까지는 괜찮았다. 뭐, 그럴 수 있으니까. 근데 아이가 당황한 듯 벌떡 다시 일어나서 섰다. 나는 순간 속에서 알 수 없는 불덩이가 올라왔다.




작은 꼬마는 어느새 커서, 엄마와 어디든 여행할 수 있는 씩씩한 십 대가 되었다.



차라리 엉엉 울어버리지.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저렇게 일어나는 거야.
나를 닮은 건가.
애가 저런 표정으로 살게 할 건가.



순간 나는 카운터로 돌진했다. 아니, 넘어지지 않으려 팔을 버둥대며 남자 직원에게 다가갔다.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긴장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기요, 매니저 좀 불러주세요.”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 아이가 넘어졌다고 설명을 하는데,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려니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곧 여자 매니저가 나왔다. 나는 한 손엔 가방을, 다른 한 손엔 아이 손을 쥐고 서서 매니저의 반응을 주시했다.

그런데 매니저는 아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그리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순간 딸아이가 나를 올려다보는데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근데 마른 걸레로 얼른 닦아야 할 것 같다고 대충 말하고, 아이스크림 사는 것도 까먹은 채 밖으로 나왔다.


매장 문 앞에 서서 숨을 돌리는데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런데 별일도 아니었지만 어깨가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와 손잡고 명동길을 걸으며 물었다.

“엄마가 직원한테 말하길 잘했어? 아님 너는 말 안 하는 게 더 좋아?”

아이는 답하는 대신 날 보더니 엄지손가락을 펴 내밀었다.

아, 딸아이는 본 것이었다. 그날 엄마가 혼자 조용히 엄청난 헐크가 되기 시작한 것을.



아이 덕분에 나는 씩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