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대의 취향

취향은 물건들에 대한 기억

by 김자유

이십 대에 내 취향은 기도문 같았다.

‘이런 농담을 하는 남자라면 내가 좀 더 즐거운 사람이 되게 해주지 않을까’,

‘이런 옷을 입으면 나의 여성적인 매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처럼,

지금의 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되게 해줄 것들을 골랐달까.


이십 대는 그런 나이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어쨌든 이것저것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이. 20대 초반에 나는 여대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학점 관리는 엉망이었다. 그러다 ‘호주에 가면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급하게 유학길에 올랐다.


일중독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삼십 대 초반에는

‘이런 남자라면 안정적인 가정을 갖게 되고, 일과 삶의 균형 속에 살게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결혼을 했다. (결국 십 년 후, 인생이 꼭 기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이혼을 택했지만)



뉴질랜드의 기억



마흔의 취향에는 몸에 쌓인 경험과 기억들이 겹겹이 들어 있다.

뉴질랜드의 겨울을 예로 들어보자. 영하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날씨지만, 막상 살아보면 온도는 주관적이다. 단열재도 온돌도 없는 오래된 집.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 밖으로 나오자마자 발을 더듬어 털 슬리퍼를 찾게 되고, 거실로 나오면 두꺼운 잠옷을 한 번 더 여미고 히터 리모컨을 25도까지 꾹꾹 올린다. 잠시 후 아이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교복을 들고 나타나 히터 앞에 서서 주섬주섬 갈아입는다.



뉴질랜드에는 급식이 없기 때문에 냉동 새우를 해동해 파기름을 내 볶음밥 도시락을 싸 준다. 차고에서 시동을 걸어 학교로 향할 때마다 운전이 무서운 나는 깊게 숨을 내쉰다. 그리고 곧 열선이 없는 중고 도요타 프리우스의 차가운 핸들에 손가락이 시려 온다.



그러니까 사십 대의 취향은 그런 날들의 온도를 기억한다.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순간들이 쌓여가면서, 내가 살고 싶은 온도를 서서히 알아가게 된다.


장소나 도시뿐이 아니다. 카페에 앉아 일할 때의 작은 여유로움이 그날그날의 최고의 럭셔리라고 느끼는 나에게, 몸에 딱 맞아 불편한 청바지는 걸맞지 않다. 연필을 많이 쓰는 나는 천으로 된 필통은 금세 회색 얼룩의 누더기로 만들어버린다. 대신 연필과 볼펜 서너 자루가 들어가는 작은 가죽 케이스를 5년째 쓰고 있다.


12.9인치 아이패드가 들어가지 않는 가방은 십 년을 가야 들 일이 없다. 살아보니 그런 물건들은 결국 짐을 줄여야 하는 순간 짐이 된다. 그렇게 취향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물건들에 대한 기억에 가까워진다.


브라운 중독



최근 내가 한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매일의 경험들 때문이다. 해 질 녘의 서울 풍경이 아름다워서나, 홍대 쇼핑이 즐겁다거나 하는 한두 가지 매력 때문이 아니다.


싱글맘이자 워킹맘인 나의 하루를 살펴보면 알 수 있게 된다. 한국의 여느 평범한 동네에 사는 지금, 집에서 아이 학원까지 십 분이면 걸어서 갈 수 있다. 게다가 한국의 여느 학원 건물처럼 1층에는 카페가 있다. 아이가 수업을 받는 동안 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을 하거나 글을 쓴다. 아이와 팔짱을 끼고 돌아가는 길에는 마트가 두 개나 있어 장을 볼 수 있다.


맡겨진 소녀



주중에는 한 번씩 연희동이나 동대문 같은 곳에서 재미난 것들을 구경하고, 주말에는 우리말 책이 가득한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온다. 편의점에 가면 언제든 구운 계란을 살 수 있고, 겨울에 버스정류장 벤치에 앉으면 엉덩이가 따뜻하다.


그렇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사실은 소중하다는 걸 알아버렸다. 큼직한 나일론 가방에 가죽 필통과 아이패드를 넣고 헐렁한 면바지를 입고 동네를 걸어다니는 이 사소한 걸음들이 매일 쌓이고 쌓여 내 취향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 취향이란

잘 길들여진 신발처럼

도무지 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취향: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개인이 특별히 좋아하거나 끌리는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