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Pray, Write.

40대의 클리셰 혹은 용감한 시에스타

by 열대우림책방경리
이 나이에 그 좋은 회사도 쉬고, 집도 처분하고, 남자친구랑도 헤어지고 발리에 간다고? 너 그 영화...'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 따라 하는 거야?

"응". 다 사실이다. 그래서 클리셰라고 딱히 하면 할 말은 없으나... 인간사 클리셰가 있는 데엔 이유가 있으며, 막상 진짜 다 접고 발리든 이탈리아든 인도든 떠난 사람이 주변에 영화 속 줄리아 로버츠 말고 또 있냐 (나는 없다!) 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더랬다. 사실 나는 발리행 비행기를 알아볼 때 즈음엔 번아웃이 진행될 대로 진행된 터라, 나의 생각과 마음을 타인에게 설명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20여 년간의 회사 생활 중 15년간 미국 외노자로서 생존해 오면서, 그 사이에서 개인사와 가족사를 견뎌내는 삶이 나를 태우고 태워, 아주 고옵게 바스러진 잿더미 같은 상태였다.


그렇게 휴직계를 내고, 발리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5일 만에 비행기를 끊고, 내 주변 발리 전문가 2명 (홍보/마케팅 에어전시 대표님 A와 요가 선생님 B)의 조언을 참고로 딱 하루정도 검색해서 3주간의 숙소를 정했다. 내가 살던 미국 시애틀에서 발리는 무려 비행시간만 19시간인...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대척점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우루과이 앞바다)에 가까운 곳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꼭 이렇게 먼 데까지 가야만 하나라는 내 안의 판단귀마의 불꽃이 말을 걸기 전에 황급히 헌트릭스의 골든을 틀어 내 마음의 소리에 응해주기로 했다 (땡큐 혼문).


여하튼 그 긴 비행시간 동안 기내 엔터테인먼트로 영화를 검색하는데 - 운명처럼 혹은 클리셰처럼- 화면에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떡하니 내 눈앞에 나타났다. 홀린 듯한 손가락으로 터치해서 15년 만에 본 그 영화는 나에게 너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느덧 나는 주인공 Liz Gilbert (줄리아 로버츠) 보다 나이가 한참(!) 많아졌으며, 그녀처럼 뉴욕에서의 삶과 오랜 인연들을 정리해야 했고, 20여 년간 목숨처럼 쌓아온 커리어에 쉼표를 찍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 도입부의 화장실에서의 그녀의 어색하지만 간절한 기도 장면이 그렇게 마음에 와닿을 수가 없었다.


리즈: 저... 어떻게 해야 하죠..? 제발, 제발 알려주세요
신(?)의 응답: 음... 일단 잠 좀 자, 리즈 (Go back to bed, Liz)

미국에서 30대 싱글 외노자로 살면서 저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사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생존과 자아실현 그 중간 어디쯤에서 늘 치열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미국 정부에 나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영주권을 따내고, 회사들에게 나를 증명하면서 이직과 승진을 해내고. 그 와중에 이런저런 연애를 하면서 울고 웃고. 그렇게 20대에는 단순히 영화적인 장치로 느껴진 그 장면이, 오늘의 나에게는 마음을 후벼 파는 순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 비행기를 타고 일단 긴 잠을 자러 가야겠다고. 틈만 나면 주변 사람들에게 동남아에 가서 어부바지에 쪼리 끌고 다니면서 한량처럼 살고 싶다고 - 하루 종일 요가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싶다고 - 노래를 불러왔던 내 모습이 문득 생각났다. 그런 시간들을 비로소 나에게 선물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 글을 쓰면서 2022년에 저장해 놓은 나의 작가의 서랍 속 첫 브런치 글들을 다시 읽었다. 시애틀의 책방경리. 이 6개월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열대우림 책방에서 나를 더 이상 찾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용감하게 휴직계를 내고 긴 낮잠을 나에게 허락하려 한다. 이제부터 쓸 글들은 시애틀 책방경리의, 발리 일기다.


(나시고랭) 먹고, (요가 수련으로) 기도하고, (글을 쓰는 나를) 사랑해 보자.


Eat, pray, wr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