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두 번째 외전
“나쁜 놈의 XX, 그 XX는 자식도 아냐!” 야밤의 술자리. 친구 A가 술상을 내리쳐대면서 자기 아들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던 적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 중 ‘최강 빌런, 대답하지 않는 대답’ 챕터에서요.
출간 후 A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게 실은 “이게 다 아빠 책임이야!”라는 아들 말에 빡 돌았던 탓이었다더군요.
A와 아들의 속상함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누구 책임일까, 혹은 어느 편에 책임을 지운다고 풀릴 일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언젠가 제 아들이 했던 비슷한 뉘앙스의 말도 떠올랐던 날이었습니다.
오늘은 ‘책임’이라는 말의 쓰임새를 떠올려 볼까 합니다. 제 책의 꽤 여러 챕터가 실은 이 ‘책임’에 관한 이야기에 깊이 엮여 있습니다. 근데 한 번도 명시적으로 드러내질 못했습니다. 자꾸 헷갈렸던 단어라서요. 여전히 참 헷갈립니다;;
'책임'은 원망하거나 혹은 추궁할 때 쓰는 말 같습니다. 이때의 책임은 ‘탓’입니다. 부정적이고 공격적인 뉘앙스지요. 책임을 묻는 이는 삭막해지고 문책을 당하는 이도 날카로워집니다. 그러니 아빠 A도 발끈했겠지요.
‘이거 책임져!’라는 말은 얼핏 원래대로 돌려놓으란 말처럼 들립니다. 근데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는 상처란 게 세상에 있던가요. 폭행 가해자가 피해자 병원비를 대서 갈비뼈를 원래대로 붙여놓거나 위자료를 주며 사과한다고 해서 폭행 당한 고통이나 트라우마가 없던 일이 되진 않습니다. 장미를 밟아 버린 이웃이 새 장미를 심어줬다 해서 어린 왕자가 쏟은 시간이 복구되지도 않구요. 학폭 피해로 사망한 자녀의 부모에게는 무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니 '책임져!'에서 책임이란 원상 복구 요구라기보다 상실감을 쏟아내는 ‘원망’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너도 나처럼 망가지라는 저주일 때도 있습니다.) 원망 받으니 발끈합니다.
‘니 책임이야’라는 말은 어떤가요. 이때의 책임은 원망에 더해, 잘못에 대한 처벌이나 제재, 혹은 피해 보상의 뜻을 포함합니다. 일상 속 문책은 물론 민‧형사책임 같은 법적 책임도 이 용례에 속하는군요.
'인과적 책임'이지요. 원인 제공자를 찾아내 처벌하거나 제재하거나 보상 받기. 한 마디로 ‘추궁’입니다. 이것도 탓 하는 거네요. 추궁하거나 추궁 받을 때도 발끈 버튼은 자동으로 작동하지요.
추궁도 원망처럼 실은 한계가 있더군요. 일단 진짜 원인 제공자를 밝히는 거 자체가 만만한 일이 못됩니다. 원인을 제공할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발뺌하거나 전가할 힘도 큰 법이라서요. 또 하나, 추궁을 통해 책임지게 한다는 게 애당초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합니다. 가령 바다로 유출된 방사능은 돌고 돌아 결국 우리 몸에 쌓여 배출되지도 않는데, 유출자나 방조자를 처벌한들 뭘 책임질 수 있을까요? 암만 생각해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있는 상처란 없더군요.
원망과 추궁의 공통점. ‘사후적이자 인과적으로 탓한다’는 겁니다. 부정적 결과가 일어났을 때 뭔가 한다는 발상. 탓으로서의 ‘책임’은 공격적이고 소모적인 뭔가일 수밖에 없더군요. 타인을 향하든 자기를 향하든 말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책임이라는 말은 ‘책임질 것’을 요구받는 사태에 직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 책임이라는 말을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없습니다.
일본 사상가 우치다 다츠루의 생각입니다. 타자를 향한 책임 윤리를 대표하는 사상가 레비나스(E. Levinas)의 제자지요. 우치다는 ‘책임’이라는 말은, 책임질 일이 필요한 사태가 벌어지고 나면 이미 늦어버렸다는 걸 일깨우는 데 사용될 때만 생산적이라고 하는군요. 흠, 사전 예방적 의미로서의 책임을 말하려는 듯합니다.
현대 생태‧책임 윤리의 대표 사상가 요나스(H. Jonas)도 책임을 이렇게 나눕니다. 1) ‘일어난’ 결과를 평가해 원인 제공자의 잘못에 대해 지우는 부담이나 처벌. 2) ‘일어날’ 결과를 신중히 예측하고 행동할 의무나 부담.
2)는 ‘예방적 행위’이자 ‘의무론적 책임’입니다. 원망하고 저주하고 처벌하고 보상하고 추궁할 일이 최대한 안 일어나게 미리 마음 쓴다는 말 같습니다. 짊어질 부분이나 역할. 이건 ‘몫’을 뜻하는 말입니다. 남을 향한 몫이든 나를 향한 몫이든 말입니다.
흔히 법적 징벌 같은 사후 추궁에도 예방 약빨이 있지 않냐고들 합니다. 근데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우린 좀 멀리 와 버렸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깊은 경험이 새겨져 있지요. 선택적 처벌이 만연해 온 지라 예방이나 위로 효과보다 상대적 박탈감이나 도덕적 해이로 귀결될 때가 더 잦은 듯합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마음 쓸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깨달았습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마스크를 쓰는 누군들 소용없었습니다. 모두가 건강하지 않으면 누구도 건강할 수 없더군요. 다 함께 책임을 나누며 동참했기에 모범적으로 팬데믹을 넘겼었지요.
발끈과 발뺌과 전가를 유발시키는 일, 그러니까 누군가만 사후 책임져야 할 불행한 일을 애초에 덜 생기게 하는 게 거의 유일한 길 아닐까 싶습니다. 저마다 힘닿는 범위에서 미리 마음 쓰는 일입니다. 힘 많이 닿는 이는 당연히 더 많이 써야 할 테구요.
가족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관계 속에서 ‘책임’만큼 자주, 쉽게, 그리고 다양하게 쓰여 온 말도 없는 듯합니다. 서로에게 ‘탓’을 할 때도 ‘몫’을 할 때도 있으니, 우리의 애초 생겨먹은 구조(존재론적 구조)란 늘 영향과 상처를 주고받는 엮여 있음의 구조라는 걸 가장 명확히 증빙하는 단어가 책임 같습니다.
언어 습관은 사회적 소통 방식과 한 통속이더군요. 사회적 상호작용이 언어 습관을 만들고 언어 습관이 다시 관계를 구성해 냅니다. 부모 자녀 간에 책임을 탓이라는 뜻으로 자꾸 쓰다 보면 부모자녀 관계 역시 탓해야 할 뭔가가 돼 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책임은 애초 참 좋은 상호작용을 뜻하는 단어였을 텐데 말입니다.
책임이 잘못, 원망, 추궁, 저주, 처벌, 제재, 보상의 뜻(to)보다는 참여, 나눔, 동참(with)이나 염려, 배려(for)를 향한 '몫'으로 더 자주 받아들여지면 좋겠습니다.■
※ 인용문은 우치다 다츠루, 『곤란한 성숙』(바다, 2017), 24p입니다. 책임에 관한 요나스의 구분은 한스 요나스, 『책임의 원칙』 (서광사, 1994), 168~172p에 설명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