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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퐁 Dec 02. 2023

영국에서 산다는 것

늘 꿈꾸던 한 장면 속에 살고 있지만, 그 뒤에 숨은 생각지 못한 현실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 중에 '마루 밑 아리에티'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벼랑 위의 포뇨 다음에 나온 작품이지 아마?  지브리의 앞선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아주 크게 주목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서정적인 스토리와 지브리 특유의 동화적이고 단아한 그림체, 한 폭의 수채화가 바람에 일랑이는 것 같은 배경에 많은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작품이다. 내용보다도, 유럽 문화와 풍경에 대한 로망에  일본의 정서를 잘 덧입힌 느낌의 전체적인 분위기 좋았다. 그 많은 예쁜 장면들 중에서도 나는 주인공 소년이 종종 바깥바람을 쐬러 나와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있던, 간질간질 바람에 살랑이던 풀밭(meadow)이 잘 잊히지 않는다. 남편 말로는, 미야자키 하야오는 (좋은 의미로) 다소 변태적으로 무언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브리의 작품들의 배경들 중에 특히 눈길을 끄는 배경들은 대부분 유럽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라고 한다. 마루 밑 아리에티가 영국 작가 메리 노튼의 'The Borrowers'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니, 그럼 영국 어딘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겠구나 잠시 생각했었다.



일본에서 지냈던 짧은 시기에 이 영화가 개봉했고, 우리는 그 이듬해쯤 영국에 다시 오게 되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 1년, 에식스에서 1년, 일본에 돌아가서 한 6개월, 그리고 다시 런던에서 1년, 임신과 출산, 학위 취득, 구직 활동, 비자 문제 등등... 마음에 '서정'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틈 없는 세월이 이어졌기에, 아리에티는 내 기억 속 깊은 곳 어딘가에 처박혀 도통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남편이 에식스의 콜체스터라는 듣도 보도 못한 동네에 취업을 하게 되어 런던에서 무작정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결혼하고 처음으로 한 곳에서 1년 남짓을 넘겨  5년이 넘게 살고 있다. 막상 와서 보니 이곳은 런던에서 꽤나 가깝지만 아직 집값이 그리 비싸지 않고, 한적하고 백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지만 종합 대학교가 있고 런던 출퇴근이 가능한 지역이라 젊은 인구가 꽤 많았으며, 영국 치고는 날씨가 상당히 좋은 동네였다. 동네가 익숙해지고, 아이가 자라고, 친구가 생기면서 동네 엄마들과 아이들이 편안하게 뛰놀 수 있는 근처의 공원 혹은 그냥 들판, 숲길 등을 다니기 시작했다. 기억의 저편에 묻어 두었던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가 드디어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 장면, 내가 많이 좋아했던 그 풍경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에.


호젓한 숲길을 걷다가 문득 탁 트인 들판이 펼쳐지며 시야가 환해지고 그곳에 핀 너무 강렬하지 않은 각양각색의 풀꽃들이 바람에 살랑인다. 그 길을 무심히 가로질러 걷거나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고 있노라면 팍팍한 타향살이조차 살 만하게 느껴진다. 사진에는 잘 담기지 않는 청량한 공기와 적당한 산들바람, 말갛게 갠 하늘,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 반짝이는 햇살. 이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건 일 년에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기간뿐이지만, 만약 이곳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영국을 추억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장면일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마법 같은 분위기를 지브리는 애니메이션에 참 잘도 담아냈다. 직접 와서 보지 않고서는 절대 그리지 못했을 느낌이다. 거의 잊어버린 꿈이지만, 어쩌면 나는 내가 꿈꾸던 장면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사 그것이 내가 꿈꾸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본 글보다 더 긴 에필로그...


지난 5일간 심각한 치통에 시달리고 있다. 두 달 전 한국에서 분명히 치과 검진 및 적당한 처치를 모두 받고 왔다. 앞으로 주의해서 관리해야 할 부분은 있지만 현재로서는 괜찮다는 이야기를 두 곳에서 듣고 왔건만.. 느닺없이,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강렬한 치통에, 어처구니없는 영국의 치과 시스템에 충격을 받고 며칠 계속 우울했다. 이렇게는 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아픈데,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진통제를 최대로 먹고 버티다 아침에 치과에 전화를 걸어, 예약비를 내고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예약 시간에 맞춰 진료를 받으러 갔는데... 아픈 곳 처치는 전혀 해주지 않고, 치아에 금이 갔으니 크라운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다. 비용은 비보험으로 100-120만 원이 든다고. 상태를 봐서 신경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따로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약 60만 원 정도). 국민 건강 보험(NHS) 환자로 몇 년 전에 등록비까지 내고 등록해 둔 치과였는데, 등록만 해놓고 한 번도 오지 않아서 등록 취소되었으니 모두 비보험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도 했다. 첫 일 년은 검진을 받을 필요를 못 느꼈고, 그다음에는 팬데믹으로 1년 넘게 치과가 거의 영업 정지 상태였기에 가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영국 치과는 팬데믹 이후 진료 여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존의 환자 외에 새로운 보험 환자를 받지 않고 있다. 필요하다면 비보험 진료라도 받아야 하지만... 이 상황이 다 너무 황당했다. 아픈 와중에도 한 번도 진료를  받아보지 않는, 저리도 매정한 태도의 의사에게 치료를 맡겨도 될지 의문이 들었다. 크라운은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아픈 것만이라도 어떻게 해줄 수 없냐고 물었더니, 진통제를 먹으란다. 너무 차분하게 점잖게 이야기해서 더 물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10만 원가량의 예약비만 내고 아무 진료도 받지 못하고 돌아와 그날 밤 더 극심한 치통을 겪고 나니 정말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고 싶어졌다. 말만 선진국이지 이런 기본적인 의료 보장도 안 되는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건가. 이곳저곳의 조언을 구해 다음 날 어찌어찌 다른 치과에 응급으로 예약을 해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최소한 그곳에서는 항생제 처방을 받을 수 있었다. 염증이 심하니 일단 항생제를 먹고 염증을 가라앉힌 뒤 다시 내원해서 신경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고, 물론 비보험으로. 어제에 비해 일단 환자를 고려한 상식적인 수준의 처치와 진단이라고 느껴져 이곳에서 진료를 받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받은 다음 예약 날짜가 2주 후다. 1주일 치 항생제 처방을 받기는 했지만... 이런 속도라면, 치료가 다 끝나려면 3~4개월은 더 걸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밀려든다. 항생제를 3일 정도 먹고 나니 여전히 아프기는 해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로는 돌아왔다. 계속 속이 상한 상태지만 어느 정도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오늘은 아이와 함께 가을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숲길로 산책을 다녀왔다. 어쩐지 유독 고운 올해 영국의 가을 풍경과 산책길에 느닷없이 나타난 무지개 (이렇게 선명하고 완전한 모양의 무지개를 본 적이 있었던가 싶은). 삶이 좀 지치고 팍팍하더라도 어찌어찌 버텨보라는 (어딘가 있을지 모를) 신의 작은 친절의 표시였을까? 어찌 되었건 나는 내가 꿈꾸던 그 찬란한 풍경 속에 있다. 현실이 어떻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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