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눈이 하염없이 내리더니, 오늘 아침엔 신발이 뒤덮일 정도로 많이 쌓여있었다. 이 정도 눈이면 오늘 하루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폭설이었지만, 출근을 막을 순 없었다.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흩날리는 눈발로부터 최대한 몸을 숨기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보통의 출근길이었다면 초등학교를 지나가며 아이들의 웃음소리나 아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차량들의 엔진 소리가 들렸을 터였다. 이 날 들리는 건 오직 우산 위로 툭툭 떨어지는 눈송이의 소리와 눈을 밟을 때마다 나는, 뽀드득대는 소리 뿐이었다.
우리는 평소에 많은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 이는 보이는 것의 변화를 말한다. 하지만 눈으로 세상이 뒤덮이면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들리는 것, 만지는 것을 비롯해 내가 느끼는 세계가 변화한다. 눈은 소리도 하얗게 뒤덮는다. 결국 눈은 우리(의 감각)를 뒤덮는다.
어릴 적엔 원하는 모양대로 만질 수 있는 눈은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특히 손의 열기로 조금씩 녹여주어야 눈이 딴딴하게 뭉치며 형상을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차가움을 어느정도 감내하고서도 눈을 만지는 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 날 지금의 나에게 눈은 조금 색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하였다.
모든 감각이 하얗게 뒤덮이고 남는 건 내 자신을 향한 감각이었다. 읽고 듣고 느끼고 해석하고 판단해야할 외부의 것들이 잠시 동안 흐려지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의 상태는 마치 마음의 세계에 흰 눈이 내려 모든 것이 하얗게 뒤덮인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나 홀로 존재하며 생각에 잠기는 느낌을 소란스러운 도심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특별한 순간일 것이다. 이렇게 나에겐 겨울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물을 때 답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