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악-도덕 철학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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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되고도 가장 현대적인 딜레마가 있다. 바로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필요악(necessary evil)'이라는 개념은 이 근본적 모순을 정면으로 제기한다. 어떻게 무언가가 동시에 '필요하면서도 악할' 수 있는가? 이 역설 속에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조건이 숨어있다.


한 어머니가 굶주린 아이를 위해 빵을 훔치고, 한 의사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하며, 한 지도자가 수백만 명을 구하기 위해 수천 명을 희생시킨다. 이런 상황들에서 우리는 도덕의 가장 복잡한 얼굴과 마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크고 작은 도덕적 타협을 한다. 늦잠을 잔 아이에게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해서 학교에 결석신고를 해주거나, 친구의 못생긴 새 머리 스타일을 보고도 "예쁘다"고 말한다. 이런 일상적 거짓말부터 국가적 차원의 중대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필요악은 인간 삶의 모든 층위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떤 기준으로 악을 필요하다고 받아들여야 할까?


필요악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그 이름 자체에 담겨 있는 모순이다. '필요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이 어떻게 동시에 성립할 수 있을까? 이 역설적 결합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을 드러낸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세계에서 불완전한 정보와 제한된 선택지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상적인 도덕 법칙과 냉혹한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때로는 더 큰 선을 위해 작은 악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1945년 2월, 연합군의 드레스덴 폭격은 이러한 딜레마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처칠과 연합군 지휘부는 민간인이 거주하는 도시를 의도적으로 불바다로 만들었다. 3일간의 폭격으로 수만 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명백히 전쟁법을 위반한 행위였고, 인도주의적 관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것이 나치 독일의 항복을 앞당기고 궁극적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과연 이러한 계산이 정당한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가장 직관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행위의 도덕성은 그 결과가 가져오는 전체적인 행복이나 고통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드레스덴 폭격은 단기적 고통이 장기적 이익을 초과하지 않는 한 정당화될 수 있다. 수만 명의 희생으로 수십만 명, 혹은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법은 곧바로 심각한 문제에 부딪힌다.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이런 냉혹한 산술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생명을 숫자로 환산하여 비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더 나아가 미래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가? 실제로 드레스덴 폭격이 전쟁을 앞당겼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분분하다.


칸트라면 이런 계산 자체를 거부했을 것이다. 그의 의무론적 윤리학에 따르면, 도덕적 행위는 결과가 아니라 원칙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거짓말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와 같은 도덕 법칙은 예외 없이 지켜져야 하는 절대적 명령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필요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악은 악이고, 그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칸트의 엄격한 원칙주의도 현실 앞에서는 한계를 드러낸다. 만약 나치가 내 집에 숨어 있는 유대인의 행방을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을 말해서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 것인가, 아니면 거짓말을 해서 생명을 구할 것인가? 칸트는 그래도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거짓말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느낄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윤리학이 제시하는 관점에서 더 현실적인 해법을 찾을 수 있다. 덕윤리학은 고정된 규칙보다는 상황에 맞는 실천적 지혜를 강조한다. 덕스러운 사람은 각 상황의 구체적 맥락을 고려하여 최선의 판단을 내린다.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융통성 있는 지혜다.

이러한 철학적 논의가 단순히 학문적 흥미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생생히 경험했다. 각국 정부가 시행한 록다운 정책은 전형적인 필요악이었다. 경제활동을 강제로 중단시키고, 사람들을 집에 가두고, 교육과 문화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분명히 악한 일이었다. 수많은 사업체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우울증과 고립감에 시달렸으며, 아이들은 교육 기회를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회가 격렬한 논쟁과 갈등 속에서도 결국 이러한 정책을 받아들였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고 의료시스템의 붕괴를 방지하며 궁극적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제적 자유를 우선시하는 목소리와 공중보건을 앞세우는 목소리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필요악 판단의 어려움과 사회적 분열의 깊이를 동시에 실감했다. 어디까지가 적절한 제한이고 어디서부터가 과도한 통제인가? 경제적 피해와 생명의 가치를 어떻게 비교할 것인가?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안전 중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앞에서 사회는 깊게 분열되었다.


더욱 복잡한 것은 서로 다른 사회가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다. 스웨덴처럼 상대적으로 느슨한 정책을 택한 나라가 있는가 하면, 중국이나 호주처럼 극도로 엄격한 봉쇄를 시행한 나라도 있었다. 어느 쪽이 옳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아마도 영원히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기후변화 대응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딜레마에 직면한다.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각종 규제는 당장의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일자리를 없애며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파괴한다. 석탄 광부들은 일자리를 잃고, 자동차 산업은 혁신의 압박을 받으며, 소비자들은 더 비싼 제품을 구매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기후과학자들은 이러한 단기적 고통을 감수하지 않으면 인류 전체가 훨씬 더 큰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연안 도시의 침수, 극한 기후로 인한 농업 붕괴, 물 부족으로 인한 분쟁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경제적 희생은 미래 세대의 생존을 위한 필요악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여기서도 불확실성이 문제가 된다. 기후변화의 속도와 규모, 그리고 그 영향에 대한 예측은 여전히 논란이 많다. 또한 현재 세대가 미래 세대를 위해 어느 정도까지 희생해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도 없다.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들이 이미 누린 산업화의 혜택을 자신들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복잡성 때문에 기후 정책은 여전히 지지부진한 상태다.

디지털 시대의 감시 기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CCTV, 스마트폰 위치추적, 온라인 활동 모니터링 등은 명백히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경고했던 빅브라더의 시대가 현실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기록되고 분석되며, 때로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에 대한 판단이 내려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감시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 범죄 예방, 테러 방지, 교통사고 감소, 코로나19 같은 전염병 추적 등의 명분 때문이다. 중국의 사회신용제도처럼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안전과 프라이버시 사이의 균형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런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필요악 판단의 몇 가지 공통된 패턴이다.

첫째, 비례성이다. 추구하는 선이 초래되는 악보다 현저히 커야 한다. 사소한 편의를 위해 큰 해를 끼치는 것은 필요악이 아니라 그냥 악이다.

둘째, 불가피성이다. 다른 대안이 정말로 없거나 모든 대안이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때만 필요악이 정당화된다. 셋째, 최소화 원칙이다.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는 여러 방법 중에서 가장 적은 피해를 초래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기준들조차 완벽하지 않다. 무엇보다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드레스덴 폭격이 정말로 전쟁을 앞당겼는지, 록다운이 정말로 더 많은 생명을 구했는지, 기후 정책이 정말로 재앙을 막을 수 있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또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에 대한 합의조차 쉽지 않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필요악이라는 개념이 악용될 위험성이다. 역사상 수많은 독재자들과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잔혹한 행위를 필요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스탈린의 대숙청,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폴 포트의 킬링필드 모두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필요악이라고 포장되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더 큰 선을 위해 불가피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역사적 교훈은 우리에게 중요한 경고를 준다. 필요악이라는 개념은 반드시 엄격한 견제와 균형 속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투명한 절차, 민주적 토론, 사법부의 감시, 언론의 비판 등이 없이는 필요악은 쉽게 권력의 남용으로 변질된다.


또한 필요악에 너무 익숙해지는 것도 위험하다. 예외가 일상이 되고 타협이 원칙을 대체할 때, 우리는 도덕적 감수성을 잃어버릴 수 있다.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는 말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만능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필요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지혜는 그 중간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악을 선택할 때의 겸손함이다. 우리의 판단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관점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필요악을 선택했을 때는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인정하고 수정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둘째로, 끊임없는 대안 모색이다. 현재로서는 필요악이 불가피해 보이더라도, 언젠가는 더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의 발전, 사회제도의 개선, 인간 의식의 성장을 통해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질 수 있다.

셋째로, 희생자에 대한 기억과 추모다. 필요악의 논리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애도하며, 가능하다면 보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품위다.

넷째로,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이다. 필요악에 대한 판단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토론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다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악이 될 수 있다.


결국 필요악에 대한 고찰은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고 악마도 아닌,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는 회색 지대에서 최선의 선택을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절대적 확신이 아니라 겸손한 지혜다. 우리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완벽한 답은 없지만, 끊임없는 성찰과 대화를 통해 더 나은 판단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필요악에 관한 가장 중요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완벽한 도덕이 아니라 성장하는 도덕이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실수로부터 배우는 능력, 확신을 가지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균형,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필요악은 결국 인간적인 것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고민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우리가 필요악의 딜레마에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여전히 도덕적 존재라는 증거다. 그리고 그 고민을 통해 우리는 조금씩, 더 지혜로운 존재로 성장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8B%A4%ED%81%AC%20%ED%9E%88%EC%96%B4%EB%A1%9C?uuid=48cdc0b4-9d6e-4903-a89d-adf548453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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