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뉴스를 켜면 절망적인 소식들이 쏟아진다. 전쟁, 기후변화, 불평등, 혐오와 분열. 챗봇이 시를 쓰고, 로봇이 수술을 하며,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점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한 가지 역설적 진실이 드러난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더욱 절실하게 깨닫는다 -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계는 효율을 추구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창조한다. 알고리즘은 최적해를 찾지만, 인간은 불완전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지금이야말로 인간찬가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그것은 맹목적 낙관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참된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인간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꿈이 좌절되고, 몸과 마음이 병들어간다.
그런데 역설이 여기 있다. 바로 이 연약함에서 인간의 가장 숭고한 면이 태어난다.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진정한 연민을 안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만이 소중함을 깨닫는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을수록 삶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만이 진짜 희망을 발견한다.
금이 간 도자기를 황금으로 메우는 일본의 '킨츠기'처럼, 인간도 상처 입은 자리에서 더 아름다워진다.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에서 발견한 것도 이것이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마지막 하나만은 빼앗을 수 없다. 주어진 상황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선택하는 자유. 그것이 인간이다.
인간을 다른 존재들과 구별짓는 가장 큰 특징은 창조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단순히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낸다. 언어를 창조하여 생각을 나누고, 예술을 통해 영혼을 표현하며, 과학으로 우주의 비밀을 밝혀낸다.
더 놀라운 것은 인간의 창조가 물질적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이다. 몸은 유한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사상과 예술은 영원히 남는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베토벤의 음악, 반 고흐의 그림들이 수백 년을 넘어 우리에게 여전히 감동을 주는 이유다.
그리고 인간의 창조는 개인을 넘어선다. 우리는 협력하여 더 큰 문명을 건설한다. 각자의 작은 기여들이 모여 거대한 도시를 만들고, 복잡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며, 지구를 넘어 우주로 나아가는 꿈을 현실로 바꾸어간다.
하지만 인간찬가의 가장 깊은 근거는 창조 능력도, 이성의 힘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지하철 계단에서 휠체어를 든 낯선 사람들, 응급실에서 밤새 간병하는 가족들, 길에서 넘어진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는 중학생. 이런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인간찬가의 진정한 무대다.
AI가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여기다. 알고리즘은 효율을 추구하지만, 인간은 비효율적으로 사랑한다. 손해를 각오하고, 대가 없이, 때로는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어머니가 밤새 열이 난 아이 이마를 만지는 그 손길에는 어떤 로봇도 흉내낼 수 없는 온기가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의 사랑이 점점 확장되어간다는 사실이다. 가족에서 시작된 사랑이 친구들에게, 공동체에게, 나아가 전 인류에게까지 확산된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며, 소수자를 보호하려는 인류의 역사는 결국 사랑의 영역을 확장해온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동물적 본능에만 머물지 않고,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한다. 진리를 향한 갈망, 정의에 대한 열망, 아름다움을 향한 동경이 그것이다.
간디가 비폭력으로 제국주의에 맞섰을 때, 마틴 루터 킹이 꿈을 말했을 때, 만델라가 용서를 택했을 때, 그들은 인간 가능성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당시로서는 비현실적이고 무모해 보였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초월의 능력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있다. 매일의 작은 선택들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자신이 될 수 있다. 분노 대신 이해를 선택하고, 포기 대신 인내를 선택하며, 절망 대신 희망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현대 사회가 개인주의를 강조하지만, 인간의 본질은 관계적 존재라는 데 있다. 우리는 홀로 존재할 수 없고,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완전한 자신이 된다.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함성이 온 나라를 하나로 만들었을 때, 2016년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평화롭게 광장을 메웠을 때, 우리는 연결의 힘을 목격했다. 이런 순간들이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팬데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도 이것이었다. 물리적 거리두기가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 인간관계가 우리 존재에 얼마나 본질적인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상황에서도 서로를 돌보고 연대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강렬한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의 연결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낯선 사람과도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고,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모일 수 있다. 연결되는 인간,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자 축복이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멈춰 세웠을 때,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의료진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환자를 돌보는 모습을, 마스크가 부족하자 집에서 바느질을 시작한 할머니들을, SNS로 연결된 전 세계 시민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을.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홀로 시작한 기후 시위. 그것은 곧 전 지구적 청년 물결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폐허 속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쇼팽. 포항 지진 때 자원봉사자들이 만든 무료 급식소.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꽃을 놓고 돌아서는 시민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남북 공동 입장할 때 울려 퍼진 아리랑. 그 순간 분단의 아픔을 넘어 하나 된 민족의 꿈이 세계에 울려 퍼졌다.
위기는 가면을 벗긴다. 두려움 너머의 용기를, 절망 너머의 연대를, 죽음 너머의 삶을.
인간찬가는 인간이 완벽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는 실수한다. 넘어진다. 때로는 끔찍한 악을 저지르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흠집투성이 인생에서 끊임없이 더 나아지려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완벽한 존재라면 성장할 이유가 없다. 실패할 위험이 없다면 용기가 무슨 의미인가. 상처받을 가능성이 없다면 사랑이 어떤 가치를 갖겠는가.
인간의 모든 덕목은 우리의 한계를 전제로 해서만 빛을 발한다. 그래서 인간찬가는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깊은 이해다. 현실을 직시하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것. 절망할 이유는 충분하되 그래도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
새벽 5시, 한 간병인이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손을 잡고 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한 직장인이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늦은 밤, 한 교사가 코로나로 학교에 못 나오는 학생을 위해 온라인 수업을 준비한다.
이런 평범한 순간들에서 인간찬가가 울려 퍼진다. 거창한 영웅담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선택들, 그 안에서 빛나는 인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노래해야 할 찬가다.
AI는 정보를 처리한다.
-인간은 의미를 창조한다.
기계는 답을 제공한다.
-인간은 질문을 던진다.
알고리즘은 효율적이다.
-인간은 아름답다.
여기에 인류 생존의 핵심이 있다. 의미 없는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종족은 번영할 수 없다. 인간만이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삶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기에,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면, 바로 그 순간 당신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서막에서 말했듯이, 이것이 기계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인간만의 능력이다.
불완전하기에 더욱 소중한 존재들이, 실수하고 넘어지면서도 끊임없이 일어서는 불굴의 존재들이 부르는 노래. 이것이 우리가 오늘 부르는 인간찬가다.
매일 아침 절망적인 뉴스가 쏟아져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창조하며 의미를 만들어간다.
바로 지금, 인간을 노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노래는 당신이 내일 누군가에게 미소 짓는 순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