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송나라의 한 장군이 전장에서 마주한 광경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들이 평원을 가득 메운 채 천둥처럼 달려오는 모습. 말조차 투구와 갑옷으로 완벽히 무장한 이 괴물 같은 군대 앞에서 송나라의 정예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것이 바로 금나라가 자랑하던 철부도(鐵浮屠)였다. '철로 된 부도(浮屠)', 즉 철로 만든 탑처럼 견고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이 명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중기병 부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철부도는 사실 송나라 사람들이 붙인 명칭이었다. 사학자 등광명은 "실제로 말하자면, 철부도는 한족이 부여한 호칭일 뿐이고, 결코 여진어가 아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불교 용어사전에 따르면 부도(浮屠)는 '부도', '휴도'라고도 쓰며 모두 '부처(佛陀)'의 다른 번역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후, 사람들은 불교 신자를 부도라 불렀고, 후에는 불탑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송나라 사람들이 이 이름을 붙인 것은 인간과 말 모두 철갑으로 무장한 채 탑처럼 견고하게 적진을 향해 밀고 들어오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 광경이 주는 공포와 압도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철부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12세기 초, 여진족의 완안부(完顔部) 추장 완안 아골타는 쇠락해가는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건국했다. 1115년, 아골타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정했다. 이 국호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전설에 따르면 아골타는 "요나라는 철을 국호로 삼아 그 견고함을 취하였지만, 결국 쇠락하였다. 금은 철보다 강하니, 우리는 금을 국호로 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여진족이 금속과 야금술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이해와 자부심을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금나라는 '맹안모극(猛安謀克)' 제도라는 독특한 군사 조직 체계를 운영했다. 금태조는 건국 전년인 1114년에 300호를 '모극(謀克)', 10개 모극을 '맹안(猛安)'으로 편성하는 제도를 정립했다. 《금사·병지》에 따르면 여진족 초기에는 "그 부장을 파근이라 하고, 행군할 때는 맹안, 모극이라 불렀으니, 그 많고 적음을 따라 호칭으로 삼았다. 맹안은 천부장이고, 모극은 백부장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평시에는 생산에 종사하고 전시에는 전사로 동원되는 효율적인 체계였다. 모극 안에는 다시 50호 단위의 '포련'이 있었고, 맹안 위로는 군수, 만호, 도통이 설치되어 체계적인 지휘 계통을 구성했다.
철부도는 이 맹안모극 체계 내에서 정예 중의 정예로 선발된 부대였다. 철부도는 금나라 대장 완안종필(완안 올술, 금 올술로도 알려진)의 휘하에 속했고, 괴자마와 함께 금 올술을 따라 남정북벌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완안종필은 금태조 아골타의 넷째 아들로, 금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다. 그의 손에서 철부도는 진정한 비장의 카드로 기능했다.
철부도는 '인마구장(人馬俱裝)', 즉 사람과 말이 모두 철갑으로 무장한 중기병이었다. 사람은 두 눈만 드러냈고, 말은 네 발굽만 보일 정도로 완전히 갑옷으로 감쌌으며, 거의 도창불입(刀槍不入)이었다. 철부도는 세 필의 말을 가죽 끈으로 서로 연결했는데, 그들은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하여 '벽을 쌓듯 전진'했으며, 주로 정면 충격에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술은 명확했다. 적진을 향한 집중 돌격이었다. 완벽한 방어구로 무장한 채 밀집 대형을 이루어 적진의 중심부를 돌파하는 것이 그들의 기본 전법이었다.
금군은 좌우 양익의 '괴자마'를 이용한 측면 협공을 주요 전술로 삼았고, 중앙 돌파를 위해 적절한 시기를 선택했다. 괴자마는 좌우 양익에 배치된 기병으로, 모두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여진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이 양측에서 적을 압박하면, 중앙의 철부도가 정면으로 돌파하는 전술이었다. 이 조합은 거의 완벽했다. 송나라의 장군들은 "여진군을 창과 활로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탄식했다. 일반적인 무기로는 철부도의 중장갑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금나라는 이러한 중기병을 대규모로 보유했다. 이는 엄청난 국가적 자원이 필요한 일이었다. 말 한 필을 완전히 무장시키고, 기수까지 중장갑으로 무장시키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금나라는 이를 감당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 가장 두려운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압도적인 군사력 덕분이었다.
그러나 무적처럼 보이던 철부도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첫 번째는 기동성의 제한이었다.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말과 기수는 장시간 전투를 수행하기 어려웠다. 한 번의 돌격이 실패하면 재정비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이는 전술적 유연성을 크게 제한했다.
두 번째는 지형의 제약이었다. 철부도는 평원에서는 무적이었지만, 산악 지형이나 습지, 좁은 협곡에서는 그 위력이 크게 감소했다.
세 번째는 말의 다리였다. 아무리 중장갑으로 무장했어도 말의 다리 관절 부분, 특히 발목 부분은 완벽히 보호할 수 없었다.
송나라의 명장 악비(岳飛)는 바로 이 약점을 간파했다. 악비의 장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장졸들이 각각 마찰도(麻扎刀), 제도(提刀), 대부(大斧)를 들고 적과 육박전을 벌였다." 이 마찰도, 제도, 대부는 모두 당시 송나라 보병의 제식 기병 대응 무기였다. 송나라의 참마도(斬馬刀)는 기록에 따르면 길이가 "1장 2척", 즉 날 부분을 포함하여 약 3.8미터에 달했다.
악비는 병사들에게 이러한 긴 자루의 도끼와 칼을 지급하고, 철부도의 돌격을 방어하는 대신 말의 다리를 집중 공격하도록 훈련시켰다. 동시에 지형을 활용한 방어 전술을 구사했다. 1140년 7월 8일, 역사적인 언성(郾城) 전투가 벌어졌다. 완안종필은 용호대왕, 개천대왕 등과 함께 언성 북쪽에서 악가군과 대진했다. 악비는 그의 아들 악운에게 경기병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종횡으로 적을 무찌르도록 명령했다.
연구자 왕증유의 고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금 올술의 10만 대군 중 많은 수가 서명군, 즉 보병이었고 아마도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금군의 참전 병력은 1만 5천 명의 정예 기병이었다. 악가군은 아직 집결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악비가 거느린 병력은 배외군과 절반의 유혁군에 불과했고, 총 병력은 1만여 명에 불과했다.
완안종필은 기병 회전에서 승리할 수 없음을 보고 초조해하며, '중개전장(重鎧全裝)'으로 무장한 '철부도'군을 전투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다. 완안종필은 보통 금군 중기병으로는 승리할 수 없음을 보고, 그의 비장의 카드인 가장 정예한 구장기병, 즉 그의 친병 중 철부도를 출동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때 악비의 전술이 빛을 발했다. 악비는 보병에게 마찰도, 대부 등의 무기를 들게 하여 전문적으로 '철부도' 전마의 관절 부위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 전술은 '철부도'의 약점을 충분히 이용했고, 전마가 부상당하면 전체 기병 편대는 기동성을 잃게 되어 악가군의 보병에게 하나씩 격파당했다.
10일, 금병이 다시 언성을 공격했으나 악비는 성북 오리점에서 다시 금병을 격파하고 금나라 장수 아리탁발근을 죽였다. 이후 완안종필은 12만 병력을 임영에 집결시켜 악비와 결전을 준비했다. 13일, 양재흥이 300 기병으로 순찰하다 소상교에서 금병과 조우했다. 송군은 과부적중으로 전원 장렬하게 희생되었고, 양재흥이 맞은 화살촉만 두 되가 넘었다. 그들이 남긴 전과는 금병 2천여 명과 만호 살팔발근 등 다수의 장령을 죽인 것이었다. 이러한 승리들은 철부도가 더 이상 무적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러나 악비의 전술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유로 그는 1142년 음력 12월 29일 풍파정에서 처형당했고, 송나라는 금나라와의 굴욕적인 화의를 맺어야 했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철부도의 군사적 위력이 여전히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악비라는 천재 장군이 있어야만 철부도를 격파할 수 있었고, 그가 사라지자 송나라는 다시 금나라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철부도의 진정한 종말은 북방의 초원에서 찾아왔다. 13세기 초, 칭기스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211년, 몽골군은 본격적으로 금나라 영토를 침공했고, 이는 금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긴 전쟁의 시작이었다. 몽골군은 철부도와는 완전히 다른 전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경기병 중심의 고도로 기동성 있는 군대였다. 칭기스 칸의 명장들인 수부타이, 제베, 무칼리는 철부도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면 대결을 피하고, 끊임없는 기동전과 포위전으로 철부도를 무력화시켰다.
몽골군의 전술은 치고 빠지는 타격이었다. 가벼운 갑옷을 입은 몽골 기병들은 말 위에서 활을 쏘며 철부도를 괴롭혔다. 철부도가 돌격하면 재빨리 도주했고, 철부도가 지치면 다시 돌아와 공격했다. 무거운 장갑으로 무장한 철부도는 이러한 유연한 전술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더욱 결정적이었던 것은 몽골군의 전략적 우위였다. 몽골군은 금나라의 보급선을 끊고, 도시를 포위하며, 외교적 수단으로 금나라의 동맹을 무너뜨렸다. 철부도가 아무리 강력해도 먹을 것과 말을 먹일 사료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이 시기, 금나라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금나라가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맹안모극 제도와 노예제가 서로 적응하던 제도가 점차 파괴되어 "융적의 안마지장을 버리고 중주의 부미한 습속을 따랐다." 여진인이 날로 문약해지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1183년 금나라는 각 맹안모극 호에게 토지 275무와 노예 2.2명을 배분했으며, 세금 부담은 한인 농민의 44분의 1에 불과했다. 맹안모극 호는 이로써 소지주, 소노예주가 되었다.
이들은 본래 유목민족으로서 무거운 농업 생산을 전혀 원하지 않았고, 토지를 한족에게 임대했다. 이렇게 되자 맹안모극은 완전히 착취 계층이 되어 매일 먹고 마시고 노는 데만 몰두했다. 20~30년이 지나자 금나라 여진인들은 급속히 타락했다. 신세대 여진 젊은이들은 생활 조건이 우월해져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었고, 전투를 원하지도 않았다. 금군은 중후기에 거의 대부분 한인 병사로 구성되었다.
1 168년 조정이 맹안모극에서 시위 친군을 선발했으나 "할 수 있는 자가 열에 하나도 없었다." 사인들은 시를 지어 "낭군은 말 위에 앉아 팔에 조궁을 메고, 손으로 한 쌍의 금복고를 만지작거린다. 결국 태평시대에 어디에 쓰겠는가, 다만 이른 아침 그림을 꾸미는 데나 알맞을 뿐"이라 하며 "국조의 병이 쓸 수 없음을 알았으니, 이것이 시인의 우려가 깊은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1234년, 금나라는 마침내 몽골 제국과 남송의 협공으로 멸망했다. 금나라의 멸망과 함께 철부도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금나라에서 철은 금나라의 전매 제도에 규정된 상품이었기 때문에 민간 사회에서 철은 매우 귀했고, 때로는 청동보다도 가치가 높았다. 금나라의 철 자원은 극히 희소했고, 그들이 철갑옷 한 벌을 주조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철부도가 전사하면 금병들은 그들의 철갑옷을 벗겨 가져갔다. 송나라 병사들도 이 철갑옷을 빼앗았는데, 한편으로는 철갑옷을 가져가 상납하면 돈으로 바꿀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사장하여 일부 철기를 주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철부도의 완전한 갑옷을 거의 볼 수 없다.
철부도는 단순히 강력한 군사 조직이 아니라, 동아시아 군사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철부도는 중기병의 발전이 극한에 도달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국의 중장기병 전통은 한나라 시대부터 존재했고, 남북조시대에 크게 발전했다. 삼국시대 한반도에도 개마무사라는 중장기병이 있었다. 하지만 철부도는 이러한 전통을 집대성한 형태였다. 완전한 인마구장, 즉 사람과 말을 모두 철갑으로 감싸는 기술은 당시 야금술과 군사 조직력의 정점이었다.
둘째, 철부도의 흥망성쇠는 군사 기술과 전술의 상호작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 체계라도 그에 대응하는 전술이 개발되면 무력화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전장의 패권은 단순한 무력이 아니라 유연성과 적응력에 달려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악비의 참마도 전술은 기술적 우위를 전술적 창의성으로 극복한 사례였고, 몽골의 승리는 전략적 사고가 전술적 우위를 능가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셋째, 철부도는 문화와 기술의 융합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여진족의 유목 전통, 거란과 발해로부터 계승된 제도, 중원의 야금 기술이 결합되어 탄생한 철부도는, 문명의 교차점에서 새로운 혁신이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맹안모극이라는 효율적인 군사-행정 체계와 인마구장이라는 첨단 기술이 결합될 때, 작은 민족도 강대국을 압도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철부도의 소멸은 안일함이 군사력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을 보여준다. 토지와 노예를 배분받은 여진족은 불과 한 세대 만에 전투력을 잃었다. 맹안모극 제도가 특권 계층을 만들어냈고, 이는 결국 금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제도가 아무리 우수해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들이 타락하면 무용지물이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오늘날 우리는 철부도의 실물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들의 갑옷은 세월 속에 녹슬어 사라졌거나 다른 용도로 재활용되었고, 그들을 만들던 기술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철부도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중국의 만화와 역사서에서 철부도의 이미지는 여전히 강렬하게 그려진다. 철갑으로 무장한 기병들이 평원을 가득 메우고 돌격하는 장면은, 금나라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동시에 철부도의 몰락은 우리에게 겸손함을 가르친다. 아무리 강력한 힘도 영원하지 않으며, 오만과 안일함은 패망의 씨앗이 된다. 금나라는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정복하며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었지만, 결국 몽골이라는 더 큰 힘 앞에 무너졌다. 더욱이 내부로부터의 타락, 즉 특권을 누리며 안일해진 맹안모극 계층의 전투력 상실이 결정적이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고 돌아간다.
철부도는 12세기 동아시아의 하늘을 가득 메웠던 철의 메아리였다. 그 메아리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전해진다. 기술과 전술, 문화와 전쟁, 흥망과 성쇠에 대한 이야기.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지혜의 울림이다. 탁월한 기술과 제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지탱할 정신, 끊임없는 혁신과 경계심, 그리고 안일함을 경계하는 자세가 있어야만 진정한 강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교훈을 철부도는 우리에게 남겼다.
(이미지 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cqr&no=3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