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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미디아 기병-고대 지중해 제일의 기병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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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 지중해 세계는 로마와 카르타고라는 두 거대 세력의 충돌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 격렬한 각축전에서 승패를 가른 것은 단순히 보병의 숫자나 전략가의 천재성만이 아니었다. 북아프리카의 건조한 고원지대에서 말과 함께 성장한 한 민족의 기병이 전쟁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누미디아 기병, 그들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치명적인 경기병 부대로 군림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누미디아는 오늘날 알제리와 튀니지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유목과 목축을 주업으로 삼던 베르베르족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이곳의 전사들은 어린 시절부터 말 위에서 자랐고, 재갈도 안장도 없이 맨몸으로 말을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그들의 기동성은 단순히 빠른 속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방향을 전환하고 즉각적으로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는 전술적 유연성을 뜻했다. 폴리비오스가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 카르타고군의 일원으로 처음 기록한 이래, 누미디아 기병은 지중해 전역에서 그 명성을 떨쳤다.


누미디아 기병의 전술적 특징은 그들의 장비와 전투 방식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갑옷을 거의 입지 않았고, 고작해야 가벼운 튜닉 하나를 걸친 채 표범 가죽을 왼팔에 감아 간이 방패로 활용하는 정도였다. 이러한 경장비는 단점이 아니라 그들의 전술적 강점이었다. 무거운 갑옷에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누미디아 기병은 극도의 기동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주무기는 창과 투창이었으며, 근접전보다는 타격 후 이탈하는 히트 앤 런 전술을 선호했다. 적진에 신속하게 접근해 투창을 던지고는 재빠르게 후퇴하는 이 전술은 중장기병이나 중보병에게는 극도로 성가신 것이었다. 적이 추격하면 도망치다가, 적이 멈추면 다시 접근해 괴롭히는 이 전술은 마치 모래폭풍처럼 상대방의 대형과 사기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한니발 바르카가 누미디아 기병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한 것은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부터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을 자신의 군대에 대거 편입시켰다. 그들은 단순한 보조 병력이 아니라 한니발 전략의 핵심 축이었다. 기원전 218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한니발의 군대에서 누미디아 기병은 정찰, 소규모 교전, 적군의 보급선 차단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가가 완전히 발휘된 것은 기원전 216년 칸나에 전투에서였다.

칸나에 전투는 군사사에서 완벽한 포위섬멸전의 교과서로 평가받는 전투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로마군 약 8만 명이 한니발의 군대에 의해 철저히 포위되어 대부분 전멸당한 이 전투에서, 누미디아 기병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우익에 배치된 로마 기병을 상대로 누미디아 기병을 투입했다. 폴리비오스와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누미디아 기병은 로마 기병을 상대로 특유의 기만 전술을 구사했다. 그들은 접근했다가 후퇴하기를 반복하며 로마 기병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들의 독특한 전투 방식 때문에 서로 큰 피해를 입히거나 받지는 않았지만, 적의 기병을 무용지물로 만들며 계속 견제했다. 이러한 교란 작전은 로마 기병의 전열을 흐트러뜨리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데 충분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니발의 중기병 지휘관 하스드루발이 로마군 좌익의 기병을 격파한 후, 전장을 가로질러 우익으로 이동해 누미디아 기병과 합류한 순간이었다. 이제 로마 기병은 양쪽에서 카르타고 기병의 협공을 받았고, 결국 전장에서 도주하고 말았다. 로마 기병이 무너지자 카르타고 기병들은 로마 보병의 후방으로 돌아가 공격을 가했다. 전방에서는 한니발의 중보병이 압박하고, 측면에서는 경보병이 괴롭히며, 후방에서는 기병이 공격하는 완벽한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로마군은 밀집대형으로 인해 제대로 무기를 휘두를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학살당했다. 누미디아 기병은 패주하는 로마군을 추격하며 대부분을 베거나 말에서 떨어뜨렸다.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간신히 베누시아로 도망쳤지만, 약 2만 5천 명에 달하는 로마군이 전사했다. 이 패배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였으며, 누미디아 기병의 전술적 탁월함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누미디아 기병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은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일어났다. 한니발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누미디아 기병이 이번에는 로마 편에서 싸우게 된 것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마시니사라는 누미디아 왕자가 있었다. 원래 카르타고의 동맹이었던 마시니사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인해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의 가치를 정확히 이해했고, 자마 전투에서 그에게 약 4천에서 6천 명의 누미디아 기병을 이끌고 로마군 우익을 담당하게 했다.

자마 전투는 칸나에의 역전된 버전이라 할 수 있었다. 전투는 양 날개에서의 격렬한 기병전으로 시작되었다.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은 한니발 편의 카르타고 기병을 상대로 우위를 점했고, 그들을 전장에서 몰아냈다. 이어서 마시니사와 스키피오의 기병 지휘관 라일리우스는 전장을 돌아 한니발 보병의 후방을 공격했다. 칸나에에서 로마군을 괴롭혔던 바로 그 전술이 이번에는 카르타고군에게 적용된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약 2만 명의 카르타고군이 전사하고 2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로마군의 손실은 약 1,500명에 불과했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한니발이 장군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이 가진 우위를 극복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 우위의 핵심에는 누미디아 기병이 있었다.


자마 전투 이후 누미디아 기병의 운명은 로마 제국과 긴밀히 얽히게 되었다. 마시니사는 로마의 지원 아래 누미디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그는 90세가 넘는 나이로 기원전 148년에 사망할 때까지 로마의 충실한 동맹으로 남았다. 로마는 누미디아 기병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에, 공화정 말기부터 이들을 정규군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로마군에 복무한 누미디아 기병은 보조군(auxilia)의 일원으로서 로마의 정복 전쟁에 참여했다. 그들은 히스파니아 전역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는데, 켈트이베리아인과 루시타니아인이 활동하기 어려운 평지에서 누미디아 기병이 종횡무진 활약했고, 산악지대에서는 현지 경보병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이러한 상호보완적 관계는 로마가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누미디아와 로마의 관계가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마시니사의 손자 유구르타는 기원전 112년 로마에 반기를 들었고, 그의 뛰어난 게릴라전 전술은 로마군을 수년간 괴롭혔다. 유구르타 전쟁은 누미디아 기병이 자신들의 고향 땅에서 얼마나 강력한지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비록 결국 유구르타는 배신과 포획을 당해 로마로 압송되었지만, 그가 보여준 저항은 누미디아 전사들의 불굴의 정신을 대변했다.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누미디아를 정복하고 로마의 속주로 편입시킬 때까지, 이 지역은 지중해 세계에서 독립적인 군사력을 유지했다.


누미디아 기병의 유산은 단순히 전술적 혁신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경기병의 역할과 가치를 재정의했다. 고대 전쟁에서 기병은 흔히 중장기병의 충격력이나 귀족 전사들의 명예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누미디아 기병은 경량화된 장비와 극도의 기동성, 그리고 교란 전술을 통해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적을 직접 격파하기보다는 적의 대형을 무너뜨리고, 심리적 압박을 가하며, 기회가 왔을 때 결정타를 날리는 방식으로 싸웠다. 이러한 전술은 후대의 많은 경기병 부대에 영향을 미쳤다. 중세 헝가리의 경기병이나 몽골 기병의 전술에서도 누미디아 기병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누미디아 기병은 동맹과 용병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전쟁은 단순히 자국 병력만으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카르타고든 로마든,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군사력을 동원하고 통합하는 능력이 승패를 좌우했다. 누미디아 기병은 그러한 복합적 군사 체계의 핵심 요소였으며, 그들의 충성과 배신은 때로 전쟁의 결과를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칸나에와 자마가 보여주듯, 같은 전술과 같은 부대가 어느 편에서 싸우느냐에 따라 역사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누미디아 기병의 이야기는 결국 적응과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척박한 북아프리카 고원의 환경에 적응하며 독특한 기병 문화를 발전시켰고,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들이 벌인 패권 전쟁에 개입하며 역사의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재갈 없는 말 위에서 창을 던지던 그 전사들은, 단순히 전장의 보조 병력이 아니라 전략적 균형을 좌우하는 핵심 세력이었다. 한니발의 승리를 가능케 했고, 스키피오의 승리를 완성시켰으며, 로마 제국의 정복에 기여한 그들의 발자취는 고대 전쟁사에 깊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고대 지중해의 전쟁을 이해하려 할 때, 누미디아 기병의 존재를 간과한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이해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변수였고, 역사가 기억해야 할 위대한 전사들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88%84%EB%AF%B8%EB%94%94%EC%9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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