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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용병 욤스바이킹-전설의 바이킹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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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말 발트해 남부 어딘가에 욤스부르크라는 요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요새는 특별한 전사 집단의 본거지였다. 그들은 욤스바이킹이라 불렸으며,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는 자라면 누구를 위해서든 싸웠다. 기독교도를 위해 칼을 휘두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들 자신은 끝까지 오딘과 토르를 섬기는 이교도였다. 이들은 바이킹 시대가 막바지에 이른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 북유럽 세계에서 가장 두려움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던 전설적 용병 집단이었다.


욤스바이킹의 존재는 역사와 전설의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그들에 관한 기록은 주로 중세 북유럽의 사가, 특히 '욤스바이킹 사가'와 같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11세기 독일의 연대기 작가 아담 폰 브레멘은 발트해 어딘가에 거의 난공불락의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바이킹 요새가 있으며, 그곳의 엘리트 전사들이 자신들만의 전사 규범을 따른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를 일종의 바이킹판 '무사도'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욤스바이킹이 단순한 약탈자 집단이 아니라 체계화된 군사 조직이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본거지인 욤스부르크의 정확한 위치는 오늘날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실제 역사적 존재 여부조차 논쟁의 대상이다. 많은 학자들은 욤스부르크가 오늘날 폴란드의 볼린 섬 부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그러나 전설이 완전히 허구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드물다. 욤스바이킹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러 독립적인 문헌에서 언급되고,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그들이 실존했을 가능성을 높인다. 특히 986년경 노르웨이의 하콘 야를과 벌인 히요룽가바그 전투는 여러 사료에서 확인되는데, 이 전투에서 욤스바이킹은 패배했지만 그들의 용맹함은 적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욤스바이킹들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목이 베일 차례를 기다렸다는 일화는 그들의 전사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욤스바이킹의 이야기는 과장과 신화화가 섞여 있을지라도, 그 핵심에는 실제로 존재했던 엘리트 용병 집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욤스바이킹을 단순한 용병 집단으로만 보는 것은 그들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그들은 엄격한 규율과 규범을 가진 일종의 군사 수도회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욤스바이킹이 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입단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지원자는 홀트강이라 불리는 의례적 결투에서 욤스바이킹 중 최소 한 명을 이겨야 했으며, 나이는 18세에서 50세 사이여야 했다. 일단 받아들여지면, 그들은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료를 버리거나 동료의 죽음을 복수하지 않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동료에 대한 비방이나 내부 다툼은 금지되었으며, 구성원 간의 혈족 복수는 욤스바이킹의 지휘관이 중재했다. 요새 안에는 여성이나 어린이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전리품은 공동체 전체에 공평하게 분배되었다. 이는 개인의 영광과 부의 축적을 추구하던 일반적인 바이킹 문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러한 규율은 그들을 하나의 형제단으로 결속시켰다. 욤스바이킹은 금전을 받고 싸우는 용병이었지만, 그들의 충성심은 돈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규범에 충성했으며, 이는 고용주에 대한 충성보다 우선했다. 전투에서 욤스바이킹을 고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칼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 집단 전체의 헌신을 사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후대의 기사 수도회, 특히 템플 기사단이나 병원 기사단과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욤스바이킹은 기독교가 아닌 북유럽의 전통 신앙을 고수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들은 10세기 말 북유럽 전역에서 기독교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에도 끝까지 오딘과 토르를 섬겼으며, 이는 그들의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욤스바이킹의 지도자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스칸디나비아의 소왕 스트루트하랄드의 아들인 시그발디였다. 그는 1010년 이전 어느 시점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그발디의 통치 아래에서 욤스바이킹은 북유럽 정치의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했다. 그들은 단순히 전투를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라, 때로는 왕좌를 결정하고 왕국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정치적 세력이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욤스부르크는 덴마크 왕 하랄드가 정복한 율리눔이라는 정착지를 스웨덴 왕자 스티르비외른에게 하사하면서 함께 주어졌고, 스티르비외른은 이 뛰어난 전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욤스바이킹이 단순한 용병이 아니라 정치적 거래의 대상이자 권력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욤스바이킹의 힘은 영원하지 않았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 그들에 관한 기록은 점차 사라진다. 욤스부르크는 1043년경 소멸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북유럽 전역의 기독교화와 중앙집권화된 왕국들의 성장이 그들과 같은 독립적 군사 집단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이킹 시대 자체가 종언을 고하면서, 옛 신들을 섬기며 자신들만의 규율로 뭉친 전사 집단의 시대도 함께 막을 내렸다. 욤스바이킹의 몰락은 단순히 하나의 용병 집단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북유럽이 중세 유럽의 봉건 체제 안으로 완전히 편입되는 과정의 일부였다.


오늘날 욤스바이킹은 역사학자들에게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대중문화에서는 바이킹 시대의 가장 낭만적인 상징 중 하나로 재탄생했다. 그들은 용맹함과 형제애, 명예와 규율이라는 전사의 이상을 구현한 존재로 기억된다. 비록 그들의 실체가 전설 속에서 부풀려졌을지라도, 욤스바이킹의 이야기는 한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무법적 약탈로 특징지어지던 바이킹 시대가 저물고, 규율과 조직, 그리고 새로운 신앙이 지배하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초상이다. 욤스바이킹은 그 변화의 경계에 서서, 구시대의 신들을 섬기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조직적 전쟁 방식을 선취한 역설적 존재였다. 그들이 진정으로 존재했든, 혹은 부분적으로 신화화된 존재였든, 욤스바이킹은 한 시대가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순간의 꿈이자 기억으로 역사 속에 각인되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A%A4%EC%8A%A4%EB%B9%84%ED%82%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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