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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페르시아의 기안 압스파르-정예 중의 정예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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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부터 7세기까지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을 지배했던 사산 제국의 군사 체계는 당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고 강력한 전력 투사 능력을 보유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는 야심으로 출발한 이 제국은 파르티아의 봉건적 군사 체계를 거부하고 중앙집권적이며 전문화된 군대를 창설했다. 로마 제국과의 끝없는 충돌 속에서 단련된 이 군사 조직은 단순히 수적 우위나 지리적 이점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기술적 우수성, 전술적 혁신, 그리고 무엇보다 왕권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결합하여 수백 년간 제국을 지탱했다. 이 군사 조직의 정점에는 푸시티그반이라는 엘리트 기병대가 있었고, 그 푸시티그반의 핵심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력과 헌신을 자랑하는 특수부대가 존재했다. 그들의 이름은 기안 압스파르, 즉 "생명을 희생하는 자들"이었다.

기안 압스파르라는 명칭 자체가 이 부대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페르시아어로 '기안'은 생명이나 영혼을, '압스파르'는 희생자나 헌신자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었다. 이 전사들은 실제로 자신의 생명을 왕과 제국에 완전히 바치겠다는 서약 아래 선발되었으며, 심지어 조로아스터교의 내세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친바트 폴을 건널 때조차 왕을 위해 싸우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전해진다. 친바트 폴은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가르는 심판의 다리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죽음 이후 각자의 영혼이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고 믿었다. 의로운 자에게는 이 다리가 넓고 안전하게 펼쳐지지만, 악한 자에게는 좁은 칼날처럼 변해 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기안 압스파르의 전사들은 이 내세의 여정에서조차 왕에 대한 충성을 우선시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이는 그들의 헌신이 단순히 현세적 의무를 넘어 영적 차원의 절대적 서약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종교적 맥락과 결합된 군사적 헌신은 기안 압스파르를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닌 하나의 숭고한 전사 집단으로 만들었다.


기안 압스파르는 푸시티그반의 하위 조직이었다. 푸시티그반은 사산 제국의 사한샤, 즉 왕 중의 왕을 호위하는 천 명 규모의 근위 기병대였다. 이들은 평시에는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에 주둔하며 왕궁을 방어했고, 전시에는 사바란이라 불리는 사산 제국의 중장기병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사들로 구성되었다. 사바란 자체가 이미 당대 최고 수준의 카타프락트 기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푸시티그반은 그 정예 중의 정예였고, 기안 압스파르는 그 최정예 중에서도 선발된 초엘리트였다. 이러한 다층적 선발 구조는 사산 제국이 군사적 우수성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추구했는지를 보여준다. 일반 사바란 기병이 되기 위해서도 귀족 출신이어야 했고 고도의 승마 기술과 무기 숙련도를 갖추어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만이 푸시티그반에 선발되었고, 그 푸시티그반 중에서도 전투 능력, 충성심, 그리고 희생정신 모두에서 탁월한 자들만이 기안 압스파르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의 지휘관인 푸시티그반-살라르는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왕의 직접적인 명령 하에서만 움직였다.


기안 압스파르의 선발 과정과 내부 구조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사산 제국의 문서 대부분은 이슬람 정복과 함께 소실되었고, 남아있는 기록들은 주로 외부 관찰자들, 특히 로마와 비잔틴의 역사가들이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단편적인 증거들은 이들이 단순히 전투 능력만으로 선발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우선 이들은 반드시 귀족 계급, 특히 사산 사회의 7대 귀족 가문 출신이어야 했다. 이 가문들은 파르티아 시대부터 페르시아의 지배 계층을 형성해왔고, 사산 왕조에서도 그 특권을 유지했다. 이들 가문의 자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승마, 궁술, 창술, 검술을 익혔고, 사냥을 통해 실전 감각을 키웠다. 그러나 기안 압스파르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술적 숙련도 이상의 것이 요구되었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깊은 신앙을 갖추어야 했으며, 정기적으로 신전에서 의례를 수행해야 했다. 무엇보다 왕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입증해야 했는데, 이는 종종 실제 전투에서의 공훈이나 왕실에 대한 봉사를 통해 증명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기안 압스파르의 후보자들이 특별한 입단식을 거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의식에서 그들은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생명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했으며, 조로아스터교 사제의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 자격 요건은 기안 압스파르를 단순한 군사 조직이 아닌 일종의 전사 귀족 집단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전장에서의 용맹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 권위를 동시에 보유한 제국의 지배 엘리트였다. 전투가 없을 때 이들은 왕궁에서 왕을 호위하며 궁정의 중요한 의식과 행사에 참여했고, 때로는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제국의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다.


카타프락트로서의 기안 압스파르의 전투 방식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들은 사람과 말 모두를 두터운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했다. 인간은 비늘갑옷이나 사슬갑옷을 겹겹이 착용했고, 그 위에 금속판을 덧댄 퀴라스를 입었다. 말 역시 두꺼운 천과 금속 판으로 제작된 마갑으로 보호받았다. 4세기 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사산 기병들의 등장을 목격하고 "반짝이는 사슬갑옷과 강철 띠가 달린 기르트, 그리고 멀리서도 보이는 광택이 나는 퀴라스"에 대해 기록했다. 이러한 중무장은 단순히 방어력만을 높인 것이 아니었다. 이들이 돌격할 때 발생하는 물리적 충격은 어떤 보병 진형도 견딜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이었다. 그러나 기안 압스파르의 무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주 무기로 콘토스라 불리는 양손 장창을 사용했는데, 이 무기는 길이가 4미터에 달해 적과 거리를 두고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돌격 전에는 복합궁을 사용한 말 위에서의 궁술로 적을 교란시켰고, 근접전에서는 검과 철퇴, 전투도끼를 활용했다. 이처럼 다양한 무기 체계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귀족 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말을 타면서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는 파르티안 샷 기술은 사산 기병의 상징이었다.


기안 압스파르의 전술적 운용은 전장에서의 결정적 순간을 위해 예비되었다. 이들은 일반적인 전투 상황에서 함부로 투입되지 않았다. 대신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거나 적의 중심부를 돌파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 혹은 왕이 직접 위험에 처했을 때 출격했다. 359년 아미다 공성전에서 이들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전투에서 사산군은 로마의 요새 도시를 73일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푸시티그반과 기안 압스파르는 로마군의 결사 항전을 무력화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4세기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침공 시에는 특별히 "그들의 이름에 걸맞은 뛰어난 능력과 열정"으로 싸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율리아누스의 침공은 사산 제국에 대한 로마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는데, 이 전역에서 기안 압스파르는 단순히 방어적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로마군을 추격하고 괴롭혔다. 결국 율리아누스 황제는 전장에서 전사했고, 그의 후계자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는 기안 압스파르가 단순히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 전투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전투 집단이었음을 증명한다.


로마 제국과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은 기안 압스파르의 존재 이유를 지속적으로 강화했다. 260년 에데사 전투는 사산 제국 군사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전투에서 샤푸르 1세는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7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로마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황제가 전장에서 포로로 잡히는 전례 없는 굴욕이었다. 전투 자체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이후의 사건들이었다.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에 끌려가 노예처럼 취급되었고, 전하는 바에 따르면 샤푸르 1세가 말에 오를 때 발판으로 사용되었으며, 결국 포로 생활 중 사망한 후 그의 시체는 박제되어 사산 제국의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비록 이 전투에서 기안 압스파르의 역할이 명시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왕이 직접 참전하여 적국의 황제를 생포한 이 결정적 전투에서 근위대의 핵심인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 에데사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성공을 넘어 사산 제국이 로마와 대등하거나 우월한 강국임을 세계에 선포한 사건이었다. 이후 수백 년간 지속된 로마-페르시아 전쟁에서 기안 압스파르는 왕의 최후 보루로서 그 명성을 이어갔다.


그러나 기안 압스파르의 진정한 의미는 군사적 효율성을 넘어선 곳에 있었다. 이들은 사산 제국의 정치적, 이념적 체계의 살아있는 상징이었다. 사산 왕조는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광을 재건하겠다는 이념 아래 건국되었다. 파르티아의 분권적 체제와 봉건 귀족들의 독립성이 제국의 약점이었다고 판단한 사산 왕조의 건국자들은 강력한 중앙집권과 왕권의 절대성을 핵심 가치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고, 기안 압스파르는 바로 그 왕권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의 완벽한 구현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왕을 지키는 병사가 아니라 신이 선택한 군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헌신자들이었다. 왕은 단지 정치적 지도자가 아니라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지상에 권위를 부여한 대리자였고, 기안 압스파르는 이 신성한 권위를 물리적으로 수호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상징성은 제국 전체의 귀족과 병사들에게 충성의 모델을 제시했다. 만약 가장 뛰어난 전사들조차 왕을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다른 모든 신하들도 그러한 충성을 보여야 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기안 압스파르의 최대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이들의 극단적인 충성심과 왕에 대한 집중은 제국의 군사 체계를 과도하게 왕권 중심으로 만들었다. 전투의 승패가 왕의 생존과 직결되는 상황에서, 왕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면 제국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이는 구조적으로 취약한 지휘 체계였다. 또한 이러한 엘리트 중심의 군사 체계는 막대한 자원을 소수의 귀족 기병에게 집중시켰다. 한 명의 카타프락트를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데 드는 비용은 수십 명의 보병을 유지하는 것과 맞먹었다. 말 한 마리의 마갑만 해도 숙련된 장인이 수개월간 작업해야 완성할 수 있었고, 기사의 겹겹이 쌓인 갑옷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요구했다. 이는 보병과 민병의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사산 제국의 보병은 로마 군단병에 비해 훈련도와 장비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고, 이는 전술적 유연성을 제한했다. 카타프락트는 개활지에서의 대규모 회전에서는 무적에 가까웠지만, 산악 지형이나 도시 공성전, 혹은 더운 기후에서의 장기전에서는 그 효율성이 크게 떨어졌다. 갑옷의 무게는 열사병을 유발했고, 기동성 제한은 게릴라전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7세기 이슬람 세력의 침공 당시 사산 제국이 보여준 취약성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651년 사산 제국의 멸망과 함께 기안 압스파르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636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사산 제국은 이슬람 라시둔 칼리파의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642년 나하반드 전투는 "승리 중의 승리"로 불리며 제국의 운명을 완전히 봉인했다. 이슬람 군대의 급속한 진격 앞에서 전통적인 카타프락트 전술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슬람 전사들은 중무장한 기병이 아니라 기동성이 뛰어난 경기병과 열정적인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했고, 새로운 전술을 구사했으며, 무엇보다 사막의 더위 속에서도 거침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사산 제국의 중장기병은 이들의 빠른 기동과 소모전 전술에 대응하기 어려웠다. 갑옷의 무게는 장점이 아니라 약점이 되었고, 정면 돌격이라는 단일한 전술은 예측 가능했다. 더욱이 수십 년간 지속된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으로 사산 제국의 국력은 이미 고갈되어 있었다. 최정예 부대들은 서쪽 전선에서 소진되었고, 귀족 계급은 왕위 계승 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카디시야에서 사산군을 지휘한 로스탐 파르로크자드는 전투 중 전사했고, 크테시폰은 함락되었으며, 마지막 사한샤 야즈데게르드 3세는 동쪽으로 끝없이 도망쳐야 했다. 수세기 동안 제국을 지켜온 기안 압스파르의 희생정신도 궁극적으로는 제국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에 남긴 유산은 군사사의 범위를 넘어선다. 기안 압스파르는 충성과 헌신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러한 극단성이 가진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역사는 그들의 용맹을 증언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희생만으로는 제도의 결함을 메울 수 없다는 냉혹한 교훈도 전한다. 이들의 전투 기술과 무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지만, 변화하는 전쟁 양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이었지만, 그 충성의 대상인 왕권 자체가 흔들리자 제국 전체가 무너졌다. 이들이 수호하려 했던 것은 단지 한 명의 군주가 아니라 하나의 문명, 하나의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문명을 지탱하던 군사적 엘리트주의와 귀족 중심의 체계가 바로 문명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기안 압스파르는 완벽한 전사였지만, 완벽한 전사만으로는 제국을 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변화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역사는 변화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관대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기안 압스파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들이 뛰어난 전사였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한 제국이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어떻게 군사 조직으로 구현했는지, 그리고 그러한 구현이 어떤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생명을 희생하는 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이 전사들의 이야기는 권력과 충성, 희생과 헌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왕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제국은 결국 그들의 희생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이것이 기안 압스파르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충성은 고귀한 덕목이지만, 맹목적인 충성은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킨다. 전통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변화에 대한 거부는 쇠퇴를 초래한다. 엘리트의 우수성은 인정받아야 하지만, 소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전체 시스템을 취약하게 만든다. 기안 압스파르는 이 모든 모순을 체현한 존재였다. 그들은 사산 제국의 영광을 상징했지만, 동시에 그 몰락의 씨앗도 품고 있었다. 크테시폰의 궁전이 무너지고 조로아스터교의 성화가 꺼진 지 1400년이 지난 지금, "생명을 희생하는 자들"의 메아리는 여전히 역사의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진다. 그것은 영웅적 희생에 대한 찬가이자, 동시에 구조적 변화 없는 개인의 헌신이 가진 한계에 대한 경고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82%AC%EC%82%B0%20%EC%99%95%EC%A1%B0#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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