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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타그마타-중앙 상비군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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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년 5월, 콘스탄티노플의 거리는 다시금 황제의 깃발 아래 평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2년 반에 걸친 내전 끝에 반란군 지도자이자 자신의 매형이었던 아르타바스도스를 물리치고 제국의 수도를 되찾았다. 옵시키온과 트라키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병력이 반란에 가담했고, 콘스탄티누스는 아나톨리콘과 트라케시아 테마의 군대, 그리고 키뷔라이오트 테마의 함대에 의존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승리의 환희 속에서도 황제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던 옵시키온 테마가 거의 전체적으로 반란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제국의 군사 체제가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7세기부터 발전해온 테마 제도는 아랍의 침공에 대한 효율적인 방어 체제를 제공했지만, 동시에 지방군 사령관들에게 과도한 권력을 집중시켰고, 그들은 황제의 왕좌를 위협하는 상시적인 위험 요소가 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즉각 옵시키온 테마를 분할하여 부켈라리온 테마와 아마도 옵티마톤 테마를 분리해냈다. 이는 단순히 반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넘어서, 어떤 단일 테마도 제국의 안정을 위협할 수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개혁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르타바스도스 반란을 진압한 후 군대를 6개의 새로운 연대로 재편성했다. 이것이 바로 타그마타였다. 이 혁명적인 군사 개혁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제국이 직면한 딜레마의 복잡성을 반영한다. 지방 사령관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황제에게 직접 충성하는 강력한 중앙군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러한 군대 자체가 새로운 권력 집단이 될 위험도 내포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제국의 생존을 위해서는 충성스러운 정예 부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타그마타라는 명칭은 그리스어 '타세인(τάσσειν)', 즉 '질서 있게 배치하다'에서 유래하며, 대대나 연대 규모의 군사 단위를 지칭한다. 이미 4세기부터 200명에서 400명 규모의 보병 대대를 지칭하는 군사 용어로 사용되어 왔지만, 콘스탄티누스 5세가 창설한 타그마타는 단순한 부대 단위를 넘어서는 혁명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들은 황제에게 직접 충성하는 직업 군인으로 구성된 정예 상비군이었으며,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 주둔하면서 제국의 중앙 예비군 역할을 수행했다. 테마 병력이 주로 토지를 소유한 자영농을 기반으로 한 민병대적 성격이 강했던 것과 달리, 타그마타는 군사 활동에만 전념하는 전문 전사 집단이었다. 이들은 정규 급여를 받았고, 제국 재정에서 직접 보급을 지원받았으며, 평시에도 지속적인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전문성은 타그마타를 테마 병력과는 질적으로 다른 군사 조직으로 만들었다. 각 타그마타는 도메스티코스(domestikos)라는 지휘관이 이끌었으며, 비글라만 예외적으로 드룬가리오스(droungarios)가 지휘했다. 이들은 토포테레테스(topotērētēs)라 불리는 한두 명의 부관의 보좌를 받았다. 이 지휘관들은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지도록 조직되었으며, 이는 지방 사령관들의 독립성을 견제하려는 명확한 의도의 산물이었다.


타그마타 체제의 핵심에는 네 개의 주요 부대가 자리했다. 가장 높은 서열을 차지한 것은 스콜라이(Σχολαί)로, '학교들'이라는 뜻을 가진 이 부대는 가장 고참 부대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 초에 프라이토리아 근위대를 대체하기 위해 창설한 황제 근위대의 직접적인 계승자였던 이 부대는, 타그마타 중에서도 가장 명예로운 지위를 누렸다. 그들의 군인을 지칭하는 '스콜라리오이(σχολάριοι)'라는 용어는 단순히 이 부대의 구성원을 넘어서, 점차 모든 타그마타 병사를 통칭하는 일반 명사로 확장되었다. 이는 스콜라이가 타그마타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지위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콜라이의 지휘관인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domestikos tōn Scholōn)은 점차 중요성이 증대되어 10세기 말에는 제국 전체 군대의 최고위 장교가 되었다. 이는 타그마타가 단순한 근위대에서 제국 군사력의 핵심으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서열은 엑스쿠비토레스(Ἐξκούβιτοι), 즉 '감시자들'이 차지했다. 레오 1세 황제가 470년대에 창설한 이 부대는 원래 궁전 경비를 담당했던 근위대였다. 레오 1세는 자신의 전임자들이 의존했던 게르만 출신 용병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이사우리아인들로 구성된 이 부대를 창설했다. 엑스쿠비토레스의 역사는 비잔티움 황제들이 항상 균형추를 찾아야 했던 권력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한 세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그들이 위협이 되고, 따라서 새로운 세력을 양성하여 견제해야 했다. 콘스탄티누스 5세에 의해 재편되면서, 엑스쿠비토레스는 단순한 궁전 경비대에서 본격적인 야전군으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들은 황제의 친위대로서의 명예를 유지하면서도, 제국의 국경에서 적과 싸우는 전투 부대로 변모했다.

세 번째는 아리트모스(Ἀριθμός) 또는 비글라(Βίγλα)로 불린 부대였다. '숫자' 혹은 '경계'라는 의미를 가진 이 부대의 기원은 다소 복잡하다. 공식적으로는 780년대에 황후 에이레네에 의해 테마 병력에서 승격되어 타그마타에 편입되었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고풍스러운 계급 명칭들은 훨씬 더 오래된 기원을 암시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 부대가 이미 6세기나 7세기 초에 존재했던 야간 경비대의 후신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비글라는 행군 중에 황제의 진영을 경비하고 야간 경계를 서는 특수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이들은 제국의 정보 수집과 보안 활동에도 관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단순한 전투 부대를 넘어서는 역할이었다. 비글라의 지휘관이 다른 타그마타와 달리 드룬가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도 이 부대의 특수한 성격을 반영한다.

네 번째 주요 부대는 히카나토이(Ἱκανάτοι), 즉 '유능한 자들'로, 810년 니케포로스 1세 황제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이전 세 부대보다 약 70년 늦게 형성되었지만, 창설 즉시 정식 타그마타의 일원으로서 중앙군의 핵심을 구성했다. 히카나토이의 창설은 제국이 직면한 새로운 군사적 압박을 반영한다. 8세기 말과 9세기 초, 제국은 동쪽의 아바스 칼리파트, 북쪽의 불가르, 그리고 서쪽의 프랑크 제국이라는 삼중의 위협에 시달렸다. 니케포로스 1세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군의 규모를 확대할 필요성을 느꼈고, 히카나토이는 그 산물이었다. 이 부대는 콘스탄티노플 인근에 주둔하며, 다른 타그마타와 마찬가지로 황제가 직접 동원할 수 있는 전략 예비군 역할을 수행했다.

이 네 부대가 타그마타의 기본 구성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의 상황에 따라 보조적인 부대들도 추가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수비하는 누메로이(Νούμεροι)는 '숫자'라는 뜻의 라틴어 'numerus'에서 유래한 명칭을 가진 수비대로, 주요 타그마타와는 다소 다른 성격의 부대였다. 누메로이는 야전 작전보다는 수도 방어에 특화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지휘관은 다른 타그마타 지휘관들보다 낮은 서열을 차지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10세기 후반, 아마도 963년경에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에 의해 창설된 아타나토이(Ἀθάνατοι), 즉 '불멸자들'이다. 이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의 정예 근위대 '만인의 불멸자(Ten Thousand Immortals)'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군사적 전통에 대한 비잔티움인들의 역사적 의식을 보여준다. 귀족 가문의 젊은이들로 구성된 이 부대는 타그마타 중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차지했다. 황제의 최측근 친위대로서 기능했던 이들은 단순한 군사 조직을 넘어 제국 엘리트의 상징이기도 했다. 아타나토이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군사적 명예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의 표식이었다.


타그마타의 군사적 구성은 중장 기병과 중장 보병의 혼합으로 이루어졌으며, 황제가 원정에 나설 때 제국 군대의 핵심을 형성했고, 지방의 테마 병력으로 보강되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직면한 다양한 적들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동쪽에서는 아랍 기병의 신속한 기동과 궁술을 상대해야 했고, 북쪽에서는 불가르족의 강력한 돌격 전술에 맞서야 했다. 서쪽에서는 점차 강력해지는 프랑크 기사들의 중장갑 기병과 대치해야 했다. 타그마타는 이러한 다층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다. 중장 기병은 적의 기병과 맞서 싸우고 결정적인 돌격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중장 보병은 안정적인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돌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혼합 편성은 비잔티움 군사 교리의 핵심이었던 유연성과 적응력을 체현했다.

평시에는 수도와 그 주변에 집중 배치되었지만, 전역이 시작되면 신속하게 동원되어 제국 군대의 핵심을 구성했다. 테마 병력이 주로 자신의 영토 방어에 치중하고 장기간의 원정에 참여하기 어려웠던 것과 달리, 타그마타는 제국 어느 곳으로든 신속하게 파견될 수 있었다. 그들은 상시 대기 상태를 유지했고, 보급과 장비는 제국 재정에서 직접 지원받았기 때문에, 전역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최소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이들을 이끌고 740년대부터 770년대까지 아랍과 불가르에 대한 일련의 성공적인 공세 작전을 전개했다. 그는 아랍 영토 깊숙이 침투하여 멜리테네와 테오도시오폴리스 같은 요새 도시들을 공격했고, 불가르에 대해서는 9차례나 원정을 감행하여 그들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이러한 성공은 타그마타가 단순한 근위대가 아닌 진정한 야전군임을 입증했다.


하지만 타그마타의 역사는 단순히 군사적 성공의 연대기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태생적으로 정치적 존재였다. 황제에게 직접 충성하도록 설계되었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위치 때문에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수도에 주둔하면서 황제와 가까이 있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그들은 황제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황제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후계자들, 특히 성상 파괴 논쟁을 둘러싼 정치적 격변 속에서 타그마타는 때로는 황제를 지지하고, 때로는 황제에 대항하는 세력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오 4세가 780년에 사망한 후, 그의 미망인 에이레네가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이 되면서 제국은 다시 한번 성상 숭배 논쟁에 휘말렸다. 에이레네는 성상 숭배를 복원하려 했고, 이는 성상 파괴를 지지했던 많은 군부 세력과의 충돌을 의미했다.

792년 7월, 제국군은 불가르와의 마르켈라이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젊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가 직접 지휘한 이 전역에서 비잔티움군은 거의 전멸했다. 이 패배 직후, 스콜라이와 엑스쿠비토레스의 일부 장교들은 콘스탄티누스 6세를 폐위하고 그의 삼촌 니케포로스를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음모는 발각되어 실패했지만, 이는 타그마타가 황제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자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5년 후인 797년 8월, 상황은 더욱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모친 에이레네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콘스탄티누스 6세는 같은 부대들, 즉 스콜라이와 엑스쿠비토레스에 의해 체포되었다. 황후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황제를 눈멀게 했고, 에이레네는 자신의 아들을 제거하고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비잔티움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독립적으로 제국을 통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극적인 사건들에서 타그마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들의 지지 없이는 어떠한 정치적 변화도 불가능했다.

역사가들은 에이레네가 성상 숭배를 복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상 파괴를 지지했던 타그마타를 유지하고 심지어 확대한 점에 주목한다. 그녀는 비글라를 정식 타그마타로 승격시켰고, 이는 이념적 차이를 넘어선 타그마타의 군사적 효용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실용주의적 통치자였던 에이레네는 타그마타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세력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제국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전력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이러한 양면성은 타그마타의 본질을 관통하는 특징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충실한 검이자 동시에 황제의 목을 위협할 수 있는 칼날이었다. 이는 어떤 통치자도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였다. 강력한 군대 없이는 제국을 지킬 수 없지만, 강력한 군대는 그 자체로 위험 요소가 되었다.


9세기에 접어들면서 타그마타는 점차 안정화되고 제도화되었다. 이사우리아 왕조와 아모리아 왕조를 거치면서, 타그마타는 더 이상 정치적 모험에 쉽게 동원되는 세력이 아니라, 제국 군사 체제의 확고한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는 부분적으로 황제들이 타그마타를 통제하는 방법을 학습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타그마타 자체가 조직으로서 성숙했기 때문이다. 810년 히카나토이의 창설은 이러한 안정화의 산물이었다. 니케포로스 1세는 단순히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을 넘어, 타그마타 체제를 더욱 체계화하고 균형있게 만들려 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811년 불가르와의 플리스카 전투에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니케포로스는 칸 크룸에게 참패하여 전사했고, 그의 두개골은 불가르족의 술잔이 되는 치욕을 당했다. 이 재앙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붕괴하지 않은 것은 타그마타가 여전히 제국의 핵심 전력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10세기에 접어들면서 타그마타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9세기 말 바실리우스 1세가 마케도니아 왕조를 개창한 이후, 제국은 군사적 부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는 단순히 운이 좋았거나 적들이 약해진 것이 아니라, 체계적인 군사 개혁과 경제적 회복, 그리고 유능한 군사 지도자들의 등장이 결합된 결과였다. 타그마타는 이 과정의 선봉에 섰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재위 963-969)는 타그마타 출신의 장군으로 제위에 올랐고, 그의 치세는 비잔티움 군사력의 정점을 상징한다. 그는 961년 크레타를 아랍으로부터 되찾았고, 황제가 된 후에는 시리아와 킬리키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했다. 965년 키프로스를 재정복했고, 968년에는 안티오키아를 점령했다. 이 고대 도시는 330년 이상 아랍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그 탈환은 비잔티움 세계를 흥분시켰다.

니케포로스의 후계자이자 조카인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재위 969-976)는 이러한 공세를 계속했다. 그는 971년 불가르를 격파하여 발칸 반도에서 비잔티움의 지배권을 재확립했고, 동쪽으로는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 근처까지 진격했다. 비록 예루살렘 자체를 정복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원정은 제국의 위신을 크게 높였다. 이 모든 정복은 타그마타의 전투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시기 타그마타의 규모는 크게 증가하여, 황제가 동원할 수 있는 정예 병력은 평상시에도 12,000명에서 15,000명을 상회했고, 전시에는 25,000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한 근위대의 규모를 훨씬 초과하는 수치로, 타그마타가 진정한 의미의 야전군으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타그마타의 질적 수준도 최고조에 달했다. 이들은 최고의 장비를 갖추었고, 지속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로 구성되었다.

바실리우스 2세(재위 976-1025)의 치세는 비잔티움 군사력의 최후의 영광을 대표한다. '불가르 살육자'라는 별명을 얻은 이 황제는 타그마타를 이끌고 30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불가르 제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그는 불가르군을 섬멸했고, 15,000명의 포로를 눈멀게 한 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 이 잔혹한 행위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바실리우스의 군사적 성공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의 영토는 5세기 이후 최대 규모로 확장되었고, 타그마타는 이 모든 정복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바실리우스 2세의 사후, 제국은 급격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11세기부터 타그마타의 위상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바실리우스 2세는 1025년 사망할 때까지 제국을 강력하게 통치했지만, 그에게는 적절한 후계자가 없었다. 그의 형제 콘스탄티누스 8세가 잠깐 통치한 후, 제국은 일련의 평범하고 때로는 무능한 황제들의 손에 넘어갔다. 이들은 대부분 군사적 배경이 없었고, 군대보다는 궁정 정치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재정적 압박이 증가하면서, 황제들은 군대 유지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줄이려 했다. 타그마타를 유지하는 것은 특히 비용이 많이 들었다. 이들은 정규 급여를 받았고, 최고급 장비를 필요로 했으며, 지속적인 훈련과 보급이 필요했다. 평화가 지속되자 일부 황제들은 이러한 지출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토지 소유 귀족들, 특히 아나톨리아의 대토지 소유자들이 점점 더 강력해졌다. 이들 귀족 가문들은 자신들의 사병을 보유했고, 소작농들을 병사로 동원할 수 있었다. 포카스, 두카스, 콤네노스 같은 유력 가문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군벌이 되어갔다. 황제들은 이들의 세력을 견제하려 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군사력에 의존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 집권적 성격의 타그마타는 점차 그 역할을 상실해갔다. 더욱이 타그마타 자체도 변질되고 있었다. 오랜 평화와 훈련 부족으로 인해 그들의 전투력은 저하되었고, 부패와 후원주의가 만연했다. 타그마타의 지위는 여전히 명예로웠지만, 그것은 점차 실질적인 군사적 능력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의미하게 되었다.


1071년 8월 26일, 만지케르트 전투는 이러한 쇠퇴의 극명한 증거였다.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황제는 아르메니아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과 대치했다. 비잔티움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타그마타도 참전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콘스탄티누스 5세나 니케포로스 2세 시대의 정예 부대가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후방의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이끄는 부대가 배신하여 전장을 이탈했고, 이는 황제의 군대를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황제는 포위되어 포로가 되었고, 비잔티움군은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재앙적 패배의 직접적인 결과로, 제국은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제국의 주요 병력 충원지가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아나톨리아의 테마들은 제국 군대의 핵심 병력원이었고, 이 지역을 잃으면서 제국은 전통적인 군사 체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만지케르트 이후 10년간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내전이 연이어 발생했고, 권력을 잡기 위한 귀족 가문들의 투쟁이 격화되었다. 타그마타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제국을 구할 힘이 없었다.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쿠데타를 통해 제위에 올랐다. 그가 마주한 제국은 극도로 약화된 상태였다. 서쪽에서는 노르만족이 발칸 반도를 침공했고, 동쪽에서는 투르크족이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제국의 영토는 수도 주변과 몇몇 해안 도시, 그리고 발칸 반도의 일부로 축소되어 있었다. 재정은 파탄 상태였고, 군대는 사기가 저하되고 규율이 해이해져 있었다.


알렉시오스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타그마타를 포함한 전통적인 군사 조직이 더 이상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대신 그는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 방식을 택했다. 외국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랑기안 근위대는 스칸디나비아와 앵글로색슨 출신의 전사들로 구성된 정예 부대로, 황제의 개인 경호를 맡았다. 이들은 이전의 타그마타가 수행했던 근위대로서의 역할을 대신했다. 서유럽의 기사들, 특히 노르만족 용병들도 대거 고용되었다. 이들의 중장갑 기병 전술은 비잔티움 군사 전통과는 달랐지만, 효과적이었다. 또한 투르크 출신 기병들, 특히 페체네그족과 쿠만족도 제국군에 통합되었다. 이들은 경기병으로서 뛰어난 기동력과 궁술을 제공했다.

이러한 용병 의존은 단순한 임시방편이 아니라, 콤네노스 왕조 전체를 관통하는 군사 정책이 되었다. 알렉시오스의 후계자들, 특히 그의 아들 요한네스 2세와 손자 마누엘 1세도 이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켰다. 제국은 어느 정도 영토를 회복했고, 12세기 중반까지는 다시 한번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는 타그마타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군사 체제 위에 세워진 부흥이었다. 용병에 의존한다는 것은 충성심이 금전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국의 재정이 건전할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하면 군대의 충성심도 흔들렸다. 또한 용병들은 제국에 대한 장기적인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들은 봉급을 받기 위해 싸웠지, 제국의 이념이나 전통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타그마타는 이러한 새로운 체제 속에서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존재했다. 고위 군사 칭호로서 '도메스티코스 톤 스콜론'은 계속 사용되었고, 때로는 실제로 군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타그마타는 더 이상 황제가 의존할 수 있는 정예 중앙군이 아니었다. 그들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전투력은 저하되었으며, 제국 군사 체제에서의 중심적 역할은 외국 용병들에게 넘어갔다. 12세기 말이 되면 타그마타라는 명칭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고,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타그마타는 사실상 소멸되어 있었다.


타그마타의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동로마 제국이 직면했던 근본적인 딜레마를 발견한다. 충성스럽고 효율적인 군대를 창설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권력 집단을 만들어냈고, 그 권력 집단은 다시 제국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지방 사령관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타그마타를 창설했지만, 타그마타 역시 정치적 행위자로서 황제의 운명을 좌우했다. 이는 중앙 집권과 권력 분산 사이의, 효율성과 안정성 사이의 영원한 긴장이었다. 어떤 제도도 이 딜레마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강력한 중앙군은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데 필수적이었지만, 동시에 내부의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반대로 분산된 군사력은 반란의 위험을 줄일 수 있었지만, 제국의 방어를 약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그마타는 동로마 제국이 8세기 중반부터 11세기까지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 중 하나였다. 아랍의 끊임없는 압박, 불가르의 위협, 내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제국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정예 중앙군의 존재 덕분이었다. 타그마타는 제국이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다시 한번 지중해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세기의 영광스러운 정복들, 안티오키아와 크레타의 탈환, 불가르 제국의 정복은 모두 타그마타의 전투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잘 훈련된 군대였던 것이 아니라, 제국의 정체성과 연속성을 체현하는 제도였다. 타그마타의 병사가 된다는 것은 로마 제국의 영광스러운 군사 전통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타그마타의 역사는 또한 제도의 생명력이 그것을 유지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타그마타는 743년에 창설되었을 때 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제공했다. 중앙 집권적이고, 전문적이며, 신속하게 동원할 수 있는 정예 부대였다. 그들은 테마 제도의 약점을 보완했고, 황제에게 독립적인 군사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의 상황이 변했다. 11세기의 제국은 8세기의 제국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경제 구조가 변했고, 사회적 역학관계가 변했으며, 군사적 위협의 성격도 변했다. 타그마타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쇠퇴하고 소멸했다. 이것은 어떤 제도도 영원할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제공한다.

그들의 역사는 군사 제도가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구조와 사회적 변화, 그리고 제국의 운명과 깊이 얽혀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타그마타의 창설과 진화, 그리고 최종적인 쇠퇴는 비잔티움 제국 자체의 궤적을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제국이 강할 때 타그마타도 강했고, 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타그마타도 흔들렸으며, 제국이 새로운 형태로 변모했을 때 타그마타는 소멸했다. 이 둘은 서로를 반영하고 형성했으며, 하나의 운명을 공유했다.


743년 반란의 잿더미 위에서 탄생한 이 혁신적 군사 조직은, 3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제국의 심장을 지켰다. 콘스탄티누스 5세가 옵시키온의 잔해로부터 창설한 이 부대들은 제국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아랍의 공세를 저지했고, 불가르를 격퇴했으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그들은 황제들을 만들고 폐위시켰으며, 제국의 정치를 형성했다. 그들은 비잔티움 군사력의 상징이었고, 제국의 회복력을 증명했다. 그리고 타그마타가 사라진 후, 제국 역시 그 생명력의 핵심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타그마타는 동로마 제국의 힘이자 모순이었고, 그들의 역사는 중세 세계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제국의 복잡하고 매혹적인 본질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들의 이야기는 제국의 영광과 쇠퇴, 혁신과 경직성, 충성심과 배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 제도의 필멸성에 대한 서사시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D%83%80%EA%B7%B8%EB%A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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