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8년 어느 봄날, 콘스탄티노플의 황궁 정문 앞에 낯선 전사들이 도열했다. 그들의 키는 보통 비잔티움 병사들보다 한 뼘은 더 컸고, 북해의 찬 바람을 견뎌낸 듯 거칠고 단단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손에는 양날 전투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이는 제국의 군대가 사용하던 어떤 무기와도 달랐다. 이들이 바로 바랑기안 친위대의 시초였으며, 이후 400여 년 동안 동로마 제국 황제들의 가장 충성스러운 수호자로 남게 될 전사들이었다.
바랑기안이라는 명칭은 고대 노르드어 'væringjar'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맹세를 한 자들' 또는 '동료들'을 의미한다. 그들의 기원은 9세기 발트해 동안을 습격하던 노르만족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들 바이킹은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진출하여 슬라브 부족들과 교역하고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결국 키예프 루스라는 강력한 국가를 형성했다. 874년 루스와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에는 흥미로운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루스는 비잔티움에 용병을 제공할 의무를 지닌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후일 바랑기안 친위대로 발전하게 될 최초의 법적 근거였다.
그러나 친위대가 공식적으로 창설된 것은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였다. 988년, 젊은 황제는 반란 세력에 의해 왕좌를 위협받고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유력 귀족들이 이끄는 반란군은 수도를 향해 진격했고, 제국군의 상당수가 반란에 가담하면서 황제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바실리오스는 자신의 친위대조차 믿을 수 없었다. 궁정의 음모와 배신이 일상이었던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는 금전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야망에서 자유로운 전사들이 필요했다. 그의 눈은 자연스럽게 북방으로 향했다.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바실리오스의 간절한 요청에 응답했다. 그는 6,000명의 정예 전사를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다. 이 전사들은 키예프 루스의 스칸디나비아계 귀족들과 그들을 따르는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비잔티움 황제를 섬기는 것은 단순한 용병 계약이 아니었다. 북방의 전사 문화에서 강력한 군주를 섬기는 것은 명예의 문제였고, 비잔티움 황제는 그들이 알던 어떤 왕보다도 부유하고 강력했다. 이 바랑기안 전사들은 반란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의 전투 스타일은 비잔티움군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방패벽을 형성하고 도끼를 휘두르며 전진하는 그들의 모습은 적들에게 공포를 안겼다.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바실리오스 2세의 신뢰를 얻은 바랑기안들은 곧 황제의 개인 친위대로 공식 편성되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황제의 신변 보호였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치안 유지, 황궁의 수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의 전략 예비대 역할까지 맡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들이 황궁의 보물 창고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는 것이다. 이는 황제가 그들을 얼마나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토착 비잔티움 귀족들은 금전적 유혹에 넘어갈 수 있었지만, 바랑기안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맹세한 이상 그것을 깨뜨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바랑기안 친위대의 전설적인 명성은 104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인물은 하랄 하르드라다였다. 1030년 스티클레스타드 전투에서 형 올라프 2세가 전사하자, 당시 15세였던 하랄은 상처를 입은 채 노르웨이를 탈출했다. 그는 먼저 키예프 루스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야로슬라프 대공의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젊고 야망 넘치는 하랄에게 키예프의 궁정은 너무 작았다. 그는 더 큰 무대를 원했고, 그의 발걸음은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1034년경 바랑기안 친위대에 합류한 하랄은 곧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첫 번째 큰 시험은 1038년 시칠리아 원정이었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손에 넘어간 시칠리아 섬을 되찾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르주 마니아케스 장군이 이끄는 원정군에는 바랑기안 친위대의 정예 병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하랄도 그 중 하나였다. 흥미롭게도 이 원정에서 바랑기안들은 남부 이탈리아에 막 도착한 노르만 용병들과 함께 싸웠다. 같은 노르만 혈통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깃발 아래 모인 두 전사 집단이 협력하여 이슬람군을 격파한 것이다.
그러나 하랄의 진정한 시험은 1040년 불가리아 반란 진압 작전에서 찾아왔다. 페타르 델랸이 이끄는 불가리아 반란군은 바실리오스 2세 사후 이완된 제국의 지배력을 틈타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반란은 삽시간에 발칸 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제국은 다시 한번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미카일 4세 황제는 바랑기안 친위대를 포함한 정예 부대를 파견했다. 1041년 오스트로보 근처에서 벌어진 결정적 전투에서, 하랄이 이끄는 바랑기안 부대는 반란군의 중앙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사가에 따르면 하랄은 전투 중 적진 깊숙이 진입하여 반란군 지휘관들을 직접 공격했고, 이는 불가리아군의 사기를 꺾는 결정타가 되었다.
이 승리는 하랄의 명성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바랑기안 친위대의 전투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그들의 전술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두꺼운 사슬갑옷으로 무장한 채 밀집 대형을 형성하고, 양날 전투도끼를 휘두르며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이었다. 비잔티움 군대의 복잡한 전술 기동이나 기병의 우회 공격과는 달리, 바랑기안들은 정면 충돌을 선호했다. 이러한 전술은 일견 무모해 보였지만, 그들의 뛰어난 체격과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성이 뒷받침되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하랄은 바랑기안 친위대에서 10년 이상을 복무하며 제국 전역을 누볐다. 그는 시리아의 사막에서도, 소아시아의 산악 지대에서도, 지중해의 파도 위에서도 싸웠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80번이 넘는 전투에 참가했고, 항상 승리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과장된 면이 있지만, 그의 탁월한 전투 능력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바랑기안 친위대의 지휘관급으로 승진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비잔티움 황제들은 바랑기안들에게 정기적인 봉급 외에도 전리품의 상당 부분을 허용했으며, 특히 황제가 사망했을 때는 황궁의 보물 중 일부를 가져갈 권리까지 부여했다. 이를 '폴레아토리온'이라 불렀는데, 이는 바랑기안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특권이었다.
1042년경, 충분한 부와 명성을 얻은 하랄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노르웨이로 가져간 재물은 엄청났고, 이는 그가 1046년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랄 하르드라다의 이야기는 바랑기안 친위대가 단순한 황제의 경호원이 아니라 출세와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음을 보여준다. 북방에서 온 수많은 전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들에게 비잔티움 황제를 섬기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자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었다.
11세기 중반, 바랑기안 친위대의 구성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의 윌리엄이 승리하면서 앵글로색슨 귀족 계층이 몰락했다. 고향을 잃은 수많은 앵글로색슨 전사들이 새로운 삶을 찾아 비잔티움으로 향했다. 그들은 바랑기안 친위대에 합류했고, 점차 스칸디나비아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1080년대에 이르면 바랑기안 친위대의 다수가 앵글로색슨 출신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노르만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고, 그것은 전투에서 더욱 맹렬한 투지로 발현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081년 디라키움 전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노르만의 로베르 기스카르가 발칸 반도를 침공했을 때,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황제는 바랑기안 친위대를 최전선에 배치했다. 앵글로색슨 출신 바랑기안들은 노르만 기병대를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은 방패벽을 형성하고 도끼를 휘두르며 기병 돌격을 막아냈다. 비록 전투 자체는 비잔티움의 패배로 끝났지만, 바랑기안 친위대는 최후까지 황제를 지키며 질서 있는 후퇴를 가능하게 했다. 많은 바랑기안들이 전사했지만, 그들의 충성심과 용맹성은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바랑기안 친위대의 명성은 12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황제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호자였으며, 궁정의 의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외국 사절들이 황제를 알현할 때, 바랑기안 친위대가 양옆에 도열하여 제국의 위엄을 과시했다. 그들의 거대한 체구와 번쩍이는 전투도끼는 방문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비잔티움 역사가들은 바랑기안들이 "술을 좋아하고 성격이 거칠지만, 황제에 대한 충성만큼은 절대적"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제국의 쇠퇴와 함께 바랑기안 친위대도 서서히 약화되었다. 13세기에 들어서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재정난에 시달렸고, 친위대에 지급할 급여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새로운 신병 모집도 어려워졌다. 북유럽과 영국에서 더 이상 전사들이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지 않았다. 유럽 정세가 변화하면서 다른 기회들이 생겨났고, 비잔티움 제국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위대의 규모는 점점 줄어들었고, 전투력도 약화되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을 때, 바랑기안 친위대는 여전히 황제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십자군이 성벽을 돌파하고 시내로 진입했을 때, 바랑기안들은 황궁의 마지막 방어선을 지켰다. 그들은 수적으로 열세했고 더 이상 전성기의 전투력을 유지하지 못했지만, 충성심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의 물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라틴 제국이 수립되면서, 바랑기안 친위대의 전통은 사실상 끊겼다.
1261년 미카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복원했을 때, 바랑기안 친위대를 재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변해 있었다. 옛날처럼 북방에서 용사들을 대규모로 모집할 수도 없었고, 제국의 재정도 이를 뒷받침할 수 없었다. 14세기의 기록에는 여전히 '바랑기안'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과거의 영광스러운 전사 집단과는 거리가 먼, 명목상의 부대에 불과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최종 함락될 때까지 바랑기안이라는 이름은 명맥을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상태였다.
바랑기안 친위대의 역사는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는 문화적 경계를 넘어선 충성과 신뢰의 이야기다. 북유럽의 전사들이 그리스 정교의 황제를 섬기며 목숨을 바칠 정도로 충성했다는 사실은, 중세 사회에서도 문화적·종교적 차이를 극복한 관계가 가능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 바탕에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었다. 바랑기안들은 후한 보수를 받았고, 전리품과 특권을 누렸다. 하지만 단순히 돈만으로는 그들이 보여준 헌신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문화에서 명예와 충성은 물질적 보상만큼이나 중요했다.
또한 바랑기안 친위대의 존재는 비잔티움 제국의 실용주의를 잘 보여준다. 제국은 외국인 용병을 핵심 권력의 중심부에 배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제국 내부의 정치적 파벌 싸움과 배신의 역사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황제들은 자국민보다 외국인 전사들을 더 신뢰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바랑기안들은 비잔티움의 복잡한 궁정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황제 개인에 대한 충성만을 중시했다. 이것이 그들을 이상적인 친위대로 만들었다.
바랑기안 친위대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그들은 중세 유럽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용병 집단 중 하나로 기억된다. 하랄 하르드라다 같은 인물들은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아이슬란드 사가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유적지에서는 바랑기안들이 새긴 룬 문자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천년 전 북방의 전사들이 실제로 그곳에서 황제를 지켰다는 생생한 증거다.
결국 바랑기안 친위대의 이야기는 동서양의 만남, 충성과 명예, 야망과 모험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고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국땅에서 낯선 황제를 위해 싸웠고, 그 과정에서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비잔티움 제국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바랑기안 친위대의 명성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들은 중세의 가장 인상적인 전사 집단 중 하나였으며, 충성과 용맹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증거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B0%94%EB%9E%91%EC%9D%B8%20%EC%B9%9C%EC%9C%84%EB%8C%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