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0년 6월 29일, 안기아리 평원에서 8천여 명의 군대가 격돌했다. 밀라노의 니콜로 피치니노가 이끄는 군대와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지휘하는 피렌체 동맹군 사이의 전투였다. 네 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이 끝났을 때, 마키아벨리의 기록에 따르면 단 한 명의 사상자만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적의 칼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 늪에 빠져 익사한 것이었다. 이 기이한 전투의 결과는 콘도티에리라 불리는 이탈리아 용병 지휘관들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영광이나 정복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들의 전쟁은 철저히 계산된 사업이었고, 죽음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할 사업상의 손실이었다.
콘도티에리는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무대로 활동한 용병 지휘관들을 일컫는다. 이 명칭은 이탈리아어 '콘도타'(condotta), 즉 '계약'에서 유래했다. 이들은 말 그대로 계약으로 자신과 부하들의 칼을 고용주에게 빌려주는 전문 군사 청부업자들이었다. 중세 후기 이탈리아의 정치적 분열은 이들에게 완벽한 사업 환경을 제공했다.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제노바 같은 도시국가들은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정작 그 부를 지킬 군사력은 부족했다. 시민군은 신뢰할 수 없었고, 상인 귀족들은 전쟁보다 장부에 더 익숙했다. 이 틈새에서 콘도티에리가 번성했다.
초기 콘도티에리의 대표적 인물은 영국 출신의 존 호크우드였다. 그는 백년전쟁에서 경험을 쌓은 뒤 1361년 '백색 용병단'(White Company)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호크우드의 경력은 콘도티에리 시스템의 모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364년 5월, 그는 만 명의 병력과 삼천 필의 말을 이끌고 피렌체를 한 달 동안 포위했다. 그의 부하들은 주변 농지를 불태우고 가옥을 파괴했다. 결국 피렌체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서야 그를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호크우드는 이후 피렌체의 가장 충실한 용병 지휘관이 되어 1394년 죽을 때까지 그 도시를 섬겼다. 피렌체는 그에게 공개 장례식을 거행하고 영웅으로 대접했다. 적을 돈으로 사는 것, 이것이 콘도티에리 시대의 논리였다.
콘도티에리의 전쟁 방식은 중세 기사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에게 전투는 가능한 한 피해야 할 최후의 수단이었다. 기동과 포위, 소모전과 심리전이 그들의 주된 전술이었다. 안기아리 전투의 낮은 사상자 수는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그 이면의 진실은 명확하다. 숙련된 기병과 보병은 훈련에 시간과 비용이 들었고, 전사한 병사는 다시는 임금을 벌어다 줄 수 없었다. 용병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부하는 자본이었고, 적군의 용병들 역시 내일의 잠재적 동료였다. 피치니노가 안기아리에서 패한 뒤 포로가 된 그의 부하들은 즉시 석방되었다. 이것이 '운명의 군인들'이 벌이는 전쟁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이런 신중한 전쟁 방식이 콘도티에리가 무능하거나 비겁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당대 최고 수준의 전술가들이었다. 니콜로 피치니노는 '브라체스코 시스템'에서 '스포르체스코 시스템'으로 전환을 시도했다. 전자는 소규모 기동부대를 번갈아 투입하는 유연한 전술이었고, 후자는 대규모 병력을 한 지점에 집중시켜 신속히 돌파를 노리는 방식이었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는 이런 전술적 혁신으로 안기아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결국 밀라노 공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용병 지휘관에서 군주로의 신분 상승, 이것은 콘도티에리 시대가 낳은 가장 극적인 성공 사례였다.
콘도티에리의 실체는 그들이 참여한 다른 전투들을 통해 더 명확히 드러난다. 1377년 체세나 학살은 그들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 교황청의 명령으로 호크우드의 백색 용병단은 반란을 일으킨 도시를 본보기로 삼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사흘에 걸쳐 수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호크우드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지휘 아래 저질러진 만행이었다. 이 사건은 콘도티에리가 단순히 온건한 전술가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잔혹할 수 있는 전문 폭력 집단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신중함은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경제적 합리성의 산물이었다.
콘도티에리 시스템은 이탈리아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피렌체 같은 도시국가들은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용병 고용에 지출했다. 이는 시민들의 군사적 전통을 약화시켰다.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초 이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는 용병에 의존하는 것이 공화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협한다고 경고하며, 시민군 재건을 주장했다. 그의 비판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에 근거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콘도티에리들은 훨씬 조직적이고 결연한 외국 군대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냈다. 계산된 전쟁에 익숙한 그들은 생사를 건 전면전에 대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콘도티에리 현상은 단순히 이탈리아만의 특수성으로 치부할 수 없다. 사실 당시 유럽 전역의 군대는 계약 기반이었고 외국 용병들로 채워졌다. 스위스 창병대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러 국가의 고용을 받았고, 독일의 란츠크네히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콘도티에리가 특별했던 것은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활동한 정치적 환경이었다. 분열된 이탈리아에서 용병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권력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스포르차가 그랬고,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같은 우르비노 공작도 그랬다. 그들은 검으로 출세했지만, 통치는 문화와 외교로 했다. 몬테펠트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훌륭한 예술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콘도티에리의 유산은 복잡하다. 그들은 전쟁을 합리화하고 전문화했지만, 동시에 전쟁을 사업으로 만들어 그 잔혹성을 체계화했다. 그들은 용맹했지만 신의가 없었고, 능력 있었지만 신뢰할 수 없었다. 피렌체의 시뇨리아 궁전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리려 했던 안기아리 전투의 벽화가 있어야 했다. 그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현존하는 습작들은 격렬한 전투의 순간을 포착한다. 네 명의 기사가 깃발을 두고 격렬히 싸우는 장면, 그것은 콘도티에리 전쟁의 실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영토나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라 계약의 상징인 깃발을 위해, 그리고 그것이 대변하는 금화를 위해 싸웠다.
16세기 중반이 되자 콘도티에리의 시대는 저물었다. 중앙집권화된 국가들이 상비군을 갖추기 시작했고, 화약 무기의 발달은 전쟁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중장갑 기병 중심의 콘도티에리 부대는 총포 앞에서 시대착오가 되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이 국가의 독점물이 되기 전, 그것은 사적 기업이 될 수 있었다. 폭력은 계약의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충성은 가격표를 달 수 있었다. 오늘날 민간 군사 기업들이 세계 곳곳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볼 때, 콘도티에리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반복되는 패턴의 초기 사례임을 깨닫게 된다.
안기아리 늪에서 익사한 그 한 명의 병사는 콘도티에리 전쟁의 상징이다. 그는 영웅적인 돌격에서 죽지 않았고, 영광스러운 희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우연히, 어쩌면 어리석게도 늪에 빠져 죽었다. 이것이 바로 계약으로 전쟁하는 자들의 운명이었다. 그들의 전쟁에는 서사시가 없었다. 대신 장부와 계약서, 그리고 꺼지지 않는 욕망만이 있었다. 콘도티에리는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화려함 뒤에 숨은 냉혹한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그 시대는 예술과 인문주의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전쟁이 가장 이성적이고 계산적으로 수행된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역설 속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의 복잡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이미지 출처https://ko.wikipedia.org/wiki/%EC%95%99%EA%B8%B0%EC%95%84%EB%A6%AC_%EC%A0%84%ED%88%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