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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원정-진정한 정복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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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34년 봄, 스물두 살의 마케도니아 왕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다. 그의 군대는 보병 3만, 기병 5천에 불과했다. 맞은편에는 200년간 지중해 세계를 지배해온 페르시아 제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도 이 젊은 왕이 11년 뒤 인도 국경까지 진격하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의 연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교한 전략, 혁신적 전술,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의지가 만들어낸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물려받은 마케도니아 왕국은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20년에 걸쳐 단련한 군사 강국이었다. 필리포스는 그리스 세계를 통일하고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암살당했고, 스무 살의 알렉산드로스는 갑작스레 왕위에 올랐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18세에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버지의 기병대를 지휘하여 결정적 돌파를 이룬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 직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북방의 트라키아와 일리리아 부족들이 침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번개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그는 2주 만에 발칸 지역을 평정했고, 테베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여 본보기를 보였다. 이 무자비한 조치는 역설적으로 다른 그리스 도시들을 평화롭게 만들었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미완성 과업, 페르시아 원정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라니코스 강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첫 번째 시험대였다. 페르시아 총독들이 이끄는 군대가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었다. 강을 건너며 싸운다는 것은 군사적 상식에 어긋났다. 병사들은 물살에 발이 묶인 채 언덕 위의 적을 공격해야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스스로 선두에 서서 강을 건넜다. 그는 전투 중 머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지만 투구가 공격을 막아냈고, 부하 장군 클레이토스가 적장의 칼을 막아 그의 목숨을 구했다. 왕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전율을 불러일으켰다. 마케도니아군은 강을 건넜고,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로 소아시아의 서부 해안 전체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자인 동시에 해방자로 자신을 내세웠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 도시들에게 자유를 선언했고, 현지의 관습과 종교를 존중했다. 이소스 전투에서 그는 마침내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 3세와 직접 맞닥뜨렸다. 페르시아군은 숫자에서 압도적이었지만, 좁은 해안 평야라는 지형은 그들의 수적 우위를 무력화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직접 정예 기병을 이끌고 페르시아 전선의 약점을 향해 쐐기처럼 돌진했다. 그의 목표는 다리우스 자신이었다.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페르시아 왕의 수레까지 도달했고, 다리우스는 공포에 질려 전장을 버리고 도망쳤다. 왕이 도망치자 페르시아군 전체가 붕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가족을 포로로 잡았지만, 그들을 왕족에 걸맞게 극진히 대우했다. 이는 정치적 관용과 심리전의 결합이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도망친 다리우스를 즉시 추격하지 않았다. 그는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목표를 선택했다. 페르시아의 해군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의 모든 항구를 점령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남하하여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들을 하나씩 정복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저항 없이 항복했지만, 티레는 달랐다. 섬에 건설된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 티레는 7개월간 포위를 견뎌냈다. 알렉산드로스는 본토에서 섬까지 거대한 둑길을 건설하는 전무후무한 공학적 도전에 나섰다. 파도와 폭풍이 공사를 방해했고, 티레인들은 화공선으로 공성 무기들을 불태웠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둑길이 완성되었고, 그는 새로 건조한 함선들을 동원해 해상에서도 공격했다. 티레는 함락되었고, 그 저항의 대가는 혹독했다. 8천 명이 학살되고 3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 이 무자비함은 계산된 것이었다. 그 후 어떤 도시도 알렉산드로스에게 감히 저항하려 들지 않았다.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압제에 질려 있던 터라 알렉산드로스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는 멤피스에서 파라오로 즉위했고, 시와 오아시스의 아몬 신전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사제들은 그를 신의 아들로 선언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알렉산드로스의 오만을 키웠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이는 이집트를 통치하기 위한 정치적 필요였다. 이집트인들에게 파라오는 곧 신이었고, 신적 권위 없이는 진정한 통치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는 나일강 삼각주에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후대에 헬레니즘 문화의 찬란한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는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로 향했다. 다리우스는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지형이 페르시아에게 유리했다. 드넓은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은 자신들의 압도적인 숫자를 완전히 활용할 수 있었다. 다리우스는 25만의 대군을 동원했고, 낫이 달린 전차와 전투 코끼리까지 배치했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는 4만 7천에 불과했다. 전투 전날 밤, 부하 장군들은 야습을 제안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거절했다.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는 오만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정정당당한 승리만이 페르시아인들을 진정으로 복종시킬 수 있었다.

가우가멜라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전술적 천재성이 빛난 순간이었다. 그는 군대를 비스듬히 배치하여 페르시아군의 포위를 유도했다. 페르시아군이 마케도니아군을 감싸려 하자 그들의 전선에 틈이 생겼다. 바로 그 순간, 알렉산드로스는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쐐기 대형으로 그 틈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목표는 변함없이 다리우스였다. 격렬한 전투 끝에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다시 한 번 페르시아 왕의 전차에 도달했다. 다리우스는 또다시 도망쳤고, 그와 함께 페르시아 제국의 운명도 무너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를 차례로 점령했다.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웠는데, 이는 150년 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네를 불태운 것에 대한 복수라고 선전되었다. 이제 그는 단순한 마케도니아 왕이 아니라 아시아의 왕, 페르시아 제국의 계승자였다.

그러나 정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리우스는 동쪽으로 도망쳤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추격했다. 기원전 330년, 다리우스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대왕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자신의 망토로 덮어주었다. 그는 다리우스를 왕족의 예법에 따라 장사지냈고, 그를 살해한 배신자들을 추격하여 처형했다. 이는 페르시아인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자가 아니라 정당한 계승자이며, 페르시아의 전통을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이 확장되면서 알렉산드로스의 통치 방식은 변화했다. 그는 점점 더 페르시아의 의식과 관습을 받아들였다. 페르시아식 복장을 입었고, 페르시아 귀족들을 행정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페르시아 귀족의 딸 록사네와 결혼했고, 부하 장군들에게도 페르시아 여성들과의 혼인을 장려했다. 이는 동서양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세계 제국을 건설하려는 비전이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오랜 동료들은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정복의 전리품을 나누기를 원했지, 페르시아인들과 권력을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긴장은 고조되었다. 기원전 328년, 사마르칸트 인근의 마라칸다에서 비극이 일어났다. 술자리에서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오랜 친구이자 그라니코스 강에서 그의 목숨을 구한 클레이토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화되었다고 비난했고, 그의 업적이 아버지 필리포스의 유산 덕분이라고 말했다. 분노한 알렉산드로스는 창을 집어 들어 클레이토스를 찔러 죽였다. 정신을 차린 후 그는 3일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통곡하며 후회했다. 이 사건은 절대 권력이 가져오는 위험과 알렉산드로스 내면의 갈등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복은 계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의 거친 산악 지대를 평정했다. 이 지역의 유목민들은 게릴라 전술로 저항했고, 정복에는 3년이 걸렸다. 그는 산꼭대기의 난공불락 요새들을 공략하기 위해 암벽 등반 전문가들을 활용하는 등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록사네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박트리아 귀족의 딸이었고, 그들의 결혼은 정치적 동맹인 동시에 진정한 애정의 결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26년,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아대륙으로 진격했다. 그는 히다스페스 강에서 포로스 왕과 맞닥뜨렸다. 포로스는 2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포함한 강력한 군대를 이끌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강을 건너 측면 공격으로 포로스를 놀라게 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전투 코끼리들은 마케도니아군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은 창과 투창으로 코끼리들을 공격하여 공황 상태로 만들었고, 광란에 빠진 코끼리들은 자신의 군대를 짓밟았다. 포로스는 패배했지만 용감하게 싸웠다. 알렉산드로스가 그를 어떻게 대우받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포로스는 "왕답게"라고 대답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왕으로 복권시켰고, 그의 영토를 확대해주었다. 이는 정복당한 지도자를 존중함으로써 충성을 얻는 그의 전략의 또 다른 사례였다.


그러나 여기서 알렉산드로스의 진격은 멈췄다. 병사들은 8년간 1만 8천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그들은 사막과 산맥을 넘었고, 수없는 전투를 치렀다. 이제 그들은 한계에 도달했다. 히파시스 강에서 병사들은 더 이상 전진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며칠간 천막에 틀어박혀 분노했지만, 결국 굴복했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정복자라도 병사들의 의지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귀환을 명령했다.

귀환길은 새로운 악몽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강을 따라 남하하여 인도양에 도달했다. 그리고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눴다. 한 부대는 네아르코스 제독의 함대를 따라 해로로, 다른 부대는 자신과 함께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하기로 했다. 게드로시아 사막 횡단은 재앙이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물과 식량이 고갈되었다. 병사들은 갈증으로 죽어갔고, 모래폭풍이 대열을 집어삼켰다. 7만 5천 명 중 2만 5천 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치른 어떤 전투보다 많은 손실이었다. 그가 왜 이 위험한 경로를 선택했는지는 논란거리다. 일부는 그가 전설적인 아시리아 여왕 세미라미스와 페르시아의 키루스도 실패한 일을 성공시키려 했다고 주장한다. 오만이었을까, 아니면 계산된 모험이었을까.


기원전 324년, 알렉산드로스는 수사에 돌아왔다. 그는 제국을 통합하기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수사에서 대규모 집단 결혼식을 열어 1만 명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병사들을 페르시아 여성들과 결혼시켰다. 그는 스스로도 다리우스의 딸 스타테이라와 결혼했다. 그는 3만 명의 페르시아 젊은이들을 마케도니아식으로 훈련시켜 군대에 통합했다. 이 모든 것은 동서양의 융합이라는 그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참전용사들은 분개했다. 오피스에서 그들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는 반란 주동자 13명을 즉석에서 처형했고, 나머지 병사들에게 자신이 페르시아인들만으로 새 군대를 만들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천막에 들어가 사흘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용서를 빌었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화해의 연회가 열렸고, 그는 "모든 인류는 형제"라는 혁명적인 선언을 했다. 이는 민족과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세계 시민주의의 비전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기원전 323년 6월, 바빌론에서 그는 갑자기 병에 걸렸다. 열흘간 고열에 시달린 끝에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음의 원인은 여전히 논쟁거리다. 말라리아, 장티푸스, 독살 등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죽어가면서 부하들이 제국을 누가 계승할 것인지 묻자, 그는 "가장 강한 자에게"라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혹은 "크라테로스에게"라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가 후계자를 명확히 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과 함께 제국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의 장군들은 40년간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결국 제국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히 영토가 아니었다. 그는 70개 이상의 도시를 건설했고, 대부분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도시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스 문화와 동양 문화의 융합은 새로운 예술, 과학, 철학을 낳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고대 세계 지식의 보고가 되었다. 그리스어는 지중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의 공통어가 되었고, 이는 나중에 기독교가 확산되는 언어적 토대를 제공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전쟁을 평가하는 것은 복잡한 과제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군사적 천재였다. 그는 한 번도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며, 종종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창의적 전술과 개인적 용기로 승리를 거뒀다. 그는 선두에서 싸웠고, 여러 번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리더십은 병사들에게 초인적인 성취를 가능하게 했다. 그들은 그를 위해 세계의 끝까지 행군했다. 동시에 그는 정복자의 무자비함을 보였다. 티레와 테베의 파괴, 수만 명의 학살과 노예화는 그의 영광의 어두운 면이다.

그러나 그를 단순히 잔혹한 정복자로만 보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는 정복한 민족들의 문화를 존중했고, 그들을 제국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만들려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그리스인들은 비그리스인들을 야만인으로 여겼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 이집트인, 인도인들을 파트너로 대우했다. 그의 세계 시민주의적 비전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순전히 이상주의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피정복민들의 협력이 필요했고, 문화적 융합은 실용적 필요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업적은 개인의 능력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페르세폴리스가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혹은 32세가 아닌 52세까지 살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의 이른 죽음은 역사의 가장 큰 "만약"중 하나다. 어떤 이들은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제국을 안정시키고 진정한 동서 융합을 이뤘을 것이라 상상한다. 다른 이들은 제국이 너무 거대하고 다양해서 어차피 붕괴할 운명이었다고 주장한다. 확실한 것은 그의 11년간의 정복이 고대 세계의 지도를 영원히 바꿔놨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알렉산드로스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는 영웅인가, 악당인가. 해방자인가, 압제자인가. 천재인가, 오만한 광인인가. 아마도 그는 이 모든 것의 복합체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그 시대를 초월했다. 그는 개인적 야망과 세계사적 비전을 결합했다. 그의 정복전쟁은 수십만 명의 죽음을 가져왔지만, 또한 문화적 교류와 지식의 확산을 촉진했다. 역사는 도덕적 단순함을 거부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전쟁은 인간의 야망, 용기, 잔혹함, 그리고 비전이 뒤엉킨 복잡한 태피스트리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리더십, 그리고 문화적 만남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는 것이다. 2300년이 지난 지금도 알렉산드로스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위대함의 대가는 무엇인가. 한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할 권리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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