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8년 봄, 마흔두 살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의 변경에서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일리리쿰, 키살피나 갈리아, 나르보 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된 상태였으나, 그의 정치적 입지는 취약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와 함께 형성한 제1차 삼두정치는 겨우 그의 파산 직전 상태를 막아주는 정치적 방패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8년 동안 펼쳐질 전쟁은 그를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변모시킬 것이었다. 갈리아 전쟁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라, 한 남자의 정치적 생존, 로마 공화정의 운명, 그리고 유럽 문명의 미래가 걸린 드라마였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향했을 때, 그곳은 로마인들에게 야만의 땅이었다. 켈트족으로 알려진 갈리아인들은 오랜 세월 로마와 충돌해왔고, 기원전 4세기에는 로마 자체를 약탈하기도 했던 무시무시한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갈리아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다. 수백 개의 부족들이 끊임없이 경쟁하고 동맹을 맺고 배신하며 살아가는 분열된 세계였다. 이 분열이야말로 카이사르에게 가장 큰 전략적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단순히 군사력으로 정복하지 않았다. 외교, 술책, 그리고 갈리아인들의 내부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이 그의 진정한 무기였다.
전쟁의 명분은 헬베티족의 이주였다. 현재 스위스 지역에 거주하던 이 부족은 게르만족의 압박을 피해 서쪽으로 대규모 이주를 계획했다. 카이사르는 이를 로마의 동맹 부족들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개입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 이유에 불과했다. 카이사르 자신이 저술한 『갈리아 전기』에서도 그는 이 전쟁을 방어적 행위로 묘사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철저히 계산된 정치적 결정이었음을 지적한다. 카이사르는 군사적 명성과 부를 필요로 했고, 갈리아는 그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무대였다.
첫 해의 승리는 카이사르에게 확신을 주었다. 헬베티족을 격파한 뒤, 그는 즉시 게르만 족장 아리오비스투스와 싸워 이겼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자랑스럽게 기록했다. "한 번의 원정에서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전쟁을 끝냈다." 이는 단순한 자화자찬이 아니라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을 향한 정교한 선전이었다. 그는 3인칭으로 자신을 서술하며 객관성을 가장했고, 간결하고 명료한 라틴어로 글을 써서 교육받지 못한 도시 평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했다.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문체를 "맨몸의 운동선수처럼 수사적 장식을 벗어던진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평가했지만, 그 간결함 속에는 치밀한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북쪽의 벨가이족을 공격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네르비족과의 사비스 강 전투에서 거의 패배할 뻔한 위기를 맞았다. 네르비족은 로마군이 진영을 구축하는 동안 기습 공격을 감행했고, 로마 군단들은 혼란에 빠졌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그 자신이 전선에 나타나 병사들을 독려했고, 그의 존재만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카이사르식 서술이다. 한 사람, 바로 카이사르가 전투를, 전쟁을, 그리고 역사를 결정한다는 서사. 실제로 얼마나 과장되었든 간에, 그의 군단들은 승리했고, 원로원은 15일간의 감사 의식을 선포했는데, 이는 그때까지 누구에게도 부여된 적 없는 영예였다.
다음 해들은 더욱 대담한 모험으로 가득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는 라인 강을 건넜다. 로마군이 게르만 영토에 진입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단 10일 만에 라인 강 위에 다리를 건설했는데, 이는 로마 공학의 경이였다. 그러나 이 원정의 진짜 목적은 게르만족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충분히 자신의 힘을 과시한 뒤 다리를 부수고 돌아왔다. 같은 해, 그는 더욱 대담한 시도를 했다. 브리타니아, 즉 현재의 영국으로 원정을 떠난 것이다. 로마인은 물론 그 어떤 지중해 문명도 브리타니아에 군대를 상륙시킨 적이 없었다. 카이사르의 첫 번째 브리타니아 원정은 정찰에 가까웠고, 이듬해의 두 번째 원정도 영구적인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 영웅이 되었고, 로마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갈리아는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 기원전 54년 겨울, 갈리아 북서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에부로네스족의 암비오릭스는 로마 군단을 기습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중 가장 치욕적인 패배였다. 그는 즉각 보복에 나섰고, 다음 해 잔혹한 징벌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함은 오히려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기원전 52년, 갈리아 전체가 하나의 지도자 아래 통합되었다. 아르베르니족의 젊은 족장 베르킨게토릭스였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만난 가장 강력한 적이었다. 그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전략가였다. 그는 로마군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초토화 전술을 사용했고, 갈리아 부족들을 하나로 묶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게르고비아 공성전에서 카이사르는 생애 처음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그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갈리아 반란은 더욱 거세졌다. 심지어 로마의 가장 충실한 동맹이었던 아이두이족마저 반란에 가담했다. 카이사르의 정치적 생명이 위태로웠다. 로마에서 그의 적들, 특히 보수파 원로원 의원들은 그를 전쟁 범죄로 기소하려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 갈리아에서 패배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단 한 번의 승부에서 모든 것을 역전시켰다. 알레시아 공성전이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요새로 후퇴했고, 카이사르는 그를 포위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포위전이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알레시아 주변에 이중 포위선을 구축했다. 안쪽 포위선은 베르킨게토릭스의 군대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바깥쪽 포위선은 외부에서 오는 갈리아 구원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총 30킬로미터에 달하는 참호, 방벽, 함정을 건설했다. 이는 고대 공학의 걸작이었다.
구원군이 도착했을 때, 카이사르는 양면에서 공격받는 상황에 처했다. 알레시아 내부의 베르킨게토릭스 군대와 외부의 대규모 갈리아 연합군 사이에 끼인 것이다. 전투는 며칠 동안 치열하게 벌어졌다. 카이사르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결정적 순간에 직접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전장에 나타나 병사들을 독려했다. 결국 로마군의 훈련과 조직력이 승리했다. 구원군은 패주했고, 베르킨게토릭스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갈리아의 영웅은 카이사르의 발 앞에 무기를 던졌고, 6년 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서 전시된 뒤 처형되었다.
알레시아의 승리로 갈리아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다음 2년간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로마의 지배는 확고해졌다. 카이사르는 약탈과 전리품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그의 군단은 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이 군사력과 부, 그리고 명성이 그가 로마로 돌아가 내전을 일으키고 독재자가 되는 기반이 되었다. 갈리아 전쟁은 로마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제국을 탄생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카이사르의 업적을 평가할 때 그 대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군대가 300만 명과 싸워 100만 명을 죽이고 100만 명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 숫자가 과장되었다고 보지만, 그럼에도 갈리아 전쟁의 인명 피해는 엄청났다. 카이사르는 승리를 위해 때로 잔혹한 방법을 사용했다. 기원전 55년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을 학살했을 때, 로마의 카토는 카이사르를 게르만족에게 넘겨 재판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세기 일부 학자들은 카이사르의 행위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기도 한다.
또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정확한 역사 기록으로 여겨졌지만, 20세기 들어 학자들은 그것이 치밀하게 계산된 선전물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43만 명의 갈리아군과 싸웠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 불가능한 규모다. 그는 또한 헬베티족의 인구 조사가 그리스어로 된 석판에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비현실적이다. 역사가 데이비드 헤니지는 카이사르의 수치들이 정치적 효과를 위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리아 전쟁의 역사적 중요성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정복은 거의 5세기에 걸친 로마의 지배를 가져왔고, 갈리아를 로마 문명권으로 통합시켰다. 라틴어는 이 지역에 뿌리내려 결국 프랑스어로 진화했다. 로마의 도로, 도시, 법률 체계가 갈리아에 이식되었고, 이것은 중세와 근대 유럽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원정은 비록 영구적 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100년 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정복을 위한 정찰이 되었다. 갈리아의 정복은 로마 제국의 서북 유럽 확장을 가능하게 했다.
카이사르 자신에게 갈리아 전쟁은 정치적 변신의 무대였다. 기원전 59년, 그는 군사적 명성이 전혀 없는 중년의 정치인이었다. 빚에 허덕이고 정적들의 위협에 시달리던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8년 만에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가 얻은 부와 군사력, 그리고 무엇보다 명성은 그가 루비콘 강을 건너 내전을 시작하고 결국 독재자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갈리아에서의 승리 없이는 카이사르의 권력 장악도, 로마 공화정의 종말도, 아우구스투스의 제국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갈리아 정복은 한 남자의 야심이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사례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전쟁을 시작했지만, 그 결과는 그 자신의 삶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수백만 명의 갈리아인들이 죽거나 노예가 되었고, 켈트 문명은 로마화되었으며, 유럽의 지도가 다시 그려졌다. 공화정은 무너지고 제국이 탄생했다. 역사는 때로 개인의 결단에 의해 극적으로 전환되며,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그 가장 명확한 사례 중 하나다. 그것은 정복의 이야기이자 야심의 이야기이며,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집어삼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 남자의 정치적 계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