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18년 봄, 스물아홉 살의 청년 장군 한니발 바르카는 히스파니아 카르타고 노바에서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그의 눈앞에는 전례 없는 원정이 펼쳐져 있었다. 로마를 향한 직선 거리는 해로로 가면 훨씬 짧았지만, 바다는 이미 로마의 것이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잃었고, 해상 패권마저 빼앗겼다. 그러므로 한니발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고, 론 강을 건너며, 알프스를 돌파하여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는 것. 군사 역사상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이 대담한 계획은 단순한 전술적 결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 하밀카르로부터 물려받은 로마에 대한 복수의 맹세이자, 카르타고의 자존심을 건 필사적인 도전이었다. 아홉 살 때 한니발은 아버지 앞에서 제단에 손을 얹고 맹세했다—결코 로마의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이제 그 맹세를 실행할 때가 왔다.
한니발이 이끈 군대의 규모에 대해서는 고대 사료들이 제각각 다른 숫자를 제시한다. 폴리비우스는 보병 9만 명과 기병 1만 2천 명, 그리고 37마리의 코끼리를 기록했다. 리비우스는 이보다 약간 적은 숫자를 제시했다. 하지만 정확한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이 군대의 구성이었다. 리비아 출신의 중무장 보병, 이베리아 반도의 경보병과 투창병, 누미디아의 경기병, 그리고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까지. 한니발의 군대는 지중해 전역에서 모인 용병들의 집합체였고,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오직 지휘관에 대한 신뢰와 전리품에 대한 기대뿐이었다. 이런 다국적 용병 부대를 이끌고 로마 제국의 심장부를 공격한다는 발상 자체가 상식을 벗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 불가능한 모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로마는 히스파니아의 카르타고 동맹 도시 사군툼을 공격했고, 한니발은 이에 응수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여정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피레네를 넘는 과정에서 이미 산악 부족들의 저항에 부딪혔고, 론 강을 건널 때는 갈리아 부족들과 충돌해야 했다. 한니발은 뗏목과 가죽 배를 동원해 코끼리를 포함한 전군을 강 건너로 옮겼는데, 이 과정만 해도 며칠이 걸렸다. 그러나 진짜 시련은 알프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알프스 횡단은 전쟁의 서막을 여는 동시에 한니발이라는 인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산악 부족들의 매복과 산사태, 그리고 무엇보다 눈과 추위가 카르타고 군을 괴롭혔다. 폴리비우스는 알프스를 넘는 데 15일이 걸렸다고 기록했고, 리비우스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와 짐승이 죽었다고 전한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눈 덮인 절벽길을 지날 때였다. 길이 좁아 행렬이 늘어서면서 산악 부족들의 돌팔매와 바위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많은 병사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고, 코끼리들도 공포에 질려 통제가 불가능해졌다. 어느 구간에서는 바위 낙하로 길이 막혀 한니발은 병사들에게 식초로 바위를 가열한 뒤 깨뜨리는 방법을 쓰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탈리아 북부 평원에 도착했을 때 한니발의 군대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있었다. 보병 2만 명과 기병 6천 명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왜냐하면 한니발은 단순히 로마를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로마의 동맹 체제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흩어진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이탈시켜 로마를 고립시키고, 결국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 이를 위해서는 로마군을 격파하여 로마의 무적 신화를 깨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기회는 곧 찾아왔다.
트레비아 강 전투는 한니발의 전술적 천재성을 처음으로 입증한 순간이었다. 기원전 218년 12월, 혹독한 추위 속에서 로마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는 한니발을 과소평가했다. 그는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대 스키피오의 아버지)가 부상으로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독으로 승리를 거머쥐고 싶어 했다. 한니발은 이 조급함을 정확히 간파했다. 12월의 어느 추운 새벽, 그는 자신의 동생 마고와 함께 정교한 함정을 준비했다. 소규모 누미디아 기병대를 로마 진영 가까이 보내 도발했고, 예상대로 롱구스는 전군을 이끌고 추격에 나섰다. 로마 병사들은 아침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얼어붙은 트레비아 강물을 건너야 했다. 물은 허리까지 차올랐고, 병사들의 손은 너무 얼어 검을 제대로 쥘 수도 없었다.
강 건너편에서는 카르타고군이 모닥불을 쬐며 따뜻하게 몸을 녹이고 아침 식사까지 마친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처음에는 로마군이 우세한 듯 보였다. 로마의 중장보병은 여전히 강력했고, 중앙에서는 카르타고 보병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미 승부수를 던져놓은 상태였다. 전투가 한창일 때, 마고가 이끄는 2천 명의 정예 부대가 강변의 숲과 관목 뒤에서 튀어나와 로마군의 후방을 강타했다. 동시에 한니발의 기병이 로마 기병을 격파하고 양 측면을 포위했다. 로마군은 삼면에서 공격받았고, 뒤로는 얼어붙은 강물만이 있었다. 공황이 일었다. 로마군 4만 명 중 겨우 1만 명만이 중앙 돌파에 성공해 플라첸티아로 탈출했다. 나머지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병사들도 퇴각하며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었다.
트레비아의 충격이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술렁였지만, 아직 이것은 변방에서의 패배일 뿐이었다. 진짜 위기는 다음 해에 찾아왔다. 기원전 217년 봄, 한니발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에트루리아로 진격했다. 이번에도 그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경로를 택했다. 아르노 강 유역의 늪지대를 통과하기로 한 것이다. 이 길은 봄철 홍수로 물에 잠겨 있었고,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곳이었다. 로마군은 한니발이 감히 이 길을 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한니발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나흘 밤낮을 군대는 물에 잠긴 채 행군했다. 병사들은 죽은 말과 짐승들의 시체 위에서 잠을 청했다. 한니발 자신은 남은 한 마리의 코끼리 등에 올라타 있었지만, 습기와 더러운 물 때문에 한쪽 눈에 심각한 감염이 생겼다. 고통은 극심했지만 그는 치료받을 시간조차 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늪을 빠져나왔을 때 군대의 사기는 바닥이었지만, 한니발은 이들에게 곧 풍요로운 에트루리아의 평원이 펼쳐질 것이며, 그곳에서 로마의 피를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지켜졌다.
에트루리아에 도착한 한니발은 의도적으로 로마군을 도발했다. 그는 트라시메네 호수 근처의 농장들을 약탈하며 불을 질렀다. 새로 부임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강경파 정치인으로, 적을 즉시 격멸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한니발을 추격하며 호숫가의 좁은 길을 따라 행군했다. 기원전 217년 6월 21일 이른 아침, 짙은 안개가 호수를 뒤덮었다. 로마군은 호수와 산 사이의 좁은 길을 긴 행렬로 늘어서 나아갔다. 주변의 언덕은 숲으로 덮여 있었고, 안개 때문에 시야는 거의 확보되지 않았다.
한니발은 이 지형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전날 밤 군대를 주변 언덕에 배치해 두었다. 리비아 중보병은 로마군이 지나갈 길의 출구를, 갈리아와 이베리아 보병은 언덕 비탈에, 경보병과 기병은 입구 쪽에 숨어 있었다. 로마군의 선두가 한참 전진했을 때 한니발이 신호를 보냈다. 순간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고, 카르타고군이 언덕에서 쏟아져 내려왔다. 로마군은 완전히 불의를 당했다. 전투 대형을 갖출 틈도 없이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많은 이들이 공황 속에서 호수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플라미니우스는 필사적으로 병사들을 결집시키려 했지만, 인수브리아 갈리아 전사의 창에 찔려 전사했다. 그의 시체는 안개와 혼란 속에서 발견조차 되지 않았다.
학살은 세 시간 만에 끝났다. 1만 5천 명의 로마 병사가 호숫가에 쓰러져 있었다. 또 다른 1만 5천 명은 포로가 되었다. 한니발의 손실은 1천 5백 명에 불과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틀 후 일어난 일이었다. 전투 소식을 모르고 오던 4천 명의 로마 기병대가 한니발의 누미디아 기병에게 포위되어 전멸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도시는 공포에 휩싸였다. 법무관이 광장에 나와 외쳤다. "우리는 큰 전투에서 졌다." 구체적인 내용도, 집정관의 생사도 밝히지 않은 채. 며칠 동안 로마 거리에는 통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여성들은 신전으로 몰려가 머리를 풀어헤치며 신들에게 자비를 구했다.
로마의 대응은 전통적이면서도 예측 가능했다. 독재관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임명되었고, 그는 한니발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는 지연 전술을 펼쳤다. 한니발이 이동하면 따라가되 전투는 피하고, 식량 공급을 차단하며, 시간을 끌었다. 파비우스는 이미 늙은 정치인으로,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보다는 공화국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믿었다. 그는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로 내려가 캄파니아 평원을 약탈하도록 내버려두면서도 결코 결전을 벌이지 않았다. 한때 한니발이 좁은 계곡에 갇혔을 때도, 한니발은 소 수천 마리의 뿔에 횃불을 달아 밤중에 풀어놓는 기발한 술책으로 포위를 뚫고 빠져나갔다.
이 전략은 군사적으로는 합리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재앙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적이 이탈리아 땅을 유린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싸우지 않는 독재관을 비난했다. '지연자(Cunctator)'라는 별명은 처음에는 조롱이었다. 젊은 장교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파비우스의 전략을 비겁함이라고 비난했다. 로마는 정면승부로 모든 전쟁을 이겨온 나라였다. 도망치고 숨는 것은 로마의 방식이 아니었다. 파비우스의 임기가 끝나자 로마는 다시 공세적인 전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앙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216년, 로마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두 명의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임명되었다. 파울루스는 보수적이고 신중한 귀족이었고, 바로는 공격적이고 대중적인 평민 출신이었다. 원로원은 이들에게 8개 군단을 주었다—보통 로마가 동원하는 군단 수의 두 배였다. 보병 약 8만 명과 기병 6천 명. 이것은 로마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대였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한니발을 끝장내라.
두 집정관은 한니발을 추격하여 아풀리아 지방까지 따라갔다. 한니발은 작은 마을 칸나에 근처에서 로마군을 기다렸다. 그는 이곳을 신중히 선택했다. 넓고 평탄한 평원이어서 로마의 수적 우세가 큰 장점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그의 기병이 기동할 공간도 충분했다. 8월 1일, 두 군대가 오판토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로마 관습에 따라 두 집정관은 하루씩 교대로 지휘권을 행사했다. 파울루스는 신중했지만, 바로는 공격을 원했다. 8월 2일은 바로의 지휘일이었다.
이른 아침, 로마군이 진영에서 나와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그들의 배치는 전통적이었다. 중앙에 중장보병 레기온을 밀집 대형으로 배치하고, 양 날개에 기병을 두었다. 하지만 로마는 병력이 워낙 많아서 중앙 대형의 정면 폭을 좁히고 종심을 깊게 만들었다. 이것은 중앙 돌파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질량과 운동량으로 적의 중앙을 뚫어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파울루스는 이 배치를 우려했지만, 지휘권은 바로에게 있었다.
한니발은 이 배치를 지켜보며 미소 지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독특한 형태로 배치했다. 중앙에는 갈리아와 이베리아 보병 약 2만 명을 두었는데, 이들을 로마군 쪽으로 볼록하게 돌출시켰다. 초승달 모양이었다. 이 중앙부의 양옆, 약간 뒤쪽으로 물러서서는 리비아 중보병 1만 명을 두 개의 밀집 대형으로 배치했다. 이들은 한니발의 가장 정예 병력이었고, 이전 전투에서 노획한 로마식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좌익에는 갈리아와 이베리아 중기병 6천 명을, 우익에는 누미디아 경기병 4천 명을 배치했다. 한니발은 중앙에서 직접 지휘를 맡았고, 동생 마고와 하스드루발은 각각 좌우익을 맡았다.
전투는 기병전으로 시작되었다. 좌익에서 하스드루발의 중기병이 로마 기병과 충돌했다. 숫자는 비슷했지만, 갈리아와 이베리아 기병들의 백병전 능력이 우세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도보로 싸우기까지 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 기병은 무너졌고, 살아남은 이들은 도망쳤다. 하스드루발은 즉시 추격하지 않고 전장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 동맹군 기병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의 기병이 등 뒤에 나타나자 로마 동맹군 기병도 무너졌다. 이제 전장의 기병은 모두 한니발의 것이었다.
중앙에서는 로마의 중장보병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8만 명의 병사가 일제히 움직이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땅이 울렸고, 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갈리아와 이베리아 보병들은 로마군의 압력을 받아 서서히 밀려났다. 처음에는 서서히, 그다음에는 더 빠르게. 초승달의 볼록한 부분이 점점 평평해지더니, 마침내 안쪽으로 오목하게 들어가기 시작했다. 로마 병사들은 승리를 확신했다. 적의 중앙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은 더욱 세게 밀어붙였다. 로마 대형의 정면 폭은 점점 좁아졌고, 병사들은 더욱 빽빽이 들어찼다.
이것이 바로 한니발이 원한 것이었다. 갈리아와 이베리아 병사들은 후퇴하면서도 대형을 유지했다. 그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로마군은 점점 더 깊숙이 카르타고 진영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양옆에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던 리비아 중보병이 있었다.
한니발이 신호를 보냈다. 양쪽의 리비아 중보병이 일제히 90도 안쪽으로 회전했다. 그리고 로마 대형의 양 측면을 강타했다. 로마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혼란에 빠졌다. 그들은 앞만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더 나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의 기병이 로마군의 후방에 나타난 것이다. 이제 로마군 8만 명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앞에서는 갈리아와 이베리아 보병이, 양옆에서는 리비아 중보병이, 뒤에서는 기병이 공격했다.
이때부터 전투는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 되었다. 로마 병사들은 너무 빽빽이 모여 있어서 팔을 들어 검을 휘두를 공간조차 없었다. 숫자의 우세는 이제 저주가 되었다. 뒤쪽의 병사들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지도 못한 채 압사당했다. 앞쪽의 병사들은 사방에서 칼과 창에 찔렸다. 탈출구는 없었다. 리비우스는 끔찍한 장면을 기록했다—"어떤 이들은 다리 힘줄이 잘린 채 살아 있었고, 목과 목구멍을 드러내며 정복자들에게 남은 피를 마시게 하라고 애원했다. 또 어떤 이들은 스스로 판 구덩이에 머리를 묻은 채 발견되었다. 그들은 흙을 얼굴 위에 덮어 숨을 막은 것이었다." 여름 햇살 아래에서 학살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집정관 파울루스는 부상을 입고서도 계속 싸우다가 전사했다. 바로는 소수의 기병과 함께 간신히 탈출했지만, 그의 명성은 영원히 실추되었다.
해가 질 무렵, 칸나에 평원은 시체로 뒤덮였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로마군 사상자를 5만에서 7만 명 사이로 추정하며, 폴리비우스는 7만 명이, 리비우스는 5만 5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약 1만 명이 포로가 되었고, 겨우 1만 4천 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이는 로마 역사상 단 하루에 가장 많은 시민이 죽은 날이었다. 18세에서 50세 사이 로마 남성의 20퍼센트가 칸나에에서 죽었다. 80명의 원로원 의원이 전사했다—원로원 전체 의원 수의 거의 3분의 1이었다. 귀족 가문 중 희생자를 내지 않은 집안이 거의 없었다. 한니발의 손실은 약 6천 명이었고, 대부분은 중앙에서 로마군의 압력을 받던 갈리아 병사들이었다.
전투가 끝나고 한니발은 전장을 둘러보았다. 그의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다가와 말했다. "주군, 이제 로마로 진격하십시오. 닷새 안에 우리는 카피톨리움에서 연회를 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기병을 이끌고 먼저 가겠습니다. 로마인들이 우리가 온 것을 보기도 전에 우리가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니발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로마를 포위할 공성 장비가 없었고, 병사들은 지쳐 있었다. 마하르발은 나중에 한탄했다고 한다. "당신은 이기는 법은 알지만, 승리를 활용하는 법은 모르는군요(Vincere scis, Hannibal, victoria uti nescis)."
칸나에의 여파는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도시는 공포에 휩싸였다. 거리에서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고, 많은 이들이 자살했다. 원로원은 긴급 회의를 열었지만, 의원 수가 정족수를 채우기도 어려웠다. 많은 이들이 로마의 멸망이 임박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원로원은 놀라운 결의를 보였다. 그들은 평화 협상을 거부했다. 살아남은 집정관 바로를 환영하며 "국가를 포기하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어린 소년들과 노예 8천 명까지 징집하여 새로운 군대를 편성했다. 심지어 채무자들과 범죄자들까지 병사로 받아들였다. 로마는 싸울 것이었다. 원로원은 칸나에에서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의 몸값 지불도 거부했다—그들이 살아서 포로가 된 것 자체가 치욕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로마의 동맹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칸나에 직후, 캄파니아의 대도시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다. 카푸아는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고, 그 항구와 자원은 한니발의 전쟁 수행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남부의 브루티움과 루카니아 지역의 도시들도 하나둘 카르타고 편으로 넘어갔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는 로마 동맹파가 암살당하고 친카르타고 정권이 들어섰다. 심지어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까지 한니발과 동맹 조약을 맺었다. 로마 제국의 동맹 체제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한니발의 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는 항복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의 라틴 동맹 도시들 대부분이 로마에 충성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칸나에의 공포를 목격했지만, 수백 년간 로마와 맺은 유대를 쉽게 버리지 않았다. 로마의 진정한 힘은 바로 여기서 드러났다. 패배하고도 일어설 수 있는 힘, 한 군대가 전멸해도 다른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로마와 카르타고의 근본적 차이였다.
여기서 한니발의 딜레마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로마를 포위할 만한 공성 장비도, 병력도 없었다. 칸나에에서 이긴 군대는 여전히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로마의 성벽은 견고했고,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방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미미했다.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의 성공을 시기했고, 한니발 가문의 정적들은 그에게 원군을 보내기를 거부했다. 카르타고는 상업 국가로서 히스파니아의 은광 개발과 해상 무역에 더 관심이 있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동맹 도시들을 지키고, 식량을 약탈하며, 로마가 굴복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로마는 한니발의 이런 약점을 정확히 간파했다. 칸나에 이후, 로마는 더 이상 한니발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이 공식 전략이 되었다. 한니발이 가는 곳마다 로마군이 따라갔지만, 결코 결전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 로마는 한니발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그를 따르는 동맹 도시들을 하나씩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로마는 전략적 천재성을 발휘하여 다른 전선들을 열었다. 전쟁은 더 이상 이탈리아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히스파니아에서 로마는 공세를 취했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그의 동생 그나이우스는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영토를 공격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발이 묶여 있었고, 카르타고는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워야 했다. 처음 몇 년간 스키피오 형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기원전 211년, 그들은 서로 다른 전투에서 전사했다. 히스파니아는 다시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전사한 스키피오의 아들, 스물다섯 살의 젊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히스파니아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아직 정규 관직 경험도 없는 청년이었다.
젊은 스키피오는 단순한 귀족 청년이 아니었다. 그는 칸나에에서 살아남았고, 그곳에서 한니발의 전술을 직접 경험했다. 그는 한니발을 연구했고, 적에게서 배웠다. 기원전 209년, 그는 대담한 작전을 실행했다.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수도이자 한니발의 고향인 카르타고 노바(오늘날의 카르타헤나)를 급습한 것이다. 도시는 바다와 늪으로 둘러싸여 있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현지 어부들로부터 썰물 때 늪을 걸어서 건널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정면 공격으로 적의 주의를 끌면서, 선발대를 늪을 통해 침투시켰다. 카르타고 노바는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 이 승리로 스키피오는 막대한 전쟁 물자와 인질들을 확보했고, 한니발의 히스파니아 보급선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더 중요한 것은 스키피오가 포로들을 관대하게 대우하여 이베리아 부족들의 마음을 얻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시칠리아에서도 전쟁은 치열했다. 시라쿠사는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했다. 이 도시를 방어하는 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명인 아르키메데스였다. 그는 놀라운 무기들을 발명했다—거대한 크레인으로 로마 군함을 들어올려 뒤집고, 거울을 이용해 햇빛을 모아 배에 불을 붙이고, 정교한 투석기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격퇴했다. 로마 장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2년 넘게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기원전 212년, 마침내 시라쿠사가 함락되었을 때, 혼란 속에서 로마 병사가 아르키메데스를 죽였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모래 위에 수학 도형을 그리고 있었고, 병사에게 "내 원을 밟지 말라"고 말했다가 칼에 맞았다고 한다. 마르켈루스는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지지만, 시라쿠사는 다시 로마의 것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은 점점 더 수세에 몰렸다. 로마는 그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동맹 도시들을 하나씩 되찾아갔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카푸아의 운명이었다. 기원전 212년부터 로마군은 카푸아를 포위했다. 한니발은 여러 차례 구원을 시도했지만, 로마군은 이중 포위선을 구축하여 방어했다. 필사적으로 한니발은 극적인 시도를 했다—로마 성문 3킬로미터 밖까지 진격한 것이다. 로마를 위협하여 카푸아 포위군을 철수시키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로마는 움직이지 않았다. 원로원은 평온하게 회의를 계속했고, 카푸아를 포위한 군대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니발은 로마가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211년, 카푸아는 항복했다. 로마의 복수는 가혹했다. 도시의 원로원 의원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시민들은 노예로 팔렸다. 카푸아의 자치권은 박탈되었고, 땅은 몰수되었다. 이것은 다른 동맹 도시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로마를 배신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나둘씩 다른 도시들도 다시 로마에게 복종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동맹망은 붕괴되고 있었다.
이 암울한 상황에서 한니발에게 희망의 빛이 비쳤다. 카르타고가 마침내 본격적인 지원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의 동생 하스드루발이 대군을 이끌고 히스파니아에서 출발했다. 그는 형이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을 따라 피레네를 넘고, 갈리아를 지나, 알프스를 횡단했다. 기원전 207년 봄, 하스드루발은 이탈리아 북부에 도착했다. 그의 군대는 약 3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만약 이 병력이 한니발과 합류한다면 전쟁의 판도는 다시 뒤집힐 수 있었다.
로마는 이 위기를 인식하고 있었다. 집정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남부에서 한니발을 견제하고 있었고, 다른 집정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는 북부에서 하스드루발을 막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게 전령을 보내 합류 지점을 알렸지만, 이 전령들은 로마군에게 붙잡혔다. 네로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그는 7천 명의 정예 병력을 선발하여 한니발의 감시를 피해 북쪽으로 급행군했다. 불과 7일 만에 약 400킬로미터를 강행군하여 리비우스의 군대와 합류했다.
메타우루스 강에서 두 군대가 충돌했다. 하스드루발은 자신이 두 로마 군단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전투가 시작된 후에야 깨달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로마군의 숫자와 신선한 병력에 압도당했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고, 해질 무렵 카르타고군은 무너졌다. 하스드루발은 도망치지 않았다. 폴리비우스는 기록한다—그는 자신의 형에게 수치를 더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아버지 하밀카르의 위대함에 합당하게 행동하기 위해 로마군 속으로 돌진하여 싸우다 전사했다고.
로마군은 하스드루발의 목을 베었다. 네로는 다시 급행군하여 남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하스드루발의 머리를 한니발의 진영 앞에 던졌다. 한니발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폴리비우스는 기록한다—한니발이 "카르타고의 운명이 보인다"고 말했다고. 이제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원군은 오지 않을 것이고, 동맹들은 무너졌으며, 시간은 적의 편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 브루티움 지방으로 물러나 그곳에서 4년을 더 버텼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존재였고, 로마군은 여전히 그를 직접 공격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은 이미 이탈리아를 떠나 있었다. 진짜 결정적 전투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에서 그는 한니발의 칸나에 전술을 모방하여 카르타고군을 격파했다. 그는 약한 중앙과 강한 양익으로 대형을 짰고, 적의 중앙을 유인한 뒤 양익으로 포위했다. 한니발의 전술이 한니발에게 맞서 사용된 것이다. 이 승리로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로마의 것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해외 영토를 모두 잃었고, 이제 본토만 남았다.
스키피오는 원로원에 대담한 제안을 했다—아프리카 본토를 침공하자는 것이었다. 많은 원로원 의원들은 반대했다. 한니발이 여전히 이탈리아에 있는데 어떻게 아프리카로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주장했다. 한니발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유일한 방법은 카르타고 본토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결국 원로원은 허락했지만, 충분한 병력을 주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자원병과 칸나에의 생존자들로 군대를 편성했다—칸나에의 패배로 불명예를 얻은 병사들에게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준 것이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 상륙했다. 카르타고는 공황에 빠졌다. 수백 년간 카르타고 본토는 전쟁의 공포를 몰랐다. 이제 로마군이 수도 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와 있었다. 카르타고는 누미디아의 왕 시팍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외교에도 능했다. 그는 누미디아의 왕자 마시니사를 설득하여 로마 편으로 끌어들였다. 마시니사는 시팍스의 정적이었고, 왕위를 되찾고 싶어 했다.
기원전 203년, 스키피오는 대평원 전투에서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더 극적인 것은 밤중 기습이었다—스키피오는 시팍스와 카르타고군의 진영을 동시에 불태웠고, 혼란 속에서 수만 명이 죽었다. 시팍스는 포로가 되었고, 마시니사는 누미디아의 왕이 되었다. 카르타고는 이제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원로원은 평화를 구걸했다. 로마는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카르타고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평화 협상 중에 카르타고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그들은 한니발을 소환했다.
15년 만에 한니발은 이탈리아를 떠나야 했다. 떠날 때 그의 병사들은 울었다고 한다. 그들은 그를 따라 알프스를 넘었고, 트레비아와 트라시메네에서 승리했으며, 칸나에에서 역사를 만들었다. 15년간 적국 한가운데서 싸운 그들은 단 한 번도 제대로 패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승리하지 못한 채. 리비우스는 기록한다—한니발이 브루티움 해안에서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바라보며 조국과 적들을 저주했다고. 그는 로마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이루었다.
카르타고에 돌아온 한니발은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원로원은 그를 즉시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패잔병과 급히 징집된 신병들뿐이었다. 평화 협상은 곧 깨졌다. 카르타고가 로마 수송선단을 공격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 이제 두 명의 위대한 장군이 마침내 직접 맞붙을 차례였다.
기원전 202년 가을, 자마 평원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대면했다. 전투 전날, 두 사람은 회담을 가졌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극적인 만남 중 하나였다—시대의 두 천재가, 서로를 존경하면서도 파괴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한니발은 평화를 제안했다. 그는 카르타고가 모든 해외 영토를 포기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거절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은 변했다. 이제 로마는 카르타고의 완전한 항복 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두 군대가 대치했다. 한니발의 군대는 약 4만 5천 명, 스키피오의 군대는 비슷한 숫자였다. 하지만 구성이 달랐다. 한니발은 8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전방에 배치했다. 그 뒤로 세 개의 보병선—첫 번째는 리구리아와 갈리아 용병, 두 번째는 카르타고 시민군과 리비아 병사들, 세 번째는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그의 정예 베테랑들이었다. 양 날개에는 카르타고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을 배치했다. 한니발의 계획은 명확했다—코끼리로 로마 대형을 흐트러뜨리고, 용병들로 적을 소모시킨 뒤, 베테랑들로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술을 연구했기에 대비책을 준비했다. 그는 로마 레기온의 마니플(중대) 사이의 간격을 평소보다 넓게 벌렸다. 코끼리가 돌격하면 이 통로로 빠져나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양 날개에는 이탈리아 동맹군 기병과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는 이제 기병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전투는 코끼리 돌격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스키피오는 나팔수들에게 최대한 큰 소리를 내라고 명령했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놀란 코끼리 중 일부는 방향을 잃고 자기편 전열로 돌진했다. 나머지는 로마 대형의 통로로 들어갔고, 로마 경보병들의 투창 공격을 받았다. 코끼리 작전은 실패했다.
이어서 보병전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전열의 갈리아와 리구리아 용병들이 로마 전열과 충돌했다. 이들은 용맹하게 싸웠지만, 훈련되고 규율 잡힌 로마 레기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무너졌다. 하지만 후퇴하려 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뒤에 있던 카르타고 제2전열이 그들의 퇴각을 가로막은 것이다. 한니발은 패주병들이 자기 전열을 혼란시키는 것을 막으려 했다. 혼란 속에서 카르타고 제1전열과 제2전열 사이에 싸움까지 벌어졌다. 한니발의 용병들은 배신당했다고 느꼈고, 일부는 자기편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한편 양 날개에서는 기병전이 벌어졌다.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이 카르타고 누미디아 기병을 공격했고, 이탈리아 동맹군 기병이 카르타고 기병을 공격했다. 스키피오는 라일리우스에게 명확한 지시를 내렸다—적 기병을 격파한 후 즉시 돌아오라고. 칸나에에서 한니발이 한 것처럼. 카르타고 기병은 무너졌고, 전장을 떠났다. 한니발은 이제 기병 없이 싸워야 했다.
보병전은 계속되었다. 카르타고 제2전열이 로마군과 맞붙었지만, 이들 역시 결국 무너졌다. 이제 한니발의 마지막 카드, 이탈리아 베테랑들의 차례였다. 이들은 15년간 이탈리아에서 싸운 역전의 용사들로, 트레비아와 칸나에의 승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선했고, 전장에서 가장 숙련된 병사들이었다. 스키피오는 잠시 전투를 멈추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는 제2, 제3전열을 전방으로 이동시켜 한 줄로 긴 전선을 만들었다. 두 정예 부대가 마침내 충돌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한동안 승부는 알 수 없었다. 칸나에의 베테랑들은 여전히 강력했고, 한니발의 지휘는 여전히 탁월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이 왔다. 라일리우스와 마시니사의 기병이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한니발의 후방을 공격했다. 칸나에에서 로마군이 당한 것을 이제 카르타고군이 당하게 되었다. 포위되었다. 한니발의 베테랑들은 끝까지 싸웠다. 그들은 후퇴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15년간 무패를 기록한 이 병사들은 자마에서 마지막까지 검을 들었다. 하지만 숫자와 포위의 압박은 견딜 수 없었다.
해질 무렵, 카르타고군은 붕괴했다. 약 2만 명이 전사했고, 2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한니발 자신은 소수의 기병과 함께 간신히 탈출했다. 그는 하드루메툼으로 도망쳤다. 56세의 한니발은 생애 처음으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그는 평생 로마를 이기지 못하고 죽을 운명임을 깨달았다. 스키피오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한니발의 전술을 배웠고, 한니발에게서 이겼다. 그는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았고,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 중 한 명이 되었다.
전쟁은 끝났다. 카르타고는 평화를 간청했고, 로마는 가혹한 조건을 부과했다. 카르타고는 모든 해외 영토를 포기해야 했다—히스파니아,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너머 모든 땅. 전함은 10척만 유지할 수 있었고, 나머지 500척은 모두 불태워졌다. 폴리비우스는 카르타고 시민들이 항구에서 자신들의 전함이 불타는 것을 보며 통곡했다고 기록했다. 막대한 배상금 1만 탈란트(약 300톤의 은)를 50년에 걸쳐 지불해야 했다. 가장 굴욕적인 조건은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카르타고는 독립 국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로마의 보호령이 되었다. 150년간 지중해를 지배했던 해양 제국은 이렇게 몰락했다.
한니발은 살아남았다. 그는 카르타고의 수페테(행정관)로 선출되어 전후 재건을 이끌었다. 놀랍게도 그는 행정가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카르타고의 부패한 과두정을 개혁하고, 세금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 재정을 회복시켰다. 막대한 배상금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혁 덕분에 카르타고는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그의 적들을 만들었다. 카르타고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빼앗은 한니발을 미워했고, 로마는 카르타고가 너무 빠르게 회복하는 것을 경계했다.
기원전 195년, 한니발의 정적들은 로마에 그가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3세와 음모를 꾸민다고 밀고했다. 로마는 한니발의 인도를 요구했다. 한니발은 한밤중에 카르타고를 탈출했다. 그는 다시는 조국을 보지 못했다. 그는 티레로, 그다음엔 에페소스로, 그리고 시리아로 망명했다. 어디를 가든 그는 환대받았다—로마의 적들은 모두 그를 원했다. 안티오코스 대왕은 그를 군사 고문으로 삼았다. 한니발은 왕에게 로마를 공격하라고 조언했다. 이탈리아로 병력을 상륙시키고, 갈리아 부족들을 규합하라고 했다. 하지만 안티오코스는 그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대신 그리스에서 로마와 싸우다가 패배했다.
전쟁이 끝난 후 로마는 평화 조약의 조건 중 하나로 한니발의 인도를 요구했다. 한니발은 다시 도망쳤다. 크레타로, 그다음엔 아르메니아로, 마침내 비티니아로. 그는 늙어가고 있었고, 세상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로마의 그림자는 지중해 전역을 덮었다. 기원전 183년경, 로마는 비티니아 왕 프루시아스에게 압력을 가했다. 한니발을 내놓으라고. 프루시아스는 굴복했다.
로마 사절들이 한니발의 거처를 포위했을 때, 노장군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탈출로를 여러 개 준비해 두었지만, 이번에는 모든 출구가 막혀 있었다. 64세 또는 65세의 한니발은 오래전에 준비해 둔 독약을 꺼냈다. 그는 항상 반지에 독약을 숨겨 두었다고 한다—로마의 포로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 그는 말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인들의 두려움을 끝내주자. 그들은 한 늙은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것조차 참을 수 없으니(Liberemus diuturna cura populum Romanum, quando mortem senis exspectare longum censent)."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프루시아스의 배신을 비난하며 죽었다고 한다. 그는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비티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같은 해, 놀랍게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로마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리테르눔의 자신의 별장에서 반(半)망명 생활 중에 죽었다. 승리의 영웅도 결국 로마 정치의 질투와 음모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정적들의 고발을 받아 재판에 회부되었고, 분노한 채 로마를 떠났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고 한다.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네게 나의 뼈조차 없으리라(Ingrata patria, ne ossa quidem mea habes)." 두 명의 위대한 적수가 같은 해에, 둘 다 조국에서 추방당한 채 죽은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역사적 의미는 단순한 승자와 패자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이 전쟁은 로마를 지중해의 지배자로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전쟁 전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강국이었지만, 전쟁 후 로마는 세계 제국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역설적으로 한니발이라는 실존적 위협이 로마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전쟁은 로마의 군사 시스템을 시험했고, 로마는 그 시험을 통과했다. 더 중요한 것은 로마가 전쟁을 통해 전략적 사고를 배웠다는 점이다.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 스키피오의 간접 접근법, 다중 전선 전략—이 모든 것이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나온 교훈이었다.
로마의 동맹 체제도 전쟁을 통해 시험받고 강화되었다. 많은 동맹들이 배신했지만, 가장 중요한 라틴 동맹들은 충성을 유지했다. 전쟁 후 로마는 배신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했지만, 충성스러웠던 동맹들에게는 보상했다. 이것은 미래의 로마 제국 통치 방식의 기초가 되었다—당근과 채찍, 그리고 무엇보다 일관성. 로마를 배신하면 대가를 치르지만, 충성하면 보호받고 번영할 수 있다는 명확한 메시지였다.
전쟁은 또한 로마의 사회 구조를 변화시켰다. 17년간의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소농들은 황폐해졌다. 많은 농민들이 전쟁터에서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황폐해진 농지로 돌아왔다. 이것은 로마 사회의 근간이었던 소농 계급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대신 전쟁으로 부를 축적한 귀족들이 대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노예 노동에 기반한 라티푼디움(대농장)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것은 나중에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로마 내전의 원인이 되었다. 한니발은 로마를 군사적으로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로마 공화정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군사적 측면에서 전쟁은 로마 군사 시스템의 한계와 강점을 모두 드러냈다. 한니발은 여러 차례 로마의 전통적 전술을 격파했지만, 로마는 배우고 적응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술을 연구하고 모방했다. 로마군의 진정한 강점은 개별 전투에서의 우월성이 아니라 제도의 회복력이었다. 한 군대가 전멸해도 다른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능력, 패배에서 배우고 개선하는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 이것이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었다.
한니발 개인에 대한 평가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계속되어 왔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술가 중 한 명이다. 칸나에 전투는 2천 년이 넘도록 군사 학교에서 연구되는 완벽한 포위섬멸전의 전형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슐리펜 계획도, 영국군의 사막 작전도 칸나에의 원리에서 영감을 받았다. 한니발의 전략적 비전—적의 동맹 체제를 파괴하여 고립시킨다—역시 탁월했다. 그는 로마의 진정한 힘이 군단이 아니라 동맹 체제에 있다는 것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러나 한니발에게는 전략을 완성할 수단이 부족했다.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카르타고는 해양 무역 제국으로, 과두정 상인들이 지배했다. 그들에게 한니발의 모험은 위험한 도박이었고, 성공해도 한니발 가문의 권력만 강화될 뿐이었다. 정치적 질투와 파벌 싸움이 국가 이익보다 우선했다. 만약 카르타고가 한니발에게 충분한 지원을 보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카르타고라는 국가의 본질과 맞지 않았다.
한니발의 또 다른 한계는 공성전 능력의 부족이었다. 고대 전쟁에서 야전의 승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도시를 점령하고 유지할 수 있어야 했다. 한니발은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었지만, 공성 장비와 기술이 부족했다. 그는 카푸아 같은 도시가 스스로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로마 같은 대도시를 공격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이것은 전략적 한계로 이어졌다—그는 로마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니발이 로마라는 적의 본질을 과소평가했을 가능성이다. 로마는 단순한 도시 국가가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수백 년에 걸쳐 구축된 법률, 제도, 동맹 네트워크의 복합체였다. 한 사람의 천재가 아무리 뛰어나도 이런 시스템을 단기간에 무너뜨리기는 어려웠다. 로마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칸나에 이후에도 항복을 거부한 것은 단순한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로마라는 정치 체제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원로원 체제, 시민 정신, 동맹 구조—이 모든 것이 결합하여 놀라운 회복력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의 유산은 영원하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시도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알프스를 넘어 코끼리를 이끌고 온 그 대담함은 전설이 되었다. 15년 동안 적국 한가운데서 버틴 그 인내심은 경이로웠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굴복하지 않은 그 자존심은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했다. 로마인들조차 그를 존경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때 한니발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한니발은 첫 번째로 알렉산더 대왕을, 두 번째로 피로스를 꼽았다. 스키피오가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라고 묻자, 한니발은 "만약 내가 자마에서 당신을 이겼다면, 나를 그들 모두보다 위에 놓았을 것이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승자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킨 대답이었다.
리비우스는 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니발을 공정하게 평가했다. "그는 극한의 더위와 추위를 똑같이 견뎌냈다. 식사는 자연의 필요에 의한 것이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잠은 낮과 밤을 구별하지 않았다—업무 후에 남은 시간만을 쉼에 할당했다... 그는 기병과 보병 중 누가 첫 번째로 전투에 돌입하든 그들 중 선두에 있었고, 마지막으로 전장을 떠났다." 이것은 패배한 적에게 바치는 로마인의 경의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또한 역사의 우연성을 보여준다. 만약 카르타고가 한니발에게 충분한 지원을 보냈다면, 만약 로마가 칸나에 이후 항복했다면, 만약 하스드루발이 메타우루스에서 승리했다면, 세계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로마 제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로마 문명의 유산은 다른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유럽의 언어들은? 서양 법률 체계는?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만약'으로 쓰이지 않는다. 역사는 실제로 일어난 일들로 쓰인다. 그리고 실제로 일어난 것은 로마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 승리는 결코 쉽지 않았고, 그 대가는 엄청났다. 로마는 피로 그 승리를 샀다. 17년간의 전쟁 동안 이탈리아 반도는 황폐화되었다. 수십만 명의 로마 시민과 동맹군이 목숨을 잃었다. 경제는 무너졌고, 사회 구조는 변형되었다. 로마는 승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공화정의 이상들은 침식되었다. 전쟁의 영웅들—스키피오, 파비우스, 마르켈루스—은 막대한 명성과 권력을 얻었다. 이들과 같은 강력한 개인들의 등장은 결국 공화정 시스템의 균형을 깨뜨렸다. 한 세기 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길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한니발은 로마를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로마 공화정의 종말을 앞당겼다.
전쟁은 또한 카르타고의 운명을 봉인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카르타고는 군사적으로 무력화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다시 번영했다. 이것이 오히려 로마의 의심을 샀다. 원로원의 보수파, 특히 대(大) 카토는 연설할 때마다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고 외쳤다. 기원전 149년, 사소한 구실로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3년 후,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도시는 불탔고, 살아남은 5만 명의 시민들은 노예로 팔렸다. 로마는 폐허에 소금을 뿌렸다고 전해진다—다시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한니발의 조국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한니발 자신은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2천 년이 넘도록 대담함과 군사적 천재성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나폴레옹은 알프스를 넘으며 한니발을 떠올렸고, 자신을 한니발과 비교했다. 프로이센의 몰트케는 칸나에를 연구하며 포위섬멸 전략을 발전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은 한니발의 기동전 원칙을 적용했다. 현대의 군사 학교에서는 여전히 칸나에가 필수 교재다. 한니발의 전술과 전략은 시대를 초월한 교훈을 제공한다.
문화적으로도 한니발의 영향은 지속되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고, 바이런은 그를 노래했으며, 무수한 소설과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는 도전자의 상징, 불가능에 맞서는 자의 아이콘이 되었다. 약자가 강자에게 맞서는 모든 이야기에서 한니발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전쟁에서는 졌지만, 기억의 전쟁에서는 이겼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지도에서 지웠지만, 한니발을 역사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돌아볼 때, 우리는 단순한 군사사 이상의 것을 본다. 우리는 권력과 야망, 충성과 배신, 용기와 절망의 이야기를 본다. 우리는 한 개인의 천재성이 어떻게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 동시에 어떻게 제도와 시스템의 힘이 개인의 천재성을 이길 수 있는지를 본다. 우리는 전쟁이 단순히 전장에서만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경제에서, 외교에서, 동맹 관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의지와 인내심에서 치러진다는 것을 배운다.
한니발 바르카는 패배했지만 잊히지 않았다. 그는 알프스를 넘었고, 칸나에에서 불멸의 전투를 지휘했으며, 15년간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싸웠다. 그는 로마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로마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전설이 되었다. 그의 마지막 날들은 비극적이었다—추방되고, 추적당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죽음조차 그의 명성을 지우지 못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살아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군사 학교에서 연구하며, 사람들이 기억한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불멸성일지도 모른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 것. 한니발은 로마를 정복하지 못했지만, 역사를 정복했다. 그는 제국을 무너뜨리지 못했지만,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가장 의미 있는 승리일지도 모른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파괴했지만, 한니발의 이야기를 파괴할 수는 없었다. 그 이야기는 세대를 거쳐 전해져 내려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한 젊은 장군이 불가능에 도전했던, 그리고 거의 성공할 뻔했던 그 놀라운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