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북서부 히사를릭 언덕에는 3천 년 넘게 묻혀 있던 비밀이 잠들어 있었다. 1868년 독일의 사업가이자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열정과 확신으로 무장하고 이곳의 땅을 파내리기 시작했을 때, 대부분의 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순수한 허구로 치부했다. 절세미녀 헬레네, 천 척의 배를 출항시킨 사랑, 영웅들의 장엄한 결투, 거대한 목마—이 모든 것이 시인의 상상력이 빚어낸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겨졌다. 이는 무리가 아니었다. 그 당시까지 누구도 고대 트로이의 실제 위치를 알지 못했고, 기원전 12세기의 사건을 증명할 물리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슐리만의 삽이 흙을 헤치며 드러낸 성벽과 도시의 흔적들은 학계에 충격을 안겼다. 트로이는 실재했다. 문제는 이제 달라졌다. 트로이가 존재했다면, 그곳에서 전쟁도 벌어졌을까? 호메로스가 노래한 영광과 비극은 단순한 시적 창작인가, 아니면 잊혀진 역사의 메아리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트로이라는 도시의 실체를 이해해야 한다. 히사를릭 언덕의 발굴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수천 년에 걸쳐 9개의 층위로 쌓인 문명의 지층을 드러냈다. 각 층위는 서로 다른 시대의 트로이를 대표하며, 그중 트로이 6세와 7세는 기원전 1300년에서 1180년 사이에 존재했던 도시들로 호메로스가 노래한 전쟁의 시기와 겹친다. 슐리만은 처음에 기원전 2500년경의 트로이 2세를 프리아모스 왕의 트로이로 잘못 판단했으며, 발굴 과정에서 황금 보물들을 발견하고는 이를 '프리아모스의 보물'이라 명명했다. 그의 열정은 찬사받을 만했지만, 고고학적 방법론은 조악했다. 그는 깊이 파내려가는 과정에서 실제로 중요한 층위들을 파괴해버렸다. 이후의 연구들은 더 늦은 시기의 층위들, 특히 트로이 6세와 7세에 주목하게 되었다.
1930년대 미국 고고학자 칼 블레겐이 이끈 체계적인 발굴은 슐리만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블레겐은 트로이 7a가 기원전 1250-1180년경에 폭력적으로 파괴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만프레트 코르프만의 발굴에서 일어났다. 코르프만과 그의 후계자인 뤼스템 아슬란이 이끈 국제 팀은 1988년부터 수십 년에 걸쳐 이 유적지를 재조사했다. 1990년대에 발견된 하부 도시의 방어 구조물들은 트로이가 성채 너머로 넓게 펼쳐진 대도시였음을 증명했다. 자기계 탐사와 여러 차례의 발굴을 통해 13세기경 U자 형태의 인상적인 방어 시설이 하부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나무 방책과 약 3미터 너비의 참호가 발견되었는데, 이 참호는 적의 전차를 막기 위한 함정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발견들은 트로이가 단순한 작은 성채가 아니라 최대 5천에서 1만 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던 지역적 강국이었음을 시사한다.
트로이의 지리적 위치는 그 중요성을 더욱 설명해준다. 이 도시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에게해에서 흑해로,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남동유럽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제하는 이곳은 청동기 시대 후기의 국제 무역 네트워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아프가니스탄산 주석—청동 제작에 필수적인—과 중앙아시아 초원의 말들이 트로이를 거쳐 갔다는 증거가 있다. 미케네 문명이 해상 무역에 크게 의존했던 시기에,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를 둘러싼 경쟁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트로이는 단순히 호메로스의 시에 나오는 낭만적인 배경이 아니라, 당대의 국제 정치와 경제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도시 국가였다.
고고학적 증거는 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전쟁의 흔적을 드러낸다. 트로이 7a 층위에서 발견된 파괴의 흔적들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폭력적 공격의 결과를 보여준다. 화재로 그을린 건물들, 급히 매장된 인골들,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대량의 투석용 돌들이다. 궁전 성벽 밖 작은 구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된 점토와 강돌로 만들어진 투석들은 격렬한 전투를 증언한다. 성공적으로 방어에 성공한 도시라면 이러한 무기들을 회수하여 보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버려진 채로 남겨진 투석들은 공격자의 승리를 암시한다. 화살촉들도 함께 발견되었고, 이는 근접 전투가 벌어졌음을 나타낸다.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방어자들이 최후의 저항을 펼친 전장"으로 해석한다.
2024년과 2025년의 최신 발굴은 더욱 극적인 증거들을 추가했다. 청동기 시대 후기의 파괴 층위에 집중한 발굴에서 수천 개의 3500년 된 투석과 무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단순한 소규모 충돌이 아닌 대규모 공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트로이 6세의 거대한 성벽에는 균열이 있어 기원전 1300년경 지진이 도시를 타격했을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그 이후 재건된 트로이 7a는 명백히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물질문화의 연속성은 같은 주민들이 도시를 재건했음을 보여주지만, 도시의 성격은 변화했다. 성채는 더 붐볐고 외부 수입품은 감소했으며, 대형 저장 항아리들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포위 공격에 대비한 식량 저장을 암시한다. 이러한 세부사항들은 트로이가 공격당하기 전 이미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고학적 증거만으로는 불완전한 퍼즐이다. 여기에 히타이트 제국의 문헌 기록이 결정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터키 중부의 하투샤에서 발굴된 히타이트 제국의 점토판 문서들은 "윌루사"라는 도시를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1924년 스위스의 아시리아학자 에밀 포러가 처음으로 윌루사와 트로이의 동일성을 제안했을 때, 그의 주장은 언어학적 유사성에 기반했다. "윌루사"는 그리스어 "윌리오스"와, 관련 지명 "타루이사"는 "트로이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후 수십 년간의 히타이트 지리 연구는 이러한 동일시에 추가적인 근거를 제공했고,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인다. 물론 확고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증거의 무게는 압도적으로 이 해석을 지지한다.
히타이트 문서는 더 나아가 "아히야와"라는 세력을 언급하는데, 많은 학자들이 이를 미케네 그리스인들로 해석한다. 포러는 이 용어가 호메로스의 "아카이오이"(아카이아인,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시적 명칭)에 해당한다고 제안했다. 소아시아 서부 해안, 특히 밀레토스와 에페소스 지역에서 발견된 미케네 도기와 그 모방품들은 이 지역에 미케네인들의 존재와 영향력이 실재했음을 증명한다. 밀레토스는 기원전 1450년경부터 미케네적 성격을 띤 정착지였으며, 12세기까지 상당한 규모의 번영하는 미케네 중심지로 기능했다. 보드룸 근처 뮈스게비의 무덤은 미케네식 매장 방식을 보여준다. 히타이트 문서에 따르면 아히야와는 소아시아가 아닌 해외, 즉 미케네 본토나 에게해 섬들에 기반을 둔 세력이었다. 이들과 히타이트 사이에 윌루사를 둘러싼 분쟁이 있었다는 기록은 그리스인들이 실제로 트로이와 군사적으로 충돌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문서는 기원전 1280년경 윌루사의 왕 알락산두와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 2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은 21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알락산두라는 이름이 23번 등장한다. 이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 알렉산드로스와 명백한 언어적 연관성을 지니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또 다른 이름이 알렉산드로스였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우연의 일치를 넘어선다. 조약에서 무와탈리는 알락산두가 정규 왕위 계승을 통하지 않고 권력을 얻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데, 이는 그가 혈통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왕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알락산두가 그리스 출신 지배자였을 가능성의 증거로 해석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조약을 보증하는 신들 중 하나로 "아팔리우나스"가 언급된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 신이 그리스의 아폴론에 해당한다는 데 동의하며, 이는 윌루사에 그리스 문화적 영향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알락산두를 파리스와 직접 동일시하는 것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히타이트 문서는 알락산두를 명백히 왕으로 기록하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파리스는 결코 왕이 아니었다. 그는 프리아모스의 아들이자 헥토르의 동생으로, 왕위 계승 서열에서도 뒤처져 있었다. 또한 연대기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알락산두는 기원전 1280년경에 활동했지만, 트로이 7a의 파괴는 기원전 1180년경으로 추정되어 약 100년의 시간 차이가 있다. 이는 알락산두와 파리스가 동일 인물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있다. 알락산두의 시대는 트로이 6세 말기에 해당하며, 이 도시는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만약 그리스 전통이 여러 세대에 걸친 사건들을 압축했다면, 알락산두라는 역사적 인물이 파리스라는 전설적 인물로 변형되었을 수 있다. 구전 전승은 종종 시간을 압축하고 여러 인물을 하나로 합친다.
히타이트 문헌이 기록한 여러 차례의 충돌은 단일한 "트로이 전쟁"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여러 전쟁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기원전 1400년경 아수와 연맹의 반란에서 윌루사는 히타이트 제국에 저항한 22개 국가 중 하나였다.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히타이트 왕 투트할리야가 획득한 전리품 중에는 미케네식 검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아히야와가 반란을 지원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후 기원전 13세기 후반, 히타이트 문서들은 피야마라두라는 반란 지도자를 언급한다. 그는 수십 년간 소아시아 서부에서 히타이트에 저항하며 활동했으며, 아히야와와 동맹을 맺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이름이 프리아모스와 유사하다고 지적하지만, 이 동일시는 문제투성이다. 히타이트 문서는 피야마라두를 결코 왕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그가 트로이 출신이라는 증거도 없다. 오히려 그는 아르자와(소아시아 남서부) 출신으로 보이며, 심지어 윌루사를 공격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호메로스가 묘사한 프리아모스의 역할과 정반대다.
타와갈라와 서신으로 알려진 또 다른 히타이트 문서는 히타이트와 아히야와 사이에 윌루사를 둘러싼 이견이 있었음을 언급한다. 이 서신은 두 강대국이 윌루사를 놓고 외교적 긴장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전쟁으로 비화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원전 1220년경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문서는 윌루사의 왕 발무가 전복되었다는 사건을 기록한다. 누가 그를 전복시켰는지는 불분명하지만—내부 반란인지, 피야마라두의 공격인지, 아니면 아히야와의 개입인지—이 사건은 윌루사가 정치적 불안정을 겪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서들을 종합하면, 기원전 15세기부터 12세기까지 적어도 네 차례의 트로이 관련 전쟁 또는 충돌이 있었다. 그리스 문헌 역시 최소한 두 차례의 트로이 전쟁—헤라클레스의 전쟁과 아가멤논의 전쟁—을 언급한다. 고고학적으로도 트로이는 기원전 1300년에서 1000년 사이 두세 차례 파괴되었다.
이러한 증거들이 시사하는 것은 명확하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특정한 단일 사건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충돌들의 기억이 시적으로 응축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구전 전통은 수백 년에 걸쳐 이야기를 전승하면서, 여러 전쟁의 기억을 하나의 위대한 서사로 융합시켰을 수 있다. 중세 유럽의 『롤랑의 노래』가 778년의 사건을 12세기에 서사시로 만들면서 적조차 바꿔버린 것처럼, 호메로스의 서사시도 역사적 핵심을 보존하면서도 세부사항들을 변형시켰을 것이다. 실제로 호메로스는 자신이 노래한 사건들로부터 약 400년 후인 기원전 8세기에 활동했다. 그 사이는 문자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그리스 암흑시대였다.
그렇다면 왜 이 전쟁들이 벌어졌을까? 호메로스는 헬레네의 납치를 전쟁의 원인으로 제시하지만, 고대 역사가 투키디데스조차 이를 과장으로 의심했다. 그는 아가멤논이 당대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기에 동맹국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보았으며, 사랑이 아닌 권력이 진정한 동기였다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가들도 더 실용적인 이유들을 지적한다. 트로이의 지리적 위치가 핵심이다. 다르다넬스 해협의 강한 조류와 바람은 항해를 어렵게 만들었고, 배들은 종종 트로이 근처에서 대기해야 했다. 이는 트로이가 통행료를 부과하거나 무역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주석—청동 제작에 필수적이며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로 공급되었던—을 비롯한 귀중한 상품들의 무역로가 이곳을 지났다.
기원전 13세기 말과 12세기 초는 지중해 동부 전체가 격변을 겪던 시기였다. 히타이트 제국이 해체 과정에 있었고, 바다 민족들이 이집트와 근동의 왕국들을 공격하던 시기는 지역 전체가 불안정했던 혼란의 시대였다. 이른바 청동기 시대 붕괴로 알려진 이 대재앙은 기원전 1200년경을 전후하여 동지중해 전역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미케네 그리스, 히타이트 제국, 레반트의 도시 국가들이 모두 파괴되거나 크게 약화되었다. 이 붕괴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만, 여러 요인들의 복합적 작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 기근, 질병의 확산, 지진, 그리고 무엇보다 대규모 인구 이동과 전쟁이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바다 민족 중 일부는 미케네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의 블레셋 유적지에서 발견된 초기 정착층의 도기 유형들은 모두 미케네 세계에서 유래했다. 이는 미케네인들이 키프로스를 거쳐 동부 지중해로 이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미케네 유적지의 예외적으로 강력한 방어 시설들, 무덤에서 발견되는 대량의 무기들, 필로스의 선형 B 점토판에 기록된 방어 준비들은 모두 미케네인들이 전쟁에 익숙한 사회였음을 증명한다. 기원전 13세기 후반 미케네 전쟁 방식에는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무기들이 더 가볍고 작아졌으며, 전술은 더 유연해졌다. 창은 여전히 주무기였지만, 검의 역할도 증가했다. 일부 학자들은 보병 중심의 새로운 전투 방식이 전차에 의존하던 청동기 시대 왕국들에게 치명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군사적 혁신은 전체 사회 질서의 변화를 초래했고, 전차를 소유하고 운용하던 엘리트 전사 계층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트로이에 대한 공격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건이었다. 미케네 본토의 궁전들이 붕괴하면서 일부 미케네 집단들은 해외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약탈, 정복, 새로운 정착지 확보—이 모든 것이 동기가 될 수 있었다. 트로이는 부유했고, 전략적으로 중요했으며, 히타이트 제국의 쇠퇴로 보호자를 잃었다. 완벽한 표적이었다. 실제로 트로이 7a의 파괴 시기는 기원전 1180년경으로, 미케네 본토의 주요 궁전들이 파괴된 이후다. 이는 시간적 모순을 제기한다. 기원전 1190년경이면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은 이미 붕괴하고 있었다. 대규모 원정을 조직할 능력이 있었을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붕괴가 일부 미케네 집단들을 해외 약탈로 내몰았을 수 있다. 고향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전사들은 다른 곳에서 부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역사적 핵심과 시적 각색을 구분하는 일은 여전히 까다롭다. 『일리아드』에 묘사된 10년간의 포위 공격은 명백한 과장이다. 고대 그리스 도시들이 10년간 군대를 해외에 주둔시킬 경제적, 정치적 능력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투키디데스가 지적했듯이, 실제로는 훨씬 짧은 기간의 전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186척의 배가 트로이로 출항했다는 것도 과장이다. 각 배에 50명의 전사가 탔다고 가정하면 약 6만 명의 군대가 되는데, 이는 청동기 시대의 기준으로는 믿기 어려운 규모다. 목마의 이야기는 문헌 어디에서도 물리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많은 학자들이 이를 계략이나 배신을 나타내는 시적 상징으로 해석한다. 어쩌면 도시의 문이 내부자에 의해 열렸거나, 종교 의식을 가장한 침투가 있었을 수도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영웅적 일대일 결투, 신들이 전장에서 싸우는 장면들은 분명 서사시의 극적 요소들이다.
하지만 『일리아드』에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세부사항들도 포함되어 있다. 지형 묘사의 일치는 주목할 만하다. 2001년 지질학자 존 크래프트와 동료들이 발표한 연구는 1977년부터 시작한 이 지역의 지질학적 조사 결과를 담고 있다. 그들은 현재의 지형을 『일리아드』와 스트라본의 『지리학』 같은 고전 문헌들이 묘사한 지형과 비교했다. 결론은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의 위치와 그리스 진영 같은 장소들, 지질학적 증거, 그리고 『일리아드』의 지형 묘사와 전투 기록 사이에 일관성이 규칙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호메로스는 스카만드로스 강과 시모이스 강이 트로이 평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는데, 고고학적 증거는 청동기 시대에 이 강들의 위치가 실제로 호메로스가 묘사한 것과 일치했음을 보여준다. 수천 년간의 퇴적으로 현재 지형은 크게 변했지만, 지질학적 재구성은 호메로스의 지리적 지식이 놀랍도록 정확했음을 드러낸다.
물론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호메로스나 그의 선배 음유시인들이 실제 장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구전 전승은 종종 지리적 세부사항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보존한다. 인류학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구전 전승이 수천 년 전의 지리적 변화를 기억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호메로스의 경우에도 비슷한 현상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부사항들이 세대를 거쳐 전승되면서, 일부는 과장되거나 변형되었지만, 기본적인 지리적 틀은 보존되었을 것이다.
무기와 갑옷에 대한 『일리아드』의 묘사들도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호메로스는 청동 무기들을 상세히 묘사하지만, 그가 살던 기원전 8세기에는 이미 철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가 왜 청동 무기를 묘사했을까? 이는 그가 더 오래된 전통을 보존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멧돼지 엄니로 만든 투구에 대한 묘사다. 『일리아드』 10권에서 오디세우스가 착용하는 이 투구는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투구들이 실제로 미케네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기원전 15-14세기에 사용되었던 매우 특수한 무기로, 호메로스 시대에는 이미 수백 년간 사용되지 않았다. 호메로스가 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그의 서사시가 진정으로 고대의 기억을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
전투 방식에 대한 묘사에서도 유사한 혼재가 발견된다. 『일리아드』는 전차를 주로 전장까지의 이동 수단으로 묘사하며, 영웅들은 전차에서 내려 도보로 싸운다. 이는 호메로스 시대의 전투 방식이 아니라 미케네 시대의 전투 방식에 더 가깝다. 물론 호메로스의 묘사가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다. 일부 장면들은 후대의 전투 방식을 반영하며, 일부는 시적 허용에 불과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일리아드』는 청동기 시대 후기의 전쟁에 대한 희미하지만 진정한 기억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로이 6세의 웅장함은 『일리아드』가 묘사하는 부유하고 강력한 도시의 이미지와 부합한다. 언덕을 오르며 계단식으로 배치된 성채, 트로이 엘리트들이 살았던 다층 독립 주택들의 잔해, 그리고 더 넓은 지역에서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방어 시설은 이 도시가 단순히 작은 마을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성벽은 높이 9미터, 두께 5미터에 달했으며, 석회암 블록들로 정교하게 쌓아 올려졌다. 동쪽 문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거대한 탑으로 방어되는 이 문은 도시의 주요 입구였다. 『일리아드』는 스카이아 문을 트로이의 주요 문으로 묘사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동쪽 문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트로이 6세는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며, 전쟁의 명확한 증거는 그 후계 도시인 트로이 7a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트로이 7a는 트로이 6세보다 규모가 작았고 덜 웅장했지만, 기원전 1180년경의 파괴 흔적은 적대적 공격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는 청동기 시대 후기의 붕괴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가능성이 제기된다. 만약 『일리아드』가 여러 세대에 걸친 사건들을 압축했다면, 웅장한 트로이 6세의 기억과 파괴된 트로이 7a의 역사가 하나의 이야기로 융합되었을 수 있다. 호메로스가 노래한 프리아모스의 트로이는 실제로는 두 도시—번영하던 트로이 6세와 파괴된 트로이 7a—의 복합적 이미지일 것이다.
히타이트 학자 트레버 브라이스는 신중한 경고를 제시한다. 현재 우리가 가진 윌루사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실제로 트로이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료가 적을수록 우리가 원하는 결론에 맞추기 쉽다는 것이다. 히타이트 문서는 윌루사-트로이가 그리스-아히야와에 의해 실제로 공격받았다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외교적 긴장, 동맹 관계, 조약 체결은 기록되어 있지만, 대규모 전쟁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브라이스는 우리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알고 있기 때문에 히타이트 문서에서 트로이 전쟁의 흔적을 찾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일리아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같은 문서들을 전혀 다르게 해석했을 것이다.
그의 회의론은 학문적으로 건전하다. 역사가는 증거가 허용하는 것 이상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만프레트 코르프만과 그의 동료들은 반론한다. 지난 수십 년간의 놀라운 발견들을 고려할 때, 이제 입증 책임은 『일리아드』의 기본 사건들에 역사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쪽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청동기 후기 트로이에서 일어난 일과 『일리아드』의 사건들 사이에 역사적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고고학, 히타이트 문헌, 지리학적 정확성, 무기 묘사의 고대성—이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일 수 있을까?
코르프만의 질문은 정당하다. 고고학적, 문헌적, 지질학적 증거들의 수렴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트로이는 실재했고, 청동기 시대 후기 중요한 도시였으며, 적어도 한 번 이상 폭력적으로 파괴되었다. 미케네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 서부에서 활동했고, 트로이의 히타이트식 명칭인 윌루사를 둘러싸고 긴장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기원전 13세기와 12세기 초에 일어났다. 트로이에서 발굴을 진행하는 고고학자에게 누군가 다가와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믿는다고 말한다면, 코르프만의 대답은 명확했다. "왜 안 되겠는가?"
하지만 역사가 조슈아 칸과 같은 학자들은 더 회의적이다. 그들은 고고학적 파괴 증거가 전쟁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화재는 사고로도 발생할 수 있고, 투석들은 방어자들이 공격자를 격퇴한 증거일 수도 있다. 더욱이 트로이 7a의 파괴 시기가 미케네 본토의 붕괴 이후라는 점은 그리스 연합군의 대규모 원정이라는 시나리오를 약화시킨다. 칸은 『일리아드』가 청동기 시대의 실제 사건보다는 호메로스 자신의 시대—그리스 식민지 개척 시대—의 관심사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인들은 소아시아와 흑해 연안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었고,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이러한 확장을 정당화하는 건국 신화로 기능했을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완전한 확실성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결코 기원전 1180년의 트로이 평원으로 돌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직접 볼 수 없다. 하지만 증거의 무게는 무언가가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호메로스가 묘사한 그대로의 트로이 전쟁을 특정할 수는 없다. 제우스와 헤라가 전장에 개입했다는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아킬레우스의 무적과 헥토르의 비극적 운명은 시적 창조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핵심—그리스인들과 트로이 주민들 사이의 군사적 충돌—은 역사적 사건들의 기억에 기반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1964년 역사가 모지스 핀리는 더 많은 증거를 확보할 때까지 트로이 전쟁의 서사를 역사의 영역에서 신화와 시의 영역으로 옮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제 우리가 그 추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아히야와와 윌루사를 논의하는 히타이트 문서들과 트로이의 새로운 고고학적 데이터라는 형태로. 하지만 증거의 축적이 반드시 확실성의 증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우리가 모르는 것도 더 많아진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경계는 흐릿할 수 있다. 특히 신들이 전쟁에 개입할 때 그렇다. 우리는 세부 사항들에 대해 논쟁할 수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트로이와 트로이 전쟁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정확히 자리하고 있다. 소아시아 북서부에, 그리고 고고학과 히타이트 문서, 호메로스와 서사시 전통의 그리스 문헌 증거로부터 우리가 알게 된 청동기 시대 후기의 세계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다. 트로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단순히 고대 도시의 폐허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명예, 전쟁과 혈연, 의무에 대한 영원한 주제들이다. 이 주제들은 후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심금을 울렸고,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에서 베르길리우스로, 그리고 초서, 셰익스피어를 거쳐 계속 울려 퍼져 왔다.
어쩌면 트로이 전쟁의 가장 심오한 진실은 역사적 사실성의 문제를 넘어선다. 『일리아드』가 수천 년간 살아남은 이유는 그것이 정확한 역사 기록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경험의 본질적 진실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선택, 헥토르의 용기와 두려움, 프리아모스의 슬픔과 존엄—이것들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전쟁이 가져오는 영광과 상실, 명예와 비극은 모든 시대의 인간들이 직면한 딜레마다. 이러한 의미에서 트로이 전쟁이 정확히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부차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포착하는 진실이며, 그 진실은 히사를릭 언덕의 돌들만큼이나 견고하다.
결국 트로이 전쟁의 진실은 아마도 이것이다. 하나의 특정한 10년간의 전쟁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반복된 충돌들이 시간의 연금술을 거쳐 하나의 위대한 서사로 정제되었다는 것. 히사를릭 언덕의 흙 속에서 발견된 투석들과 화살촉들, 불탄 건물의 잔해들은 그 충돌들이 실재했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시는 그 실재했던 사건들에 영원불멸의 의미를 부여했다. 역사가 기억으로, 기억이 전설로, 전설이 신화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사실적 정확성은 희미해질 수 있다. 하지만 더 깊은 진실—인간이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 죽음 앞에서 명예란 무엇인가—은 더욱 선명해진다.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트로이 전쟁은 둘 다이며 동시에 그 이상이다. 그것은 실재했던 충돌들의 희미한 메아리일 수도 있고, 순전한 시적 창조일 수도 있다. 우리는 결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불확실성이 이 이야기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든다. 트로이 전쟁은 계속해서 우리를 히사를릭 언덕으로 이끌며, 돌과 흙 속에서 답을 찾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찾는 것은 단순한 사실들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이야기가 역사보다 때로 더 진실할 수 있다는 역설에 대한 이해다. 원래의 사건들, 혹은 그것의 어떤 변형이 일어난 지 3천 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이야기는 광범위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본질적 진실—용기와 슬픔, 영광과 상실—을 담은 그릇이며, 그 진실은 실제로 벌어진 전투들보다 더 오래, 더 깊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