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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테마 제도-몸부림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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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중엽, 동로마 제국은 존망의 기로에 서 있었다. 628년 페르시아 사산 왕조와의 처절한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랍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이 제국의 가장 풍요로운 속주들을 급속히 정복했다. 시리아는 639년에, 이집트는 642년에 함락되었고, 북아프리카의 총독령은 647년부터 670년 사이에 점차 무너졌다. 650년대부터는 아랍 함대가 지중해에 진입하여 새로운 전장을 열었다. 동시에 발칸 반도에서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피와 금으로 되찾았던 지중해 제국의 영광은 한 세대도 채 되지 않아 사라져버렸다. 642년까지 제국은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잃었고, 영토의 3분의 2와 자원의 대부분, 특히 이집트의 곡물 공급을 상실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하면, 제국은 사실상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 일부만을 간신히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재앙적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이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페르시아 사산 제국은 637년 카디시야 전투 이후 무슬림에게 완전히 무너졌다. 서고트 왕국은 불과 몇 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잃었다. 그러나 동로마는 달랐다. 영토와 자원의 3분의 2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은 테마 제도의 효율성과 군대에 무기와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개혁된 비잔틴 경제 덕분에 8만 명의 군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국이 생존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테마 제도라는 혁명적인 군사-행정 체제의 도입이었다. 이 제도는 단순한 행정 개편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문명이 자신을 재창조한 생존 전략이었다.


테마 제도의 기원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20세기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 제도를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작품으로 여겼다. 비잔틴 역사학의 거장 게오르게 오스트로고르스키는 8세기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의 기록을 근거로, 헤라클리우스가 622년에 "테마들의 땅"에 도착했다는 구절이 이미 그 시점에 테마 제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대 학계는 이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월터 카에기를 비롯한 학자들은 테마 제도가 640년대부터 660년대 사이, 콘스탄스 2세 치세에 형성되었다고 본다. 더 흥미로운 것은 '테마'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 변화다. 초기에 이 용어는 지리적 구역이 아니라 군사 부대 자체를 지칭했으며, 7세기 후반이나 8세기 초반에 이르러서야 이 군대들이 주둔한 지역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러한 학술적 논쟁은 단순한 연대 측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테마 제도의 본질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다. 테마 제도는 어느 한 황제의 천재적 발상으로 하루아침에 완성된 체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실험과 시행착오, 위기 대응의 산물이었다. 제국의 야전군이 소아시아로 철수하면서, 이 부대들의 주둔 지역에서 최초의 테마들이 창설되었고, 그 이름은 해당 지역에 존재했던 군사 부대에 상응했다. 아나톨리콘 테마는 동방의 최고 군사령관(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오리엔템)이 지휘하던 동방군이 아랍의 공격을 피해 소아시아로 후퇴하면서 669년경 콘스탄티누스 4세 치세 초기에 형성되었고, 마기스테르 밀리툼은 스트라테고스로 재명명된 테마의 군사 총독이 되었다. 아르메니아콘, 옵시키온, 트라케시온이라는 최초의 테마들 역시 기존 군사 조직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들은 처음부터 명확한 행정 구역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전략적 필요에 따라 점진적으로 영토적 단위로 발전해간 것이다.


테마 제도의 핵심은 군사력과 행정권의 통합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세기 말에 확립한 로마의 행정 원칙은 민정과 군정의 엄격한 분리였다. 이는 군사 지휘관의 반란을 막기 위한 현명한 조치였으나, 동시에 위기 대응 능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미 이 문제를 인식하고 아프리카와 라벤나에 총독제를 도입하면서 민정과 군정을 한 사람에게 맡겼지만, 이것은 제국 변방의 예외적 조치에 불과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또한 동부 속주들의 총독들에게 군사 및 행정 권한을 부여했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주요 행정 구조였던 제국의 교구들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그러나 7세기 중반의 생존 위기는 이러한 예외를 규칙으로 만들었다. 7세기에 테마 제도가 창설되면서, 스트라테고스의 역할이 변화했다. 야전군들이 재배치되고 영토 테마의 기반이 되면서, 그들의 장군들도 새로운 책임을 맡게 되었고, 군사적 의무와 테마의 민정 통치를 결합했다.

테마의 사령관인 스트라테고스는 단순한 군사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군인들을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설정한 민정 총독과 군사 사령관 사이의 구분을 폐지하고 민정과 군정의 관할권을 문제의 영토 지역에서 통합했다. 그는 자신의 관할 구역 내에서 세금 징수, 사법권 행사, 민정 감독 등 총독의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이는 로마 공화정이나 초기 제국 시대의 속주 총독 체제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이 과정은 9세기 중반까지 완료되어, 각 테마의 스트라테고스가 군사와 민정 양면을 통일적으로 관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클레토롤로기온과 데 아드미니스트란도 임페리오 같은 저작에서 언급되는 "고전적" 테마 모델이다.


이 체제의 혁신성은 병력 충원 방식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전통적인 로마군은 전문 직업군인으로 구성되었고, 제국은 막대한 재정을 군대 유지에 쏟아부었다. 그러나 영토의 절반 이상을 잃은 제국은 더 이상 이런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다. 테마 제도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독창적 방법을 제시했다. 테마라는 용어는 모호했는데, 군사 보유지의 형태와 행정 구획 모두를 가리켰다. 테마는 병사들에게 경작을 위해 주어진 토지 구획의 배치였다. 병사들은 여전히 스트라테고스의 지휘 아래 기술적으로는 군사 단위였고, 그들이 경작한 토지는 국가가 통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소유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토지의 사용에 대해 병사들의 급여가 감소되었다. 이는 로마 공화정 초기의 시민군 전통으로의 복귀인 동시에,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서유럽 봉건제에서 영주는 토지의 완전한 소유권을 가졌지만, 테마 제도에서 토지는 여전히 국가 소유였고 병역의 대가로 임대된 것이었다.

이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참여자들은 그들의 후손도 군대에서 복무하고 테마에서 일할 것에 동의했고, 이는 동시에 불인기한 징병의 필요성을 줄이는 동시에 군대를 저렴하게 유지했다. 정복된 땅을 정착시킬 수 있게도 했는데, 정복 중에는 항상 공유지에 상당한 추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평시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유사시에는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출정하는 이 병농 일치 체제는 제국의 군사력을 유지하면서도 재정 부담을 극적으로 줄였다. 이러한 병농 일치 체제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확립되었는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월터 카에기는 10세기 이전에 군인들에게 토지를 체계적으로 분배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7세기 후반 제국의 생존이 테마 제도의 효율성보다는 오히려 칼리프 내부의 분열과 내전 덕분이었다고 본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7세기 중반부터 군인들이 소아시아에 정착했다고 믿는다. 이 논쟁이 시사하는 것은 테마 제도가 단일한 설계도에 따라 한꺼번에 시행된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진화한 복잡한 과정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초기에는 전통적인 급여 지급과 토지 할당이 병행되었을 것이고, 점차 토지 중심 체제로 이행했을 것이다.

테마 제도는 제국의 군사적 효율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다. 헤라클리우스는 탁월한 황제임을 증명했다. 제국을 테마들로 재편성한 것은 비잔틴들이 군사적 잠재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가능한 한 최대한 끌어낼 수 있게 했다. 병력이 해당 지역에 상주하므로 동원 속도가 빠르고, 자신의 고향과 가족을 지킨다는 의식이 사기를 높였다.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부대는 지형을 잘 알았고, 방어 전투에서 유리했다. 650년 이후, 이슬람 칼리프국이 비잔틴보다 훨씬 더 자원이 풍부하고 강력했을 때 이것은 필수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랍인들과 싸우기 위해 높은 수준의 효율성이 필요했는데, 부분적으로 테마 제도 덕분에 달성되었다. 이러한 개혁으로 비잔틴들은 아랍인들에게 여러 차례 패배를 안길 수 있었는데, 674년과 717년 두 차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리고 740년 아크로이논에서였다. 8세기 초 콘스탄티노플 포위전에서 레오 3세가 이슬람군을 격퇴한 것, 9세기와 10세기에 제국이 공세로 전환하며 영토를 재정복한 것은 모두 테마 제도가 뒷받침한 군사력 덕분이었다. 9세기 중반에 이르면 테마 제도는 전성기를 맞았고, 제국 전역이 약 30개의 테마로 조직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의 로마군에 필적하는 30만 명의 병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재정 부담이 제국 전역에 고르게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본질적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최초의 테마들은 수가 적고 매우 컸으며, 8세기에 지방의 스트라테고스들은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와 끊임없는 적대 관계에 있었고, 종종 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여, 테마들은 점진적으로 분할되었고 스트라테고스의 수가 증가하여 그들의 권력을 희석시켰다.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장악한 스트라테고스는 황제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695년부터 715년까지의 혼란기는 테마 사령관들의 반란으로 점철되었다. 가장 강력했던 옵시키온 테마는 콘스탄티노플 옆에 위치한 거대한 테마였고, 엘리트 비잔틴 군사 부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전통을 위해 스트라테고스 대신 백작(코메스)이 지휘했다. 741-742년 아르타바스도스의 대반란이 일어났는데, 이 반란은 진압되는 데 2년 반이 걸렸고 콘스탄티누스 5세의 목숨을 거의 앗아갈 뻔했다. 이 반란이 진압된 후, 황제들은 대형 테마를 분할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옵시키온의 분할이 그러한 엄청난 반란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거기에 인과 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옵시키온의 분할은 아마도 그것의 이전 권력과 반역적 성격의 직접적인 결과였을 것이다. 옵시키온 테마는 부켈라리온과 옵티마톤으로 분리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주변에는 황제 직속의 전문 부대인 타그마타가 창설되어 근위대 역할을 맡았다.

테마들은 병사들 외에도 제국 자체를 위한 자원을 제공해야 했다. 이는 광산과 비옥한 땅을 가진 더 부유한 테마들이 더 많이 제공하고 더 강력했던 반면, 많이 가지지 못한 테마들은 작게 남아있었음을 의미했다. 테마를 통제했던 스트라테고스는 때때로 너무 강력해져서 황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반란을 시작하거나 다른 테마들과 싸우기 위한 군대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들이 스트라테고스와 그의 군대의 권력을 줄이기 위해 생각해낸 해결책은 더 큰 원래의 테마들을 분할하여 더 작은 것들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 지도자가 반란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강력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는 테마 제도의 실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제국은 지속적으로 중앙집권과 지방분권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며, 군사적 효율성과 정치적 안정성 사이에서 최적점을 찾아나갔다.


10세기에 제국이 공세로 전환하면서 테마 제도는 또 다른 변화를 맞았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위대한 비잔틴 정복(956-1025)은 먼저 장군으로서(956-963), 나중에 황제로서(963-969)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뛰어난 군사 지도력 아래 시작되었다. 킬리키아는 2년 캠페인(964-965) 후에 정복되었고, 북부 시리아가 침공당했다(966). 967년 사이프 앗-다울라의 죽음은 시리아의 아랍 방어를 혼란에 빠뜨렸고, 니케포로스가 트리폴리까지 시리아 해안을 정복하고, 하마와 홈스를 약탈하고(968), 1년간의 포위 끝에 안티오크를 점령할 수 있게 했다(969). 8세기 후반과 9세기 초반에 아랍의 습격으로부터 비잔틴의 아나톨리아 심장부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은 일련의 작은 변경 지구인 클레이수라이 또는 클레이수라르키아이의 창설로 이어졌다. 동부 변경 지역에 소형 테마들이 대거 생겨났다. 10세기, 11세기, 12세기까지, 새로운 비잔틴 정복은 변경 국가로서 기능하는 훨씬 더 작은 테마들을 만들었지만, 크기가 작아서 제국의 국경, 특히 이 모든 작고 중요하지 않은 테마들이 형성된 동쪽을 더욱 보호하기 위한 군사 기지로만 사용되었다. 이들은 '소테마' 또는 '아르메니아 테마'라고 불렸으며, 전통적인 '대테마'와는 성격이 달랐다. 대개 요새 하나와 그 주변 지역으로 구성된 이 소테마들은 약 1천 명의 수비대를 두었고, 사령관은 하급 스트라테고스였다. 이들은 주로 아르메니아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방어에는 유용했지만 대규모 침공에 대응하거나 지속적인 공세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는 제국이 정복한 영토를 확보하고 변경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적 조정이었다. 10세기 비잔틴의 동부와 발칸 반도 공세가 시작되면서, 특히 전사 황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와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아래서, 점차 대부분이 완전한 테마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1세기에 접어들면서 테마 제도는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했다. 비잔틴 군대는 1071년 이전에 의심스러운 질을 가지고 있었고, 정규 투르크 침입이 실패하는 테마 제도를 압도하고 있었다. 가장 치명적인 변화는 군역의 화폐화였다. 농민 병사들은 직접 군 복무를 하는 대신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의무를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제국 군사력의 근간을 허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테마 군대는 점차 훈련도가 떨어지고 전투력이 약화되었다. 동시에 대토지 소유자인 디나토이 계층이 성장하면서 농민 병사들의 토지를 잠식했고, 이는 병력 기반을 더욱 약화시켰다. 콘스탄티노플 중앙 관료제와 지방의 군사 귀족 사이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11세기 동안, 스트라테고스들은 점차 군사적 임무에 국한되었고, 그들의 재정 및 행정 책임은 민간 크리타이('재판관들')에게 넘어갔다. 제국은 점점 더 외국 용병과 동맹국 병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1071년 8월 26일,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제국 사이에 이베리아의 만지케르트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비잔틴군의 결정적 패배와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의 포로 됨은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에서 비잔틴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투의 주된 부담은 동부와 서부 타그마타의 비잔틴군 직업 군인들이 짊어졌는데, 많은 수의 용병과 아나톨리아 징집병들이 일찍 도망쳤고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로마노스가 만지케르트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타르카네이오테스의 군대는 남쪽에서 진군하는 강력한 셀주크 군대와 마주쳤다. 로마노스에게 알리지 않고, 타르카네이오테스는 교전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그의 병력을 서쪽으로 철수시켰다. 그의 군대는 후속 전투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대형이 무너지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장군이 전장을 버린 결정은 비잔틴 입장을 더욱 무너뜨렸다. 두카스는 카이사르 요한네스 두카스의 아들이자 로마노스의 쓰라린 반대자였으며, 후방을 지키던 그의 군대가 이탈하면서 황제의 근위대는 고립되었다. 로마노스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결국 포로가 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참패는 이러한 경향의 정점이었다. 전투 자체는 재앙이었지만, 더 큰 재앙은 그 이후였다. 테마 제도의 붕괴는 비잔틴군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전투 후 소아시아 대부분이 셀주크 투르크의 수중에 떨어졌고, 제국은 사실상 재앙에 직면했다.


만지케르트 이후의 혼란은 전투 자체보다 더 파괴적이었다. 로마노스가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후 귀환했을 때, 그는 두카스 가문의 쿠데타로 폐위되었다. 이어진 내전은 제국의 방어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테마 군대들은 각자의 장군을 따라 내전에 참여했고, 동부 변경은 방치되었다. 투르크 부족들은 이 권력의 공백을 메웠다. 1080년대에 이르면 소아시아의 심장부까지 투르크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제국은 겨우 니카이아와 해안 도시들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제국의 병력과 자원의 주요 공급원이었던 아나톨리아가 사라진 것이다.

콤네노스 왕조는 제국을 재건하려 했지만, 그들은 테마 제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1081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황제에 오르면서 비잔틴 제국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알렉시오스는 테마 제도가 이미 회복 불가능하게 무너졌음을 인식했다.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이 상실되었고, 남은 테마 군대는 수십 년간의 내전과 방치로 전투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군사 체제를 구축했다. 콤네노스 군대는 황제 개인과 왕조에 중앙집권화되었고, 바랑기안 근위대를 비롯한 다양한 외국 용병 부대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았다.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 기간 동안, 알렉시오스는 서유럽 기사들과 노르만 전사들을 비잔틴 군대에 통합했다. 그의 군대는 비잔틴인, 투르크, 페체네그, 쿠만, 프랑크, 노르만, 앵글로색슨으로 구성된 진정한 다국적 군대였다.

이후 프로노이아 제도가 도입되었는데, 이는 군역의 대가로 토지 수익을 하사하는 제도였다. 표면적으로는 테마 제도와 유사해 보이지만, 본질은 완전히 달랐다. 테마 제도에서 병사는 토지를 직접 경작했지만, 프로노이아에서는 수혜자가 토지에서 나오는 세금 수익을 받았다. 더 중요한 것은, 프로노이아가 점차 세습화되면서 서유럽의 봉건제와 더욱 유사해졌다는 점이다. 12세기 말에 이르면 프로노이아는 사실상 상속 가능한 봉토가 되었고, 이는 황제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마누엘 1세 콤네노스(1143-1180) 치세 동안, 제국은 다시 한번 강성해 보였지만, 그의 군대는 더 이상 테마 병사들이 아니라 용병과 프로노이아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테마는 명목상으로는 계속 존재했지만, 이제 그것은 군사 조직이 아니라 단순한 행정 및 재정 단위에 불과했다. 11세기 후반부터 테마의 민정 책임자인 크리타이의 권한이 점점 커졌고, 스트라테고스는 점차 순수한 군사 지휘관으로 격하되었다. 12세기에는 '테마'라는 말 자체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카토파니키온'이라는 새로운 행정 단위가 등장했다. 이것은 세금 징수를 위한 재정 구역일 뿐, 군사적 의미는 전혀 없었다. 콤네노스 왕조 말기에 이르면 테마 제도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테마 제도의 흥망성쇠는 동로마 제국 역사의 축도라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7세기 중반 제국이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창조적 해법이었다. 로마의 전통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현실에 맞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함으로써 제국은 페르시아나 서고트 왕국이 무너진 그 파도를 견뎌냈다. 페르시아 사산 제국은 651년 완전히 멸망했고, 서고트 왕국은 711년 과달레테 전투 이후 급속히 붕괴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영토의 3분의 2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테마 제도는 이 생존의 핵심 메커니즘이었다. 제국은 더 작아졌지만, 더 효율적이고 탄력적인 국가가 되었다.

9세기와 10세기 동안 테마 제도는 제국에게 놀라운 회복력을 부여했고, 비잔틴 군대를 유라시아에서 가장 효율적인 군사 조직 중 하나로 만들었다. 867년 마케도니아 왕조가 시작되면서 제국은 공세로 전환했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는 960년대에 크레타를 재정복하고 킬리키아를 점령했으며 시리아 북부를 침공했다.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는 969년 안티오크를 회복했고, 더 남쪽으로 진군하여 팔레스타인 변경까지 도달했다. 바실리오스 2세(976-1025)는 "불가르 살해자"라는 별명을 얻으며 발칸 반도 전역을 재정복했고,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그의 군대는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까지, 서쪽으로는 이탈리아 남부까지 뻗어나갔다. 이 모든 정복의 기반은 테마 군대였다. 10세기 말 제국의 영토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이후 최대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성공 자체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토지를 기반으로 한 군사 체제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오히려 약화되었다. 경제가 회복되고 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병역의 화폐화는 불가피한 추세가 되었다. 10세기 말부터 황제들은 군인 토지를 보호하려는 법령을 반복적으로 발표했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 토지가 위협받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바실리오스 2세는 대귀족들의 토지 확장을 막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했지만, 그의 사후 이러한 정책은 포기되었다. 대토지 소유자들의 성장은 소농 기반의 병사들을 잠식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지방 군사 귀족 사이의 긴장은 제국을 내부에서 약화시켰다. 11세기 후반에 이르면 테마 제도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고, 제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형태의 국가로 변모했다.

11세기 중반의 위기는 단순히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변화의 산물이었다. 테마 병사들은 점차 자신의 토지를 귀족들에게 빼앗기거나 팔았고, 병역 의무를 돈으로 대체했다. 귀족들은 이 돈을 내면서도 자신의 소작인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황제들은 용병을 고용해야 했고, 이는 재정을 고갈시켰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코스(1042-1055)는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5만 병력을 해산하고 그 비용을 절약하려 했지만, 이것은 동부 방어를 치명적으로 약화시켰다. 1050년대부터 셀주크 투르크의 습격이 격화되었고, 약화된 테마 군대는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만지케르트는 이 과정의 극적인 정점이었을 뿐, 근본적 원인은 그 이전 수십 년 동안 진행된 테마 제도의 점진적 붕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마 제도는 중세 군사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실험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것은 위기에 처한 국가가 어떻게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지, 전통과 혁신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제국은 로마의 직업군인 전통을 버리고 시민군 원칙으로 돌아갔지만, 동시에 중앙집권적 행정 통제를 유지했다. 지방 사령관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지만, 끊임없이 그들을 감시하고 견제했다. 군사적 효율성과 정치적 안정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역동적 균형 추구는 4세기 동안 제국을 지탱한 원동력이었다.

테마 제도의 역사는 또한 역사적 제도가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천재적 개혁자의 완벽한 설계도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십 년에 걸친 실험과 시행착오, 상황 대응의 축적이 점차 하나의 체계를 형성해갔다. '테마'라는 말조차 처음에는 군대를 의미했다가 나중에 지역을 가리키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발전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제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했다. 7세기 후반의 초기 테마들은 거대한 군사 지구였고 스트라테고스는 막강한 군벌이었다. 8세기에 반란을 겪으면서 테마들은 분할되고 황제의 통제가 강화되었다. 9세기와 10세기에는 테마 제도가 전성기를 맞이했고, 제국 전역이 정교한 군사-행정 네트워크로 조직되었다. 11세기에는 제도가 쇠퇴하고 프로노이아라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대체되었다. 각 시기의 '테마'는 같은 이름을 공유했지만 그 내용은 크게 달랐다.


궁극적으로 테마 제도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국가는 어떻게 생존하는가? 동로마 제국은 7세기 중반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영토의 3분의 2, 가장 부유한 속주들, 수백 년간 축적된 부와 인구를 잃었다. 636년 야르무크 전투와 642년 이집트의 함락은 제국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제국은 살아남았다. 새로운 군사-행정 체제를 창출하고, 이를 끊임없이 조정하고 개선함으로써 제국은 4세기를 더 지속했다. 만약 테마 제도가 없었다면, 동로마 제국은 7세기에 멸망했을 것이고, 유럽과 중동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비잔틴 문명이 보존한 그리스-로마의 유산은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텍스트들, 로마 법학의 전통, 기독교 신학의 발전, 이 모든 것이 콘스탄티노플의 도서관과 수도원에 보존되었다. 9세기 '비잔틴 르네상스' 동안 포티오스와 레오 6세 같은 학자들은 고대 문헌을 필사하고 주석을 달았다. 11세기 미카엘 프셀로스는 플라톤 철학을 부활시켰다. 이러한 지적 전통은 12세기와 13세기에 서유럽으로 전파되어 스콜라 철학과 르네상스의 토대가 되었다. 테마 제도가 제국의 생존을 가능케 했기에, 이 문명의 유산은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다.


정교회의 전통도 마찬가지다.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청은 동유럽과 러시아 정교회의 정신적 중심이었다. 9세기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는 슬라브 문자를 창제하고 슬라브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이것은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문자 문화와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 비잔틴 예술과 건축의 영향은 키예프와 모스크바, 베네치아와 팔레르모에서 볼 수 있다. 이 모든 문화적 전파는 제국이 계속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제국의 존재는 테마 제도가 가능케 한 군사적 생존에 달려 있었다.


테마 제도는 결국 실패했다. 11세기 후반의 위기를 막지 못했고, 제국은 다시 한번 존망의 기로에 섰다. 만지케르트 이후 아나톨리아의 상실은 제국에게 치명적이었다. 십자군 원정 시대의 비잔틴 제국은 7-10세기의 강력한 군사 국가가 아니라, 외교와 상업에 의존하는 중급 강국이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제국의 종말을 앞당겼다. 1261년 제국은 회복되었지만,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비잔틴은 과거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천년 제국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4세기 동안 테마 제도는 작동했고, 그 기간 동안 제국은 단순히 생존한 것이 아니라 번영했다. 9세기와 10세기 비잔틴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문명화된 국가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고, 이는 서유럽의 어떤 도시보다도 훨씬 컸다. 비잔틴의 예술과 건축, 문학과 학문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외교와 무역 네트워크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인도양까지 뻗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테마 군대가 제공한 안보였다. 이것이 바로 테마 제도의 진정한 유산이다.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시대의 도전에 대한 창조적 응답, 영원한 제도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진화하는 살아있는 체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생존의 길을 찾아낸 인간의 지혜와 적응력의 증거였다. 테마 제도는 역사가 단순한 결정론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창의성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보여준다. 7세기 중반 비잔틴의 지도자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을 과감히 개혁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그 결과 창출된 테마 제도는 제국을 4세기 동안 지탱했고, 그 과정에서 인류 문명의 귀중한 유산을 보존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테마 제도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군사 제도가 아니라, 위기의 시대에 어떻게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D%85%8C%EB%A7%88%20%EC%A0%9C%EB%8F%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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