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46년 봄, 로마 장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군단이 카르타고의 성벽을 뚫었다. 그리고 6일간,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파괴 작업이 시작되었다. 로마군은 항구 지역에서 돌파한 뒤 주거 지역을 통과하며 조직적으로 전진했다. 그들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지나온 건물마다 불을 질렀다. 때때로 로마 군인들은 지붕에서 지붕으로 이동했는데, 아래에서 투사체가 날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6층짜리 건물들이 즐비한 세 개의 거리가 비르사 요새로 이어졌고, 카르타고인들과 로마인들은 옥상에서도 거리에서도 치열하게 싸웠다. 로마군은 점령한 건물을 발판 삼아 다음 건물을 공격했고, 스키피오는 방어자들이 아직 안에 있는 채로 건물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시체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로마군은 진격을 계속하기 전에 먼저 시신들을 치워야 했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포로를 잡았는데, 그 수는 5만 명에 달했다. 전쟁 전 인구의 극히 일부였다. 그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 이것이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년)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단순한 군사적 충돌이 아니었다. 이것은 미움이 어떻게 국가의 정책이 되고, 정치가의 집념이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사례다.
기원전 153년(혹은 152년), 82세의 로마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로마와 누미디아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원로원 사절단의 일원으로 카르타고를 방문했다.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참전 용사였고, 기원전 218년 17세의 나이로 첫 전투에 참가했을 때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유린하는 것을 목격했다. 카르타고가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에 안긴 고통을 그는 평생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카르타고에서 본 것은 패배한 도시국가가 아니었다. 번영하는 무역 중심지, 다시 부유해진 경쟁자였다. 카토는 카르타고의 성장하는 번영에 충격을 받았고, 로마의 안전이 카르타고의 소멸에 달려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카토는 원로원에서 자신의 토가 주름 사이에서 리비아산 무화과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원로원 의원들이 그 크기와 아름다움에 감탄하자, 그는 말했다. "이것이 자라는 나라는 로마에서 불과 사흘 항해 거리에 있소."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카르타고는 너무 가깝고, 너무 부유하고, 따라서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플리니우스는 이 연설에서 카토가 "원로원 전체에 카르타고를 파괴하라고 외쳤다"고 기록했다.
그날 이후 카토는 자신의 모든 연설을 한 문장으로 끝맺기 시작했다. 주제가 무엇이든, 농업 정책이든 세금 문제든 상관없이, 그는 항상 같은 말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덧붙여, 카르타고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Ceterum censeo Carthaginem esse delendam)." 종종 "카르타고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로 축약되는 이 문구는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수사학적 무기가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카토가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투표 의견을 물으면,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전한다. 키케로는 카토가 "그것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두려워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반복은 설득의 가장 강력한 도구다. 카토는 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주제를 논의하든, 의회는 항상 카르타고의 위협을 상기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수사적 기교가 아니라 정교한 정치적 전략이었다.
그러나 원로원의 모든 이가 카토의 의견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사위이자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카토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연설을 한 문장으로 끝냈다. "내 의견으로는, 카르타고는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Carthago servanda est)."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의 논리는 정치적으로 정교했다. 로마 민중은 이미 방종하고 수많은 과잉을 저지르고 있으며, 번영의 자만심으로 원로원의 통제를 거부하고 광기 어린 욕망이 이끄는 대로 국가 전체를 끌고 간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카르타고에 대한 두려움이 민중의 대담함을 고삐처럼 억제하기 위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르타고가 로마를 정복할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수단으로서는 충분히 유용하다는 계산이었다. 오랫동안 원로원 토론에서 나시카가 우세했다.
하지만 역사는 결국 카토의 편을 들어주었다. 기원전 151년,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50년 동안 갚아야 했던 막대한 배상금 1만 탈렌트(약 26만 9천 kg의 은)를 모두 상환했다. 경제적으로 회복한 카르타고는 이제 조약의 의무에서 자유로웠다.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 조약을 카르타고의 영구적인 종속 선언으로, 마치 로마가 이탈리아 동맹국들과 맺은 조약처럼 해석했다. 더욱이 배상금 상환의 완료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평화를 유지해야 할 주요 인센티브 중 하나를 제거했다. 더 이상 중단될 수 있는 지불금이 없었던 것이다.
카르타고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였다. 마시니사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동맹이 되었고, 그 대가로 로마는 그가 카르타고 영토를 침범하는 것을 묵인했다. 기원전 202년의 평화 조약에는 카르타고가 로마의 명시적 허락 없이는 전쟁을 할 수 없으며, 아프리카 내에서도 로마의 허가를 받아야만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마시니사는 이를 악용했다. 50년 동안 그는 반복적으로 카르타고의 땅을 빼앗았고, 궁극적으로 기원전 200년 시점의 카르타고 영토의 약 절반을 획득했다. 카르타고가 로마 원로원에 탄원할 때마다 로마는 거의 독점적으로 누미디아에 유리하게 결정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소유물을 보호할 수 없게 만들었고, 카르타고가 구제나 군사 행동 허가를 요청할 때마다 거부했다. 마시니사의 카르타고 영토 강탈과 침략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었다.
기원전 151년, 이제 89세가 된 마시니사가 오로스코파 마을을 포위하며 또다시 침공했을 때, 카르타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카르타고는 조약을 무시하고 그전까지는 기록에 없던 장군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2만 5,400명의 보병과 4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소집했다. 여기에 마시니사에게 불만을 품은 두 명의 누미디아 지도자 수바와 아사시스가 이끄는 6천 명의 추가 기병이 합류했다. 카르타고군은 오로스코파로 진군하여 몇 차례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했고, 하스드루발이 보기에 누미디아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결정적인 전투를 유도하기 위해 누미디아군을 추격했다. 누미디아인들은 의도적으로 카르타고군을 험준한 지형으로 유인했고, 그곳은 물이 부족하고 식량 조달이 어려운 곳이었다.
기원전 150년, 마침내 회전이 벌어졌다. 마시니사가 전투를 선택한 것인지 하스드루발의 책략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지만 결과가 나지 않았다. 해가 질 무렵 누미디아군이 약간 우세해 보였다. 그날 밤 마시니사의 막사에 로마에서 온 방문객이 도착했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당시 켈티베리아 전쟁에서 호민관으로 복무 중이던 그는 로마군을 위해 전쟁 코끼리를 얻기 위해 누미디아로 파견되었다. 한니발을 물리치고 마시니사를 왕으로 만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로서, 그는 누미디아 왕조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카르타고인들도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그를 통해 휴전 협상을 요청했다.
하스드루발은 군대를 언덕 위로 후퇴시켜 진영을 요새화하고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중재자로 삼아 마시니사와 협상에 들어갔다. 카르타고인들이 수바와 아사시스를 처벌을 위해 마시니사에게 넘기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협상은 실패했다. 그 사이 누미디아인들은 카르타고군이 진을 친 언덕 기슭 주위에 넓은 원을 그리며 자체 요새를 건설했다. 마시니사의 아들 굴루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대가 항복 중이던 카르타고 병사들을 공격했다. 이것이 마시니사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현대 역사가 윌리엄 해리스는 굴루사가 로마인들의 부추김을 받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카르타고군이 입은 사상자는 명확하지 않다. 해리스는 "극소수만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진술하고, 나이절 배그널은 "생존자가 거의 없었다"고 쓰며,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많은 이가 살해당했다"고 기록한다. 모든 사료는 하스드루발과 그의 대부분의 장교들이 살아남아 카르타고로 돌아왔다는 데 동의한다. 전투, 항복, 학살은 기원전 151년 말까지 끝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에게 이것은 완벽한 구실이었다. 카토는 수년 동안 기다려온 순간을 맞이했다. 로마는 매우 법률적인 사회였고, 전쟁을 시작하려면 정당한 명분, 즉 "유스타 벨룸(iustum bellum, 정당한 전쟁)"이 필요했다. 카르타고가 로마의 허락 없이 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맺은 조약의 명백한 위반이었다. 더욱 나쁜 것은, 그들이 로마의 동맹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사실이었다. 기원전 149년, 로마 내 반카르타고 파벌은 이 불법적인 군사 행동을 징벌 원정의 명분으로 삼았다. 같은 해, 로마는 카르타고에 전쟁을 선포했다.
카르타고는 필사적으로 전쟁을 피하려 했다. 그들은 사절단을 보냈고, 로마의 반응은 회피적이었다. 카르타고 북쪽 55km 지점에 있던 카르타고의 오랜 동맹 도시 우티카가 로마 편으로 넘어갔을 때, 로마는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이 전략적 배신은 로마에 카르타고에서 하루 항해 거리에 있는 잘 배치된 항구를 제공했다. 기원전 149년, 8만 명의 보병, 4천 명의 기병, 50척의 퀸케레메와 100척의 헤미올리아(빠른 2단 갤리선)를 갖춘 로마의 대군이 우티카에 상륙했다. 집정관 마니우스 마닐리우스가 육군을, 루키우스 켄소리누스가 해군을 지휘했다.
카르타고는 여전히 화해를 시도했다. 로마는 외교적 가식을 계속하며 먼저 300명의 인질을 요구했다. 이들은 명문가의 자녀들이어야 했다. 카르타고는 순순히 응했다. 인질들은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러자 로마는 새로운 요구를 했다. 모든 무기를 넘기라는 것이었다. 폴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20만 벌의 갑옷과 2천 대의 투석기를 우티카로 보냈다. 그들의 군함들도 우티카로 항해했다. 이는 엄청난 양이었고, 카르타고가 진지하게 평화를 원한다는 증거였다.
완전히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로마는 최후통첩을 했다. 집정관들은 카르타고인들에게 도시를 완전히 버리고 해안에서 최소 16km(약 10마일) 떨어진 내륙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신전과 무덤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은 허용되지만 도시의 나머지 부분은 파괴될 것이었다. 카르타고를 파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바다가 없으면 카르타고의 무역 경제는 사라진다. 카르타고의 정체성 자체가 사라진다.
아피아누스는 카르타고인들의 분노와 좌절을 생생하게 전한다. 사절들이 린치를 당했고, 인질과 무기 인도를 수용하라고 말한 원로원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카르타고에 있던 이탈리아인들도 학대를 받았다. 협상은 결렬되었고, 카르타고 원로원은 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들은 무기가 없었지만, 필사적이었다.
도시는 전쟁 공장으로 변모했다.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모든 신성한 장소, 신전, 그리고 점유되지 않은 모든 공간이 작업장으로 변했고, 그곳에서 남녀가 함께 낮과 밤 내내 쉬지 않고 일했으며, 정해진 일정에 따라 교대로 식사를 했다. 매일 그들은 100개의 방패, 300자루의 검, 1천 개의 투석기용 투사체, 500개의 투창과 창, 그리고 가능한 한 많은 투석기를 만들었다. 투석기의 현을 만들기 위해 여성들은 다른 섬유가 없어서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노예들은 해방되어 군대를 보강했다. 약 70만 명(혹은 20만 명, 사료에 따라 다름)의 인구를 가진 도시가 생존을 위해 단결했다.
시민들은 성벽을 지켰다. 카르타고의 방어 시설은 엄청났다. 34km가 넘는 방어벽이 있었고, 일부는 삼중 방어선으로 건설되었으며 다른 구간은 말뚝 울타리, 참호, 그리고 바다로 보호되었다. 성벽은 두께가 9미터(약 30피트)에 달했고 2만 4천 명의 병사를 수용할 수 있는 막사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로스코파에서 패배한 하스드루발과 또 다른 하스드루발(이는 당시 흔한 이름이었다)이 이끄는 군대가 방어를 맡았다. 첫 번째 하스드루발은 로마의 전쟁 선포를 피하기 위해 카르타고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탈출하여 카르타고 남쪽 25km 지점의 네페리스에 주둔했다. 그는 시골에서 카르타고로 보급품을 보내는 것도 주선했다. 두 번째 하스드루발은 도시 안에서 방어를 지휘했다.
로마의 포위 공격은 예상외로 어려웠다. 기원전 149년과 148년 내내, 로마군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카르타고의 성벽은 너무 견고했고, 시민 민병대는 너무 결연했다. 마닐리우스는 카르타고의 방어를 뚫기 위해 즉각적인 공격을 명령했지만, 스키피오의 조언을 무시했다. 처음에는 잘 진행되었지만 로마군은 유지할 수 없는 위치로 진출했다. 철수하려 할 때 카르타고군이 반격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입혔다. 스키피오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일련의 제한적이고 훈련된 돌격과 위협을 가하여 카르타고군을 멈추게 했고, 그 사이 대부분의 보병이 후퇴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스키피오는 기병대를 이끌고 돌아가 포위된 로마군을 구출했다.
로마는 네페리스의 군대를 격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히포 아크라를 점령하려 했지만 격퇴당했다. 아스피스를 육지와 바다에서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카르타고와 우티카 사이의 히파그레타를 포위하려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이 도시는 로마의 보급선을 차단했다. 더욱 나쁘게도, 로마군은 잘못 배치된 진영에서 전염병으로 고통받았다. 피소 집정관의 지휘 아래서도 성과가 없었다. 네아폴리스는 항복하고 약탈당했지만, 아스피스는 로마 육군과 해군의 공격을 모두 견뎌냈고, 히포는 헛되이 포위되었다. 히포에서 출격한 카르타고군은 로마의 공성 기계를 파괴했고, 로마군은 작전을 중단하고 동계 숙영지로 들어가야 했다.
카르타고는 또한 로마를 놀라게 했다. 항구 내부에서 신중하게 숨겨진 작업을 통해 바다의 다른 부분에 또 다른 출구를 굴착했다. 여성과 어린이들이 발굴을 도왔다. 동시에 그들은 오래된 재료로 삼단노선과 퀸케레메를 건조했고, 새로운 출구에서 50척의 삼단노선과 더 작은 배들을 진수했다. 하지만 항구 밖에서 벌어진 두 차례 해전에서 이 배들은 로마군에 패배했고, 카르타고의 마지막 공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중급 장교였던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만이 여러 차례 두각을 나타냈다. 원로원에서 파견된 위원회가 스키피오와 마닐리우스의 진척을 평가하기 위해 도착했고, 그들의 보고서에서 스키피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기원전 147년 초의 연례 선거에서 민중의 지지는 스키피오에게 쏟아졌다. 그는 36세에 불과했지만, 법률상 최소 연령인 42세의 규정이 그 해에만 면제되었다. 그는 집정관이자 아프리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키피오는 포위를 강화했다. 그는 봉쇄 주자들이 카르타고로 보급품을 반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거대한 방파제 건설을 시작했다. 이 작업이 완료되자, 그는 네페리스에 있는 카르타고 야전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떠났다. 디오게네스라는 그리스인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동계 숙영지를 위한 요새화된 진영을 세웠다. 기원전 147년 말, 스키피오는 여러 방향에서 진영에 대한 공격을 지휘했고 진영을 점령했다. 도망친 카르타고인들은 로마의 누미디아 동맹 기병대에 의해 추격당했고 거의 탈출하지 못했다. 네페리스 마을은 3주간 포위된 후 항복했다. 카르타고의 배후지에서 여전히 저항하던 대부분의 요새화된 진지들이 이제 문을 열었다.
로마군은 항구 지역에 거대한 벽돌 구조물을 세워 도시 성벽을 장악했다. 기원전 146년, 스키피오의 지휘 임기가 1년 연장되었다. 봄에 그는 최후의 공격을 시작했다. 공격은 카르타고의 주요 항구인 코톤 항구를 목표로 했다. 로마군은 항구 벽을 돌파하고 곧이어 이웃한 군사 항구를 점령했다. 그들은 포획한 군함을 즉시 파괴했다. 그곳에서 로마군은 광장으로 진격했고, 그곳은 포럼과 비르사로 이어지는 세 개의 주요 도로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비르사는 약 60미터 높이의 낮은 언덕으로, 그 위에 에슈문 신전이 있었다.
6일간의 전투가 이어졌다. 첫날 밤 로마군은 광장을 확보하고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스키피오는 4천 명을 이끌고 군사 항구의 부대와 합류하려 했다. 이 부대는 아폴론 신전에서 금을 약탈하느라 지체되었고, 스키피오와 그의 장교들은 분노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카르타고인들은 로마군을 공격하는 대신 비르사와 그 주변의 주거 지역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옥상에 진지를 구축했고, 6층 높이의 건물들이 즐비한 세 거리에서 저항할 준비를 했다.
재정비한 로마군은 체계적으로 주거 지역을 통과하며 진격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로 통하는 세 거리를 나누어 각각에 부대를 할당했다. 주간에는 병력을 교대로 투입하여 쉬지 않고 전투가 계속되도록 했다. 로마 군인들은 건물 하나를 점령하면, 그것을 거점으로 삼아 다음 건물을 공격했다. 그들은 마주치는 모든 사람을 죽이고 지나온 건물마다 불을 질렀다. 때때로 로마군은 지붕에서 지붕으로 이동했는데, 아래 거리에서 투사체가 날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카르타고인들은 옥상에서 돌과 기와를 던지며 저항했고, 여성들과 어린이들도 방어에 참여했다.
스키피오는 적이 여전히 안에 있는 채로 건물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타오르는 건물들이 무너지면서 사망자와 부상자를 함께 묻었다. 시체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많은 사람들이 건물 잔해에 깔려 죽었다. 로마군은 진격을 계속하기 위해 먼저 시신들을 치워야 했다. 아피아누스는 이렇게 기록한다. "시체를 치우기 위해 그들은 시신을 구덩이로 던지고 땅을 고르게 했으며, 말과 수레로 그 위를 지나갔다. 그들은 시체를 마치 나무와 돌처럼 다루었다." 일부는 머리를 아래로 하여 구덩이에 던져졌고, 그들의 다리가 땅 위로 튀어나왔다. 말들이 그 위를 달리며 다리를 부러뜨렸고, 군인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
폴리비우스는 그 자리에 있었고 나중에 이렇게 썼다. "스키피오는 눈물을 흘리며 적의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한동안 잠겨 있다가 호메로스의 시구를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는 신성한 일리온이 멸망할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프리아모스와 잘 무장한 프리아모스의 백성도.' 폴리비우스가 이 말의 의미를 대담하게 물었을 때, 스키피오는 주저하지 않고 로마를 언급하며 자신의 조국의 운명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6일째 되는 날, 약 5만 명의 남녀가 비르사 언덕에서 나와 항복했다. 그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 카르타고 편에 선 로마 탈영병 900명을 포함한 최후의 저항자들은 에슈문 신전으로 후퇴했다. 그들은 항복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는 탈영병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하스드루발 장군은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그들과 함께 있었다.
신전이 로마군에 의해 포위되자, 하스드루발은 홀로 나와 스키피오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했다. 그의 아내는 신전 지붕 위에서 이를 목격했다. 아피아누스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기록한다. "비열한 로마인이여, 당신의 배신과 위증과 불경건에 대해 신들이 당신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하스드루발에게는 내가 복수하겠다." 그녀는 두 아들의 목을 베고 그들의 시신을 신전 안으로 던진 뒤, 스스로도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른 저항자들도 신전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죽었다. 전쟁 전 인구가 수십만에 달했던 도시에서 5만 명만이 생존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로마는 멈추지 않았다. 원로원은 10명의 위원단을 보내 카르타고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했다. 스키피오는 명령을 받았다. 남아 있는 건물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로마군은 도시를 평탄화하기 위해 17일 동안 일했다. 누구도 다시 그곳에 살지 못하도록 공식적인 저주가 선포되었다. 누구든 폐허에서 재건을 시도하는 자는 신들의 분노를 받을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카르타고의 영토는 로마 속주 아프리카가 되었고, 우티카가 수도가 되었다.
소금을 뿌렸다는 이야기는 고대 사료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폴리비우스, 아피아누스, 리비우스의 개요, 플루타르코스, 디오도루스 시큘루스 등 어떤 고대 사료도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19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1863년 케임브리지 학자가 카르타고를 방문한 후 자신의 시에서 처음 언급했고, 1930년 케임브리지 고대사 초판에서 학계에 소개된 후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재는 근거 없는 전설로 간주된다. 경제적으로도 의미가 없다. 당시 소금은 매우 비쌌고, 카르타고의 거대한 영토를 불모지로 만들 만큼의 소금은 천문학적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로마는 그 땅을 곡창 지대로 활용하기를 원했다. 상징적 진실은 분명했다. 로마는 경쟁자를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카토와 마시니사는 모두 전쟁 중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카토는 기원전 149년에 85세로 사망했고,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보았지만 카르타고의 파괴는 보지 못했다. 마시니사는 같은 해 90세로 사망했다. 그의 예언은 글자 그대로 실현되었다. 하스드루발은 노예가 되었고 후에 알바 푸센스에서 사망했다. 스키피오는 로마로 개선 행진을 하며 돌아왔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마조르를 따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미노르가 되었다.
100년이 넘은 기원전 2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카르타고를 로마 식민지로 재건할 계획을 세웠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를 실행에 옮겼다. 콜로니아 율리아 카르타고라 불린 새로운 도시는 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기원후 2세기경, 새로운 카르타고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에 이어 제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인구는 50만 명에 달했다.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고,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교부들의 고향이 되었다. 439년 반달족에게 정복되었고, 534년 비잔틴 제국에 재정복되었으며, 698년 이슬람군에 의해 최종적으로 파괴되었다.
오늘날 카르타고의 유적은 튀니스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있다. 포에니 항구의 윤곽, 로마 극장, 안토니누스 목욕탕, 그리고 여러 기독교 바실리카의 유적이 남아 있다. 1985년 2월 5일, 로마와 카르타고(튀니스)의 시장들은 3차 포에니 전쟁 종료 2,131년 만에 상징적인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로마 시장 우고 베토레는 "오늘 우리는 고대 적대 관계를 공식적으로 종식시킵니다"라고 선언했다.
3차 포에니 전쟁이 가르치는 교훈은 복잡하고 불편하다. 이것은 선제적 자위권의 문제인가, 아니면 부도덕한 침략인가?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카르타고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거의 파괴할 뻔했고, 50년 후 다시 부유해지고 있었다. 카토의 두려움은 비이성적이지 않았다. 마시니사가 죽으면 누미디아의 후계 분쟁이 발생할 수 있었고, 카르타고가 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로마는 또 다른 한니발을, 또 다른 칸나에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카르타고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모든 조약 의무를 이행했다. 50년간의 배상금을 완납했고, 로마의 허락 없이 전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마시니사의 계속되는 침략에 대해 로마에 반복적으로 탄원했지만 거부당했다. 그들이 마침내 자위를 위해 일어섰을 때, 로마는 그것을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그리고 카르타고가 완전히 무장 해제되고 협력한 후에야, 로마는 실제 요구를 드러냈다. 도시의 파괴였다.
로마가 왜 그토록 전쟁을 열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제시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카르타고의 상업적 경쟁에 대한 두려움을 지적한다. 다른 이들은 89세의 마시니사가 죽을 경우 더 큰 전쟁을 미리 막으려는 전략적 계산을 제시한다. 또 다른 이론은 로마 내부 파벌이 실제 위협과 무관하게 카르타고를 정치적 허수아비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영광과 약탈에 대한 욕심, 특히 부유한 도시를 파괴하여 얻을 수 있는 막대한 전리품에 대한 욕망도 무시할 수 없다. 일부는 로마가 혐오하는 카르타고의 과두정 체제를 분쇄하려는 이념적 욕구를 제시하기도 한다. 학자들 사이에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전쟁은 군사적 필요성보다는 정치적 의지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카토의 집념은 수사학의 힘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윤리적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치가는 증오를 정책으로 만들 권리가 있는가? 반복과 선전은 정당화의 대체물이 될 수 있는가? 나시카의 주장, 즉 카르타고를 민중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냉혹하다. 양측 모두 카르타고를 실제 존재가 아닌 정치적 상징으로 취급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기원전 167년 인질로 로마에 보내진 그리스인으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친구이자 멘토가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목격했다. 그의 기록은 대체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평가받지만, 그가 스키피오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스키피오의 행동을 우호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은 현대 학자들도 인정한다. 폴리비우스의 『역사』는 4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차 포에니 전쟁을 다룬 36-39권은 상당 부분 소실되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주로 단편과 다른 역사가들의 인용이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도 기원전 167년 이후는 페리오카에(목차)만 남아 있다. 아피아누스의 『로마사』 중 '푸니카'(카르타고 전쟁) 편은 2세기에 쓰여졌으며 폴리비우스에 크게 의존하지만 독립적인 세부 사항도 포함한다. 그럼에도 현대 학자들은 폴리비우스의 설명을 주요 사료로 의존하며, 현대 저작의 전쟁 세부 사항은 대부분 그의 기록 해석에 기반한다.
카르타고의 파괴는 단순한 역사적 각주가 아니다. 그것은 수사학의 힘과 역사를 형성하는 능력에 대한 깊은 사례다. "카르타고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는 외침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지속적인 문구 중 하나가 되었고, 전쟁, 경쟁, 그리고 정치 전략에 대한 현대적 논의에서도 여전히 인용된다. 처칠은 나치 독일에 대해 이 문구를 사용했고, 냉전 시대에는 소련에 대해, 현대에는 테러리즘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증오가 어떻게 정책이 되고, 반복이 어떻게 설득이 되며, 집념이 어떻게 역사를 쓰는지에 대한 증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중해 연안의 재더미 속에서, 5만 명의 노예가 된 생존자들의 삶 속에서, 그리고 완전히 파괴된 한 문명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새겨졌다. 3차 포에니 전쟁은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교훈이자, 정치적 수사학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이며, 강대국이 약소국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무자비한 힘에 대한 증언이다.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했는가? 역사는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의는 여전히 침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