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26년 5월, 히다스페스 강변에서 인류 역사를 바꿀 장면이 펼쳐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인도 제후 포로스가 거느린 군대와 맞붙었을 때, 마케도니아인들의 눈앞에는 그들이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한 적 없는 거대한 존재들이 서 있었다. 포로스 왕의 군대에는 200마리에 달하는 코끼리가 있었는데, 이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동물이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는 알렉산드로스가 치른 가장 힘든 전투 중 하나였으며, 전투가 낮 여덟 번째 시간까지도 결정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했다. 이날 벌어진 코끼리 부대와의 대결은 정복왕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의 병사들이 더 이상의 인도 진군을 거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코끼리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5톤 가까이 나가는 거대한 몸집에 육상동물 중 최강의 힘을 가졌으며, 무엇보다 머리가 좋아 사람의 지시를 잘 이해했다. 전쟁터에서 코끼리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코끼리들은 철제 스파이크가 박힌 상아로 많은 손실을 입히거나, 코로 적을 들어올려 짓밟았다. 하지만 이들의 진정한 무기는 물리적 파괴력만이 아니었다. 코끼리를 처음 본 적군에게 공포와 무력감을 주어 전의를 꺾고 전선을 흐트러지게 하는 심리적 효과가 엄청났다. 병사들이 똘똘 뭉쳐 진형을 형성하고 싸우는 것이 필수였던 전근대 시대에, 공포심으로 인해 진형이 무너지면 그대로 게임이 끝났다. 현대인도 코끼리를 보면 그 위압감을 느끼는데, 집채만 한 괴수를 태어나서 처음 본 고대 병사들이 겪었을 정신적 충격은 짐작하기 어렵다.
코끼리가 전쟁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악샤우히니 전투 대형은 전차 1대, 코끼리 1대, 기병 3명, 보병 5명의 비율로 구성되었다. 고대 인도 왕들은 전쟁에서 코끼리를 분명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일부는 코끼리 없는 군대는 사자 없는 숲이나 왕 없는 왕국만큼이나 비열하다고 말했다. 인도에서 시작된 코끼리 전술은 점차 서쪽으로 전파되어 페르시아 제국에 이르렀고, 결국 지중해 세계로 퍼져나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코끼리와 처음 만난 것은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였다. 페르시아군은 15마리의 코끼리를 전선 중앙에 배치했고, 마케도니아 왕국군에 너무나 큰 인상을 주어서 알렉산드로스는 전투 전날 밤 공포의 신 포보스에게 희생제를 바쳐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진정한 시험은 인도에서 펼쳐졌다.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포로스군의 전투 코끼리 부대에 맞선 알렉산드로스의 방진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으며, 부상당한 코끼리들이 진지로 달려와 병사들이 자기들 코끼리에게 살해당하는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이 전투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포로스와의 전투 후,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더 나아가려 했지만 병사들은 갠지스 강 건너편의 난다 왕조가 보병 20만 명, 기병 6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용 코끼리 6천 마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에 질색했다. 10년간의 전쟁에 지친 마케도니아군은 히페시스 강에서 항명 사태를 일으켰고, 불세출의 정복왕도 결국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계승자들은 알렉산드로스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지만, 코끼리의 위력에도 매료되었다. 디아도코이 전쟁 시기 여러 후계자들이 코끼리 부대를 운용했으며, 지중해 세계에서 코끼리는 점차 군사력의 상징이 되었다. 코끼리 부대를 운용한 나라들의 목록을 보면 아케메네스 왕조, 아르사케스 왕조,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 카르타고, 로마 제국,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의 난다 왕조, 마우리아 제국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고대 국가 중에서도 가장 부강한 곳들이었다. 코끼리를 보유하는 것 자체가 국력의 증명이었다.
코끼리 부대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기원전 218년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한니발은 보병 3만 8천 명, 기병 8천 명, 코끼리 37마리에 해당하는 대병력을 이끌고 스페인을 떠나 피레네 산맥으로 향했다. 로마는 그가 해안을 따라 행군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한니발은 예상을 깨고 알프스를 넘는 대담한 작전을 택했다. 그는 공성장비를 버리고 코끼리는 끌고 산을 넘었으며, 알프스를 넘는 코끼리 부대라는 역사적 진풍경이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알프스 행군은 참혹했다. 한니발은 눈 덮인 봉우리들을 9일이 지나서야 겨우 산꼭대기에 올랐고, 병사들은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한 뒤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은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어 내려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고, 한번 미끄러지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걸핏하면 눈사태가 일어나 많은 병사들이 골짜기 아래로 사라졌다. 코끼리들은 워낙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동물이기 때문에 낯선 땅을 갈 때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는데, 이 코끼리들을 재촉해 평지도 아닌 얼음 덮인 산을 넘어가야 했으니 코끼리들이나 병사들이나 죽을 고생을 했다. 알프스를 넘으면서 한니발은 무려 절반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는데, 보병 3만 8천은 2만으로, 기병 8천 기는 6천 기로 줄어 있었으며, 밧줄로 묶어 끌어올리는 등 온갖 고생을 해가면서 끌고 온 전투 코끼리 37마리도 대거 폐사했다.
한니발의 군대가 험로를 돌아 알프스를 넘어 한겨울에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왔을 때 로마인들은 충격에 빠졌으며, 코끼리 부대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한니발의 코끼리들은 알프스를 넘는 동안 고생을 하도 많이 한 탓에 이탈리아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되어 한 마리만 남고 몽땅 죽어버렸고, 홀로 살아남은 한 마리는 전투에 투입하지 않고 그냥 한니발이 타고 다녔다. 초기 한니발이 연승한 전투들에서도 트레비아 전투를 제외하면 코끼리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뒤 칸나이 전투가 벌어진 다음 해에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40마리를 공수받아 활용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한니발의 코끼리들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니발의 최후 전투인 자마 전투에서 코끼리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한니발이 가져온 80마리의 코끼리는 원래대로라면 2년 이상 조련시켜야 하는 부대를 급조한 것이다 보니 훈련이 잘 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고 성장조차 끝나지 않은 어린 개체들이 수두룩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진형을 조절해서 길을 터 주는 방법을 이용하여 카르타고의 코끼리 부대의 돌격을 흘려보냈다. 이는 매우 숙련된 부대에서나 가능한 대처법이었지만, 로마군은 이를 해냈다. 코끼리는 방향 전환이 느리고,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가도 적군이 진형을 조절해서 길을 터 주면 그리로 빠져서 그냥 지나가 버리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코끼리 부대의 또 다른 문제는 통제의 어려움이었다. 로마 보병들은 종종 코끼리의 코를 잘라내 즉각적인 고통을 유발하고, 코끼리가 자신의 진영으로 도망치게 하려고 시도했다. 코끼리는 쉽게 놀라고 공포를 느끼면 자기편 병사들도 마구 짓밟는 위험한 존재였다. 고전 고대에서 코끼리 부대를 교란하는 또 다른 방법은 전투 돼지를 배치하는 것이었는데, 고대 작가들은 코끼리가 가장 작은 돼지의 꽥꽥거리는 소리에도 겁을 먹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디아도코이 전쟁 중 메가라 포위전에서 메가라 주민들은 돼지 떼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다음 적군의 밀집된 전투 코끼리 쪽으로 몰아붙였고, 코끼리들은 결국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에피로스 왕 피로스가 로마를 침공할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코끼리 부대가 쇠퇴한 결정적 이유는 경제적 문제였다. 코끼리는 하루에 평균 100킬로그램의 먹이를 먹으며, 전쟁터라는 특성상 전투 코끼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열량을 소모하므로 저 유지비의 배는 먹여 줘야 했다. 게다가 코끼리는 추위에 약해서 겨울에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따뜻하게 해주며 신경을 많이 써 줘야 했고, 결국 코끼리 부대 하나를 운용하기 위해선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난 돈을 써야 했다. 더욱이 코끼리는 인공적인 가축화가 거의 불가능해서 야생 코끼리를 사로잡아 길들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런 이유로 고대의 세계에서 코끼리 부대는 경제력이 필요한 비싼 무기였는데, 코끼리 부대를 소유하는 것으로 주변 국가에 국력을 과시하며 기선제압을 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코끼리의 위력은 그것을 운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나왔다.
동아시아에서 코끼리 부대는 더욱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사의 몇몇 남중국 왕조들은 전투 코끼리를 운용했는데, 초나라는 기원전 506년에 오나라에 대항하여 코끼리 꼬리에 횃불을 묶어 적군 병사들 사이로 보냈지만 실패했다. 남한은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영구적인 전투 코끼리 부대를 유지했던 국가로, 이 코끼리들은 등 위에 10여 명의 사람을 태울 수 있는 탑을 운반할 수 있었으며, 948년 한나라의 초나라 침공 중에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970년에 송나라가 남한을 침공했고, 그들의 쇠뇌병들은 971년 1월 23일 샤오 함락 중 한나라 코끼리들을 쉽게 격퇴했으며, 이것이 중국 전쟁에서 코끼리가 사용된 마지막 사례였다.
동남아시아는 코끼리 부대가 가장 오래 활용된 지역이었다. 동남아시아 역사적 왕국들의 군대에서 코끼리는 영구적인 요소가 되었다. 베트남에서 전투 코끼리는 13세기 몽골의 진군을 막는 데 사용되었으며, 서기 1세기에 쯩 자매는 한나라를 상대로 벌인 항전에 코끼리를 타고 나갔고, 이후 중국에 또다시 대항한 자오 부인도 전투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버마, 시암,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문명에서 코끼리는 전형적인 권력의 상징으로, 총기의 출현에도 코끼리 등에 자리 잡은 높은 횃대는 명사수들에게 굉장한 전술적 유리함을 제공했다.
화약 무기의 발달은 코끼리 부대의 시대를 완전히 끝냈다. 1413년 중국 명나라 군대가 베트남 군대와 전쟁을 벌일 때, 베트남 군대가 코끼리 부대를 앞세우자 명나라 군대는 첫 번째 화살로 코끼리를 조종하는 기수한테 쏘게 하고, 두 번째 화살로 코끼리의 코를 맞추게 하여 베트남군이 거느린 코끼리들을 놀라 달아나게 하는 수법으로 격파했다. 코끼리는 머스킷 공격에 버틸 수 있지만, 대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포는 코끼리의 거대한 몸집을 오히려 완벽한 표적으로 만들었고, 코끼리 한 마리를 운용할 비용으로 훨씬 많은 총기병을 운용할 수 있었다.
코끼리 부대는 약 2천 년에 걸쳐 인류 전쟁사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어 페르시아, 지중해 세계, 동남아시아로 확산된 코끼리 전술은 단순한 군사 전술을 넘어 권력과 국력의 상징이었다. 알렉산드로스를 좌절시키고, 한니발에게 영감을 주고, 로마군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이 거대한 존재들은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전략 무기였다. 하지만 막대한 유지비용, 통제의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화약 무기의 등장은 이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냈다. 코끼리 부대의 역사는 기술의 발전이 아무리 강력한 무기도 결국 시대의 흐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교훈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때로는 잔혹하게 전쟁에 이용해왔는지를 증명하는 기록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https://namu.wiki/w/%EC%A0%84%ED%88%AC%20%EC%BD%94%EB%81%BC%EB%A6%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