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51년 6월 20일,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 지방의 카탈라우눔 평원에서 유럽의 운명을 가를 충돌이 벌어졌다. 한편에는 '신의 재앙'이라 불리던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제국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서로마 제국 최후의 걸출한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 서고트 왕 테오도리크 1세가 이끄는 연합군이 있었다. 이 전투는 단순히 두 세력의 군사적 대결이 아니었다. 쇠락해가는 로마 문명과 유라시아 초원에서 몰아친 새로운 힘의 충돌이었으며, 중세 유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이 된 사건이었다.
이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5세기 중반 유럽의 정세를 살펴봐야 한다. 서로마 제국은 이미 제국의 실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갈리아는 명목상으로만 로마의 영토였고, 실제로는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각자의 세력권을 구축하며 난립하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아키텐 지방에, 부르군트족은 론 강 유역에, 프랑크족은 라인 강 하류에 정착해 있었다. 이들은 로마의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포에데라티(foederati) 지위를 받았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이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과 외교를 병행하며 로마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이는 줄타기나 다름없었다. 그에게는 이들을 완전히 제압할 군사력이 없었고, 게르만 부족들은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로마의 정규 군단은 이미 대부분 해체되었고, 제국의 방어는 이제 용병과 게르만 동맹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불안정한 균형을 깨뜨린 것은 동쪽에서 불어온 폭풍이었다. 훈족의 왕 아틸라는 440년대에 동로마 제국을 굴복시키고 막대한 조공을 받아내며 권력의 정점에 올라 있었다. 443년, 그는 발칸 반도를 유린하며 나이수스(현재의 니시)와 세르디카(현재의 소피아)를 파괴했다. 447년의 우투스 강 전투에서는 동로마의 야전군을 궤멸시켰다. 이 전투에서 로마의 총사령관 아르네기스클루스가 전사했고, 그의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동시대 역사가들은 "100개 이상의 도시가 함락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이 거의 위험에 처했다"고 기록했다. 전쟁이 끝난 후 체결된 조약은 가혹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밀린 조공 6천 로마 파운드(약 2천 킬로그램)의 금을 즉시 지불해야 했고, 연간 조공은 3배로 증가해 2,100 로마 파운드(약 700킬로그램)에 달했다. 더욱이 동로마는 다뉴브 강 남쪽으로 5일 행군 거리에 해당하는 광대한 영토를 비워야 했다. 이는 완충지대라는 명목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로마 영토의 할양이었다.
아틸라는 게피드족, 오스트로고트족, 튀링기족, 헤룰리족, 루기족, 스키리족 등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을 복속시켜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제국은 우랄 강에서 라인 강까지, 발트 해에서 다뉴브 강까지 뻗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목 부족 연맹이 아니라 조직화된 제국이었다. 아틸라는 '로가데스'(logades)라 불리는 선발된 귀족들을 통해 각 지역을 통치했고, 이들은 조공 징수와 군대 동원을 책임졌다. 훈족은 여전히 유목민이었지만, 다뉴브 강과 티사 강 유역에 정착하며 이전의 아시아 초원 생활과는 다른 형태의 국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아틸라의 서진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계획된 정복이었다.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가 서로마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부추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450년 봄에 발생했다.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누이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가 아틸라에게 은밀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호노리아는 418년경에 태어나 어린 나이에 아우구스타(Augusta) 칭호를 받았지만, 실질적인 정치권력은 없었다. 30대가 된 호노리아는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에우게니우스와 불륜 관계를 맺었고, 임신까지 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격노했고, 에우게니우스는 처형되었다. 호노리아는 정략결혼의 수단으로 늙고 무능한 원로원 의원 헤르쿨라누스와 결혼하도록 강요받았다.
이것이 호노리아를 절망에 빠뜨렸다. 그녀는 환관 히아킨투스를 통해 아틸라에게 반지와 함께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것이 결혼 제안이었는지, 단순한 도움 요청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아틸라는 이를 결혼 제안으로 해석했거나 그렇게 해석하기로 선택했다. 그는 호노리아를 자신의 신부로 주장하며 서로마 제국 영토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요구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히아킨투스는 고문당한 끝에 참수되었고, 호노리아도 처형될 뻔했다. 오직 어머니 갈라 플라키디아의 필사적인 중재로 그녀의 목숨은 간신히 살아났다. 하지만 아틸라는 이를 구실로 451년 봄 갈리아 침공을 결행했다.
훈족의 침공은 파죽지세였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아틸라의 군대는 50만 명에 달했다고 하지만, 이는 분명한 과장이다. 그러나 8세기 시인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야만인 세계가 거대한 격변으로 찢어지며 북쪽 전체가 갈리아로 쏟아져 들어왔다"고 묘사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아틸라의 군대가 최소 5만에서 최대 1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이것도 5세기 기준으로는 엄청난 규모였다. 4월에 라인 강을 건너 메츠를 4월 7일에 약탈한 아틸라의 군대는 남하하며 트리어, 쾰른, 랭스, 아미앵 등 수많은 도시들을 파괴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연기와 잿더미만 남았다. 갈리아의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성벽 안으로 피신했고, 많은 이들이 난민이 되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6월 초에 이르러 아틸라는 오를레앙을 포위했다. 이 도시는 단순한 요새가 아니라 갈리아 방어의 핵심 거점이었다. 오를레앙이 함락되면 론 강 유역으로 가는 길이 열리고, 갈리아 남부의 풍요로운 지역 전체가 훈족의 수중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더욱이 이 지역은 알란족 왕 상기반이 통치하고 있었다. 일부 사료는 상기반이 아틸라에게 성문을 열어주기로 약속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근거 없는 비방이었다. 실제로 알란족은 오를레앙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6월 14일까지 성벽을 지켰고, 아틸라의 맹공을 4일간의 폭우 속에서도 견뎌냈다. 많은 현대 역사가들은 오를레앙 포위전이 실제로 451년 전역의 결정적 순간이었으며, 알란족의 완강한 방어가 훈족의 서진을 저지한 진짜 승리였다고 평가한다.
위기 속에서 아에티우스는 평생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오랫동안 적대관계였던 서고트족의 왕 테오도리크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동맹을 제안했다. 그의 논리는 명료했다. 훈족이 갈리아를 장악하면 서고트 왕국도 다음 목표가 될 것이며, 지금 함께 싸우지 않으면 각개격파당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테오도리크도 이 위협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서고트족은 이미 수십 년간 훈족의 압박을 받아왔다. 처음에 테오도리크는 망설였다. 아에티우스가 이끌고 온 병력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에 따르면, 아에티우스는 "정규군 한 명도 없이 적고 흩어진 보조군만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테오도리크는 자신의 왕국을 지키려면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에티우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는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이었다.
아에티우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리푸아리아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알란족, 사르마티아족, 아르모리카의 브리튼인들, 색슨족, 리파리우스(라인 국경수비대) 출신 병사들까지 끌어모았다. 특히 올리브리오네스(Olibrones)라 불린 부대는 "한때 로마 군인이었고 이제는 동맹군의 정예"로 묘사되었다. 이 연합군의 구성은 그 자체로 당시 갈리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싸웠던 적들이었다. 프랑크족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굴복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부르군트족은 아에티우스에게 패배해 강제 이주당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훈족이라는 공동의 위협 앞에서 이들은 하나로 뭉쳤다. 이것은 단순한 군사 동맹이 아니라, 새로운 유럽 질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6월 14일, 아에티우스와 테오도리크의 연합군이 오를레앙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틸라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는 그의 전략적 판단을 보여준다. 도시 포위 중에 적 야전군의 공격을 받는 것은 양면 작전을 의미했고, 이는 아무리 강력한 군대라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의 군대는 갈리아의 자원을 거의 다 소진했다. 수만 명의 군대와 그들의 말을 먹이는 것은 엄청난 보급 부담이었고, 오를레앙에서 며칠만 더 지체했다면 심각한 식량 부족에 직면했을 것이다. 아틸라는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찾기 위해 북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는 트루아 근처의 카탈라우눔 평원을 선택했다. 이곳은 완만하게 경사진 넓은 평야로, 훈족의 주력인 기병이 기동하기에 적합했다. 아에티우스의 연합군도 아틸라를 추격했다. 그들은 훈족을 라인 강에 등을 대고 싸우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훈족의 치명적인 기동전술인 위장 퇴각을 봉쇄할 수 있었다. 6월 19일 아침 4시경, 훈족의 정찰병들은 트루아 서쪽 약 7.5킬로미터 지점의 평원에서 로마 연합군이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전투 전날 밤, 아틸라는 훈족의 전통에 따라 점을 쳤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고 불에 탄 뼈를 긁어 미래를 읽는 샤먼들의 의식이 거행되었다. 역사가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점괘는 훈족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나 적의 위대한 지도자가 전사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틸라는 이 '적의 지도자'를 아에티우스로 해석했고, 그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점괘가 가리킨 사람은 아에티우스가 아니라 테오도리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틸라는 전투를 결심했다. 그는 제9시(오후 3시경)까지 전투를 늦추라고 명령했다. 만약 패배하더라도 어둠이 그의 군대가 전장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해줄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전투 당일, 두 군대는 고대의 관습에 따라 좌익, 중앙, 우익으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요르다네스는 전장이 "가파른 경사로 능선까지 올라가는 평원"이었다고 묘사한다. 이 능선이 전투의 중심이 되었다. 아틸라는 자신이 이끄는 훈족 정예 기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좌익에는 오스트로고트족을, 우익에는 게피드족을 배치했다. 훈족은 먼저 전장에 도착해 능선의 오른쪽을 점령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실수였다. 그는 낮은 지대를 선택해 로마군을 내려오게 만들고, 그들이 하강하는 동안 궁기병으로 공격하려 했다. 기동성과 충격 효과에 의존하는 훈족은 정면 충돌을 선호하지 않았고, 지형을 이용한 매복과 포위를 즐겼다.
아에티우스는 더욱 신중했다. 그는 서고트족을 우익에, 알란족을 중앙에, 자신이 이끄는 로마군과 프랑크족을 좌익에 배치했다. 이 배치에는 깊은 의도가 있었다. 알란족은 과거 훈족에게 복속되었던 경험이 있어 일부 역사가들은 그들의 충성도를 의심했다. 하지만 현대 연구들은 이것이 편견이었음을 보여준다. 알란족은 오를레앙 방어의 중추였고, 그들의 기병은 로마식 전술과 함께 싸우는 방법을 숙지하고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그들을 중앙에 배치함으로써 훈족의 주공을 받아낼 완충지대를 만들었다. 동시에 가장 강력한 서고트군을 우익에 배치해 아틸라의 좌익인 오스트로고트족을 압박하도록 했다. 이것은 같은 고트족끼리 싸우게 만드는 계산된 배치였다. 좌익에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로마군과 프랑크 전사들을 배치해 게피드족을 견제하도록 했다.
전투는 오후 3시경 시작되었다. 전장을 지배하는 핵심은 중앙의 능선이었다. 이 언덕을 점령하는 쪽이 지형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훈족이 능선의 오른쪽을 먼저 차지했지만, 정상은 아직 비어 있었다. 아에티우스와 테오도리크의 장남 토리스문드는 즉시 능선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서고트 기병대가 먼저 도착해 정상을 점령했고, 이어서 아에티우스의 로마 기병이 좌측 능선을 장악했다. 훈족 기병대가 정상을 향해 반복적으로 돌격했지만, 지형적 우위를 점한 서고트와 로마 기병은 그들을 격퇴했다. 이것이 전투의 흐름을 결정짓는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본격적인 전투는 참혹했다. 서고트 기병대는 아에티우스의 계획대로 오스트로고트 진영을 맹렬히 공격했다. 같은 고트족끼리의 싸움은 특히 치열했다. 오스트로고트족은 훈족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서고트족과는 공통의 언어와 문화, 오랜 역사적 유대가 있었다. 이 복잡한 감정이 전장에서 폭발했다. 일부 오스트로고트 전사들은 마지못해 싸웠고, 다른 이들은 복수의 기회로 여겼다. 서고트군은 결국 오스트로고트 진영을 돌파하기 시작했고, 아틸라의 측면을 위협하게 되었다.
중앙에서는 훈족의 정예 기병과 알란족이 격돌했다. 아틸라는 약한 로마 보병이 중앙을 지키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의 계획은 무질서한 훈족식 전술로 중앙을 고정시키고, 주력 부대는 적의 측면을 격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보병이 아니라 숙련된 알란 기병대였다. 알란족은 훈족의 전술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 자신도 뛰어난 궁기병이었다. 그들은 훈족의 위장 후퇴에 속지 않았고, 대형을 유지하며 중앙 방어선을 끝까지 지켰다. 그들의 충성은 의심받을 것이 아니라 칭송받아야 마땅했다.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 테오도리크 왕이 말에서 떨어져 전사했다. 어떤 기록은 그가 적군에게 공격받았다고 하고, 다른 기록은 그가 자기 군대의 말굽에 짓밟혔다고 한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그가 군대를 결집시키려다가 측면 공격을 받던 중 쓰러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점괘가 예언한 '적의 지도자의 죽음'이 실현된 것이었다. 서고트군은 왕의 죽음에 분노했고, 이는 그들을 더욱 맹렬하게 만들었다. 고대 게르만 전통에서 전장에서 왕이 죽는 것은 최고의 명예였지만, 동시에 복수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토리스문드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광분했다. 그는 휘하의 서고트 기병을 이끌고 훈족 진영으로 돌진했다. 그들은 아틸라의 군대를 거의 와해 직전까지 몰아붙였고, 아틸라 자신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다.
혼란 속에서 훈족의 왕은 결국 자신의 마차 진지로 후퇴했다. 훈족은 전통적으로 마차를 원형으로 배치해 방어진을 구축하는 라거(laager) 전술을 사용했다. 아틸라는 이 마차 요새 안에서 버텼고, 그의 병사들은 마차 사이에서 궁을 쏘며 연합군의 공격을 막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아틸라가 외부 참호까지 파서 방어를 강화했다고 주장한다. 6월 19일 오후,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날, 아틸라의 후위대인 게피드 궁수와 보병 1만 5천 명이 아에티우스의 선봉대인 프랑크 전사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충돌에서만 양측 합쳐 1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밤이 되자 전투는 멈췄다. 전장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동시대 기록은 "셀 수 없이 많은 시체"(cadavera vero innumera)라고 묘사했다. 시신들이 평원을 뒤덮었고, 작은 개울은 피로 물들어 흘렀다. 히다티우스는 "거의 30만 명이 그 전투에서 쓰러졌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과장이다. 현대 군사사학자들은 전체 참전 병력을 양측 합쳐 10만에서 12만 명으로 추정하며, 사상자는 수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이것은 5세기 기준으로 엄청난 참사였다.
아에티우스는 승리를 거머쥔 것처럼 보였다. 아틸라는 포위되었고, 그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연합군은 다음 날 최종 공격을 가해 훈족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아틸라는 마차 진지 안에서 화장용 장작더미를 쌓았다고 한다. 패배해 생포되면 자결하려는 의도였다. 밤 동안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고, 부대들은 어둠 속에서 뒤섞였다. 토리스문드는 적극적으로 추격하다가 자신의 근위대와 함께 본대와 분리되었고, 훈족 진영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간신히 탈출했다. 아에티우스 자신도 자기 부대와 연락이 끊겨 밤을 서고트 동맹군 진영에서 보냈다.
다음 날 아침 6월 21일, 연합군은 훈족의 침묵에 놀랐다. 아틸라의 진영에서는 나팔 소리도, 전사들의 함성도 들리지 않았다. 정찰병들은 훈족이 여전히 마차 진지에 갇혀 있으며,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최종 공격의 완벽한 기회였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고트 후계자 토리스문드에게 빨리 톨로사로 돌아가 왕위를 확보하라고 권했다. 테오도리크의 다른 아들들, 특히 프레데리크가 권력을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왕위 계승 분쟁에서 늦는 자가 지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토리스문드는 이 조언을 받아들여 서고트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갔고, 수천 명의 병사들이 장례 행렬에 합류했다. 서고트족이 떠나자 연합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얼마 후 아에티우스도 철수를 명령했다.
왜 아에티우스는 아틸라를 섬멸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은 수세기 동안 역사가들을 괴롭혀왔다.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권력 균형의 정치학이다. 아에티우스는 아틸라가 완전히 사라지면 서고트족이 너무 강해질 것을 우려했다. 훈족은 서고트족을 견제하는 카드였고, 서고트족은 훈족을 견제하는 카드였다. 둘 다 약화시키는 것이 로마에게는 최선이었다. 만약 아틸라를 완전히 파괴했다면, 테오도리크(혹은 이제는 토리스문드)는 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로마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에티우스의 권력은 그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에 달려 있었다. 외부 위협이 사라지면 그의 정치적 입지도 사라지는 것이었다.
또한 아에티우스 자신의 권력 기반도 고려해야 한다. 그의 군대는 상당 부분 훈족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420년대에 그는 훈족의 인질로 지내며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전술을 익혔다. 아틸라의 삼촌이자 이전 훈족 왕이었던 루기라는 그의 후원자였다. 아에티우스는 430년대에 요한네스 찬탈자를 지지할 때 훈족 용병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비록 늦게 도착해 요한네스는 이미 패배했지만,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군사력을 이용해 갈라 플라키디아와 협상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그는 계속 훈족 전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아틸라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군사적 권력 기반을 약화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에티우스는 아틸라와 개인적 관계가 있었다. 그들은 함께 자랐고, 서로를 이해했다. 적이긴 했지만, 완전히 제거해야 할 존재는 아니었다.
더욱이 실용적인 고려사항도 있었다. 연합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었고, 피로했다. 마차 진지에 갇힌 훈족을 공격하는 것은 더 많은 사상자를 의미했다. 아틸라는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고, 그의 군대는 마지막까지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이미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 갈리아는 구원되었고, 훈족의 무적 신화는 깨졌으며, 연합군은 승리를 증명했다. 왜 더 많은 로마 병사들을 희생시켜야 하는가? 아에티우스에게 이것은 충분한 승리였다.
전투의 피해 규모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6세기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전장에 50만 명이 있었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기록했다. 히다티우스는 165,000명 혹은 300,000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군사사학자들은 이것이 크게 과장되었다고 본다. 당시의 병참 기술을 고려할 때, 그렇게 많은 병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보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김 해리스 같은 학자들은 양측 합쳐 10만에서 12만 명 정도가 참전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상자는 아마도 전투 당일과 그 전날의 충돌을 포함해 2만에서 5만 명 사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5세기 기준으로 엄청난 규모였고, 참전한 병력의 30-40%가 사상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투의 직접적 결과는 명확했다. 아틸라는 패배했고 갈리아에서 철수했다. 그는 라인 강을 건너 자신의 영토로 돌아갔다. 훈족의 무적 신화는 깨졌고,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그의 권위는 약화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452년 봄, 아틸라는 복수를 결심하고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번에는 서고트족의 방해도, 강력한 야전군의 저항도 없었다. 아에티우스는 충분한 병력을 모을 수 없었다. 훈족은 아퀼레이아를 3개월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고,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 이어서 밀라노, 파도바, 베로나, 비첸차가 차례로 약탈당했다. 아틸라는 로마로 진군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다른 요인들이 그를 막았다. 기근과 질병이 훈족 군대를 휩쓸었다. 이탈리아 북부는 이미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있었고, 식량이 부족했다. 많은 병사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다뉴브 강을 건너 훈족의 본거지를 공격했다. 아틸라는 본국이 위협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설에 따르면 교황 레오 1세가 아틸라를 만나 설득해 철수시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실용적 이유들이 더 결정적이었다. 아틸라는 이탈리아에서 철수했지만, 발렌티니아누스에게 호노리아와의 결혼을 여전히 요구하며 다시 돌아오겠다고 위협했다.
453년 초, 역사는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아틸라는 새로운 아내 일디코와의 결혼식 밤에 갑자스럽게 사망했다. 공식 기록은 비출혈로 인한 질식사라고 했다. 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암살 가능성을 제기한다. 어쨌든 그의 죽음은 훈족 제국의 붕괴를 가져왔다. 아틸라의 아들들은 제국을 나눠 가지려 했지만, 이것이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454년, 게피드족의 왕 아르다리크는 네다오 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오스트로고트족, 헤룰리족, 루기족을 설득해 반훈족 동맹을 결성했다. 네다오 전투에서 아틸라의 장남 엘락이 전사하고 훈족 군대가 궤멸되었다. 불과 1년 만에 유럽을 지배하던 제국은 붕괴되었다. 살아남은 훈족들은 흩어져 다른 부족들에게 흡수되거나 다뉴브 강 북쪽으로 사라졌다. 100년이 지나지 않아 훈족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아에티우스 역시 비극적 운명을 맞았다. 454년 9월 21일,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가 너무 강력해졌다고 판단해 그를 직접 암살했다. 라벤나의 궁전에서 아에티우스가 재정 보고를 하고 있을 때, 황제는 갑자기 검을 뽑아 그를 찔렀다. 환관 헤라클리우스도 함께 칼을 들었고, 둘이 함께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위대한 장군을 살해했다. 아에티우스는 방어할 시간도 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의 시신은 궁전 바닥에 버려졌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아에티우스가 자신의 아들을 황제로 만들려 한다는 소문을 믿었다. 하지만 그가 제거한 것은 위협이 아니라 제국을 지탱하던 기둥이었다.
동시대인들은 이것이 자살 행위임을 즉시 깨달았다. 한 귀족은 황제에게 "당신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잘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정확한 평가였다. 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 자신도 암살당했다. 아에티우스의 부하들인 옵틸라와 트라우스틸라가 복수를 위해 황제를 살해한 것이다. 그들은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사주를 받았다는 의혹이 있었다. 막시무스는 즉시 황제로 즉위했지만, 불과 2개월 후 반달족의 로마 약탈 중에 살해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후 21년 동안 9명의 황제가 즉위했고, 그 중 대부분이 폭력적으로 퇴위당했다. 476년 9월 4일,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며 서로마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카탈라우눔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이 전투는 훈족의 서진을 저지하고 서유럽이 훈족의 영구적 지배를 받는 것을 막았다. 18세기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이 전투가 없었다면 갈리아가 훈족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고, 기독교 서유럽 문명의 형성이 크게 지연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과장일 수 있지만, 전투가 유럽사의 흐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만약 훈족이 갈리아를 정복했다면, 그들은 그곳에 영구적인 정착지를 건설했을 것이다. 훈족은 이미 판노니아에서 유목 생활에서 반정착 생활로 전환하고 있었다. 갈리아의 풍요로운 땅은 그들이 진정한 왕국을 건설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유럽의 민족 구성과 문화 발전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이다.
둘째, 이 전투는 로마 제국이 군대답게 싸운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다. 아에티우스 이후 서로마에는 그와 같은 역량을 가진 지휘관이 나오지 않았다. 451년 이후의 서로마 군사 작전들은 대부분 방어적이거나 소규모였다. 대규모 야전군을 모으고, 복잡한 연합을 조율하고,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아에티우스와 같은 능력은 사라졌다. 카탈라우눔은 로마 군사력의 백조의 노래였다. 로마 군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로마의 군사 전통과 전략적 사고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빛을 발한 순간이 바로 카탈라우눔이었다.
셋째, 이 전투는 새로운 유럽 질서의 탄생을 예고했다. 로마인과 게르만인이 연합해 공동의 적과 싸웠다는 사실은 상징적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로마 대 야만인의 싸움이 아니었다. 갈리아의 기독교화된 게르만 왕국들과 로마의 잔존 세력이 아시아의 이교 유목민에 맞서 싸운 것이었다. 로마 제국이 사라진 후 들어선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프랑크 왕국, 서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은 모두 카탈라우눔에서 함께 싸웠던 부족들이 세운 나라였다. 그들은 로마법을 받아들이고, 라틴어를 사용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로마-게르만 혼합 문명을 창조했다. 중세 유럽은 이 혼합에서 탄생했고, 카탈라우눔은 그 과정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특히 프랑크족의 경우, 이 전투는 그들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아에티우스와 함께 싸운 프랑크 전사들은 로마의 군사 훈련과 조직을 경험했다. 그들은 대규모 연합 작전에서 어떻게 싸우는지 배웠다. 칠데리크 1세는 카탈라우눔의 교훈을 잊지 않았고, 그의 아들 클로비스는 이 기반을 활용해 갈리아 전역을 정복했다. 486년 수아송 전투에서 클로비스는 로마 장군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북부 갈리아를 장악했다. 496년 톨비악 전투에서는 알라만니족을 물리쳤다.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는 서고트 왕국을 패배시켜 아키텐을 차지했다. 프랑크 왕국은 카탈라우눔의 연합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더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를 건설했다. 중세 프랑스 왕국의 뿌리는 여기에 있다. 카를 대제가 800년에 서로마 황제로 즉위했을 때, 그는 단순히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카탈라우눔에서 시작된 로마-게르만 융합의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넷째, 카탈라우눔 전투는 알란족의 충성과 용맹을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역사는 알란족을 신뢰할 수 없는 세력으로 묘사했다. 요르다네스는 알란족이 훈족에게 투항할 것을 우려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현대 연구들은 이것이 편견이었음을 밝혀냈다. 알란족은 오를레앙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의 왕 상기반은 아틸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로마 편에서 싸웠다. 카탈라우눔에서 알란 기병대는 훈족의 주공을 받아내며 중앙 방어선을 지켰다. 이들 없이는 연합군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알란족은 전투 후에도 갈리아에 남아 로마-게르만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의 후손들은 프랑스 역사에 흡수되었고, 일부 지명에 그들의 이름이 남았다. 알랑송(Alençon)이라는 도시 이름은 "알란인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잊혀진 영웅들이지만, 유럽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기여했다.
다섯째, 이 전투는 기병 중심 전술의 진화를 보여주었다. 카탈라우눔은 로마 제국 초기의 보병 중심 전술에서 중세의 기병 중심 전술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훈족의 복합궁 기병은 기동성과 원거리 화력을 결합했다. 그들은 적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화살로 적을 괴롭힐 수 있었고, 위장 후퇴로 적을 흩어지게 만들 수 있었다. 서고트의 중기병은 충격력과 근접전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창과 검으로 무장했고, 밀집 대형으로 돌격해 적진을 돌파했다. 알란의 창기병은 두 전술의 중간에 있었다. 그들은 기동성도 갖추고 있었지만, 근접전에서도 효과적이었다. 이 세 가지 기병 유형이 모두 카탈라우눔에 등장했고, 그들의 상호작용은 중세 기병 전술의 발전을 예고했다. 수세기 후 프랑크 기사들과 비잔틴 카타프락토이는 이 전투의 교훈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하지만 카탈라우눔 전투에는 비극도 있다. 아에티우스의 결정은 단기적으로는 현명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만약 그가 아틸라를 완전히 격파했다면 어땠을까? 452년의 이탈리아 침공은 없었을 것이고, 북이탈리아의 파괴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퀼레이아는 여전히 번영하는 항구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밀라노와 파도바의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과 약탈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에티우스 자신도 황제의 의심을 덜 받았을지 모른다. 발렌티니아누스가 아에티우스를 죽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훈족과 너무 가깝다는 의심이었다. 황제는 아에티우스가 왜 아틸라를 살려주었는지 궁금해했고, 배신의 가능성을 의심했다. 카탈라우눔에서의 선택이 결국 그 자신의 파멸로 이어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아에티우스를 위대하게 만든 정치적 교활함이 결국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그는 너무 영리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제국의 이익을 희생시켰다고 여겨졌다.
더 깊이 생각하면, 아에티우스의 딜레마는 쇠락하는 제국의 모든 지도자가 직면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제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은 이미 이름뿐이었고, 실질적 권력은 게르만 왕국들에게 넘어가고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래가 게르만 왕국들의 것임을 깨달았고, 자신의 역할은 단지 그 전환이 너무 폭력적이거나 혼란스럽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관점에서 아틸라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은 권력 공백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 공백은 통제할 수 없는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약한 훈족과 약한 서고트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더 안전해 보였다.
카탈라우눔 전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위기 앞에서 적대자들도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에티우스와 테오도리크는 수십 년간 싸웠지만, 더 큰 위협 앞에서는 손을 잡았다. 프랑크족과 부르군트족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생존이 이념보다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세계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본다. 상호 적대적인 국가들이 공동의 위협 앞에서 일시적으로 협력한다. 카탈라우눔은 이런 실용적 동맹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선례다.
둘째, 완전한 승리가 항상 최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에티우스는 권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다. 이것이 옳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복잡한 정치적 현실을 고려했음은 분명하다. 현대 국제정치에서도 비슷한 계산이 작동한다. 때로는 적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보다 약화시키고 견제하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일 수 있다. 적의 완전한 제거는 새로운, 어쩌면 더 위험한 권력 공백을 만들 수 있다. 아에티우스는 이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셋째, 개인의 능력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에티우스 한 사람의 존재가 서로마 제국을 20년 더 연장시켰다. 그가 사라지자 제국도 곧 붕괴했다. 이것은 리더십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쇠락하는 국가도 탁월한 지도자가 있으면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지도자는 드물고, 그들이 사라지면 붕괴는 더욱 가속화된다. 아에티우스는 이런 비극적 영웅의 전형이다. 그는 로마를 구할 수 없었지만, 그것의 종말을 지연시켰다. 그리고 그 지연은 의미가 있었다. 그 20년 동안 게르만 왕국들은 더욱 성숙했고, 로마의 제도와 문화를 더 많이 흡수했다. 로마 제국이 혼란 속에 갑자기 붕괴했다면, 암흑시대는 훨씬 더 길고 어두웠을 것이다.
넷째, 역사적 결정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아에티우스는 자신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믿었지만, 그 결과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틸라를 살려준 것이 이탈리아 침공을 초래했고, 훈족과의 연결이 그 자신의 살해로 이어졌다. 토리스문드를 서둘러 돌려보낸 것은 서고트 왕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지만, 토리스문드는 2년 만에 동생들에게 살해당했다. 권력 균형을 유지하려던 아에티우스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폭력의 연쇄를 촉발했다. 역사는 인간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가장 신중한 계획도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다섯째, 문명의 전환기에서 개인들이 직면하는 도덕적 딜레마다. 아에티우스는 로마인이었지만 훈족 용병을 사용했다. 그는 제국을 지키려 했지만 게르만 왕국들의 독립을 허용했다. 그는 승리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 이유로 적을 살려주었다. 이런 선택들은 도덕적으로 모호하다. 그를 비난할 수도, 칭송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직면한 상황의 복잡성을 이해한다면, 단순한 도덕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는 불완전한 정보와 제한된 자원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오늘날 샹파뉴 평원을 방문하는 사람은 1600년 전 그곳에서 유럽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포도밭과 밀밭이 펼쳐진 평화로운 풍경만이 있을 뿐이다. 관광객들은 이 지역의 유명한 샴페인을 마시며 풍요로운 농지를 감상한다. 하지만 그 땅 아래에는 수만 명의 뼈가 묻혀 있고, 그들의 희생 위에 중세 유럽이 건설되었다. 정확한 전장 위치조차 확실하지 않다. 메리-쉬르-센(Méry-sur-Seine) 근처라는 설도 있고, 모이리(Moirey) 근처라는 설도 있다. 고고학적 증거는 제한적이다. 몇몇 무기와 유골이 발견되었지만, 대규모 전투의 흔적을 확실히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 어쩌면 수세기의 농경으로 모든 흔적이 지워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탈라우눔은 집단 기억 속에 살아있다. 프랑스인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역사의 일부로 여긴다.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의 후손으로서, 그들은 훈족을 물리친 조상들을 자랑스러워한다. 독일인들도 이 전투를 기억한다. 니벨룙겐의 노래 같은 중세 서사시는 아틸라(에첼왕)와 그의 시대를 전설화했다. 헝가리인들에게 아틸라는 민족 영웅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훈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비록 언어학적·유전학적 증거는 이것을 뒷받침하지 않지만, 문화적 정체성에서 아틸라는 여전히 중요하다.
카탈라우눔 전투는 또한 서구 문명의 생존담으로 해석되어 왔다. 18세기와 19세기의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기독교 문명과 야만의 충돌로 묘사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만약 아에티우스가 패배했다면, 옥스퍼드의 강단에서 코란이 가르쳐지고 있을 것"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겼다. 이것은 물론 과장이다. 훈족은 이슬람교도가 아니었고, 그들이 서유럽을 정복했더라도 그들의 문화는 결국 기독교와 로마 문명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서사는 서구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카탈라우눔은 "문명의 구원"을 상징하게 되었다.
현대 역사학은 더 균형 잡힌 관점을 제시한다. 훈족은 단순한 야만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복잡한 외교를 구사했고, 조직화된 국가를 건설했으며, 다양한 문화를 통합했다. 아틸라는 잔인했지만 무능하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고 정치가였다. 동시에 서로마 제국은 더 이상 문명의 등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패하고, 분열되고, 약화된 체제였다. 게르만 부족들은 야만인이 아니라 로마화된 전사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미 기독교로 개종했고, 라틴어를 사용했으며, 로마의 제도를 모방했다. 카탈라우눔은 문명 대 야만의 싸움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에서 권력과 영토를 둘러싼 복잡한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의미는 축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만약 훈족이 승리했다면, 5세기 후반과 6세기 초반의 유럽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프랑크 왕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가톨릭교회의 확장은 지연되었을 것이며, 봉건제의 발전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중세 유럽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중세 없이는 르네상스도, 계몽주의도, 현대 서구 문명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달랐을 것이다.
로마인, 고트인, 프랑크인, 훈족이 한데 뒤섞여 싸웠던 그날, 고대 세계는 끝났고 중세가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의 통일성은 깨졌지만, 로마의 유산은 살아남았다.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그들은 라틴어로 법령을 작성했고, 로마의 관직 명칭을 사용했으며, 로마 도시들을 수도로 삼았다. 비잔틴 제국은 동쪽에서 로마의 전통을 천 년 더 이어갔다. 가톨릭교회는 로마의 조직 구조를 물려받았다. 교황은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역할을 계승했고, 교구는 로마 행정구역을 따랐다. 로마는 정치적으로는 멸망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영원했다.
카탈라우눔 전투는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함성이었다. 더 이상 제국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날만큼은 로마의 독수리와 게르만의 늑대가 함께 포효했다. 아에티우스는 '마지막 로마인'이라 불렸다. 그는 로마 제국이 이미 게르만화되었고, 미래는 게르만 왕국들의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시대에 최선을 다했고, 그것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가치가 있다. 그는 구원할 수 없는 것을 지키려 했고, 되돌릴 수 없는 조류를 막으려 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성공했다. 그것이 영웅의 비극이자 영광이다.
테오도리크 왕도 영웅의 죽음을 맞았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고트족 전통에서 전장에서의 죽음은 최고의 명예였다. 그의 장례는 성대했다. 요르다네스는 "전장에서 그들은 왕을 찾기 시작했고, 많은 시신들 속에서 발견했다... 그들은 큰 슬픔으로 그를 애도했다"고 기록했다. 서고트 전사들은 전투가 끝난 후에도 왕의 시신을 찾아 헤맸다. 어둠 속에서 햇불을 들고 시체더미를 뒤졌다. 마침내 왕의 시신을 찾았을 때, 그들은 전장에서 즉석 장례식을 거행했다. 전사들은 칼과 방패를 부딪치며 죽은 왕을 경배했다. 이것이 게르만 전통이었다. 그리고 이 전통이 카탈라우눔 평원에서 로마의 제도와 만났다.
알란족의 왕 상기반도 기억되어야 한다. 그는 오를레앙을 배신하지 않았다. 아틸라의 회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편에 섰다. 그의 기병대는 전투의 중심에서 싸웠고, 훈족의 주공을 막아냈다. 상기반은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갈리아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거의 잊었다. 요르다네스와 다른 역사가들은 그를 의심했고, 후대의 기록은 그의 역할을 축소했다. 이것은 역사의 불공정함을 보여준다. 승자의 이야기는 기억되지만, 소수 민족의 공헌은 잊혀진다.
프랑크족도 카탈라우눔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의 전사들은 전투 전날 게피드족과 격렬한 충돌을 벌였다.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는 "프랑크인들과 게피드인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고, 해가 지기 전에 1만 5천 명이 쓰러졌다"고 기록했다. 프랑크 전사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무기인 프란시스카(투척용 도끼)와 스크라마삭스(긴 칼)로 무장했다. 그들은 밀집 대형으로 싸우지 않고, 느슨한 대형으로 개인 무용을 발휘했다. 이것은 로마식 전술과 달랐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효과적이었다. 프랑크족은 이 경험을 통해 대규모 전투를 치르는 법을 배웠고, 이것이 나중에 그들이 갈리아를 정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전투가 끝난 후 아틸라는 자신의 마차 진지에서 화장용 장작더미를 쌓았다고 한다. 프리스쿠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틸라는 "만약 적이 진지를 돌파하면, 아무도 그를 포로로 잡을 수 없도록" 자신을 불태울 준비를 했다. 이것은 훈족 지도자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그는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굴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에티우스는 그에게 그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틸라는 살아서 떠날 수 있었고, 자신의 제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패배했지만 파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를 바꿨다.
만약 아틸라가 카탈라우눔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훈족 제국은 즉시 붕괴했을 것이다. 그의 아들들은 아직 어렸고, 제국을 유지할 권위가 없었다. 게르만 부족들은 즉시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고, 훈족의 지배는 한 세대 더 일찍 끝났을 것이다. 452년의 이탈리아 침공은 없었을 것이고, 아퀼레이아와 밀라노는 파괴를 면했을 것이다. 베니스는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베니스는 훈족의 침공을 피해 석호로 피난한 사람들이 세운 도시다. 아틸라가 없었다면, 베니스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아틸라는 살았고, 452년에 다시 왔다. 이번에는 갈리아가 아니라 이탈리아였다. 그는 아드리아 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며 도시를 하나씩 파괴했다. 아퀼레이아는 3개월의 포위 끝에 함락되었다. 프로코피우스는 "도시가 너무 철저히 파괴되어 나중에 방문자들은 그곳에 도시가 있었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과장이지만, 아퀼레이아가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한때 번영하던 이 항구 도시는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오늘날 아퀼레이아는 작은 마을에 불과하고, 고고학 유적만이 과거의 영광을 증언한다.
밀라노는 아퀼레이아보다 운이 좋았다. 아틸라는 도시를 점령했지만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는 황궁에서 로마 황제가 훈족에게 굴복하는 그림을 보았다고 한다. 아틸라는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 했고, 화가에게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그리고 로마 황제들을 자신의 발 아래 그리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그의 야망을 보여준다. 그는 단순히 약탈자가 아니라 정복자가 되고 싶었다. 그는 로마 제국을 대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교황 레오 1세가 아틸라를 만나 설득해 로마를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라파엘로의 유명한 프레스코화는 이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교황이 아틸라 앞에 서고, 하늘에서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이 나타나 아틸라를 위협한다. 아틸라는 공포에 질려 철수를 결정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이야기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레오가 아틸라를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다. 질병, 기근, 동로마의 위협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전설을 통해 자신의 권위를 높였다. 로마 군단이 로마를 지킬 수 없을 때, 교황이 로마를 구했다는 서사는 중세 교황권의 토대가 되었다.
453년 아틸라의 죽음은 극적이었다. 결혼식 밤에 코피로 질식사했다는 공식 설명은 의심스럽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새 신부 일디코가 그를 암살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일디코는 게르만 여성이었고, 어쩌면 아틸라에게 복수하려는 동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설명은 과도한 음주와 코피의 결합이었다는 것이다. 아틸라는 결혼 축제에서 과도하게 술을 마셨고, 취한 상태에서 잠들었다. 밤중에 코피가 났지만, 그는 너무 취해서 깨어나지 못했고, 피가 기도로 역류해 질식했다는 것이다. 어느 설명이 맞든, 그의 죽음은 훈족 제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아틸라의 장례는 화려했다. 그의 시신은 금, 은, 철 세 개의 관에 넣어졌다. 금은 그가 정복한 부를, 은은 그의 왕권을, 철은 그의 무기를 상징했다.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훈족 전사들은 얼굴을 베어 피로 그를 애도했다. 이것은 훈족의 전통이었다. 그들은 눈물이 아니라 피로 슬픔을 표현했다. 아틸라의 무덤 위치는 비밀로 유지되었다. 무덤을 만든 노예들은 모두 살해되어 비밀을 지켰다. 오늘날까지 아틸라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카탈라우눔 평원에서의 그날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나 패배를 넘어선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로마 제국의 통치는 끝나가고 있었지만, 로마의 문명은 게르만 왕국들 속에서 변형되어 살아남았다. 기독교 신앙, 라틴 언어, 로마법은 야만인 왕국들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 혼합에서 중세 유럽이, 나아가 현대 서구 문명이 탄생했다. 카탈라우눔은 그 탄생의 진통이었고, 피로 쓴 새 시대의 서문이었다.
16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전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그것은 문명의 충돌이었는가? 권력 투쟁이었는가? 아니면 단순히 야심찬 지도자들의 대결이었는가? 아마도 그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카탈라우눔은 복잡한 동기, 우연한 사건, 개인적 선택, 그리고 거대한 역사적 힘들이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복잡성이 그것을 흥미롭게 만든다.
우리가 카탈라우눔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어쩌면 이것이다. 역사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 451년 6월의 그 순간들에, 다른 결정들이 내려질 수 있었고,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었다. 아에티우스가 서고트족과 동맹하지 않았다면, 아틸라가 오를레앙을 함락시켰다면, 테오도리크가 살아남았다면, 아에티우스가 아틸라를 섬멸했다면. 무수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선택이 우리가 아는 세계를 만들었다.
카탈라우눔 평원의 포도밭 아래 잠든 전사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아마 그들 대부분은 그냥 살아남으려 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왕을 따랐고, 자신들의 부족을 지켰으며, 자신들의 땅을 방어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역사적 순간"이 아니라 공포와 혼란의 하루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희생이 세상을 바꿨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