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의 가미카제-죽음의 전체주의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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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0월 21일 오전 6시 15분, 레이테만 상공에서 아이치 D3A 급강하 뇌격기 한 대가 호주 해군 기함 HMAS Australia의 함교를 향해 돌진했다. 200킬로그램 폭탄은 불발되었지만 운동에너지만으로 30명이 사망하고 3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것이 조직적으로 계획된 첫 가미카제 공격이었다. 이후 종전까지 짧은 기간 동안 3,800명에서 1만 4천 명에 이르는 청년들이 폭탄을 안은 채 적함을 향해 날아갔고, 돌아오지 못했다. 신풍특별공격대, 일명 가미카제는 단순한 군사작전이 아니라 근대 국가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 사례였다.


가미카제라는 이름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일본 원정 당시 태풍이 여몽연합군을 물리쳤다는 역사적 기억에서 유래했다. 신이 일으킨 바람이 일본을 구했다는 이 신화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의 국가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국가 신토라는 종교적 교리와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 결합하면서, 일본은 개인을 국가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이런 토양 위에서 가미카제는 단순한 절망적 군사작전이 아니라, 죽음을 영광으로 포장하는 전체주의적 논리의 완성형이 되었다.


가미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배경을 이해하려면 1942년 미드웨이 해전부터 살펴봐야 한다. 5분 만에 주력 항공모함 3척이 격침되면서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 전력은 사실상 붕괴했다. 1944년 6월 마리아나 해전에서는 369기를 투입해 239기를 잃으면서 겨우 미군기 31기를 격추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숙련된 조종사들은 이미 소진되었고, 신속하게 양성된 신병들은 기술적으로 미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폭격으로는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격추당하는 상황에서, 일본군 수뇌부는 조종사를 폭탄을 표적까지 유도하는 생체 컴퓨터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흥미롭게도 일본 내부에서도 처음부터 가미카제가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1943년 6월 특수항공대 편성 구상이 제출되었을 때 군 수뇌부는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자 1944년 10월 5일, 마침내 필리핀에서 특공작전이 결정되었다. 당시 일본은 반년 내에 연료가 고갈될 것을 알고 있었고, 레이테만 전투를 최후의 공격으로 삼아 강화조약을 통해 만주사변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전략적 판단이라기보다는 현실 부정에 가까웠다. 당시 황태자였던 아키히토조차 "그럼 병력을 소모하는 것뿐이 아닌가?"라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가미카제의 실체는 일본이 선전하던 이미지와 크게 달랐다. 전후 일본은 특공대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지원했으며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출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원한다'와 '열렬히 지원한다'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주어졌고, 거부는 용납되지 않았다. 최연소 조선인 가미카제였던 박동훈은 출격 전 녹음에서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일본이 가족들을 책임져주겠다고 해서 군에 왔다"는 그의 진심을 기억했다. 출격이 결정된 날 밤 침상에서 큰 소리로 울었다는 동기의 증언도 있다. 일본군은 출격 전 강제로 웃는 사진을 찍게 했는데, 이는 선전용이었다.


특공대원들이 남긴 유서는 이 비극의 실상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낸다. 22세의 나이로 전사한 우메하라 유지는 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전쟁을 끝낼 수 없다면 평화는 결국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내리막길인 전쟁을 벌일 필요가 있는가?"

교토제대 재학 중 징집된 24세의 하야시 타다오는 더 직설적이었다.

"승산이 없는 상황에 자포자기한 상층부의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이들의 유서에는 천황 만세나 애국심보다는 억울함, 분노, 그리고 삶에 대한 미련이 가득했다. A6M 조종사였던 하라다 가나메는 전후 증언에서 "전쟁 중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들 하는데 난 그런 전우는 단 한 명도 보질 못했어요. 모두가 마지막 순간 '엄마'를 외치더군요"라고 말했다. 선전 영화 속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공포에 떠는 젊은이들의 절규가 진실이었다.


한 가미카제 생존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 같은 우수한 파일럿을 죽이다니. 일본은 끝장이야. 난 굳이 몸으로 들이받지 않아도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킬 수 있다고."

또 다른 교관은 "아직까지도 눈을 감으면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눈에 선한데 수많은 제자들이 가미카제로 끌려갔다. 어째서 일본군 사령부는 그런 어리석은 작전을 10개월이나 지속했는가"라고 회고했다. 이들의 증언은 가미카제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의 생명을 도구화한 최악의 인권유린이었음을 드러낸다. 심지어 에이스 조종사였던 이와모토 테츠조는 1944년 제2항공전대에서 가미카제 대원을 모집하자 "이렇게까지 해서 내리막길인 전쟁을 벌일 필요가 있는가? 승산이 없는 상황에 자포자기한 상층부의 마지막 발악이라 생각하지 않는가?"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전후 전설적인 전투기 조종사가 된 사카이 사부로도 "가미카제는 일본 고래의 기습작전에 따른 것인데, 한 번은 성공하더라도 10개월 동안 몇 번씩 시도하면 어떤 바보가 당하겠습니까? 천황께서 그걸 깨닫고 멈추도록 지시했어야 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가미카제의 전과는 일본의 선전과 달리 매우 제한적이었다. 작전 성공률은 겨우 6%에 불과했다. 레이테만 해전에서는 5척을 격침하고 23척을 대파했지만, 정규 항공모함이나 대형 전함 같은 주력 함정은 단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했다. 오키나와 전투까지 합쳐 총 60척의 연합군 함정을 격침했지만, 이는 투입된 인력과 자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성과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정도의 성과라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숙련된 조종사가 모두 소진된 상황에서 신병들이 정상적으로 폭격하는 것보다는 몸으로 들이받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군사적 효율성이 아니라 시스템의 붕괴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가미카제는 항공 특공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 해군은 1944년 초부터 93식 어뢰를 개조한 유인어뢰 '가이텐'을 개발했다. 표면적으로는 어뢰를 발사하고 귀환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실제로 작전 후 돌아온 가이텐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합판으로 만든 5미터 크기의 자폭 보트 '신요'도 배치되었는데, 250킬로그램의 폭약을 싣고 적함에 돌진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요코스카 MXY-7 '오카'였다. 벚꽃을 뜻하는 이름이 붙은 이 무기는 본질적으로 사람이 탑승하는 로켓 폭탄이었다. 1.2톤의 탄두를 장착하고 시속 1,000킬로미터 이상으로 적함에 돌진하도록 설계된 오카는 755기가 생산되었다. 미군은 이를 '바카 밤'이라 불렀는데, 일본어로 바보를 뜻하는 말이었다. 조종사는 모기인 일식육상공격기에 매달려 목표 근처까지 운반된 뒤 분리되어 로켓 엔진으로 적함을 향해 날아갔다. 탈출 장치는 애초에 없었다. 가이텐의 명중률은 2%에 불과했고, 신요로 격침된 연합군 함선은 4척뿐이었다.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온갖 특공 전술이 창안되고 실행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전쟁의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인명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광기에 빠져들었음을 보여준다.


가미카제의 조종사들 중에는 조선인도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18명이며, 대부분 20대 전후의 청년들로 교토제국대학이나 동경제국대학에 유학 중이던 엘리트들이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 동원정책을 강화했고, 특공대 양성을 위해 학교에서 항공열을 부추겼다. 활공과를 정식 과목으로 지정하고, 모형비행기 제작과 글라이더 훈련을 실시하며 비행에 대한 환상을 심었다. 조선총독부는 '육군소년비행병' '항공기승무원양성소' 등을 설치해 조선 청년들이 특공대로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많은 조선 청년들은 항공기술에 대한 동경, 일본인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심리, 무료 교육의 기회라는 인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특공대에 지원했다. 이는 식민지배의 모순이 가장 여실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었다.


가미카제를 둘러싼 많은 통속적 이미지들은 사실이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했던 "연료를 반만 싣고 출격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다. 실제로는 정상적으로 연료를 채웠으며, 단지 귀환을 전제하지 않았을 뿐이다. "약이나 술에 취해 출격했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다. 조종사들은 명료한 정신으로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출격해야 했다. 이것이 오히려 더 잔인한 진실이었다. 그들은 도취 상태에서가 아니라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가미카제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소련의 대숙청과 함께 전체주의 국가가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말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다. 일본은 첨단 항공기술과 전근대적 종교 교리를 결합시켜 조종사들을 정밀유도 무기의 부품으로 전락시켰다. 오늘날 정밀유도 무기에서 컴퓨터가 하는 일을 당시에는 인간이 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이러한 죽음의 일상화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장치로 기능했다. 특공대원들에게 야스쿠니는 신성한 존재였고, 그곳에 합사된다는 약속은 죽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심리적 기제였다.


전쟁이 끝난 지 80년 가까이 지났지만, 일본은 가미카제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다. 특공대원 전사자들을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며, 이들을 애국심과 자기희생의 상징으로 계속 미화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 기간 내내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상징하는 곳이었고, 신사에 합사된다는 것은 죽음의 고귀함을 보장받는다는 뜻이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들 사이에서는 "야스쿠니에서 다시 보자"는 인사말이 마지막 작별 인사로 유행할 정도였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위안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심리적 통제 기제였다. 조선인 특공대원들 역시 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으며, 죽어서도 일본의 선전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다. 유족들이 합사 철회를 요구해도 야스쿠니 신사는 "신의 좌가 하나이므로 일부만 빼낼 수 없다"는 종교적 논리로 거부한다. 일본 사회 일각에서는 특공대원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지원했다는 왜곡된 서사를 유지하려 하지만,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증언, 해제된 문서들은 이것이 거짓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가미카제는 단순히 과거의 어리석은 군사작전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개인을 어떻게 도구화하고, 죽음을 어떻게 영광으로 포장하며, 광기를 어떻게 정상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죽음의 운명공동체'라는 논리는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개인의 생명보다 집단의 목표를 우선시하고, 희생을 강요하며, 이를 숭고한 가치로 포장하는 모든 시도는 가미카ze의 논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역사는 망각되는 순간 반복된다. 가미카제를 기억한다는 것은 특공대원들의 개별적 비극을 기억하는 동시에, 국가가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구조적 폭력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전체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이 어떻게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경계하는 것이다. 1944년 레이테만 상공에서 폭탄을 안고 적함을 향해 날아간 청년들의 공포와 절망은,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전체주의가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B9%B4%EB%AF%B8%EC%B9%B4%EC%A0%9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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