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6년 4월 20일, 무사시국 가와고에성 일대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판도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밤, 8천 명의 호조씨 군대가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가진 연합군에게 전면적인 기습을 감행했다. 이 전투는 훗날 오케하자마 전투, 이쓰쿠시마 전투와 함께 일본 3대 기습전의 하나로 기록되지만, 그 역사적 중요성과 극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많은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가와고에 성 전투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관동 지방의 정치구조를 완전히 재편한 전환점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관동 지방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무로마치 막부가 설치한 가마쿠라 막부의 후신으로 관동 10개국을 통치하던 가마쿠라 공방은 아시카가 모토우지의 자손들이 세습하고 있었고, 그들을 보좌하는 관동관령은 우에스기 가문이 대대로 맡아왔다. 이 체제는 수세기 동안 관동 지방의 질서를 유지하는 축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호조 소운으로 시작된 후기 호조씨가 이즈와 사가미를 기반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 전통적인 질서는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호조 우지쓰나가 무사시국을 정복하기 위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거성인 가와고에성을 공략한 것은 1537년의 일이었다. 가와고에는 단순한 지방 거점이 아니었다. 이 성은 우에노와 에치고 방면에서 가마쿠라로 향하는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물자와 정보가 모이는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였다. 호조씨가 이 성을 장악함으로써 관동에서의 입지는 크게 강화되었지만, 이는 동시에 기존 권력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545년 8월, 호조 우지야스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무사시 신겐의 지원을 받아 호조령인 가와도 지역을 공격해 들어온 것이다. 우지야스는 서쪽에서 이마가와와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관동 전역에 동원령을 내려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와 함께 가와고에성을 포위했다. 더욱이 호조 우지야스의 처남이자 명목상 관동의 최고 권력자인 고가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까지 연합군에 가세했다.
이 연합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큰 차이를 보인다. 군기물인 『가마쿠라 구대후키』와 『간하치슈 고센로쿠』는 8만에서 8만 5천이라는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연구자들은 이 수치에 회의적이다. 성경쟁생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군을 3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군을 1만 5천, 고가 공방군을 수천에서 1만 정도로 추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총병력이 2만에서 3만에 달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가와고에성을 지키고 있던 호조 쓰나시게의 수비대는 3천, 구원군으로 나선 호조 우지야스의 병력은 8천에 불과했다.
우지야스는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직면했다. 정면 대결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는 먼저 이마가와와의 분쟁부터 해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가와도 지역을 양보하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강화를 맺은 것이다. 오다와라 성에서 불과 하코네 산맥 하나를 사이에 둔 지역을 적에게 넘긴다는 것은 전략적으로 큰 손실이었지만, 우지야스는 가와고에성의 전략적 가치가 훨씬 높다고 판단했다. 이 냉철한 우선순위 설정이 이후 전개될 극적인 역전의 첫 단추였다.
이마가와와의 강화 이후에도 우지야스는 즉시 가와고에로 향할 수 없었다. 이마가와를 경계하는 동시에 병력을 재정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가와고에성의 호조 쓰나시게는 반년 가까이 포위망 속에서 버텨야 했다. '지황팔만'의 깃발로 알려진 맹장 쓰나시게는 압도적인 적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성을 굳건히 지켰다. 연합군은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지만, 신속한 함락을 이루지 못한 채 대치 상황이 장기화되었다.
1546년 4월, 드디어 우지야스가 가와고에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8천의 병력으로는 포위망을 정면돌파할 수도, 연합군과 정규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우지야스는 철저히 계산된 심리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는 연합군 진영에 "지금까지 빼앗은 영토를 모두 돌려드리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는 항복의 의사를 내비치는 듯 보였고, 연합군은 점차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실제로 우지야스는 수차례에 걸쳐 허위 공격을 감행한 후 퇴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연합군은 "호조 우지야스는 무능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치밀하게 계획된 기만전술이었다. 우지야스는 성내의 쓰나시게에게 작전을 전달해야 했다. 군기물인 『오다와라 호조키』에 따르면, 쓰나시게의 동생 후쿠시마 벤치요라는 젊은 무사가 단기로 포위망을 뚫고 성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적병들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하게 접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것은 군기물의 각색일 가능성이 높지만, 우지야스가 어떤 방식으로든 성내와 연락을 취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4월 20일 밤, 우지야스는 드디어 결정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가장 유력한 설은 그가 성의 남쪽 스나쿠보 지역에 진을 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의 진영을 기습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지야스가 훗날 남긴 서신에는 이 전투를 '스나쿠보의 싸움'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 설에 신빙성을 더한다. 이 기습이 정확히 야간에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부 사료는 한밤중의 야습이라고 기록하는 반면, 『호조 고다이키』는 정오 무렵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전한다. 현대 연구자들은 우지야스가 심야에 진군을 시작해 새벽녘에 공격을 개시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공격의 방식은 매우 독창적이었다. 우지야스는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도록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갑옷을 벗음으로써 움직일 때 나는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고 기동성을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호조군은 3개 부대로 나뉘어 적진에 돌입했고, 돌파한 후 다시 돌아서서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어둠 속에서 전후좌우 어디에서든 공격이 이어지자 연합군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동료와 적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동료끼리의 오인 공격까지 발생했다.
바로 그 순간, 성내의 쓰나시게가 만반의 준비를 끝낸 3천의 병력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출격했다. 안팎에서 협공을 받은 연합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는 전사했고, 그가 이끌던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은 이날로 멸망했다. 관동관령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고즈케국 히라이로 패주했고,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시모우사로 도망쳤다. 가와고에성 서쪽의 도묘지 부근은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고, 후대에 이곳 땅을 팠을 때 400~500개의 두개골이 출토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극적인 승리에 대한 사료는 놀랍게도 매우 부족하다. 호조 우지야스가 발급한 감장, 즉 공로를 치하하는 문서가 단 한 건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특히 이례적이다. 반면 패배한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발급한 감장은 여러 건 확인된다. 4월 26일자 혼조 구나이쇼유 앞 서신, 4월 26일자 하라 나가메마루 앞 서신, 4월 27일자 아카호리 고즈케노카미 앞 서신 등이 그것이다. 이들 문서에는 "지난 20일 가와고에의 일전"이라는 구절이 있어 4월 20일에 확실히 전투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혼조 도사부로, 하라 다쿠미노스케, 아카호리 고즈케노카미 등이 전사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렇다면 왜 승자인 호조씨 측의 기록이 이토록 빈약한 것일까? 몇 가지 가설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 전투가 예상보다 혼란스럽고 무질서하게 전개되어 개별 무사들의 공적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둘째, 우지야스가 의도적으로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을 최소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적의 허를 찌른 기습전이었기에 정통 무사도의 관점에서 볼 때 찬양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는 해석이다.
셋째, 단순히 문서가 후대에 소실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료의 부족은 전투의 세부사항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연합군의 병력 규모, 야간 전투 여부, 정확한 공격 위치, 전투의 지속 시간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학자들 간에 이견이 존재한다. 심지어 일부 연구자들은 '가와고에 야전'이라 불리는 극적인 단일 전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천문 10년에도 가와고에에서 호조와 우에스기 간의 전투가 있었고, 이때 우지야스가 발급한 감장이 여러 건 남아있다. 이들 연구자는 천문 10년부터 15년까지 일어난 여러 차례의 교전을 후대의 군기물 작가들이 하나의 극적인 사건으로 재구성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제2차 고노다이 전투의 경우에도 2년에 걸친 두 차례 전투를 『호조 고다이키』가 하나의 사건으로 통합했다는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의문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1546년 4월 20일을 전후로 관동 지방의 권력 구도가 완전히 전복되었다는 것이다.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은 멸망했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고가 공방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호조씨는 무사시국은 물론 관동 대부분 지역에서 패권을 확립했다. 이것은 수백 년간 유지되어온 관동의 전통적 질서가 새로운 권력으로 대체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가와고에 전투 이후 호조 우지야스는 관동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했다. 그는 1554년에 다케다씨, 이마가와씨와 고소순 삼국동맹을 맺어 외교적 안정을 확보하고 내정에 집중했다. 우지야스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뛰어난 행정가이기도 했다. 그는 평정중이라는 독자적인 관료기구를 창출하여 영내의 소송 처리 등을 담당하게 했다. 천문 19년(1550년)에는 영국 전역에 대대적인 세제개혁을 단행했다. 이것은 천문 18년 대지진으로 영민들이 대규모로 도주하는 '국중제군퇴전'이라는 위기에 대응한 것으로, 북조씨가 전 영국 규모로 실시한 최초의 덕정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우지야스의 명성은 확고했다. 1561년 우에스기 겐신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오다와라성을 포위했을 때, 우지야스는 견고한 방어를 펼쳐 겐신을 물리쳤다. 1569년에는 다케다 신겐이 공격해왔지만, 우지야스는 성에서 나오지 않고 버텨 신겐을 철수시켰다. 우지야스는 평생 36번의 전투에 출전하면서 단 한 번도 등을 돌린 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의 얼굴과 몸에는 일곱 개의 칼자국이 있었는데, 모두 몸의 앞면에 입은 상처였다고 한다. 이러한 용맹성 때문에 그는 '사가미의 사자'로 불렸다.
가와고에 전투는 단순히 한 전투의 승패를 넘어 전국시대 일본에서 권력의 정당성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로마치 막부의 임명에 기반한 전통적 권위는 실질적인 군사력과 통치 능력 앞에서 무력했다. 호조씨는 외래 세력이었지만, 효과적인 영국 경영과 압도적인 군사적 성과로 관동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실력주의가 혈통주의를 압도한 전국시대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오늘날 가와고에시 시타마치의 도묘지 경내에는 '가와고에 야전 유적'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가와고에시 지정 사적으로,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용한 사찰 터에서 500년 전 벌어진 극적인 사건의 실체를 온전히 복원하기는 불가능하다. 사료의 부족과 군기물의 과장,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진실을 안개 속에 가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와고에 전투가 일본 전국시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명확하다. 이 전투는 수적 열세를 지략과 기동력, 그리고 과감한 결단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오케하자마의 오다 노부나가, 이쓰쿠시마의 모리 모토나리와 마찬가지로, 북조 우지야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기적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라 치밀한 전략적 판단, 철저한 심리전, 그리고 무엇보다 목표를 향한 흔들림 없는 집중력의 산물이었다. 가와고에성 전투는 그렇게 전국시대 관동의 운명을 결정짓고, 일본 군사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D%98%B8%EC%A1%B0%20%EC%9A%B0%EC%A7%80%EC%95%BC%EC%8A%A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