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0년 5월 19일, 일본 전국시대의 역사는 단 한 번의 전투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2만 5천의 대군을 이끈 이마가와 요시모토에 맞서 오다 노부나가가 본진을 공격해 요시모토를 토벌한 오케하자마 전투는 단순한 승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전투는 동해 지방을 지배하던 이마가와 가문의 몰락과 오다 노부나가의 급부상, 그리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훗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독립이라는 세 가지 역사적 전환을 동시에 만들어낸 분수령이었다.
전투의 규모와 결과만 놓고 보면 오케하자마는 기적에 가까운 승리였다. 27세의 오다 노부나가가 4천 명의 병력으로 2만 5천의 이마가와 군에 도전해 승리했다는 사실은 당대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 승리를 단순히 운이나 기습의 성공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이 전투가 지닌 복잡한 전략적 맥락을 간과하는 것이다. 노부나가의 승리는 정보전, 심리전, 그리고 대담한 결단력이 결합된 결과였으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패배는 단순한 방심이 아니라 구조적 취약점이 폭로된 결과였다.
오케하자마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투 직전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스루가와 토토미 지역을 지배하는 수호 다이묘로서, 무력만이 아니라 혈통에서도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아시카가 장군가의 혈통을 잇는 기라 가문의 분가로서, 아시카가 가문의 후계가 끊길 경우 요시모토의 집안에서 후계자가 나올 수 있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반면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슈고다이(수호대)에 불과했으며, 전투 전년도에야 비로소 오와리를 통일하고 자신이 옹립한 수호 시바 요시카네를 추방해 오와리의 국주가 되었다. 신분상으로나 세력으로나 이마가와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요시모토는 왜 오와리로 진격했을까. 전통적으로는 요시모토가 교토로 상락해 무로마치 막부의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요시모토가 상락해 무로마치 막부의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현재는 오와리 동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요시모토가 직접 출진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오와리 동부는 원래 이마가와의 영지였으나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가 빼앗은 땅이었다. 노부히데가 사망하고 오와리가 혼란에 빠지자, 요시모토는 구영지를 되찾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와리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미카와 지배를 안정시키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투 전개 과정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오타 규이치가 저술한 『신장공기(信長公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사료는 노부나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인물의 기록으로서, 후대에 작성된 문학적 각색이 많은 오세 호안의 『신장기』와는 달리 높은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신장공기』는 기록성이 강한 반면, 『신장기』는 호안 자신의 사관에 의한 개찬이 보이며 사료 가치가 낮다고 평가된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5월 17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구쓰카케 성에 도착했으며, 18일 밤에는 마쓰다이라 모토야스가 오다카 성에 병량을 넣었다. 그리고 18일 저녁, 마루네 요새를 지키던 사쿠마 다이가쿠와 와시즈 요새를 지키던 오다 겐바로부터 19일 아침 요새가 공격받을 것이라는 보고가 기요스 성의 노부나가에게 전달되었다. 놀라운 것은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군의 작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부나가 측에서 쓰인 『신장공기』에 이마가와 측 작전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이마가와 측에 내통자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그날 밤 노부나가의 행동은 가신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군의 전략은 전혀 없이 세간의 잡담만 하다가 밤이 깊어지자 귀가하라고 해산시켰으며, 가로들은 "운이 다하면 지혜의 거울도 흐려진다"며 조롱하며 돌아갔다. 그러나 이는 노부나가의 계산된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신을 집으로 돌려보낸 것은 가신 중에 내통자가 있을 것을 경계한 것이며, 가신이 돌아간 후 노부나가는 노를 읊고 춤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적을 앞두고 노를 즐긴다는 것은 단순한 태평함이 아니라 침착함의 표현이었다.
5월 19일 새벽, 이마가와 군은 마루네 요새와 와시즈 요새를 공격했다. 노부나가는 즉시 출진했다. 열전 신궁에 참배하고 진을 정비한 뒤 이마가와 군의 상황을 살펴보니 "적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4만 5천을 이끌고 오케하자마 산에서 인마를 쉬게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전투 장소에 대한 논쟁이다. 전통적으로는 요시모토가 낮은 곳에 진을 쳤고 노부나가가 산 뒤에서 공격했다는 설이 유명했지만, 『신장공기』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토벌당한 장소는 '오케하자마 산'이었다. '오케하자마 산'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으며, 1745년 오와키 마을 그림에는 오와키 마을과 오케하자마 마을 경계에 표시되어 있고, 1781년 오치아이 마을 그림에는 조금 더 남쪽의 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요시모토가 움푹 파인 곳이 아니라 높은 지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부나가의 전술은 대담했다. 젠쇼지 요새에 많은 '노보리'(깃발)를 세워 오다 군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으며, 이로써 요시모토에게 들키지 않고 오케하자마로 말을 진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노부나가는 300명의 병력을 미끼로 사용해 이마가와 측 병력을 끌어들였다. 이로써 50여 기가 전사했으며, 노부나가는 300명의 병력을 미끼로 삼아 요시모토 주변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오후 1시경, 시야를 가릴 정도의 폭우가 쏟아졌다. 『신장공기』에는 "석수가 섞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우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검은 구름이 오케하자마 산 주변을 덮으면서 주변이 어두워져 산 꼭대기에서 오다 군이 보이기 어려워졌다. 이마가와 군은 비에 젖는 것을 싫어해 흩어졌고, 요시모토의 병력은 더욱 약해졌다. 오다 군은 이 틈을 타고 병력을 진격시켜 요시모토의 본대를 공격했다. 이마가와 군의 총병력은 2만 5천 명이었으나, 병참 유지를 위한 짐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병력을 분산시켜 배치했기 때문에 실제로 요시모토를 지키는 병력은 적었으며, 양측의 전력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전투는 빠르게 끝났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예상치 못한 긴급 사태에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가마를 버리고 300기의 기모토(旗本, 친위대)와 함께 급히 말을 타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다 군의 다섯 차례에 걸친 공격으로 주변의 병사들을 조금씩 잃어갔고, 마침내 오다 군의 우마마와리(말 경호병)에게 따라잡혔다. 오케하자마는 추격전이 벌어진 일대의 지명이었으며, 지형은 계곡이나 협곡이 아니라 깊은 논과 습지가 펼쳐진 곳이었다. 폭우로 인한 진흙탕에 발이 빠진 채 오다 군의 공격을 받아 죽는 이마가와 군 병사가 많았다. 난전 속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태도를 뽑아 스스로 분전했다. 일번창을 꽂은 하토리 가즈타다(服部一忠, 하토리 고헤이타)에게 반격해 무릎을 베었지만, 모리 요시카츠(毛利新介)에게 제압당해 목이 베여 전사했다. 향년 42세였다. 『미즈노 가쓰나리 각서』의 전문에 따르면 요시모토는 목이 베일 때 모리의 왼손 손가락을 물어뜯었다고 한다.
전투 현장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한 현장은 이마가와 가문의 자료에 "덴가쿠쿠보(田楽窪)"로 기록되어 있다. 오케하자마 전투 27년 후인 텐쇼 15년(1587년)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사였던 타이겐 스우후(태원설재)의 33주기 법회가 열렸는데, 그때의 기록 『호국선사삼십삼회기염향졸어병서』에 "5월 19일, 예부(요시모토) 미주의 덴가쿠쿠보에서 일전하여 죽었다"고 적혀 있다. 이 "덴가쿠쿠보"의 장소는 현재 도요아케시 구쓰카케초에 "덴가쿠가쿠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 전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병력 차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마가와 측에는 가신단 편성의 실태를 알 수 있는 분겐초나 군역장이 전해지지 않아 동원 가능 병력을 추정하기 어렵지만, 『신장공기』에는 4만 5천, 『신장기』에는 수만 기, 『고요 군감』에는 2만여, 『무공야화』에는 3만 유여라고 기록되어 있어 실제 숫자에는 논란이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오케하자마 전투 시 로쿠가쿠 씨로부터 2천 명 규모의 원군이 파견되었고, 다른 지원 세력의 수를 포함하면 노부나가 측도 5천 명 가까운 병력이 되어 이마가와 측 동원 수와 대등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노부나가가 동족을 평정하고 자신이 옹립한 수호를 추방해 오와리의 국주가 된 것은 오케하자마 전투 전년에 불과하며, 본 전투에서 노부나가를 따라 싸운 것은 종래의 가신들이었고, 오와리 통일 과정에서 노부나가 가신에 편입된 자나 국인·호족들은 전황을 관망하거나 하토리 우지사다처럼 이마가와 측에 붙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즉 노부나가의 동원력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따라서 정면 대결이 아닌 기습이 유일한 승산이었다.
전투 후 파장은 동해 지방 전체를 뒤흔들었다. 오다 측 무장 미즈노 노부모토는 조카 마쓰다이라 모토야스에게 아사이 미치타다를 사자로 파견했다. 5월 19일 저녁, 미치타다는 모토야스가 지키고 있던 다이코 성에 도착해 이마가와 요시모토 전사의 보를 전했다. 오다 세력이 내습하기 전에 퇴각하라는 권유에 대해 모토야스는 일단 정찰을 보내 오케하자마 패전을 확인했다. 당일 야반에 퇴성했고, 오카자키 성 내에는 이마가와의 잔병이 있었기에 이를 피해 다음날 20일 보리사인 다이주지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가와 군이 오카자키 성에서 퇴거하자 23일 모토야스는 "버려진 성이라면 주울 것이다"라며 오카자키 성에 입성했다. 모토야스에게 다행이었던 것은 다이코 재성으로 인해 그의 가신단이 패전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독립의 시작이었다.
전후 동해 지방을 통치하던 이마가와 가문은 종속되어 있던 마쓰다이라 가문과 동맹 상대인 다케다 가문에게 배신당해 몰락하는 한편,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를 완전히 통일한 뒤 미노와 기나이 제압으로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마가와의 동맹국들의 움직임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다케다 신겐, 호조 우지야스와 고소스노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군사 동맹인 이상 요시모토의 대 오다 전에 다케다 씨나 호조 씨가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문제로 떠오른다. 마루시마 가즈히로는 『고요 군감』에서 오케하자마 전투 기술이 빈번하게 상세한 것에 주목하며, 전투 1개월 후인 6월 13일자로 다케다 신겐이 오카베 모토노부에게 서한을 보내 그의 무용을 칭찬하는 동시에 우지자네에 대한 "간신의 참언"이 있음을 우려하는 내용임을 지적했다. 이는 오케하자마 전투 직후 이마가와 가신단에서 다케다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신장공기』의 기록 자체도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오케하자마 부분에서만 '텐분 21년'이라는 연호를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이를 단순한 기술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사건의 순서다. 실제 역사적 순서는 1) 노부나가 부친 사망 2) 하야시 미사쿠가 동생 노부유키를 앞세워 모반 3) 동생 노부유키 자살 4) 오와리 통일 5) 오케하자마 전투 6) 미노 점령이지만, 『신장공기』의 기술 순서는 1) 부친 사망 2) 하야시의 모반 3) 오케하자마 전투 4) 동생 자살 5) 오와리 통일 6) 미노 점령으로 되어 있다. 즉 오케하자마 전투가 실제보다 앞당겨져 있다. 오타 규이치는 오류가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오케하자마 전투를 노부나가가 부친의 뒤를 이은 직후 위치로 가져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노부나가의 정통성과 영웅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 전략이었을 것이다.
전술적 관점에서 보면 노부나가의 승리는 정보전과 심리전의 승리였다. 노부나가는 오와리 동부를 영유하는 무장 중 약소한 자신보다 강한 요시모토에게 붙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해 배신한 무장의 필적을 흉내 내어 가짜 편지로 요시모토를 교란시켰으며, 편지를 믿은 요시모토는 분노해 이 무장을 할복시켰다. 노부나가는 정보 조작만으로 배신자 처분과 요시모토의 세력 감소에 성공한 것이다. 또한 노부나가는 미카와에 스파이를 보내 요시모토의 위치를 보고하게 하는 한편, 자군의 위치는 적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정보를 통제했으며, 이렇게 해서 노부나가는 은밀히 요시모토의 본진에 접근해 승리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신장공기』를 전면적으로 의거하는 정면 공격설에 따르면,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측의 승리는 다양한 조건이 겹쳐 가져온 행운에 의한 성공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계획된 기습이 아니라 우연히 요시모토 본진을 공격하게 되었고, 전국 다이묘가 전장에서 전사한 희귀한 사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급작스러운 폭풍우, 적의 방심, 정보의 우위 등 여러 요소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승리였다는 관점이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심리적 전환점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어도 자만이나 방심으로 패배할 수 있으며, 치밀한 전략을 세우면 그 차이는 역전될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노부나가에게는 천하인으로 가는 첫 발걸음이었고, 이마가와에게는 명문가의 몰락이 시작된 날이었으며, 이에야스에게는 독립과 새로운 운명의 출발점이었다.
이 전투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단지 번복이 극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정보의 중요성, 심리전의 위력, 결단의 순간, 그리고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의지가 역사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전국시대의 전기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 역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1560년 5월 19일, 오케하자마 산에서 일어난 단 한 번의 전투가 일본 역사 전체를 다시 썼던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BC%80%ED%95%98%EC%9E%90%EB%A7%88_%EC%A0%84%ED%88%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