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츠쿠시마 전투-일본 3대 기습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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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 10월 1일, 세토나이카이의 신성한 섬 이츠쿠시마에서 일본 전국시대의 판도를 뒤바꾼 전투가 벌어졌다. 모리 모토나리군의 총병력은 4천을 상회했고, 스에 하루카타군은 8천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념보다 병력 차이가 작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여전히 열세였던 모리군이 승리한 이 전투는 단순한 군사적 성취를 넘어, 한 인물의 치밀한 전략과 정치적 수완이 불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음을 증명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전투가 있기까지 중국 지방의 정치적 지형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중심에는 권력과 배신, 그리고 생존을 위한 냉혹한 계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1551년 스에 하루카타가 주군인 오우치 요시타카를 자살로 몰아넣은 다이네이지의 변에서 시작된다. 오우치 가문은 중국 지방과 북규슈를 아우르는 서일본 최대의 세력이었다. 그러나 집권 말기 요시타카는 정무와 군사보다 문화와 예술에 심취했고, 이는 무단파였던 스에 하루카타와 문치파였던 사가라 타케토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하루카타는 주군이 사가라를 중용하고 자신을 멀리하자 점차 불만을 키웠고,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켜 오우치 가문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하루카타는 모리 모토나리에게도 협력을 요청했고, 모토나리는 당초 이에 동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토나리의 적남 모리 타카모토의 아내가 오우치 요시타카의 양녀였기에, 모리 가문은 옛 주군을 배신한 하루카타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모토나리는 일단 하루카타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다. 하루카타는 아키 지역과 빈고 지역의 국인 영주들을 통솔할 권한을 모토나리에게 부여했고, 모토나리는 이를 기반으로 주변 세력을 흡수해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세력 확장은 필연적으로 하루카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1554년, 하루카타가 이와미의 요시미 마사요리 토벌에 모리 가문의 참전을 요구했을 때 균열이 표면화되었다. 모토나리는 당초 참전하려 했으나, 타카모토를 비롯한 가신들이 강력히 반대했다. 그들은 하루카타가 모리 가문에 부여했던 권한을 무시하고 직접 다른 국인들에게 출진을 독촉한 것이 동맹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모토나리는 결국 아들과 가신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하루카타와 결별을 결심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판단이 아니라, 하루카타의 지배 아래서는 모리 가문의 독립성과 성장이 제한될 것이라는 냉철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하루카타는 격분했다. 그는 즉각 중신 미야가와 후사나가에게 병력을 주어 모리를 공격하게 했다. 이것이 오리시키바타 전투, 곧 이츠쿠시마 전투의 전초전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전투는 1554년 6월 5일에 벌어졌으며, 미야가와 후사나가가 이끈 병력은 3천에서 7천 사이였다. 모토나리는 자군을 여러 부대로 나누어 적군을 포위했다. 전투는 다음 날 오전에 진행되었고, 미야가와군 750명이 전사했으며 미야가와 후사나가는 도주 중 자결했다.


오리시키바타 전투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모토나리가 밤에 출진하며 반딧불이 무리가 흐트러진 것을 보고 적의 매복을 간파했다는 이야기다. 6월이라는 시기는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시기와 일치하므로 이 일화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서는 미야가와 후사나가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고도 전한다. 어느 쪽이든, 이 초기 승리는 모토나리의 전술적 역량을 입증했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카타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모리 가문은 존망의 기로에 섰다.


오리시키바타 승리로 모토나리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이 패배로 하루카타는 병력 재편성이 필요했고, 조기 아키 침공을 포기했다. 그 덕분에 모토나리는 주변의 하루카타 측 세력을 토벌하고 후방의 불안 요소를 제거할 여유를 얻었다. 이 시간이 없었다면 이츠쿠시마 전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토나리는 정면 대결이 불가능함을 알았다. 하루카타군의 병력은 8천 정도였고, 하루카타군의 손실은 전사 4,700명과 포로 3,000명이었다. 모리군의 정확한 규모는 불확실하지만, 모리 가문의 보대가신단만 약 3천 명이었고, 거기에 요시카와 씨, 고바야카와 씨, 구마가이 씨, 아마노 씨, 히라가 씨, 아소누마 씨 등 아키 지역 국인들이 참전했기 때문에 총병력은 4천을 훨씬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모토나리에게 필요한 것은 적을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하고, 기습으로 혼란을 일으키며, 무엇보다 바다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전장은 이츠쿠시마, 즉 미야지마였다. 이 섬은 헤이안 시대부터 신성시되었고, 다이라노 키요모리가 일송 무역의 중계지로 삼았던 세토나이카이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섬의 지형이었다. 남북 10킬로미터, 동서 4킬로미터의 작은 섬은 매우 험준하고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어 대군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모토나리는 이 제약을 이용하기로 했다.


먼저 모토나리는 심리전을 펼쳤다. 그는 하루카타군의 필두 중신 에라 후사히데를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이번에는 에라가 모반을 꾀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하루카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주군을 배신한 경험이 있던 하루카타는 가신들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1555년 3월 16일, 하루카타는 히로나카 타카카네를 시켜 에라 후사히데를 고하쿠인에서 처형했다. 에라는 아키 지역 사정에 정통한 유능한 가신이었고, 하루카타는 자신의 손으로 귀중한 전력을 잃었다. 이는 나중에 이츠쿠시마 전투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모토나리는 이츠쿠시마에 미야오 성을 축조했다. 일부 군기물에서는 이것이 하루카타를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미야오 성이 1554년 시점에 이미 존재했으며 모토나리는 방비 강화를 위해 개축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이 성의 존재는 하루카타를 자극했다. 세토나이카이의 요충지를 모리가 장악한다는 것은 해상 교통과 상업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츠쿠시마는 종교·교통·경제적 중요 거점이었기에 여러 차례 군대가 파견된 곳이었다.


군기물에는 또 다른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사쿠라오 성주 카츠라 모토즈미가 하루카타에게 내통하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이야기다. 카츠라 모토즈미는 과거 모토나리의 가독 상속 과정에서 아버지가 자결하는 비극을 겪었기에, 모토나리에게 원한이 있다는 명분으로 하루카타에게 접근했다. 그는 "하루카타군이 이츠쿠시마를 공격하면 모리군 본대도 이츠쿠시마 방어에 나설 것이니, 그 틈에 카츠라군이 요시다 고오리야마 성을 공격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하루카타를 이츠쿠시마로 유인하는 정교한 계략이었을 것이다. 카츠라 모토즈미는 하루카타를 믿게 하기 위해 7장이나 되는 서약서를 작성했고, 본인은 사쿠라오 성에 남았지만 그의 아들들은 전투에 참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일화를 뒷받침하는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후대에 모토나리의 지략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토나리의 가장 중요한 준비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무라카미 수군의 확보였다. 세토나이카이를 지배하던 무라카미 일족은 이노시마, 노시마, 쿠루시마의 세 가문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노시마 무라카미 가는 일찍이 모리에 복속했지만, 쿠루시마와 노시마는 독립성이 강한 해적 세력이었고, 이요의 고노 가문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555년 9월, 모토나리는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서신을 보내 쿠루시마 무라카미 가의 원군이 언제 올지 물었다. 그의 초조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만약 무라카미 수군이 오지 않는다면, 고바야카와 수군의 60~70척과 가와우치 경고중의 50~60척만으로도 결전에 임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모토나리조차 이 순간만큼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타카카게는 노미 무네카츠를 사자로 보내 무라카미 일족을 설득했다. 무네카츠는 고바야카와 수군의 총대장이자 무용이 뛰어난 해장이었고, 그를 보낸 것은 무라카미 수군에 대한 최대의 경의였다. 한편 하루카타는 무라카미 일족에게 단순히 서신 한 통만 보내 자기편에 서라고 전했을 뿐이다. 그는 대군을 가진 자신에게 무라카미가 절대적 열세인 모토나리를 도울 리 없다고 자만했다.


결국 9월 28일 쿠루시마 무라카미 가가 원군으로 도착했고, 모토나리는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술과 음식으로 대접했다. 노시마 무라카미 가에 대해서는 군기물에서 모리 측으로 참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1554년 6월경 하루카타의 서신에 노시마에서 사자가 하루카타에게 왔다는 기록이 있으며, 1561년 이전에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모리 측으로 활동한 기록이 없어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았거나 중립을 지켰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쿠루시마의 참전만으로도 모리 수군은 하루카타 수군에 대적할 만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바다가 장악되면 섬에 상륙한 하루카타군은 보급로가 끊긴 고립된 군대가 될 것이었다.


9월 21일, 하루카타는 대군을 이끌고 이츠쿠시마에 상륙했다. 그는 섬 동쪽의 토노오카에 본진을 세우고 미야오 성을 공격했다. 이츠쿠시마 신사의 신역에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었지만, 하루카타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치명적 실수를 저질렀다. 험준한 지형과 밀림으로 뒤덮인 이 작은 섬에서 대군은 오히려 짐이었다. 병력을 제대로 전개할 수도, 신속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


모토나리는 기다렸다. 9월 30일 밤, 폭풍우가 몰아쳤다. 모토나리는 비와 바람에 이동 기척이 묻히는 것을 이용해 몰래 이츠쿠시마로 건너갔다. 병력은 두 부대로 나뉘었다. 모토나리와 타카모토는 포가우라에 상륙해 하루카타 본진의 배후로 돌아갔고, 타카카게는 이츠쿠시마 신사 정면에서 접근했다. 10월 1일 새벽, 두 부대는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하루카타군은 완전히 기습당했다. 폭풍우 속에서 적의 상륙을 눈치채지 못한 그들은 혼란에 빠졌고, 좁은 지형 탓에 병력 수적 우위를 활용할 수 없었다.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무라카미 수군은 해상을 봉쇄해 하루카타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하루카타군은 4,700명이 전사하고 3,000명이 포로가 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하루카타는 오에우라에서 자결했다. 서일본 최강 세력의 실권자가 작은 섬에서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모토나리가 취한 행동은 그의 정치적 감각을 보여준다. 그는 사전과 회랑을 바닷물로 씻어내고, 피가 묻은 흙을 섬 밖으로 옮겨내는 등 신역을 더럽힌 죄를 씻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신성한 장소를 전장으로 삼은 것에 대한 속죄인 동시에, 이츠쿠시마 신사와 그 배후 세력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현명한 처신이었다.


이츠쿠시마 전투의 승리는 모리 가문의 운명을 바꿨다. 1557년, 모토나리는 오우치 가문을 완전히 평정하고 스오와 나가토를 차지했다. 이후 그는 숙적 아마고 가문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해 이즈모를 손에 넣었다. 모토나리는 산요와 산인 10개국을 영유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전국 다이묘가 되었다. 아키의 작은 국인 영주에 불과했던 모리 가문이 서일본을 호령하는 대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전투가 역사에 남는 진정한 이유는 단순한 병력의 승리가 아니다. 모토나리는 오리시키바타 전투에서 먼저 적의 선봉을 격파해 시간을 벌었고, 상대의 심리를 파고들어 유능한 가신을 제거하게 만들었으며,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고, 외교를 통해 결정적 해상 세력을 확보했으며, 기후까지 이용한 완벽한 기습을 감행했다. 이는 종합적인 전략과 전술, 정치와 외교가 결합된 완벽한 승리였다.


이츠쿠시마 전투는 흔히 가와고에 성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와 함께 전국시대 3대 기습전으로 불린다. 그러나 다른 두 전투와 달리 이츠쿠시마는 단순한 기습이 아니었다. 이는 수개월에 걸친 치밀한 준비, 심리전, 정보 조작, 동맹 구축, 그리고 완벽한 타이밍이 결합된 전략적 걸작이었다. 모토나리 자신도 전투 직전까지 쿠루시마 수군의 도착을 초조하게 기다렸을 만큼, 이 승리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하루카타의 패배는 거만과 오판의 결과였다. 그는 병력 수적 우위를 맹신했고, 지형의 불리함을 간과했으며, 무라카미 수군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고, 무엇보다 상대를 얕잡아 보았다. 한때 주군을 배신한 자로서 가신들을 의심해 유능한 인재를 스스로 제거한 것도 치명적이었다. 결국 그가 가진 모든 유리함은 모토나리의 전략 앞에서 오히려 약점이 되었다.


이 전투는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준다. 절대적 열세라도 지혜와 전략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 동맹과 외교가 군사력만큼 중요하다는 것, 지형과 기후 같은 자연 조건이 승패를 가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순간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모토나리의 유명한 말처럼 "꾀가 많은 자가 이기고, 적은 자가 진다"는 진리는 이츠쿠시마의 파도 소리와 함께 오늘날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신성한 이츠쿠시마는 피로 물들었지만, 그 피는 씻겨나갔고 신사는 다시 성역으로 복원되었다. 1996년 이츠쿠시마 신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방문객들이 붉은 도리이와 아름다운 신사를 보러 오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는 일본 역사의 흐름을 바꾼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전투는 전략과 지혜가 힘을 이긴다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B%AA%A8%EB%A6%AC%20%EB%AA%A8%ED%86%A0%EB%82%98%EB%A6%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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