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5년 가을, 영국 동앵글리아의 해안에 유례없는 규모의 함대가 출현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를 '미켈 해텐 헤레'(mycel hæþen here), 즉 '거대한 이교도 군대'라 기록했다. 이것은 단순한 약탈이 아니었다.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모인 전사들은 정복과 영구 정착을 목표로 삼았고, 그들의 도래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었다.
8세기 후반부터 바이킹의 습격은 영국의 해안 지역을 괴롭혀 왔다. 793년 린디스판 수도원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된 이래, 이후 수십 년간 바이킹들은 여름철마다 약탈을 위해 찾아왔고, 겨울이 오면 본국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들은 부유한 수도원과 정착지를 집중적으로 노렸으며, 앵글로색슨인들은 때로 데인겔트, 즉 금전을 주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굴욕적인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850년대에 이르러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바이킹 군대는 겨울을 해안 기지에서 보내며 더 이른 시기에 습격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전략적 변화의 전조였다. 그들은 단순한 약탈자에서 정복자로 변모하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군대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세 아들, 즉 이바르 본레스, 할프단 라그나르손, 우바가 이끌었다고 한다. 북유럽 사가는 이들의 침공이 노섬브리아 왕 엘라의 손에 아버지가 죽은 것에 대한 복수였다고 전하지만,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진실성은 불확실하다. 현대 역사가들은 라그나르라는 인물이 여러 역사적 인물과 문학적 창작이 결합된 복합적 이미지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실제로 이 침공의 동기는 복수보다는 경제적 이득과 토지 정착의 욕망에 있었을 것이다. 프랑크 왕국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던 바이킹들은 강과 내륙 깊숙이 침투하는 전술을 발전시켰고, 영국은 그러한 전략을 적용하기에 이상적인 목표였다.
이교도 대군세는 865년 말 켄트의 대닛 섬에 진을 쳤다. 켄트 주민들은 평화의 대가로 데인겔트를 약속했지만, 바이킹들은 약속을 어기고 동부 켄트를 유린했다. 이것은 그들의 전술적 패턴의 시작이었다. 겨울 동안 동앵글리아에 머물면서 그들은 에드먼드 왕으로부터 말을 공급받았다. 말은 바이킹에게 결정적인 이점을 주었다. 이제 그들은 빠르게 내륙으로 이동하며 앵글로색슨 군대가 대응하기 전에 목표를 공격할 수 있었다.
866년 봄, 기병으로 무장한 이교도 대군세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노섬브리아의 수도 요크를 공격했다. 당시 노섬브리아는 내전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폐위된 왕 오스베르트와 찬탈자 엘라가 왕위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바이킹들은 이 혼란을 교묘히 이용했다. 그들은 요크를 점령했고, 두 왕이 연합하여 반격했을 때 그들을 격파하여 둘 다 전사시켰다. 후대 사가는 엘라가 잔혹한 피의 독수리 의식으로 처형되었다고 전하지만, 이는 역사적 기록보다는 전설에 가깝다.
요크의 점령은 전략적으로 막대한 의미를 지녔다. 바이킹들은 이 도시를 요르비크로 이름 짓고 북부 영국에서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다. 그들은 꼭두각시 왕 에그베르트 1세를 즉위시켜 노섬브리아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추가 원정에 자금을 댔다. 이것은 단순한 습격이 아니라 체계적인 정복이었다. 요크는 아일랜드와 스칸디나비아를 연결하는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바이킹 문화의 중심지로 번성했다.
869년, 이교도 대군세는 동앵글리아로 돌아왔다. 그들은 테트포드에서 겨울을 나며 에드먼드 왕과 대결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간결하게 기록한다. "군대가 머시아를 가로질러 동앵글리아로 진군하여 테트포드에 겨울 진영을 차렸다. 그해 겨울 에드먼드 왕이 그들과 싸웠으나 데인인들이 승리하여 왕을 죽이고 그 땅 전체를 정복했다." 후대 전승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기를 거부하여 나무에 묶인 채 화살로 맞아 죽었다. 그는 순교자가 되었고,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에 있는 그의 성지는 중세 영국의 주요 순례지가 되었다.
동앵글리아를 정복한 후, 바이킹들은 머시아로 시선을 돌렸다. 871년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추가 병력, 이른바 '여름 대군세'가 도착하여 군대를 증강했다. 이제 그들의 목표는 웨섹스였다. 당시 웨섹스는 에델레드 왕과 그의 동생 알프레드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해 웨섹스에서는 일련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애시다운 전투에서 알프레드는 바이킹 진영의 한쪽 날개를 맹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레딩 전투를 비롯한 다른 교전에서는 바이킹이 승리했다. 결국 양측은 평화 협정을 맺고 바이킹은 머시아로 철수했다.
874년까지 이교도 대군세는 머시아 왕 버그레드를 추방하고 왕국을 정복했다. 웨섹스만이 홀로 서 있었다. 이때 군대는 분열했다. 할프단이 이끄는 일부는 북쪽으로 가서 스코틀랜드를 습격했고, 구스룸, 오스케텔, 안윈드가 이끄는 다른 부대는 웨섹스를 계속 공격했다.
873년 겨울, 군대는 더비셔의 렙튼에서 겨울을 났다. 이 작은 마을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굴은 이교도 대군세의 실체를 극적으로 드러냈다. 마틴 비들과 비르테 키올비에-비들은 세인트 와이스탄 교회 옆에서 D자 형태의 방어 도랑을 발견했다. 이 방어 시설은 스칸디나비아의 유사한 구조물을 연상시켰고, 바이킹이 트렌트 강변에 전략적 요새를 구축했음을 보여주었다. 교회 동쪽 끝에서는 바이킹 양식의 개별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한 무덤에는 두 남성이 묻혀 있었는데, 나이 든 남성은 대퇴골에 심각한 상처가 있었다. 그들의 무덤은 부서진 앵글로색슨 십자가 조각들로 덮여 있었다.
가장 놀라운 발견은 교구 목사관 정원에 있었다. 1686년에 처음 발견되었던 집단 매장지가 재발굴되었다. 그곳에는 최소 264구의 유골이 뒤섞여 있었다. 성별을 확인할 수 있는 유골 중 약 80%가 남성이었고, 대부분 17세에서 45세 사이였다. 이들의 평균 신장은 렙튼의 다른 매장 인구보다 훨씬 컸다. 유골 중 일부는 무기 외상의 흔적을 보였다. 흥미롭게도 최소 20%는 여성이었는데, 이는 이교도 대군세가 단순한 전사 집단이 아니라 장인, 상인, 가족을 포함한 복합적 사회였음을 시사한다. 2018년의 새로운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과 동위원소 분석은 이 유골들이 정확히 873~874년 겨울에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이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렙튼에서 남동쪽으로 약 3.6킬로미터 떨어진 잉글비에는 59개의 작은 고분이 있었다. 19세기에 발굴된 이 고분들은 모두 화장 매장을 포함했다. 많은 이들이 배의 널빤지 위에서 화장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선박 매장의 상징적 형태였다. 복식과 무기의 파편이 부장품으로 함께 묻혀 있었다. 이 바이킹 고분 묘지는 영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873년에서 877년 사이에 사용되었으며 이교도 대군세 구성원들의 주요 매장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렙튼과 함께 링컨셔의 토르크시에서 발견된 증거는 더욱 놀랍다. 872~873년 겨울을 난 이곳 야영지는 약 55헥타르에 달했다. 금속 탐지기를 통한 조사로 엄청난 양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120개 이상의 아랍 은화 디르함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영국이나 아일랜드의 어떤 유적지보다 많은 수였다. 바이킹들은 동유럽에서 노예를 팔고 이 동전들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소 60개의 잘게 자른 은 조각과 12개의 희귀한 금 조각도 발견되었다. 바이킹들은 금속의 무게로 거래했기 때문에 귀금속을 잘게 잘라 사용했다. 납 게임 조각, 전투 도끼 파편, 화살촉, 그리고 금속 세공과 장인 활동의 증거도 풍부했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가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이교도 대군세는 일시적인 습격대가 아니라 수천 명 규모의 조직적인 침략 세력이었다. 그들은 전사뿐만 아니라 장인, 상인, 노예, 가족들을 포함한 복합적 공동체였다. 그들은 겨울 야영지를 방어 요새로 변모시켰고, 그곳에서 무기를 수리하고, 상품을 거래하며, 다음 시즌의 원정을 준비했다. 이교도 대군세의 정확한 규모를 두고 역사가들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역사가 피트 소여는 최소주의적 접근을 취하며 군대의 규모가 약 1,000명에 불과했을 것이라 주장했지만, 토르크시와 렙튼의 고고학적 발굴은 수천 명이 겨울 야영지에서 머물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878년 초, 웨섹스의 상황은 절망적이 되었다. 구스룸이 이끄는 바이킹 군대가 십이일절 직후인 1월 6일이나 7일 밤에 칩넘을 기습했다. 당시 알프레드는 그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다. 기습은 완벽했다. 알프레드는 소수의 측근만을 데리고 서머싯의 늪지대로 도망쳐야 했다. 그곳 애설니의 늪지는 천연 요새였다. 알프레드는 그곳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세력을 다시 모았다. 이 암흑기 동안 그에 관한 전설들이 탄생했다. 한 이야기는 그가 가난한 여인의 오두막에 숨어 있다가 빵 굽는 것을 잊고 빵을 태워 여인에게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알프레드의 겸손함과 신앙심을 상징하는 신화다.
애설니에서 알프레드는 서머싯의 얼더맨 에텔노스가 병사와 보급품을 가지고 합류하자 힘을 회복했다. 부활절까지 그들은 늪지 깊숙이 요새를 건설했다. 봄이 되자 알프레드는 웨섹스의 군대를 소집했다. 햄프셔, 윌트셔, 서머싯의 병사들이 킹스턴 데버릴 근처의 에그베르트 돌에 모였다. 군대는 사기가 높았다. 그들의 왕이 돌아왔고, 이제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878년 5월 6일에서 12일 사이, 에딩턴 근처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정확한 전투 경과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치열한 백병전이었음은 분명하다. 앵글로색슨인들은 조밀한 방패벽을 형성했다. 알프레드의 전기 작가 아써는 이렇게 썼다. "맹렬하게 싸우며 이교도 전 군대에 맞서 조밀한 방패벽을 형성하고 오랫동안 용감하게 버티다가... 마침내 그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큰 살육으로 이교도들을 무너뜨렸고, 도망치는 자들을 쳐서 요새까지 추격했다." 바이킹들은 칩넘의 요새로 후퇴했고, 알프레드는 2주간 포위를 계속했다. 보급품이 떨어지고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바이킹들은 마침내 항복을 요청했다.
이전의 웨어햄과 엑시터에서의 조약과 달리,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알프레드가 결정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이었다. 구스룸은 알프레드가 원하는 만큼의 인질을 제공하고, 즉시 웨섹스를 떠나며, 기독교로 개종하여 세례를 받겠다고 맹세했다. 3주 후 구스룸과 그의 주요 부하 30명은 애설니 근처의 얼러에서 알프레드를 만났다. 그곳에서 구스룸은 세례를 받았고, 알프레드는 그의 대부가 되었다. 구스룸은 세례명으로 에델스탄을 받았다.
웨드모어 조약은 구두 합의였을 것으로 보이며, 문서 형태로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조약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이었다. 878년 가을, 구스룸과 그의 군대는 약속대로 웨섹스를 떠나 머시아의 시렌체스터로 갔다가, 이듬해 동앵글리아로 이동했다. 886년에는 더 공식적인 조약인 '알프레드와 구스룸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문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두 왕국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규정했다. 경계선은 템즈 강을 따라 리 강으로, 리 강의 수원지를 거쳐 베드퍼드로 직진한 다음 우즈 강을 따라 와틀링 스트리트까지 이어졌다. 이 조약은 또한 평화로운 무역 관계와 법적 분쟁의 해결 방법을 규정했으며, 잉글랜드인과 데인인의 생명 가치를 동등하게 여겼다.
에딩턴의 승리는 영국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알프레드는 웨섹스를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반격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는 방어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버그할 히디지 체계를 통해 요새화된 버그를 건설하여 왕국 전역에 방어망을 구축했다. 이 버그들은 하루 행군 거리마다 배치되어 주민들이 바이킹 습격 시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게 했다. 알프레드는 또한 군사 의무를 개혁하여 절반의 군대는 전투에 참여하고 나머지 절반은 농사를 지어 경제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개혁은 바이킹들이 이전처럼 요새를 점령하고 주변을 약탈하는 전술을 사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교도 대군세는 분열되어 힘을 잃었다. 할프단이 이끄는 일부는 노섬브리아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동앵글리아와 머시아에 정착했다. 896년까지 바이킹 군대는 사실상 패배했다. 더 이상 습격을 계속할 이유를 찾지 못한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정착했고, 재산이 없는 이들은 배를 구해 센 강으로 갔다.
그러나 이교도 대군세의 유산은 영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들이 정복한 지역은 데인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바이킹의 법과 관습이 앵글로색슨의 전통과 뒤섞였다. 요크셔, 링컨셔, 더비셔, 노팅엄셔, 레스터셔 등 동부와 북부 영국의 많은 지명이 스칸디나비아어에서 유래했다. '-by'(마을), '-thorpe'(작은 마을), '-thwaite'(개간지) 등의 접미사가 붙은 수천 개의 지명이 바이킹 정착의 증거다. 사회 조직과 법체계도 변화했다. 바이킹의 자유 농민 전통은 앵글로색슨 사회 구조와 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언어에는 수백 개의 스칸디나비아어 차용어가 영어에 들어왔다. 'sky'(하늘), 'egg'(계란), 'knife'(칼), 'they'(그들), 'want'(원하다) 같은 일상 단어들이 고대 노르드어에서 왔다. 심지어 인칭 대명사 'they', 'them', 'their'조차 스칸디나비아어의 영향이다. 이는 두 문화가 얼마나 밀접하게 상호작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예술과 공예에서도 스칸디나비아 양식이 앵글로색슨 전통과 결합하여 독특한 혼합 양식을 만들어냈다.
정치적으로 에딩턴의 승리는 웨섹스 왕조에게 영국 통일의 기반을 제공했다. 알프레드의 후계자들, 특히 그의 아들 에드워드 엘더와 딸 머시아의 에텔플레드는 체계적으로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알프레드의 버그 체계를 확장하고, 데인로의 바이킹 영주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갔다. 910년대와 920년대에 걸쳐 동앵글리아와 동미들랜드가 웨섹스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954년 에릭 블러드액스가 요크에서 쫓겨남으로써 독립적인 바이킹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 알프레드 대왕의 손자 에드문드는 모든 잉글랜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채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이킹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980년대부터 새로운 침공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스벤 포크비어드와 그의 아들 크누트가 이끄는 덴마크군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데인겔트를 갈취하는 것에 만족했지만, 결국 1013년 스벤이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그가 죽은 후 크누트는 1016년에 왕위를 확고히 했다. 이는 이교도 대군세가 시작한 과정의 완성이었다. 바이킹은 더 이상 침입자가 아니라 통치자가 되었다.
크누트의 통치 아래 잉글랜드는 북해를 아우르는 대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도 지배했다. 그는 앵글로색슨 법과 관습을 존중했고, 교회를 후원했으며, 현명한 통치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치세는 두 문화의 융합이 얼마나 완전했는지를 보여준다. 바이킹의 후손들은 이제 완전히 기독교화되었고, 앵글로색슨 사회에 통합되었다.
1066년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때, 그는 바이킹의 후손이었다. 노르망디 자체가 911년 샤를 3세가 바이킹 족장 롤로에게 하사한 영토였다. 노르만인들은 프랑스어를 말하고 기독교를 믿었지만, 그들의 혈통은 분명히 스칸디나비아였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노르망 바이킹이 앵글로색슨 귀족과 데인로의 데인인 후손들을 정복한 것이었다. 이는 두 세기 전 이교도 대군세가 시작한 재편성의 마지막 장이었다.
현대 영국의 유전적 연구는 바이킹 정착의 범위를 보여준다. DNA 연구에 따르면 요크셔와 컴브리아 같은 옛 데인로 지역 인구의 약 6%가 스칸디나비아 조상을 가지고 있다. 이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 수천 개의 지명, 수백 개의 단어, 그리고 법적 관행과 사회 구조에 남아있는 흔적은 이교도 대군세의 유산이 얼마나 깊고 지속적인지를 증명한다.
렙튼과 토르크시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그 시대를 증언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칼과 도끼, 디르함과 은 조각, 게임 조각과 장신구는 천 년 전 전사들과 그들의 가족이 살았던 생생한 현실을 보여준다. 렙튼 교회는 여전히 서 있으며, 바이킹이 방어 시설의 일부로 사용했던 앵글로색슨 지하실은 지금도 방문할 수 있다.
이교도 대군세는 단순히 침략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착자이자 건설자였으며, 두 문화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과정의 주체였다. 그들의 도래는 영국 역사의 궤도를 바꾸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알프레드는 대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웨섹스는 잉글랜드를 통일하는 왕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데인로의 바이킹 정착지들은 중세 영국의 가장 번영하는 지역 중 일부가 되었다. 요크는 유럽의 주요 무역 중심지가 되었고, 링컨과 노팅엄은 번성하는 도시로 성장했다.
문화적 교류는 일방적이지 않았다. 바이킹들도 그들이 정착한 땅에 의해 변화되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앵글로색슨 언어와 관습을 채택했으며, 그들의 독특한 전통을 지역 문화와 결합했다. 2세대나 3세대가 지나자 이들의 후손은 더 이상 순수한 스칸디나비아인도, 순수한 앵글로색슨인도 아닌 새로운 혼합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교도 대군세에 대한 역사적 기억은 복잡하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그들을 잔인한 이교도 침략자로 묘사했다. 성인의 전기와 수도원 기록은 그들의 폭력과 교회에 대한 모독을 강조했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더 미묘한 그림을 보여준다. 그들은 확실히 전사였지만, 동시에 농민이자 장인이며 상인이었다. 그들은 파괴했지만 또한 건설했다. 그들의 도시는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고, 그들의 법은 앵글로색슨 법과 함께 영국 관습법의 기초가 되었다.
865년부터 896년까지 이어진 이교도 대군세의 시대는 영국사에서 가장 극적이고 결정적인 장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정복과 저항, 파괴와 창조, 충돌과 융합의 이야기다. 렙튼과 토르크시의 땅 아래에서 그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그것은 역사가 단순히 승자와 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와 적응의 과정이며,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복잡한 과정임을 보여준다.
에딩턴에서 알프레드가 구스룸을 물리친 것은 단순히 군사적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협상과 통합의 시작이었으며, 결국 더 강하고 통일된 잉글랜드를 만들어냈다. 바이킹의 침공은 엄청난 파괴와 고통을 가져왔다. 왕국들이 무너졌고, 수도원이 불탔으며,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두 문화의 융합은 중세 영국의 독특한 특성을 형성했고, 그 영향은 현대까지 이어진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수많은 영어 단어들, 우리가 지나가는 거리의 이름들, 그리고 우리의 법적 전통의 일부는 모두 천 년 전 그 '거대한 이교도 군대'의 유산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9D%B4%EA%B5%90%EB%8F%84%20%EB%8C%80%EA%B5%B0%EC%84%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