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년 크리스마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한 사건이 벌어졌다.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에게 황제의 관을 씌운 것이다. 이 순간은 단순한 대관식이 아니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324년 만에 서유럽에 다시 황제가 등장한 것이며, 동시에 교황이 황제를 임명하는 권위를 가진 존재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다. 이날 이후 천 년 가까이, 유럽의 역사는 교황과 황제 사이의 긴장과 협력, 갈등과 타협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카를 대제 본인이 이 대관식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전기 작가 아인하르트는 카를이 "만약 미리 알았더라면 그날 성당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왜 그랬을까? 이미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 황제의 칭호까지 받게 되었는데 말이다. 답은 간단하다. 교황으로부터 관을 받는다는 것은, 교황이 황제를 만들 수 있는 권위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들 수 있다면 폐위시킬 수도 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사실 이 대관식의 배경에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교황 레오 3세는 로마 귀족들에게 습격당해 눈을 뽑히고 혀를 자를 뻔한 위기를 겪었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카를에게 도움을 청했고, 카를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와서 교황을 복위시켰다. 레오 3세는 이 은혜를 갚고 동시에 카를의 보호를 영구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대관식을 기획했다. 하지만 카를의 입장에서는 미묘했다. 그는 이미 서유럽의 대부분을 정복한 절대 강자였다. 그런데 교황으로부터 관을 받음으로써, 마치 자신의 권력이 교황의 승인에서 나온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더 큰 문제는 동로마 제국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여전히 정통 로마 황제가 있었고, 카를의 대관식은 그들에게 참칭으로 비쳤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는 이후 수십 년간 악화되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중세 유럽 사회가 근본적으로 이원적인 권위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다. 한편에는 세속의 권력, 즉 검을 쥔 황제와 왕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영적인 권위, 즉 십자가를 든 교황과 성직자들이 있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최고 사제직을 겸했고, 동로마 제국에서도 황제가 교회를 지배하는 caesaropapism이 확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서유럽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제국이 무너진 후, 교회는 독자적인 조직과 권위를 발전시켰다. 황제가 사라진 공백기에 교황이 로마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고, 이는 교황권이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문제는 이 두 권력이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교황은 영적 권위만으로는 교회의 재산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다. 황제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반대로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백성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중세인들에게 왕은 단순히 힘으로 권력을 잡은 자가 아니라 신의 뜻에 따라 선택된 존재여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권력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경쟁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 모순은 11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발단은 성직 서임권 문제였다. 당시 주교와 대수도원장 같은 고위 성직자들은 단순히 종교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봉건 체제에서 중요한 봉신이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쾰른 대주교는 라인란트의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고, 황제에게 군대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다. 따라서 황제들은 충성스러운 사람을 주교로 임명하려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성직 매매와 부패가 만연했다는 것이다. 왕실 출신이나 귀족 자제들이 거액을 지불하고 주교직을 샀고, 영적 자질과는 무관하게 임명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런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려 했다. 1075년, 그는 '교황 교서(Dictatus Papae)'를 발표하며 교황의 절대적 우위를 선언했다. 이 문서는 27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내용이 가히 혁명적이었다. 교황만이 제국의 표장을 사용할 수 있고, 교황만이 황제를 폐위시킬 수 있으며, 교황은 누구에게도 재판받지 않고, 로마 교회는 결코 오류를 범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었다. 가장 논란이 된 조항은 "모든 군주는 교황의 발에 입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다. 중세의 정치 문화에서 발에 입맞춤은 가신이 주군에게 하는 복종의 의례였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이 선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반격에 나섰다. 1076년 1월, 그는 보름스에서 독일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놀랍게도 대다수의 주교들이 황제를 지지했다. 그들도 로마의 간섭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회의는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교황직에서 폐위한다고 선언했다. 하인리히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표현이 극도로 모욕적이었다. "왕들의 왕 하인리히가, 왕이 아니라 거짓 수도승에게"라는 말로 시작해서, "나 하인리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왕이지만, 너 힐데브란트(그레고리우스의 본명)는 영원히 저주받을 자다"라고 끝났다.
그레고리우스의 대응은 더욱 극단적이었다. 그는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이것이 단순한 종교적 제재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교황은 모든 신하들에게 하인리히에 대한 충성 서약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중세의 정치 체제는 개인적 충성 서약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었다. 봉신들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이 서약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교황이 이 서약을 무효화한 것이다. 게다가 파문당한 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하인리히 4세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독일의 제후들, 특히 작센의 귀족들은 이미 황제의 중앙집권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했다. 1076년 10월, 독일의 제후들은 트리부르에서 회의를 열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1년 내에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새로운 왕을 선출하겠다는 것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교황이 직접 독일로 와서 황제의 재판을 주재하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황제가 교황의 법정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굴욕이었다.
절박한 상황에 몰린 하인리히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1077년 1월,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향한 것이다. 이 여행 자체가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중세의 알프스 통과는 여름에도 어려웠는데, 겨울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황후와 어린 아들까지 동반한 이 일행은 눈보라와 추위에 시달리며 간신히 산을 넘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북부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이었다. 교황이 독일로 가는 길에 투스카니 여백작 마틸다의 이 성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카노사 성에 도착한 하인리히는 성문 밖에서 기다렸다. 그는 왕의 옷을 벗고 참회자의 옷인 조악한 양털 옷만 걸쳤다. 신발도 벗었다. 1월의 추위 속에서 맨발로 서 있는 것이다. 교황은 그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하인리히는 계속 성문 앞에 서서 기도하고 용서를 구했다. 중세의 연대기 작가 람베르트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왕의 위엄을 모두 벗어버리고, 신발도 신지 않고, 거친 양털 옷만 입고, 제3일까지 성문 앞에 멈춰 서서... 눈물과 탄식으로 교황의 자비와 도움을 간청했다."
사흘째 되는 날, 교황은 마침내 그를 용서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지만, 교회법상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를 거부할 수 없다는 원칙도 작용했다. 교황의 고해 사제 역할을 하던 클뤼니 수도원장 위그가 강력히 중재했고, 마틸다 여백작도 설득에 나섰다. 그레고리우스는 조건부로 파문을 해제했다. 하인리히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 제후들의 불만을 해결하고, 정당한 재판을 받아야 하며, 교회 개혁에 협력해야 했다. 하인리히는 이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이다. 표면적으로는 교황의 완전한 승리로 보였다.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 꿇었고, 자신의 권력이 교황의 자비에 달려있음을 인정했다. 이 이미지는 중세 내내 교황권의 우위를 상징하는 강력한 사례로 회자되었다. 하지만 실상은 더 복잡했다. 하인리히는 전략적 패배를 통해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제후들이 설정한 1년의 시한 전에 파문을 해제받았고, 따라서 새 왕 선출의 명분이 사라졌다. 일부 제후들은 이미 슈바벤 공작 루돌프를 대립왕으로 선출했지만, 하인리히는 이제 정당성을 회복한 상태였다.
더 중요한 것은 하인리히가 교황의 조건을 지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독일로 돌아온 그는 곧 내전을 시작했다. 3년간의 전쟁 끝에 그는 루돌프를 격퇴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80년 다시 하인리히를 파문했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독일의 주교들 대부분이 황제 편에 섰고, 제후들도 지쳤다. 하인리히는 반격에 나섰다. 그는 자신의 주교들을 소집하여 그레고리우스를 폐위시키고, 라벤나의 대주교 기베르트를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 세웠다.
1084년, 하인리히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로마 시민들은 그를 환영했다. 그레고리우스의 개혁 정책이 로마의 전통적 특권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하인리히는 로마를 점령하고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로부터 정식으로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산탄젤로 성에 포위되었고, 간신히 탈출하여 남부로 도망쳤다. 그는 노르만족의 로베르 기스카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기스카르의 군대가 로마로 진군하여 하인리히를 몰아냈다. 하지만 노르만 용병들은 로마를 약탈했고, 시민들의 분노가 교황에게 향했다. 그레고리우스는 로마로 돌아갈 수 없었고, 1085년 남부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서 망명 중에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그래서 망명지에서 죽는다"였다고 전해진다.
누가 승리했는가? 군사적으로는 하인리히가 이겼다. 그는 권력을 유지했고 교황을 쫓아냈다. 하지만 역사는 카노사의 굴욕을 기억한다. 한때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 꿇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는 교황이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는 원칙을 확립했고, 이후 교황들은 이 선례를 반복적으로 인용했다. 게다가 그레고리우스가 시작한 교회 개혁은 그의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성직 서임권 문제는 1122년 보름스 협약으로 타협에 이르렀다. 황제는 주교의 영적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와 지팡이를 수여할 권리를 포기하고, 교회가 선출한 주교에게 영지를 봉토로 수여하는 것만 인정받았다. 이는 교회의 승리였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중세의 권력이 단순히 군사력이나 영토만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당성이 중요했다. 아무리 강한 군대를 가진 황제라도 교회로부터 파문당하면 신하들의 충성을 잃었다. 중세인들의 세계관에서 파문은 단순히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을 의미했다. 파문당한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교황은 실제로 한 병사도 직접 지휘하지 않으면서도 황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황이 항상 우위에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교황과 황제의 관계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다. 13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우스 3세 시기에 교황권은 절정에 달했다. 그는 1198년부터 1216년까지 재위하며 전례 없는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스스로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존재, 하나님보다는 낮지만 인간보다는 높은" 존재라고 선언했다.
인노첸시우스 3세의 권력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프랑스 왕 필립 2세와의 대결이었다. 필립은 덴마크의 잉게보르그와 정략결혼을 했지만, 결혼식 다음 날 그녀를 싫어하게 되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의 외모나 언어 문제를 추측하지만, 어쨌든 필립은 결혼을 무효화하려 했다. 프랑스의 주교들은 근친 혼인이라는 명목으로 혼인 무효를 승인했다. 필립은 곧 메라니의 아녜스와 재혼했다. 하지만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인노첸시우스는 필립에게 잉게보르그를 복위시키라고 명령했다.
필립이 거부하자, 1200년 교황은 프랑스 전체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는 파문보다 더 강력한 조치였다. 성무 금지령 하에서는 영역 내의 모든 교회가 문을 닫았다. 미사가 중단되고, 성사 집전이 금지되었다. 결혼식, 세례식, 심지어 장례식조차 치를 수 없었다. 죽은 자는 묘지에 묻힐 수 없고, 교회 밖 땅에 임시로 묻어야 했다. 중세인들에게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성사를 받지 못하고 죽으면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전역에 혼란이 퍼졌다. 백성들의 분노가 왕에게 향했다. 귀족들도 불만을 표시했다. 필립은 7개월을 버텼지만 결국 굴복했다. 그는 아녜스를 버리고 잉게보르그를 복위시켰다. 하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잉게보르그를 궁전에 가두고 실질적으로는 아녜스와 계속 살았다. 교황과 십수 년간 줄다리기를 한 끝에, 1213년 마침내 진정으로 잉게보르그를 왕비로 인정했다. 이 사건은 교황이 왕의 개인적 삶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 극적인 사례는 잉글랜드의 존 왕이었다.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누가 후임이 될 것인가를 놓고 분쟁이 발생했다. 존 왕은 자신의 측근인 노리치 주교를 원했다. 캔터베리 수도원의 수사들은 독자적으로 그들의 부원장을 선출했다. 인노첸시우스 3세는 두 후보를 모두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한 스티븐 랭턴을 임명했다. 랭턴은 훌륭한 신학자였지만, 존 왕에게는 낯선 인물이었다. 존은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랭턴이 잉글랜드에 입국하는 것을 막았다.
1208년, 교황은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존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교회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수도원과 주교구의 수입을 왕실이 차지했고, 교황을 지지하는 성직자들을 추방했다. 1209년, 교황은 존 개인을 파문했다. 하지만 존은 여전히 버텼다.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지만, 군사력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12년, 상황이 급변했다. 교황은 프랑스 왕 필립 2세에게 잉글랜드를 침공하고 존을 폐위시키라고 명령했다. 이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라 십자군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었다. 필립은 대군을 모았고, 침공 준비를 시작했다. 존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프랑스의 침공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국내에서도 귀족들의 반란 음모가 포착되었다.
1213년 5월, 존은 완전히 항복했다. 그는 교황의 특사 판돌프 앞에 무릎 꿇고 왕관을 벗어 바쳤다. 그리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교황에게 봉토로 바치고, 자신은 교황의 봉신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매년 1,000마르크를 조공으로 바치기로 약속했다. 이는 카노사의 굴욕보다 더한 굴복이었다. 하인리히 4세는 용서를 구했을 뿐이지만, 존은 왕국 자체를 넘긴 것이다. 판돌프는 5일 후 왕관을 돌려주었지만, 이제 존은 명목상 교황의 신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굴복은 존에게 이익이 되었다. 교황은 이제 자신의 봉신을 보호해야 했다. 인노첸시우스는 필립에게 침공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1215년 잉글랜드 귀족들이 존에게 반란을 일으켜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을 때, 교황은 오히려 존을 지지했다. 인노첸시우스는 마그나 카르타를 무효라고 선언했고, 반란 귀족들을 파문했다. 교황의 입장에서 마그나 카르타는 자신의 봉신인 왕의 권위를 제한하는 불법적인 문서였다. 이는 교황-황제 관계의 복잡한 역학을 보여준다. 교황은 왕을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동시에 정당한 권위를 가진 왕을 보호해야 했다.
인노첸시우스 3세의 시대는 교황권의 절정이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에도 개입했다. 1198년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사망하자, 독일에서는 두 명의 대립왕이 선출되었다. 교황은 중재자로 나섰고, 결국 오토 4세를 지지했다. 오토는 교황의 도움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곧 독자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려 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대신 시칠리아의 프리드리히를 지지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도움으로 1220년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선택은 교황청에 재앙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중세 역사상 가장 비범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 시칠리아에서 성장한 그는 아랍, 그리스, 라틴 문화가 혼재된 환경에서 자랐고, 여섯 개 언어를 구사했다. 그는 과학과 철학에 열정적이었고, 동물학 연구를 했으며, 세속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사고를 가졌다. 교황들은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프리드리히는 황제로서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중앙집권적인 관료국가로 만들었다. 이는 교황령을 남북에서 포위하는 형국이었고, 교황청의 독립을 위협했다.
122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즉위했을 때,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원정을 약속했지만 출발을 미루고 있었다.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 놀랍게도 프리드리히는 파문당한 상태로 1228년 십자군을 이끌고 성지로 갔다. 그는 전투 없이 외교로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이집트의 술탄 알-카밀과 협상하여 10년간 예루살렘을 기독교도에게 양도받은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그를 환영하는 성직자가 없었다. 파문당한 황제를 위해 미사를 집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스스로 왕관을 쓰고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
이후 30년간 프리드리히와 교황청의 투쟁은 극도로 치열했다. 교황 인노첸시우스 4세는 1245년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여 프리드리히를 공식적으로 폐위시켰다. 교황은 그를 "신성 모독자, 이단자,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했다. 프리드리히는 맞섰다. 그는 유럽의 모든 군주들에게 편지를 보내 교황의 세속적 권력을 비판했다. "교황들은 겸손과 가난을 설교하면서 금과 은으로 뒤덮여 있다. 그들은 영적 권위를 넘어 세속 권력을 탐한다"고 공격했다. 이는 후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교황은 프리드리히에 대항하여 독일에서 대립왕들을 세웠다. 프리드리히는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과 싸우며 교황령을 압박했다. 1250년, 프리드리히가 5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대결은 끝났다. 교황청은 살아남았지만, 대가를 치렀다. 프리드리히와의 투쟁은 교황청의 재정을 고갈시켰고, 세속 군주들 사이에서 교황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많은 이들이 교황이 영적 목자가 아니라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는 세속 군주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1294년 교황 보니파시우스 8세가 즉위했다. 그는 인노첸시우스 3세의 전통을 이어받아 교황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했다. 1302년, 그는 교황 칙서 '우남 상탐(Unam Sanctam)'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교황권 주장의 정점이었다. "영적 검과 세속의 검 모두 교회의 권한 아래 있다... 세속 권력은 영적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 모든 인간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보니파시우스가 이 선언을 실행할 권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주된 적수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였다. 분쟁의 발단은 세금이었다. 필립은 잉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다. 교황은 1296년 칙서 '클레리시스 라이코스'를 발표하여 세속 권력이 교황의 허가 없이 성직자에게 과세하는 것을 금지했다. 필립의 대응은 단호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금과 은의 수출을 금지했다. 이는 교황청의 주요 수입원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보니파시우스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상황에서는 왕이 성직자에게 과세할 수 있다고 양보했다.
1301년, 갈등이 재발했다. 필립이 교황의 사절인 파미에 주교 베르나르를 반역죄로 체포한 것이다. 베르나르는 왕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남부 프랑스에서 왕에 대한 반란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보니파시우스는 격분했다. 그는 필립에게 주교를 즉시 석방하고, 프랑스의 모든 주교들이 로마로 와서 왕국의 개혁을 논의할 공의회에 참석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프랑스 교회를 왕의 통제에서 빼앗아 교황의 직접 지배 아래 두려는 시도였다.
필립은 이를 주권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였다. 그는 1302년 최초로 삼부회를 소집했다.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들이 모두 모인 이 회의에서 필립은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놀랍게도 프랑스 성직자들 대부분이 왕을 지지했다. 그들은 교황보다 프랑스 왕국에 더 충성했다. 이는 13세기 말에 이르러 민족 의식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보니파시우스가 '우남 상탐'을 발표했지만,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선언이었다.
1303년 8월, 교황은 필립을 파문하기로 결정했다. 파문 선언은 9월 8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전날 밤, 아나니에서 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필립의 측근인 기욤 드 노가레가 이탈리아 귀족 시아라 콜론나와 함께 무장 병력을 이끌고 교황이 머물던 궁전을 습격한 것이다. 그들은 궁전에 침입하여 교황의 침실까지 들어갔다. 보니파시우스는 교황의 예복을 입고 십자가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 장면에 대해 여러 버전을 전한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콜론나가 교황의 뺨을 철갑 장갑으로 때렸다고 하고, 다른 기록은 그들이 교황을 모욕하고 협박했지만 직접적인 폭력은 없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교황을 프랑스로 납치하여 재판에 세우려 했다는 것이다. 계획은 아나니 시민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이틀 후 시민들이 봉기하여 프랑스 병사들을 쫓아냈고 교황을 구출했다. 하지만 보니파시우스는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로마로 돌아왔지만 한 달도 안 되어 사망했다. 일부 기록은 그가 분노와 수치심으로 미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죽었다고 전하지만, 이는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아나니 사건이다. 카노사에서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 꿇은 지 226년 만에, 이번에는 교황이 왕의 병사들에게 굴욕을 당했다. 상징적 의미는 명확했다. 교황은 더 이상 세속 군주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다. 13세기 말의 유럽은 11세기와 달랐다.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왕들은 관료제와 상비군, 안정적인 세수를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의 충성도 교황보다 자신의 왕과 민족에게 향했다.
더 극적인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1305년, 프랑스인 클레멘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필립 4세의 압력으로 선출된 교황이었다. 클레멘스는 로마로 가지 않고 프랑스에 머물렀고, 1309년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아비뇽은 명목상 교황령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이른바 '아비뇽 유수'의 시작이었다. 성경의 바빌론 유수에 비유하여 붙여진 이 이름은, 교황이 로마를 떠나 외세의 포로가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비뇽 시기 동안 일곱 명의 교황이 재위했고,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추기경단도 프랑스인들이 지배했다. 이 시기 교황청은 놀라울 정도로 관료화되고 재정 중심적이 되었다. 성직 임명권, 면죄부 판매, 각종 수수료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아비뇽의 교황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교황권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이탈리아인들은 교황이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고 비난했다. 영국과 독일에서는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마침내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음 해 그가 사망하자, 더 큰 재앙이 시작되었다. 로마에서 선출된 교황 우르바누스 6세가 극도로 전제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자, 추기경들은 자신들의 선출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클레멘스 7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클레멘스는 아비뇽으로 돌아갔다. 이제 두 명의 교황이 있었고, 각자가 상대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난했다. 이것이 '교회 대분열'의 시작이었다.
이 분열은 4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유럽은 둘로 나뉘었다. 프랑스, 스코틀랜드, 스페인은 아비뇽 교황을 지지했고, 영국, 독일, 이탈리아 북부는 로마 교황을 지지했다. 각국의 선택은 종교적 확신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랐다.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던 영국은 프랑스가 지지하는 교황을 반대했다. 1409년 피사 공의회는 상황을 해결하려 했지만, 오히려 세 번째 교황을 선출하는 바람에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제 세 명의 교황이 서로를 파문하는 희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마침내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공의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주도로 개최되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교황이 아니라 황제가 교회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공의회는 3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마르티누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대분열은 끝났지만, 교황권의 권위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다.
이 시기 사상가들은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파리 대학의 장 제르송과 피에르 다이이 같은 신학자들은 교황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공의회가 교황을 판단하고 필요하면 폐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콘스탄츠 공의회 자체가 이 원칙에 따라 교황들을 폐위했기 때문에, 교황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례가 되었다.
교황과 황제의 투쟁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측면은 이들이 사용한 논리와 수사였다. 양측은 모두 성서와 신학적 논증을 동원했다. 교황 지지자들은 '두 개의 검' 이론을 내세웠다. 누가복음 22장 38절에서 제자들이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라고 말하자 예수가 "족하다"고 답한 대목을 해석한 것이다. 그들은 이 두 검이 영적 권위와 세속 권력을 상징하며, 둘 다 교회에 속하되 세속의 검은 교황의 명령에 따라 황제가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3세기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이었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세속 권력은 영적 권력에서 나온다. 따라서 세속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영적 권력이 그것을 심판해야 한다."
반면 황제 지지자들은 로마서 13장을 인용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라는 구절이다. 이들은 황제의 권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것이므로 교황의 중재 없이 독립적이라고 주장했다. 14세기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는 『평화의 수호자』라는 책에서 더 나아갔다. 그는 교황이 세속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되며, 교회는 순수하게 영적 기능만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교황청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마르실리우스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갈등은 예상치 못한 결과도 낳았다. 교황과 황제가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그 틈새에서 제3의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다. 독일의 제후들은 황제가 약해지면 교황을 지지하고, 교황이 강해지면 황제를 지지하면서 자신들의 자율성을 키웠다. 1356년 황금 문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일곱 명의 선제후가 선출한다고 규정하면서, 교황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이는 교황이 황제 선출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의미했다. 카를 대제의 대관식 이후 550년 만에, 황제는 다시 교황과 무관하게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같은 도시들은 교황과 황제의 대립을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고 번영했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교황파(구엘프)와 황제파(기벨린)로 나뉘어 싸웠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자치권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교황의 성무 금지령을 받고도 굴복하지 않았다. 1606년 교황 바오로 5세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을 때, 베네치아는 자국 내 모든 교회에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미사를 집전하라고 지시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따랐다. 베네치아의 신학자 파올로 사르피는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논문들을 발표했다. 결국 교황이 양보하고 성무 금지령을 철회했다.
역설적이게도, 두 보편적 권력의 충돌은 다원적이고 분권적인 유럽의 정치 지형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유럽을 다른 문명권과 구별되게 만든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중국에서는 황제가 절대적 권력을 가졌고, 이슬람 세계에서는 칼리프가 종교적, 세속적 권위를 모두 장악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어떤 권력도 절대적일 수 없었다. 교황은 황제를 견제했고, 황제는 교황을 견제했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 세력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공간을 찾았다. 의회, 대학, 길드, 자치 도시 같은 제도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종교개혁은 이 오랜 구조에 결정타를 날렸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했을 때, 그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다. 하지만 논쟁이 깊어지면서, 루터는 교황의 권위 자체를 거부하게 되었다. 1520년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다. 루터는 교황의 칙서를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1521년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를 심문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하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여기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시여 도우소서." 황제는 루터를 제국 추방령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루터는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았다.
북유럽의 많은 군주들이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종교개혁은 단순히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교황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날 기회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교황과 결별하고, 1534년 수장령을 통해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으로 선언했다. 토마스 모어 같은 충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이를 거부하다가 처형당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 성직자들은 왕을 따랐다.
가톨릭으로 남은 국가들조차 교황의 정치적 권위는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16세기 내내 가톨릭 국가였지만, 1516년 프랑수아 1세가 교황과 맺은 볼로냐 정교협약은 프랑스 왕에게 주교 임명권을 부여했다.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가톨릭 군주국이었지만, 스페인 왕들은 자국 교회를 철저히 통제했고 교황의 간섭을 허용하지 않았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30년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 조약은 교황 인노첸시우스 10세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결되었다. 교황은 조약의 종교 조항들을 "무효이며, 공허하고, 무의미하고, 부당하고, 불공정하며...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각국의 주권을 인정하고, 종교 문제는 각 군주가 결정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이는 근대 주권 국가 체제의 탄생을 알렸고, 동시에 교황이 유럽 정치에서 중요한 행위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했음을 의미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명목상으로나마 계속 존재했지만, 실질적 권력은 없었다. 18세기에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을 비꼬아 "신성하지도, 로마적이지도, 제국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1806년, 나폴레옹이 중부 유럽을 재편하자, 프란츠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칭호를 포기했다. 천 년 넘게 이어진 신성로마제국이 종말을 맞았다. 교황과 황제의 관계도 공식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관계가 남긴 유산은 깊다. 교황과 황제의 투쟁은 서유럽 사회에 권력의 다원성이라는 DNA를 심어놓았다. 어떤 권력도 절대적일 수 없고, 모든 권위는 도전받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권력의 원천들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정교분리, 권력분립, 법치주의 같은 원칙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의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카노사 성문 앞에 서 있던 한 황제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군대 없이 황제를 무릎 꿇린 한 교황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두 권력은 서로를 파괴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둘 다 절대 권력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공백에서 자유가 싹텄다. 이것이야말로 교황과 황제의 천 년 투쟁이 남긴 가장 역설적이면서도 귀중한 유산일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namu.wiki/w/%EC%B9%B4%EB%85%B8%EC%82%AC%EC%9D%98%20%EA%B5%B4%EC%9A%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