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군-신앙과 권력의 모순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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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 중 하나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역설 중 하나다. 교황청이라는 영적 권위의 상징이 칼과 창으로 무장한 군대를 거느렸다는 것은 단순한 자기방어의 문제가 아니라, 중세와 근대 초기 유럽의 복잡한 권력 구조와 정치적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교황의 군사력은 8세기 중반 교황령이 형성되면서 본격화되었다. 754년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가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빼앗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교황에게 헌납한 이른바 '피핀의 기증'은 교황이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세속 군주로 변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토를 소유한 순간, 교황은 그 땅을 지켜야 할 군사적 필요성에 직면했다. 이는 신학적 딜레마라기보다 냉혹한 현실 정치의 요구였다.


중세 시대 교황군의 실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교황청은 독자적인 상비군을 유지하기보다는 봉건적 군사 동원 체계에 의존했다. 교황령 내의 귀족들과 도시들은 교황에게 군사적 봉사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필요할 때마다 소집되었다. 하지만 이런 체계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했다. 지역 귀족들의 충성심은 항상 의심스러웠고, 그들 자신의 이익이 교황청의 이익과 충돌할 때가 많았다.


13세기 말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벌인 격렬한 권력 투쟁은 교황의 군사력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교황권의 절대적 우위를 주장한 교황으로, 1302년 칙서 '우남 상탐'에서 모든 인간은 구원을 위해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영적 검과 세속적 검 모두가 교회의 권력 아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정 위기에 직면한 필립 4세는 교황의 허가 없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이는 둘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충돌로 이어졌다.


1303년 9월 7일, 필립 4세의 수석 고문 기욤 드 노가레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의 아나니에 있는 교황의 여름 별장을 급습했다. 교황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콜론나 가문의 스키아라 콜론나가 함께한 이 습격은 600명의 기병과 1,5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다. 성문은 내부자의 배신으로 열려 있었고, 군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교황궁으로 진입했다. 당시 73세의 보니파키우스 8세는 화려한 예복과 성 베드로의 열쇠를 들고 옥좌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그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는 여전히 위엄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노가레는 교황에게 공의회 소환장을 전달했고, 콜론나는 교황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보니파키우스는 "차라리 죽겠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역사상 유명한 "아나니의 뺨"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스키아라 콜론나가 교황을 때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19세기에 만들어진 신화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동시대 목격자들 중 누구도 실제로 뺨을 때렸다고 기록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는 교황 권위의 모욕을 상징하는 은유였을 것이다. 어떤 연대기 작가는 교황이 구타당하고 거의 처형될 뻔했다고 기록했지만, 프랑스인들은 감히 그의 신체를 해치지는 못했다. 이틀 후 아나니 주민들이 습격자들을 쫓아냈고, 교황은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 굴욕을 극복하지 못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미친 듯이 자신을 물어뜯었고, 한 달 후인 10월 11일 사망했다. 교황군은 자신들의 주인을 지키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전능해 보이던 교황은 세속 군주의 무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 교황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군주들과 다를 바 없는 세속 군주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가 보여준 잔혹한 군사 캠페인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영감을 주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직접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섰다.


1506년 8월 26일, 율리우스 2세는 교황령 내에서 사실상 독립적으로 행동하던 폭군들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페루자에서는 바글리오니 가문이, 볼로냐에서는 벤티볼리오 가문이 교황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었다. 66세의 교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9월 13일, 페루자는 유혈 충돌 없이 항복했다. 이어 교황은 볼로냐로 진군했다. 10월 7일 그는 벤티볼리오를 파문하고 도시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벤티볼리오는 도망쳤고, 11월 10일 율리우스 2세는 승리자로서 볼로냐에 입성했다. 그는 이듬해 2월까지 도시에 머물며 교황청의 권위를 재확립했다.


율리우스 2세의 군사적 야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508년 프랑스의 루이 12세,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2세와 함께 베네치아 공화국에 맞서 캉브레 동맹을 결성했다. 1509년 5월 크레모나 인근에서 동맹군은 베네치아군을 격파했고, 교황령은 영토를 회복했다. 하지만 율리우스는 곧 프랑스가 이탈리아에서 너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야만인들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자"는 구호 아래 반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1510년부터 1512년까지 그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이 교황은 예술의 위대한 후원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철저한 군사 지도자였다. 미켈란젤로가 1508년에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성당을 위해 제작한 율리우스 2세의 거대한 청동 상은 단 3년 만에 파괴되었다. 1511년 벤티볼리오 가문이 볼로냐를 되찾았고, 그들은 증오의 상징인 교황 동상을 끌어내려 대포로 녹여버렸다.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을 시작하고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의뢰한 교황으로 기억되지만, 그의 재위 기간 내내 그는 군사 지도자로서 이탈리아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1527년 5월 6일, 율리우스 2세의 후계자들이 직면한 군사적 취약성은 다시 한번 극명하게 드러났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한 것이다. 사실 카를 5세는 로마 공격을 명령하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단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압력을 가하려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수개월간 급료를 받지 못한 약 20,000명의 용병들은 통제를 벗어났다. 여기에는 14,0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그 중 많은 수가 루터파 개신교도였다), 6,000명의 스페인 보병, 그리고 일부 이탈리아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의 방어는 형편없었다. 시민 민병대 5,000명과 189명의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가 전부였다. 5월 6일 아침 일찍,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군대가 로마 성벽 공격을 시작했다. 부르봉 공작은 자신의 군대를 식별할 수 있도록 흰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적군에게도 그가 지휘관임을 알려주는 표적이 되었다. 벤베누토 첼리니가 자신이 쏜 총에 공작이 맞았다고 주장하지만, 누가 쏘았든 부르봉 공작은 공격 초기에 전사했다. 마지막 존경받던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모든 통제를 상실했다. 갑자기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고, 방어군은 어디를 향해 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오전 7시 30분경 성벽이 뚫렸다.


스위스 근위대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마지막 저항을 준비했다. 189명의 근위대원 중 42명은 교황을 보호하기 위해 떨어져 나갔다. 대장 카스파르 뢰이스트의 지휘 아래 147명이 수천 명의 적군과 맞섰다. 이들은 바티칸 내 튜턴 묘지 근처에서 원을 그리며 서서 할버드(긴 창)와 검으로 싸웠다. 그들의 용맹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수적 열세는 극복할 수 없었다. 3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147명 전원이 전사했다. 대장 뢰이스트는 중상을 입고 자신의 집으로 도망쳤지만, 그곳에서 아내가 보는 앞에서 적군에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42명의 근위대는 교황을 800미터 길이의 비밀 통로인 '파세토 디 보르고'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로마 약탈은 8개월간 계속되었다. 루터파 독일 용병들은 가톨릭 교회의 상징물들을 특히 증오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말을 묶어두었다. 가톨릭 신자인 스페인 군인들도 잔혹함에서 뒤지지 않았다. 수도원과 궁전, 도서관이 약탈당하고 불탔다. 르네상스의 수많은 위대한 예술작품들이 파괴되거나 사라졌다. 로마의 인구는 55,000명에서 10,000명으로 급감했다. 클레멘스 7세는 6개월간 산탄젤로 성에 갇혀 지내다가 400,000 두카트의 거액을 지불하고 모데나, 파르마, 피아첸차를 포기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로마 약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예술가들과 후원자들은 도시를 떠났고, 로마는 다시는 예전의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틴 루터조차 이 만행을 후회하며 말했다. "그리스도는 루터를 박해하는 황제가 교황을 위해 교황을 파괴하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통치하신다."


1527년 스위스 근위대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날까지도 신입 근위대원들은 매년 5월 6일에 선서식을 거행한다. 이 근위대는 1506년 율리우스 2세가 창설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군대 중 하나로 남아있다.

16세기와 17세기를 거치면서 교황군의 성격은 점차 변화했다. 종교개혁 이후 교황청은 가톨릭 세계의 영적 리더십을 재확립하는 데 집중해야 했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군사적 야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교황군은 주로 교황령의 질서 유지와 방어에 초점을 맞추었다. 17세기 중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카스트로 전쟁에서 파르네세 가문과 싸웠지만, 이는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30년 전쟁의 그늘에 가려진 지역적 분쟁에 불과했다. 교황의 군사력은 이미 유럽 강대국들의 군사력에 비해 초라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18세기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교황군은 점점 더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은 교황의 세속 권력을 낡은 유물로 조롱했고,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교황령과 교황군의 취약성을 철저히 폭로했다. 나폴레옹은 1798년 로마를 점령하고 교황 비오 6세를 프랑스로 끌고 갔다. 교황군은 사실상 무력하게 무너졌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를 통해 교황령이 복원되었지만, 19세기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860년대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교황 비오 9세는 외국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로 교황령을 방어하려 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860년 창설된 교황청 주아브 부대였다. 이 부대는 프랑스 알제리의 주아브 부대의 화려한 군복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회색과 빨간색 제복을 입었다.


주아브 부대의 탄생은 극적이었다. 교황 비오 9세의 비서였던 프랑수아 사비에르 드 메로드 몬시뇰이 유럽 전역의 가톨릭 젊은이들에게 교황 방어를 호소했다. 처음에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젊은 귀족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곧 진정한 국제 부대가 되었다. 1868년 5월까지 4,592명으로 증가한 이 부대에는 프랑스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 아일랜드인, 캐나다인, 심지어 중국인과 아프리카계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캐나다에서만 507명이 입대했는데, 대부분 퀘벡의 교육받은 젊은이들이었다. 몬트리올의 이냐스 부르제 주교는 자유주의 사상에 맞서 싸울 엘리트 집단을 만들고자 했고, 각 교구마다 지원병과 재정적 지원을 제공하도록 했다.


부대의 지휘관은 스위스 출신의 외젠 알레 대령이었고, 모든 명령은 프랑스어로 내려졌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은 가톨릭 신자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주아브들은 6개월에서 10년까지 다양한 기간 동안 복무했다. 1861년부터 1870년까지 총 7,000명 이상이 입대했지만,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시간은 교황령 국경 순찰과 남부의 산적 토벌에 보냈다.


1867년 멘타나 전투는 주아브 부대가 참여한 주요 교전 중 하나였다.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이탈리아 통일군이 교황령을 침공했고, 주아브들은 프랑스 정규군 2,000명과 함께 이를 격퇴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일시적이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나폴레옹 3세는 로마에 주둔하던 프랑스 수비대 4,000명을 철수시켰다. 9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스당 전투에서 포로가 되자, 이탈리아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기회를 포착했다.


1870년 9월 20일 아침, 60,000명의 이탈리아 왕국군이 로마를 포위했다. 교황군은 약 13,000명에 불과했고, 그 중 3,040명이 주아브였다. 방어군은 7대 1로 열세였다. 이탈리아군은 오래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포르타 피아(Porta Pia) 근처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3일에는 주아브들이 적의 창기병을 격퇴했다. 20일에는 교황군 포병대와 함께 맹렬한 포화 속에서 철수했다. 주아브들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오전 10시경 교황 비오 9세는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항복을 명령했다. 단 11명의 주아브가 전투에서 사망했다. 항복 직후 몇몇 주아브들은 이탈리아군에게 처형되거나 살해당했다. 벨기에인 장교 한 명은 칼을 넘겨주기를 거부하다가 살해되었다.


다음 날 주아브 부대는 해산되었다. 마지막으로 모인 주아브들은 서로 작별을 고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760명의 프랑스 주아브들은 샤레트 대령의 지휘 아래 프랑스로 돌아가 "서부 의용군"으로 재편성되어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다. 회색과 빨간색 교황청 제복을 그대로 입고, 그들은 오를레앙 외곽에서 프로이센군과 싸웠다. 1870년 12월 2일 루아니 전투에서 그들은 제16군단의 후퇴를 엄호하면서 300명 중 216명(장교 18명, 병사 198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이들은 총검 돌격으로 맹렬하게 싸웠고, 경험 많은 전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프로이센군이 파리에 입성한 후 부대는 최종적으로 해산되었다.


일부 스페인 주아브들은 카를로스 7세의 동생 알폰소 데 보르본이 지휘하는 카를리스트 주아브 대대에 합류하여 제3차 카를리스트 전쟁에서 카탈루냐 전선에서 싸웠다. 주아브 참전용사들은 검 대신 펜을 들었지만, 언젠가 다시 제복을 입고 성도를 되찾을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오늘날 네덜란드 오덴보스 대성당 근처의 박물관, 로마의 카푸친 묘지 내 미사 예배당, 라테란의 기념비 등 여러 곳에 주아브들을 기념하는 기념물이 남아있다. 몬트리올의 마리아 성당에는 507명의 캐나다 주아브 이름이 대리석 판에 금색 글자로 새겨져 있다.


천년이 넘는 교황의 세속 권력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청은 1929년 라테란 조약으로 다시 작은 군대를 갖게 되었다. 바티칸 시국이라는 초소형 독립국가가 탄생하면서,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는 세계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오래된 군대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1506년 율리우스 2세가 창설한 이 근위대는 오늘날까지 바티칸을 지키고 있다. 화려한 르네상스 시대 복장을 입은 이들은 관광객들에게는 포토존이지만, 엄연히 무장한 현역 군인들이다. 지원자들은 19세에서 30세 사이의 미혼 스위스 가톨릭 남성이어야 하며, 최소 174센티미터 이상의 키에 스위스군에서 기본 훈련을 마쳐야 한다. 2024년 현재 135명이 복무 중이다. 그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암살 시도 때처럼 실제 위험 상황에서도 임무를 수행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로마에 진입했을 때도 스위스 근위대는 비슷한 자기희생을 준비했다. 압도적으로 열세인 근위대원들은 방어 진지를 구축했지만, 히틀러가 바티칸 공격을 결정하지 않아 피는 흘리지 않았다.


교황의 군대를 둘러싼 역사는 종교와 권력, 이상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던 교황들이 전쟁을 치르고 영토를 확장했다는 사실은 위선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인간 제도의 본질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아무리 숭고한 이상을 추구하는 조직이라도, 현실 세계에서 생존하고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세속적 권력의 도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세 교황들은 영적 권위만으로는 프랑크 왕국이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과 맞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결과 검을 들어야 했다.


동시에 교황의 군사력은 가톨릭 교회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을 주도하던 호전적인 교황청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화와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 교황청으로의 변화는 극적이다. 오늘날 교황 프란치스코가 전 세계를 돌며 평화를 호소하고 군비 경쟁을 비판하는 모습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던 율리우스 2세와는 완전히 다른 초상화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교황의 군대가 남긴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은 승리의 기록이 아니라 희생의 순간들이었다. 1527년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전사한 147명의 스위스 근위대, 1870년 로마 성벽을 지키다 해산된 주아브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군사사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급료나 영광을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신앙과 충성심으로 싸웠다. 수적 열세와 시대의 변화를 알면서도 자리를 지켰던 이들의 모습은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동시에 숭고하게 느껴진다.


교황령이 사라진 지 150년이 지났지만, 교황의 군사력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는 단순한 관광 명소가 아니라 500년 넘는 전통의 살아있는 증거다. 유럽 각지의 기념비와 박물관에 남아있는 주아브들의 흔적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건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로마의 거리를 걷다 보면 교황령 시대의 성벽과 요새를 여전히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교황이 한때 세속 군주였던 시대를 상기시킨다.


역사상 교황의 군대는 결국 실패한 실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군사력으로 확보하려 했던 세속적 권력은 일시적이었고, 결국 무너졌다. 아나니에서 굴욕을 당한 보니파키우스 8세, 로마를 약탈당한 클레멘스 7세, 교황령을 잃은 비오 9세의 이야기는 무력이 영적 권위를 보호하는 데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율리우스 2세처럼 군사적으로 성공한 교황조차도 그의 정복은 일시적이었고, 그가 세운 동맹은 곧 무너졌다.


하지만 영적 권위는 살아남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강해졌다. 바티칸이 42헥타르의 작은 국가로 축소된 지 거의 백 년이 지났지만, 교황의 목소리는 여전히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들과 그 너머의 사람들에게 도달한다. 군대가 지킬 수 없었던 것을 신앙이 지켜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이 세속 권력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도덕적 권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영토를 방어하고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게 되자, 교황청은 오롯이 영적 사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청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힘은 칼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서 나온다는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강력한 진리일 것이다. 수천 명의 병사와 요새와 대포로도 지킬 수 없었던 교황의 권위가, 이제는 군대 없이도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가장 역설적이면서도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C%9C%84%EC%8A%A4_%EA%B7%BC%EC%9C%84%EB%8C%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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