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구원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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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나 악을 응징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정의의 실현이라고 믿었고, 악인을 처벌함으로써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악을 제거하려 할수록 악은 더 깊은 곳으로 침잠했고, 응징은 또 다른 악을 낳는 순환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악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고대 그리스 비극은 이미 이 문제를 깊이 탐구했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그의 행위는 객관적으로 악이지만, 그것은 운명의 조작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찌르고 추방당한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단순한 처벌이 아니라, 악이란 인간 존재의 비극적 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는 통찰이었다. 오이디푸스의 고통은 그를 정화시키고, 결국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그는 신성한 존재로 변모한다. 악을 저지른 자가 구원받는 이 이야기는 서구 문명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기독교 전통은 이 주제를 더욱 심화시켰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자비의 호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악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조차 완전한 인식 속에서 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와 고통, 두려움 속에서 잘못된 길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 특히 오리게네스에게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만인구원론(apokatastasis)을 주장하며, 심지어 사탄조차도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악의 구원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신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악을 "선의 결핍"(privatio boni)으로 정의했다. 악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선이 부재한 상태라는 것이다. 마치 어둠이 빛의 부재인 것처럼, 악도 본래 있어야 할 선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만약 악이 실체가 아니라 결핍이라면, 악을 다루는 방법은 제거가 아니라 채움이어야 한다. 악인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에게 결핍된 선을 채워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악의 구원이라는 주제를 심리적 깊이로 탐구한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다. 그는 자신이 비범한 인간이며, 평범한 도덕은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살인 후 그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린다. 여기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보여주는 것은 양심이라는 내적 법정의 힘이다.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하는 것은 외부의 처벌이 아니라, 창녀 소냐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그 자신의 양심이다. 그는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비로소 진정한 참회를 경험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 여기서 구원은 법적 처벌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과 고통을 통한 내적 변화로 나타난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악을 목격했다. 홀로코스트는 악의 문제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나치의 만행 앞에서, 악의 구원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고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악마적 괴물이 아니라, 생각 없이 명령을 따른 평범한 관료였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의 책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한 말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렌트의 통찰은 악이 종종 무사유, 즉 생각의 부재에서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악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사이몬 비젠탈의 『해바라기』는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진다. 비젠탈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가는 나치 친위대원의 병상으로 불려간다. 그 젊은 군인은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병실을 나온다. 이 일화는 용서와 구원의 한계를 묻는다.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가해자를 용서할 권리가 있는가. 죽은 자들을 대신해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비젠탈의 침묵은 어쩌면 가장 정직한 답변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용서와 구원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실제로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가해자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조건으로 사면을 제공했다.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이것을 "용서 없는 미래는 없다"는 원칙으로 설명했다. 완전한 정의를 추구했다면 나라는 내전에 빠졌을 것이다. 대신 그들은 진실, 인정, 그리고 제한적인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완벽한 해법이 아니었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피해자들은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악의 구원이 단순히 윤리적 이상이 아니라, 때로는 사회적 생존을 위한 실용적 선택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심리학은 악의 발생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은 평범한 대학생들이 어떻게 잔혹한 교도관이 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은 권위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타인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는지를 드러냈다. 이러한 실험들이 시사하는 것은 악이 특정한 사람들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상황과 시스템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악인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악을 생산하는 시스템과 상황을 변화시켜야 한다.


현대 신경과학은 이 논의에 새로운 차원을 더한다. 뇌 손상이나 신경학적 이상이 폭력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축적되고 있다. 찰스 휘트먼은 1966년 텍사스 대학교 타워에서 16명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의 뇌에서 발견된 종양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전두엽 손상이 충동 조절 능력을 저하시키고 반사회적 행동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발견들은 자유의지와 도덕적 책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만약 어떤 사람의 악한 행동이 뇌의 생물학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단순히 이해와 설명의 차원에 머물 수 없다. 악은 실제 피해자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고통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베아트리체 디 코스타는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후, 자신을 고문한 경비원을 거리에서 마주쳤다.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그는 이미 자신의 지옥 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용서가 아니라, 복수가 아무것도 치유하지 못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진정한 구원은 가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가 증오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악의 구원은 또한 집단적 차원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독일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참회를 통해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가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그것은 한 개인이 아닌 국가 전체의 참회였다. 일본이 같은 과정을 거치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독일의 사례는 악을 저지른 집단이 과거를 직시하고 인정할 때, 일종의 도덕적 재탄생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을 던진다고 말했다. 악은 타자의 얼굴을 보지 못할 때, 그를 사물이나 추상으로 환원할 때 발생한다. 나치는 유대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고, 르완다 대학살에서 후투족은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불렀다. 악의 구원은 다시 타자의 얼굴을 회복하는 것, 그를 다시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인간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해자를 여전히 인간으로 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교 전통은 이 문제에 독특한 관점을 제시한다. 모든 존재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며, 악인 역시 깨달음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토종의 창시자 신란은 "악인이야말로 더욱 아미타불의 본원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선하다고 여기는 자는 교만하여 구원에서 멀지만, 자신의 악을 인정하는 자는 오히려 구원에 가깝다는 역설이다. 이것은 도덕적 상대주의가 아니라, 자기 인식과 겸손이 변화의 첫걸음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대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은 악의 구원을 실천적으로 모색한다. 전통적 형사 사법이 범죄자 처벌에 초점을 맞춘다면, 회복적 사법은 피해 회복, 관계 복원, 가해자의 책임 인정을 중시한다. 뉴질랜드에서 시작된 이 접근법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직접 만나 대화하고,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가 미친 영향을 직접 듣게 한다.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은 재범률을 낮추고, 피해자에게도 더 큰 만족을 준다. 여기서 구원은 법적 처벌의 완료가 아니라, 진정한 책임 인정과 관계의 회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악의 구원은 모든 경우에 가능한가. 일부 악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구원의 가능성을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연쇄살인범, 아동 학대범, 대량 학살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아마도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과 실제로 구원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이다.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인간성 밖으로 추방하는 것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저지른 것과 유사한 인간성의 부정이 될 수 있다.


심리학자 칼 융은 그림자(shadow)의 개념을 통해 악의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 각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억압하면 무의식에 축적되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폭발한다. 악인은 우리의 집단적 그림자를 투사할 대상이 되기 쉽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 자신의 어두운 가능성을 보고,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더욱 격렬하게 그들을 비난한다. 진정한 성숙은 자신 안의 그림자를 인정하고 통합하는 것이며, 이것이 타인의 어둠을 이해하는 첫걸음이 된다.


문학은 악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을 제공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는 권력욕에 이끌려 왕을 살해하지만, 그 후 끊임없는 환영과 죄책감에 시달린다. "온 대양의 물로도 이 피를 씻을 수 없으리"라는 그의 절규는 악이 저지른 자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보여준다. 악은 타인을 해치지만, 동시에 그것을 저지른 자의 영혼을 잠식한다. 이러한 이해는 악인에 대한 단순한 증오를 넘어서, 그들의 비극을 인식하게 한다.


악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완전히 선한가. 다른 상황, 다른 조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밀그램 실험에 참가한 평범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권위에 복종하여 타인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지 않을까. 짐바르도가 말했듯이, "선과 악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투과성이 있고, 유연하며, 쉽게 넘나들 수 있다." 이 인식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악인을 단순히 타자화하는 것의 위험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고 악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악을 정당화하거나 처벌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해 법과 처벌 제도를 필요로 한다. 위험한 범죄자를 격리해야 하고, 피해자의 고통은 인정되어야 하며, 정의는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처벌이 유일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형벌은 응보만이 아니라 교화와 사회 복귀를 포함해야 한다. 노르웨이의 할덴 교도소는 수감자를 인간적으로 대우하고 재활에 초점을 맞춘 결과, 세계에서 가장 낮은 재범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악인을 여전히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이 이상주의가 아니라 효과적인 전략임을 보여준다.


악의 구원은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수십 년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세포는 교체되고, 뇌는 변화하며, 경험은 축적된다. 80세의 노인과 20세에 살인을 저질렀던 그 청년은 물리적으로도 다른 사람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를 동일한 정체성으로 묶어 평생 처벌한다. 물론 피해는 지워지지 않고,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간을 정체된 존재로 고정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인 가변성과 성장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구원은 궁극적으로 신적 영역에 속한다. 기독교에서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아닌 신의 권한이다. 인간은 판단할 수 있지만, 최종적 구원이나 저주는 선언할 수 없다. 이슬람에서도 알라만이 최종 심판자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함을 유지하게 한다. 우리는 외부에서 보이는 행동만을 알 뿐, 내면의 진실, 동기, 고통, 무지의 정도를 완전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최종적 판단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


악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피해자를 배신하는 것일까. 많은 피해자와 유족들은 이렇게 느낀다. 그들의 감정은 정당하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일부 피해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에바 모제스 코르는 아우슈비츠에서 멩겔레의 실험 대상이 되었던 생존자이다. 그녀는 나치 의사를 공개적으로 용서한다고 선언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했고, 다른 생존자들은 그녀가 자신들을 대변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코르는 용서가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증오는 그녀를 계속해서 희생자로 묶어두었고, 용서는 그녀를 자유롭게 했다. 이것은 모든 피해자가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니지만, 가능한 하나의 길임을 보여준다.


악의 구원은 또한 예방의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악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이해한다면, 그것을 미리 막을 수 있다. 아동기 트라우마, 학대, 방치, 빈곤, 불평등, 사회적 배제는 모두 폭력과 범죄의 위험 요인이다. 이러한 조건들을 개선하는 것은 악의 예방이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구원의 형태일 수 있다. 악인을 처벌하는 것보다 악이 생겨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철학자 마르타 누스바움은 분노를 분석하면서, 분노는 과거를 바꿀 수 없고 오히려 우리를 과거에 묶어둔다고 말한다. 진정으로 미래지향적인 태도는 처벌이 아니라 회복과 예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실용적 지혜이다. 물론 정의는 필요하고, 책임은 물어야 하며, 피해는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복수와 영구적 낙인이 아니라, 회복과 변화를 향해야 한다.


결국 악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우리는 사람들을 영구적으로 범주화하고 낙인찍는 사회를 원하는가, 아니면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을 믿는 사회를 원하는가. 우리는 처벌과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는 사회를 원하는가, 아니면 회복과 통합의 논리를 추구하는 사회를 원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범죄자 처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적 가치와 비전의 문제이다.


악의 구원은 쉬운 답이 없는 영원한 질문이다. 어떤 악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우리의 이해와 용서의 능력을 넘어선다. 피해자의 고통은 결코 추상화되거나 최소화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복수의 순환을 끊고, 인간 변화의 가능성을 믿으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 긴장 속에서, 완벽한 해답 없이, 우리는 계속해서 묻고 고민해야 한다.


어쩌면 악의 구원이 가능한지를 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버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을 닫는 순간 우리는 인간을 사물로 만들고,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며, 희망을 포기한다. 문을 열어두는 것은 순진함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 신뢰이다. 모든 사람이 실제로 구원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변화의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존재한다는 것,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는 최소한의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단지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타인을 완전히 악마화하고 인간성 밖으로 추방하는 순간, 우리 자신도 인간성의 일부를 잃는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니체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악에 대항하기 위해 악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싸우던 것이 되어버린다. 증오로 증오에 맞선다면, 증오는 배가될 뿐이다.


역사는 이것을 반복적으로 증명해왔다.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배상금은 독일의 복수심을 키웠고, 결국 더 파괴적인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반면 2차 대전 후 마셜 플랜은 패전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유럽의 평화와 번영을 만들어냈다. 악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회복과 통합의 비전이 더 나은 미래를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정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더 넓은 맥락에서 이해한 것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증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과거의 포로가 된다. 가해자는 감옥에 있을지 몰라도, 피해자는 증오라는 감옥에 갇힌다. 남아프리카의 활동가 스티브 비코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억압자의 손이 아니라 억압받는 자의 마음에 있다"고 말했다. 증오를 놓아주는 것은 가해자를 위한 선물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해방이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고, 긴 시간이 걸리며,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 일부 사람들이 실제로 그 길을 걸었다는 것은 인간 정신의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준다.


악의 구원은 또한 공동체의 치유와 연결된다. 범죄는 개인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상처를 입힌다. 전통적 사법 체계는 국가와 범죄자 간의 문제로 범죄를 다루지만, 이것은 피해자와 공동체를 주변화한다. 회복적 사법은 범죄를 관계의 파괴로 보고, 그 회복을 추구한다. 캐나다의 원주민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치유 서클(healing circle)은 가해자, 피해자, 가족, 공동체 구성원이 모여 대화하고 치유 방안을 모색한다. 이것은 가해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재통합하면서, 동시에 책임을 묻고 피해를 회복하는 방식이다.


현대 뇌과학의 발전은 악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뇌는 평생 변화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의 발견은 변화의 생물학적 기반을 보여준다. 명상, 치료, 교육, 새로운 경험은 실제로 뇌의 구조를 바꿀 수 있다. 폭력적이었던 사람이 치료와 환경 변화를 통해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은유가 아니라 신경학적 현실이다. 물론 이것이 자동적이거나 쉬운 과정은 아니다. 그러나 변화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것, 뇌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중요한 희망의 근거이다.


악의 구원에서 시간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변화는 즉각적이지 않다. 참회는 한순간의 깨달음이 아니라 긴 여정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에서 7년을 보낸 후에야 진정한 변화를 경험한다. 소설의 끝에서 그는 "점진적 갱생의 이야기, 한 인간의 점진적 재생의 이야기,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의 점진적 이행의 이야기"가 이제 시작된다고 말한다. 구원은 도착점이 아니라 과정이다. 우리가 범죄자에게 진정한 변화를 요구한다면, 그 변화를 위한 시간과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경과 관계가 필요하다. 출소자의 70퍼센트 이상이 재범하는 이유는 그들이 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을 받아들일 사회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과자라는 낙인은 취업을 막고, 사회적 배제를 영구화하며, 범죄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악인의 구원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다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실질적 경로를 제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구원의 담론은 공허한 수사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범죄학자 체사레 롬브로소는 19세기에 타고난 범죄자(born criminal)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그는 범죄자의 두개골과 얼굴 특징을 측정하며 범죄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믿었다. 이 이론은 과학적으로 완전히 부정되었지만, 범죄자를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보는 태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그는 타고난 범죄자야," "악마 같은 놈," "인간 쓰레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언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들을 인간성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이다. 언어는 현실을 만든다. 우리가 누군가를 괴물로 부를 때,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과 변화 가능성을 부정한다.


반대로 누군가를 여전히 인간으로 대우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인간으로 행동할 기회를 준다. 심리학의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효과는 우리가 누군가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실제로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생을 우수하다고 믿고 대하면 그들의 성적이 실제로 향상되고, 범죄자를 회복 불가능하다고 대하면 그들은 그렇게 된다. 노르웨이 교도소의 성공은 수감자를 여전히 존엄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문학 작품 중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악의 구원을 가장 강렬하게 그려낸다. 장 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19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경직되고 증오에 찬 인간이 되어 나온다. 그는 자신에게 은식기를 준 미리엘 주교에게서도 은제품을 훔친다. 그러나 주교는 경찰에게 그 은제품을 선물로 주었다고 말하며 장 발장을 구한다. 이 무조건적 용서와 신뢰의 행위는 장 발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선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과거는 계속 그를 추적하고, 완고한 경찰 자베르는 법이 곧 정의라고 믿으며 그를 쫓는다. 자베르는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된다고 믿지만, 장 발장의 선행을 목격하며 혼란에 빠진다. 결국 자베르는 자신의 경직된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위고가 보여주는 것은 용서와 신뢰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경직된 정의관이 오히려 파괴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악의 구원에서 동기와 의도의 문제는 복잡하다. 같은 행위라도 의도에 따라 도덕적 평가가 달라진다. 자기 방어로 사람을 죽인 것과 계획적 살인은 다르다. 그러나 의도를 정확히 아는 것은 어렵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동기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프로이트가 보여준 것처럼 무의식적 동기가 우리 행동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다. 어떤 사람이 "나는 그냥 화가 났을 뿐"이라고 말할 때, 그 분노 뒤에는 오래된 트라우마, 억압된 무력감, 학습된 폭력 패턴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한 악의나 자유로운 선택으로만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철학자 수전 울프는 도덕적 책임에 대해 "온전한 정신으로(sanity) 행했는가"를 묻는다. 정신질환, 세뇌, 극단적 트라우마 등으로 인해 현실을 왜곡되게 인식하는 사람에게 온전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이것은 법적 정신이상 항변과 연결되지만, 더 넓게는 모든 인간의 제한된 자유의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유전자, 양육, 경험, 사회적 조건, 뇌화학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한다.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완전한 결정론도, 완전한 자유의지도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제한된 자유 속에서 선택하는 존재이며, 이 제한을 고려하는 것이 정의로운 판단의 일부여야 한다.


악의 구원에서 공감의 역할은 양날의 검이다. 가해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첫걸음이다. 그러나 과도한 공감은 책임을 희석시킬 위험이 있다. "그는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어," "그는 피해자이기도 해"라는 말이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용인된다"는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명과 정당화는 다르다. 우리는 왜 누군가가 악을 저질렀는지 이해하면서도, 그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지만 필수적이다.


최근 회복적 사법 연구들은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많은 이들이 가해자의 긴 형기보다 진심 어린 사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원했다. 전통적 사법 체계는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법정에서 가해자는 침묵하거나 부인하고, 피해자는 방청석에 앉아 있을 뿐이며, 진정한 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회복적 접근은 이러한 대화의 공간을 만든다. 물론 모든 경우에 적절한 것은 아니고,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선택지로 제공될 때,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다고 느낀다.


악의 구원은 세대를 거친 과정이기도 하다. 트라우마는 세대 간 전승된다. 학대받은 아이는 학대하는 부모가 될 위험이 높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녀들은 부모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트라우마의 징후를 보인다. 이것을 끊는 것이 진정한 치유이다. 한 사람이 폭력의 순환을 끊을 때, 그것은 한 개인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구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해자의 치유와 변화는 더 넓은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영성적 전통들은 악의 구원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기독교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 아들이 충분히 고생했는지, 진심으로 뉘우치는지 따지지 않는다. 그냥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한다. 이것은 구원이 공로나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와 사랑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유대교의 테슈바(teshuvah), 즉 회개의 개념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슬람의 타우바(tawbah)도 유사하게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전통은 변화와 귀환의 가능성을 중심에 둔다.


그러나 우리는 낭만적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십 년의 치료와 기회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반복한다. 사이코패스 연구는 공감 능력이 근본적으로 결여된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에게 구원이 가능한가.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모른다. 신경과학은 아직 이 질문에 답할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을 탐구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격리조차도 잔인할 필요는 없다. 존엄성은 여전히 지켜져야 한다.


악의 구원에 대한 논의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고통을 최소화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정의에 대한 욕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피해자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평생 증오 속에 살고, 어떤 이들은 용서를 선택하며, 어떤 이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모든 반응이 정당하다. 구원의 담론이 피해자에게 특정한 반응을 강요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악의 구원이라는 주제는 우리에게 거울을 보여준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 우리는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는 변화를 믿는가.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추상적 윤리학이나 신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교도소 정책, 범죄자 처우, 피해자 지원, 사회 통합 프로그램, 교육 시스템에서 구체화된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제도에 반영되어야 한다.


악의 구원을 논하는 것은 결코 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면서도, 그것이 마지막 말이 되지 않게 하려는 시도이다. 악은 실재하고, 파괴적이며, 고통을 낳는다. 그러나 악이 사람의 전부를 규정하게 둔다면, 우리는 그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간성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에게서 인간성을 제거할 때, 우리 자신의 인간성도 훼손된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 심지어 최악의 행위를 저지른 사람조차도, 이것이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선이다.


마지막으로, 악의 구원은 완성될 수 없는 과제일지 모른다.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한 정의, 완전한 치유, 보편적 화해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조금이라도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 복수의 순환을 끊으려는 시도,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드는 일, 이것들은 의미가 있다.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악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희망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과거에 갇혀 있지 않고, 사람들이 변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미래가 가능하다는 희망. 이 희망은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면서도, 빛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악의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악이 마지막 말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절망할 이유가 충분한 세상에서 여전히 희망을 선택하는 것, 증오가 정당해 보이는 순간에도 이해를 시도하는 것, 복수가 당연해 보일 때 회복을 꿈꾸는 것. 이것이 악의 구원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정한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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