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의 오류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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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법치를 믿는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명제를, 법이 자의적 권력을 제어한다는 약속을, 법이 정의를 구현한다는 신념을 깊이 내면화하고 있다. 법치는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분수령처럼 여겨진다. 서구 계몽주의 이래 법치는 인류가 도달한 가장 위대한 정치적 성취로 칭송받아왔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권력분립과 법치를 통해 전제정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존 로크는 자연법과 사회계약을 통해 법치의 철학적 기초를 다졌다. 하지만 이 숭고한 이상 뒤에는 우리가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는 근본적인 오류가 도사리고 있다. 법치는 그 자체로 정의를 보장하지 않으며, 때로는 가장 정교한 불의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 말이다.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두 개의 법률이 통과되었다. 제국시민법과 독일인의 혈통과 명예 보호법, 이른바 뉘른베르크 법이었다. 이 법률들은 유대인을 독일 시민권에서 배제하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결혼과 성관계를 범죄화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법률들이 바이마르 헌법의 수권법에 근거해 합법적 절차를 거쳐 제정되었다는 점이다. 의회는 승인했고, 법률 전문가들이 조문을 작성했으며, 법원은 이를 집행했다. 형식적으로 보면 완벽한 법치였다. 1896년 미국 대법원의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도 마찬가지다. 헨리 브라운 대법관은 7대 1로 '분리하되 평등'의 원칙을 확립하며,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것이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보호조항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 판결은 1954년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로 뒤집히기까지 58년간 미국 사회의 인종분리를 정당화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더욱 정교했다. 1950년 인구등록법, 1950년 집단거주지역법, 1953년 공공시설분리법 등 수백 개의 법률이 인종분리를 체계화했고, 법원은 이를 엄격히 집행했다.


이것이 법치의 첫 번째 오류다. 법치는 형식적 합법성과 실질적 정당성을 혼동한다. 법이 제정되고 집행되는 절차가 법률에 부합하면, 우리는 그것을 법치라 부른다. 하지만 그 법의 내용이 정의로운가는 별개의 문제다. 19세기 법실증주의의 거장 존 오스틴은 법을 '주권자의 명령'으로 정의하며, 법의 도덕성과 법의 존재를 철저히 분리했다. 그의 제자인 한스 켈젠은 이를 더욱 정교화해 순수법학을 확립했다. 켈젠에 따르면 법의 타당성은 오직 상위 규범에 대한 형식적 합치에서만 나온다. 이 논리의 정점에는 '근본 규범'이라는 가설적 전제가 있다. 문제는 이 이론이 법의 내용적 정당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재자가 제정한 헌법도, 그것이 이전 헌법의 개정 절차를 따랐다면 유효한 법이 된다. 실제로 히틀러는 1933년 수권법을 합법적으로 통과시켜 독재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스탈린은 1936년 소련 헌법을 제정하며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 자랑했지만, 그 헌법 아래서 대숙청이 자행되었다.


법실증주의에 대한 반발로 자연법론이 부활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의 전통을 잇는 자연법론자들은 인간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보편적 도덕 원칙이 존재하며, 이에 반하는 실정법은 진정한 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나치 경험 이후 극단적 불의는 법이 아니라는 '라드브루흐 공식'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 또한 문제가 있다. 누가 무엇이 자연법인지 결정하는가? 역사를 보면 자연법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억압이 부지기수다. 중세 교회는 자연법으로 이단 심문을 정당화했고, 식민주의자들은 자연법으로 원주민 학살을 합리화했다. 미국 남부의 노예주 옹호론자들조차 노예제가 자연의 질서라고 주장했다. 자연법은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이름이 되곤 한다.


더 교묘한 것은 법치가 가진 중립성의 가면이다. 법은 스스로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판사는 법을 발견할 뿐 만들지 않는다는 선언적 이론은 오랫동안 법조계의 신화였다. 윌리엄 블랙스톤은 18세기에 이미 판사는 "법의 살아있는 신탁자이자 대변자"이며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언"한다고 썼다. 이 관점에서 법은 발견되어야 할 객관적 실체이며, 판사는 단지 그것을 찾아내는 기술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법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법은 특정 시점, 특정 사회의 권력관계를 응고시킨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부랑자법을 보자. 1824년 부랑자법은 "고정된 거처나 합법적 생계수단 없이 방랑하는 자"를 범죄자로 규정했다. 표면적으로 이 법은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중립적 조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산업혁명기에 농촌에서 쫓겨난 빈민들을 통제하고, 저임금 노동력을 공장으로 강제하는 계급 입법이었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이를 "자기조정 시장"을 만들기 위한 국가의 폭력적 개입으로 분석했다. 1833년 영국 공장법은 9세 미만 아동의 노동을 금지하고 18세 미만의 노동시간을 하루 12시간으로 제한했다. 진보적 입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방적 공장주들이 자신들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규모 작업장의 착취를 규제한 것이었다. 재산권 보호는 더욱 노골적이다. 1800년대 초 영국에서는 사냥감을 밀렵한 자를 사형에 처할 수 있었다. 토지 귀족의 재산권이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했던 것이다.


현대로 오면 이 구조는 더욱 정교해진다. 지적재산권법은 혁신을 장려하기 위한 중립적 제도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거대 제약회사가 값싼 제네릭 의약품을 막고, 기술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는 도구가 된다. 2016년 에피펜 가격 인상 사태를 기억하는가? 마일런사는 생명을 구하는 알레르기 치료제 가격을 5년간 500% 인상했지만, 특허법이 이를 보호했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화이자와 모더나는 백신 특허 공유를 거부했고, WTO의 지적재산권 협정(TRIPS)이 이를 뒷받침했다. 수백만 명이 백신을 맞지 못해 죽어가는 동안, 법은 제약회사의 이익을 보호했다. 노동법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태프트-하틀리법은 노동조합의 권리를 제한하며 중립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사용자의 권력을 강화한다. 한국의 전임자 급여 금지 조항, 노동시간 특례업종 지정, 필수공익사업 지정은 모두 중립적 공익을 내세우지만 노동자의 단결권을 약화시킨다.


법 해석의 과정에서 이 문제는 더욱 명백해진다. 같은 헌법 조항을 놓고도 판사들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다. 미국 대법원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보라. 1973년 해리 블랙먼 대법관은 7대 2로 낙태권이 헌법상 사생활권에 포함된다고 판시했다. 수정헌법 제14조의 적법절차 조항을 해석한 결과였다. 그런데 2022년 도브스 대 잭슨 판결에서 새뮤얼 알리토 대법관은 6대 3으로 이를 뒤집으며, 낙태권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고 역사적 전통에도 없다고 선언했다. 같은 헌법, 같은 조항인데 결론은 정반대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대법관의 구성이다. 트럼프가 임명한 보수 성향 판사 3명이 균형을 바꾼 것이다. 이것은 법이 자명한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미국의 비판법학 운동은 이를 통렬하게 폭로했다. 1970년대 하버드 로스쿨의 젊은 교수들이 시작한 이 운동은 법적 추론의 중립성이라는 신화를 해체했다. 던컨 케네디는 "법률 교육과 위계의 재생산"에서 로스쿨이 어떻게 학생들을 지배계급의 대리인으로 만드는지 분석했다. 로베르토 운거는 법이 사회 변혁의 도구가 아니라 기존 권력관계를 공고화하는 기제임을 보여주었다. 마크 터시넷은 헌법 해석이 정치적 선택을 법률 용어로 번역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핵심 통찰은 이것이다. 법적 자료는 언제나 양면적이고 모순적이며, 어떤 결론도 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다. 판사가 결론을 먼저 정한 뒤 법적 근거를 찾는 것이지, 법적 근거가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경험적 연구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제프리 시걸과 해럴드 스파스의 "태도 모델"은 대법관의 판결을 정치적 성향으로 예측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리 엡스타인의 연구는 보수 대법관이 보수적 판결을, 진보 대법관이 진보적 판결을 내릴 확률이 80% 이상임을 밝혔다. 법 해석이 중립적이라면 이런 패턴이 나올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댄 카한의 "문화적 인지" 연구다. 판사들은 자신의 세계관에 맞는 방식으로 사실을 인식하고 증거를 평가한다. 총기 규제 사건에서 총기 소유를 지지하는 판사와 반대하는 판사는 같은 통계를 보고도 정반대의 결론을 내린다. 법치가 약속하는 예측가능성과 객관성은 실제로는 지배 엘리트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인 것이다.


법치의 또 다른 심각한 오류는 접근성의 구조적 불평등이다. 법 앞의 평등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한다. 1894년 아나톨 프랑스는 "붉은 백합"에서 이렇게 썼다. "법은 장엄한 평등성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다리 밑에서 자고, 거리에서 구걸하고, 빵을 훔치는 것을 금지한다." 이 풍자는 법의 형식적 평등이 어떻게 실질적 불평등을 은폐하는지 날카롭게 지적한다. 법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고 말하지만, 법을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극도로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변호사 비용의 장벽을 보자. 미국에서 이혼 소송 변호사 비용은 평균 1만5천 달러다. 살인 사건 변론은 5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를 넘는다. 대기업 간 특허 소송은 수백만 달러가 든다. 이것은 단순한 비용 문제가 아니다. 법적 분쟁의 결과가 경제적 자원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다. 마크 갤런터의 고전적 연구 "왜 가진 자들이 계속 앞서가는가"는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그는 법정에 자주 나오는 "반복 참여자"와 일생에 한두 번만 소송하는 "일회 참여자"를 구분했다. 기업이나 정부 같은 반복 참여자는 장기적 전략을 짤 수 있고, 판례를 축적하며, 소송 기술을 발전시킨다. 반면 개인 같은 일회 참여자는 당장의 사건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결과는 뚜렷하다. 반복 참여자가 압도적으로 승소한다.


형사사법 체계에서 이 불평등은 더욱 잔혹하다. 미국 형사피고인의 80%가 공선 변호인을 받는다. 그런데 공선 변호인 제도는 만성적으로 재원이 부족하다. 루이지애나의 한 공선 변호인은 동시에 194건의 사건을 맡고 있었다. 사건당 평균 7분을 쓸 수 있는 셈이다. 반면 O.J. 심슨은 500만 달러를 들여 12명의 변호사로 구성된 "드림팀"을 고용했고, 무죄를 받았다. 메리 보일 변호사의 연구에 따르면, 공선 변호인을 받은 피고인은 사선 변호사를 고용한 피고인보다 유죄판결을 받을 확률이 33% 높고, 형량도 평균 3년 더 길다.


2018년 필라델피아 보석금 제도에 대한 연구는 더욱 충격적이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중 보석금을 낼 수 있었던 사람은 61%가 무죄나 기각 판결을 받았다. 보석금을 내지 못해 재판 전 구금된 사람은 39%만 무죄나 기각을 받았다. 차이는 오직 돈이었다. 더 나쁜 것은 보석금을 내지 못해 구금된 사람들은 무죄 판결을 받아도 이미 수개월을 감옥에서 보낸 뒤였다는 점이다. 칼라 마린의 연구는 재판 전 구금이 유죄 인정 협상을 25%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죄인데도 빨리 나가기 위해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민사소송에서는 상황이 더욱 노골적이다. 대기업이 개인을 상대로 SLAPP 소송을 제기하는 전략을 보라. SLAPP은 "공공 참여 저지를 위한 전략적 소송"의 약자다. 거대 기업이나 권력자가 자신을 비판하는 시민이나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건다. 승소가 목적이 아니다. 소송 비용과 시간으로 상대방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2010년 영국의 사이먼 싱 사건이 대표적이다. 과학 저널리스트 싱이 영국 척추교정협회의 치료법을 비판하자, 협회는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싱은 20만 파운드의 변호사 비용을 쓰고 2년을 싸워 승소했지만, 그 대가는 엄청났다. 많은 언론인과 시민들은 이런 위험 때문에 아예 비판을 자제한다. 법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법률 지식의 불평등도 심각하다. 법은 전문가의 언어로 쓰여 있다. 계약서, 약관, 법률 문서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용어와 구조로 되어 있다.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계약서를 본 사람이 몇이나 이해했겠는가? 소비자들은 자신이 무슨 계약을 맺는지도 모른 채 서명했다. 법률가들은 이 정보 비대칭을 이용한다. 변호사는 자신의 의뢰인에게 유리하게 법을 해석하고, 상대방의 무지를 이용한다. 법조계는 이런 전문성 독점을 "전문가주의"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하지만, 실제로는 진입장벽을 높여 독점 지대를 누리는 것이다.


법의 지체는 또 다른 치명적 결함이다. 법은 본질적으로 과거지향적이다. 법의 정당성은 선례, 전통, 역사적 관행에 의존한다. 영미법의 스테어 디시시스 원칙은 이를 명시적으로 요구한다. 판사는 이전 판결을 따라야 하며, 이를 뒤집으려면 특별한 정당화가 필요하다. 성문법 체계도 마찬가지다. 법 개정은 복잡하고 느린 과정이다. 그 결과 법은 언제나 사회보다 뒤처진다.


여성 참정권의 역사를 보자. 존 스튜어트 밀이 1869년 "여성의 종속"에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했지만, 영국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얻은 것은 1928년이었다. 59년이 걸렸다. 미국은 1920년 수정헌법 제19조로 여성 참정권을 보장했지만, 흑인 여성들이 실제로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1965년 투표권법 이후였다. 거의 반세기가 더 걸린 것이다. 동성애도 마찬가지다. 1973년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했지만, 2003년까지 텍사스를 포함한 14개 주에서 동성 간 성행위가 범죄였다. 2015년 오버게펠 판결로 동성 결혼이 전국적으로 합법화되었을 때, 이미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60%가 동성 결혼을 지지하고 있었다. 법은 사회적 합의가 형성된 뒤에야 뒤따라온 것이다.


기술 발전 앞에서 법의 지체는 더욱 심각하다. 인터넷이 1990년대 보급되었지만, 온라인 명예훼손, 사이버 범죄, 데이터 프라이버시에 대한 적절한 법적 규제는 한참 후에야 나왔다. 그 공백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이 규칙을 만들었다.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은 법이 없는 공간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관행을 확립했다. 법이 뒤늦게 도입될 때쯤이면 이미 기득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암호화폐와 블록체인도 마찬가지다. 비트코인이 2009년 등장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명확한 법적 규제가 나온 것은 2017년 이후다. 그 사이 사기, 해킹, 자금세탁이 만연했다. 인공지능은 더욱 긴급하다. GPT-3가 2020년 출시되었고, 이미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고 있지만, AI의 책임, 편향, 저작권에 대한 법적 프레임워크는 여전히 미비하다.


법의 지체가 문제인 이유는 단순히 법이 느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간차가 권력관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법이 없는 공백기에 강자가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나중에 법으로 공식화된다. 노동법의 역사가 이를 보여준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노동관계를 규율하는 법이 없었다. 자본가들은 16시간 노동, 아동 노동, 위험한 작업 환경을 강요했다. 노동자들이 조직화하고 파업하자, 처음 나온 법은 노동조합을 불법화하는 법이었다. 1799년 영국의 단결금지법은 노동자의 단결을 범죄로 규정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은 수십 년의 투쟁 끝에야 나왔다. 법은 중립적으로 규율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권력관계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한다.


법치는 또한 자기 정당화의 순환에 빠진다. 법은 자신의 정당성을 다른 법에서 찾는다. 하위법은 상위법에 근거하고, 법률은 헌법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헌법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켈젠은 '근본 규범'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근본 규범은 "헌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전제인데, 이것 자체는 법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단지 가정될 뿐이다. 이것은 순환논리다. 법이 정당하기 때문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기 때문에 법이 정당한 것이 된다.


실제로 헌법의 정당성은 어디서 오는가? 제정 당시의 정치적 권력에서 온다. 미국 헌법은 1787년 필라델피아 제헌회의에서 55명의 백인 남성이 만들었다. 그들은 누가 권한을 주었는가? 아무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권한을 가졌다고 선언했다. "우리 인민은"으로 시작하는 헌법 전문은 수사적 장치일 뿐, 실제로 인민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여성, 흑인, 원주민, 재산 없는 남성은 배제되었다. 찰스 비어드의 고전적 연구는 제헌회의 참석자들이 대부분 채권자, 상인, 대토지 소유자였으며, 헌법이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도록 설계되었음을 밝혔다.


혁명이 이 순환을 폭로한다. 혁명 정부는 기존 헌법을 폐기하고 새 헌법을 제정한다. 어떤 법적 근거로? 없다. 혁명의 정당성은 법 밖에 있다. 사실상의 권력, 즉 물리력의 장악에서 나온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 모두 마찬가지다. 혁명가들은 구체제의 법을 무시하고 새 법질서를 만든다. 그리고 일단 안정되면, 새 체제는 스스로를 합법적이라고 선언한다. 법의 정당성은 결국 권력의 독점으로 귀결된다. 막스 베버는 이를 간파했다. 국가는 "특정 영토 내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주장하는" 조직이다. 법은 이 폭력 독점의 규칙일 뿐이다.


더 근본적으로, 법치는 법이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착각을 조장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법을 만들자"고 외친다. 범죄가 늘면 형량을 높이는 법을 만든다. 차별이 있으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 환경이 오염되면 환경법을 강화한다. 하지만 많은 사회 문제는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법은 증상을 다룰 뿐 원인을 치유하지 못한다.


빈곤을 보자. 1960년대 린든 존슨의 "빈곤과의 전쟁"은 수십 개의 사회복지 법률을 만들어냈다. 식품 쿠폰 프로그램, 메디케이드, 헤드스타트 등이 도입되었다. 6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빈곤율은 얼마나 줄었는가? 1964년 19%였던 빈곤율은 2022년 11.5%다. 개선은 있었지만 빈곤은 근절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빈곤의 원인은 법이 아니라 경제 구조, 임금 수준, 교육 기회, 주거 정책의 복합적 결과이기 때문이다. 법은 보상할 수 있지만 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1964년 미국 민권법은 인종차별을 불법화했다. 획기적인 법률이었다. 하지만 인종차별이 사라졌는가?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인종차별이 여전히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셸 알렉산더의 "새로운 짐 크로"는 민권법 이후 어떻게 형사사법 체계가 인종차별의 새로운 도구가 되었는지 추적한다. 마약과의 전쟁은 흑인을 불균형적으로 표적으로 삼았다. 흑인과 백인의 마약 사용률은 비슷하지만, 흑인이 마약 관련 범죄로 체포될 확률은 3.7배 높다. 법은 형식적으로 중립적이지만, 집행은 인종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차별은 법의 영역에서 사회적 관행과 무의식적 편견의 영역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범죄는 더욱 명백하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은 "범죄에 강경하게" 접근하며 형량을 계속 높였다. 1984년 감옥종합범죄통제법, 1986년 반마약남용법, 1994년 폭력범죄통제법 등이 이어졌다. 그 결과 1970년 20만 명이던 수감자가 2008년 230만 명으로 폭증했다.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는 미국이 세계 수감자의 25%를 보유하게 되었다. 범죄는 줄었는가? 범죄율은 1990년대부터 감소했지만, 이것이 엄벌주의 때문인지는 불명확하다. 경제 성장, 인구 구조 변화, 경찰력 증가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오히려 과도한 수감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었다. 전과자가 재취업하기 어려워 재범률이 높아졌다. 가족이 해체되고 지역사회가 붕괴되었다. 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새로운 문제를 창출했다.


오히려 과도한 법제화는 법의 효력을 떨어뜨린다. 준수되지 않는 법이 많아질수록 법 일반에 대한 존중이 약해진다. 금주법이 대표적이다. 1920년 미국은 수정헌법 제18조로 알코올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다. 목적은 도덕성 향상과 범죄 감소였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밀주 제조가 번창하고, 조직범죄가 급성장했으며, 경찰 부패가 만연했다. 시민들은 법을 공공연히 어겼다. 시카고에는 1만 개의 불법 술집이 있었다. 1933년 금주법은 폐지되었다. 법이 사회적 합의 없이 도덕을 강제하려 하면 실패한다는 교훈이다.


현대의 마약 정책도 비슷한 실패를 보여준다. 1971년 닉슨이 선언한 "마약과의 전쟁"은 50년간 1조 달러 이상을 소비했다. 마약 사용이 줄었는가? 오히려 늘었다. 2021년 미국에서 마약 과다복용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금지는 마약을 범죄 조직의 손에 넘겨주었고, 순도를 통제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중독자를 범죄자로 만들었다. 포르투갈은 2001년 모든 마약 소지를 비범죄화하고 치료 중심으로 전환했다. 결과는? 마약 관련 사망이 85% 감소했고, HIV 감염이 95% 줄었으며, 마약 사용률도 낮아졌다. 이것은 법이 아니라 정책의 승리다.


법치의 가장 역설적인 오류는 법치 자체가 법으로 강제될 수 없다는 점이다. 법치는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선의와 제도에 대한 헌신에 의존한다. 아무리 완벽한 헌법과 법률이 있어도, 판사가 부패하고, 검사가 정치에 복종하고, 입법자가 사익을 추구하면 법치는 무너진다. 그런데 이들을 감시하는 것도 법적 제도다. 누가 감시자를 감시할 것인가? 유베날리스의 이 고대 질문에 법치는 답을 주지 못한다.


실제로 많은 국가에서 법치는 종이 위에만 존재한다. 러시아는 1993년 헌법을 가지고 있고, 사법부가 있으며, 법률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법치국가다. 하지만 실제로는 푸틴의 의지가 법보다 우선한다. 정적들은 조작된 혐의로 투옥되고, 언론인은 살해되며, 선거는 조작된다. 법은 있지만 법치는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방대한 법전을 가지고 있고, 법원이 있으며, 헌법에 인권 조항도 있다. 하지만 공산당의 지도가 헌법보다 상위에 있다. 법은 당의 통치 도구일 뿐이다.


심지어 서구 민주주의에서도 법치는 위협받는다. 트럼프 행정부는 법의 지배를 반복적으로 무시했다. 법원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의회 소환을 거부하며, 사법방해 의혹에도 탄핵을 피했다. 헝가리의 오르반 정부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사법부를 장악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폴란드, 터키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법치의 형식을 유지하면서 법치의 실질을 파괴하는 것이다. 킴 레인 셰펠은 이를 "법을 통한 독재"라고 불렀다. 독재자는 더 이상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들은 선거에서 승리하고, 헌법을 개정하며, 법을 이용해 권력을 공고화한다.


더 교묘한 것은 법치를 외치며 법치를 파괴하는 경우다. 2001년 9/11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애국자법은 광범위한 감시 권한을 정부에 부여했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는 적법절차 없이 용의자들을 무기한 구금했다. CIA는 고문을 자행했다. 이 모든 것이 국가 안보라는 명분으로 법적으로 정당화되었다. 법무부는 "고문 메모"를 작성해 물고문이 고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법이 법치를 파괴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를 "예외상태"의 정상화라고 분석했다. 비상사태가 일상이 되고, 예외가 규칙이 되며, 법치는 허울만 남는다.


법치의 근본적 한계는 그것이 절차적 개념이라는 점이다. 법치는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는 말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법이 예측가능하고, 공개되고, 일반적이고, 명확하며, 소급적용되지 않고, 실행가능하고, 일관되게 적용되면 법치라고 본다. 이것이 론 풀러의 법의 내적 도덕성이다. 하지만 이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면서도 부정의한 법이 가능하다. 아파르트헤이트법은 명확했고, 공개되었으며, 일관되게 적용되었다. 절차적 법치는 실질적 정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법치를 포기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법치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법치를 강화하는 첫걸음이다. 법치는 만능이 아니라 도구다. 완벽하지 않지만 필요한 도구다. E.P. 톰슨은 "휘그와 사냥꾼들"에서 이렇게 썼다. "법의 지배는 명백한 선이다. 그것은 자의적 권력에 대한 유효한 억제장치다." 법치가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힘의 지배뿐이다. 법치는 약자가 강자에게 맞설 수 있는 최소한의 무기다.


중요한 것은 법치를 형식적 합법성 이상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법의 내용이 정의로운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법이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법적 절차에 실질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평등하게 보장해야 한다. 이것은 법률가만의 과제가 아니다. 시민 모두의 과제다. 법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토론의 대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법치를 넘어서는 정의를 사유해야 한다. 법이 정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정의로운 사회의 원칙을 법과 별개로 탐구했다. 아마르티아 센은 "정의의 아이디어"에서 완벽한 정의 이론이 아니라 불의를 줄이는 실천적 접근을 제시했다. 정의는 법전에 쓰여 있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투쟁과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때로는 불복종이 정당하다. 1849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민불복종"에서 이렇게 썼다. "부정의한 법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고치려 노력하면서도 성공할 때까지 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당장 위반해야 하는가?" 소로의 답은 명확했다. 노예제에 협력하는 법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고. 그는 멕시코 전쟁에 항의해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갔다. 1955년 로자 파크스는 몽고메리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법을 어겼다. 그녀의 체포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촉발했고, 이는 민권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1930년 간디는 영국의 소금 독점법에 저항해 소금 행진을 이끌었다. 수만 명이 불법적으로 소금을 만들며 영국 지배에 도전했다. 이것은 법의 부정이 아니라 정의의 요구였다.


시민불복종은 법치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법치를 정의로 이끄는 힘이다. 로널드 드워킨은 시민불복종을 "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행위로 해석했다. 법이 정의롭지 않을 때, 우리는 법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법의 정당성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시민불복종은 신중해야 한다. 존 롤스는 시민불복종의 조건을 제시했다. 공개적이어야 하고, 비폭력적이어야 하며, 심각한 불의에 대응해야 하고, 다른 수단이 소진된 후여야 하며, 처벌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조건들은 시민불복종을 무정부주의와 구분한다. 시민불복종은 법 질서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정의로운 법 질서를 만들려는 시도다.


법치의 오류를 직시하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더 나은 법치를 향한 출발점이다. 법이 완벽하다고 믿는 순간, 법은 독단이 된다. 법이 중립적이라고 가정하는 순간, 법은 편향을 은폐한다. 법이 정의를 구현한다고 확신하는 순간, 법은 불의를 정당화한다. 법치는 의심과 비판을 통해서만 진정한 의미를 얻는다.


법을 신화화하지 말아야 한다. 법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제도다. 불완전하고, 편향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법에 질문할 때, 법은 권위주의의 도구에서 민주주의의 수단으로 거듭난다. 법치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법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법 앞의 평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법의 정의는 선언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법치는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영원한 과제다.


우리는 법을 존중하되 숭배하지 말아야 한다. 법을 준수하되 맹종하지 말아야 한다. 법을 활용하되 법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법치의 약속을 믿되, 그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법은 지배의 도구에서 해방의 도구로 전환될 수 있다. 법치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법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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