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차 십자군-오만과 기회의 역설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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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년 4월 13일, 4차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처음부터 동로마 제국을 정복할 의도를 가지고 침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상인들의 탐욕과 정치적 음모가 결합되어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 도시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 단돌로는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고,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안으로 말과 당나귀를 끌어들여 성물과 보물을 실어나르는 광경이 펼쳐졌다. 십자군 전사들은 도시를 공격하기 전 성직자나 유아, 여성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그런 규율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여성과 성직자들은 물론 귀족들조차 비참한 신세의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250년 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했지만, 로마인들은 그래도 이들은 십자가를 든 기독교 악마보단 낫다는 평을 남겼다.


이 참극을 목격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처음에 십자군을 파문했다. 그러나 곧 태도를 바꿔 이를 동서 교회의 재일치를 위한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붕괴되었고,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른 곳으로 떠났다. 4차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이 약탈 사건은 비잔티움 제국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어 로마 가톨릭과 서방 사람들을 극도로 혐오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1054년의 대분열은 정확히 150년이 지난 1204년에 제대로 뿌리 깊게 완성되고 말았다.


인노첸시오 3세는 1160년경 이탈리아 캄파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볼로냐와 파리 대학에서 신학과 법률을 공부한 뛰어난 학자였다. 1198년 첼레스티노 3세가 사망하자 불과 37세의 나이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이는 90대의 노쇠한 전임 교황과 대조적으로 추기경들이 "젊은 교황을 뽑아 시국에 강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견해에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자처한 최초의 교황이었으며, 이는 교황권이 무소불위의 절정기에 도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창공, 즉 보편적 교회 안에 두 개의 거대한 광채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 두 광채란 교황권과 왕권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직권입니다. 그러나 낮을 지배하는 태양이 밤을 관장하는 달보다 더 위대하고 달이 태양으로부터 그 빛을 얻듯이 교황이 왕보다 더 위대하고 왕권은 그 권위를 교황권으로부터 얻습니다"라고 밝혔다.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전체 서구를 교황의 봉건국가 체제를 바탕으로 한 세계제국으로 건설하려 했고, 시칠리아를 비롯하여 영국, 아라곤, 포르투갈, 덴마크,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 등이 교황의 봉토 주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4차 십자군의 실패는 교황에게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세속 군주들에게 십자군을 맡기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탐욕이 거룩한 원정을 약탈로 바꿔버린 전례를 본 인노첸시오 3세는 이번에는 교황이 직접 주도하기로 결심했다. 십자군 자금을 교황청이 관리하고, 교황 사절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며, 전체 작전을 로마의 통제 아래 두려 했다. 이는 야심찬 계획이었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1213년 4월 19일, 인노첸시오 3세는 칙서를 발표하여 새로운 공의회 소집을 알렸다. 1215년 11월 11일, 로마 라테란 대성당에서 중세 최대의 공의회가 개막했다. 400명 이상의 주교와 800여 명의 참석자가 모였다. 이는 단순한 종교 회의가 아니었다. 교회 개혁을 추진하고 신앙과 윤리를 강화하며 평화 정착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동시에 인노첸시오 3세가 자신의 교황권 절정을 과시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공의회 개회식에 이어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성지의 불행한 상황을 설명했다. 인노첸시오 3세의 눈에 1187년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다시 정복한 사건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기독교 군주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으로 보였다.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 문제가 논의되었고, 새로운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승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새로운 십자군이었다. 11월 30일까지 3번의 회기를 거쳐 70조항의 공식문헌과 함께 1217년 6월 1일 십자군 출발을 결정하는 교령이 발표되었다. 이것이 5차 십자군의 공식적인 출발점이었다.


전략적 목표는 새로웠다. 과거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직접 공격했다면, 이번에는 다른 접근을 택했다. 원정의 공식 목적은 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 아이유브 술탄국을 격파하고 무슬림 지배하의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 교리상 중요한 3대 성지 중 하나였고, 이집트는 11세기부터 이미 바그다드를 제치고 이슬람 세계의 경제 중심지로 부상한 핵심 지역이었다. 이집트를 먼저 공략하면 아이유브 왕조의 심장부를 타격할 수 있고, 그 후 예루살렘 수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전략 자체는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는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 교황은 1216년 7월 16일 페루자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그토록 준비했던 십자군은 그의 후계자 호노리오 3세의 손에 넘어갔다. 호노리오 3세는 전임자의 계획을 그대로 유지했다. 교황의 직접 통제, 교황 사절의 막강한 권한, 그리고 이집트 우선 전략.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1217년, 십자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헝가리 왕 엔드레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가 군대를 이끌고 아크레에 도착했다. 헝가리가 5차 십자군에 합류한 데는 4차 십자군 때 자다르를 잃은 복수의 의미도 있었다. 예루살렘 왕 장 드 브리엔과 키프로스 국왕 위그가 합류하면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모였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몇 차례 작전을 시도했다. 엔드레 2세는 무슬림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약속했던 원정은 지루한 소모전이 되어버렸고, 실망한 엔드레 2세는 1218년 초 귀국해버렸다.


십자군은 지휘관을 잃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목표를 찾았다. 바로 다미에타였다. 나일강 어귀에 위치한 다미에타는 이집트의 관문이었다. 이 도시를 장악하면 카이로로 가는 길이 열린다. 1218년 5월, 십자군은 다미에타 포위를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나일강 한가운데 있는 쇄도탑이었다. 이 탑은 도시를 보호하고 강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포위는 길었고 잔혹했다. 십자군은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질병이 창궐했다. 그러나 그들은 버텼다. 1218년 8월, 쇄도탑이 함락되었다. 이제 나일강의 통제권이 십자군의 손에 들어왔다. 다미에타는 18개월을 버텼다. 도시 내부에서는 기아가 만연했고, 사람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1219년 11월 5일, 마침내 도시가 함락되었다. 십자군이 성벽을 넘어 들어갔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지옥이었다. 7만 명이던 인구 중 살아남은 사람은 3천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굶어 죽었다. 거리에는 시체가 널려있었고, 악취가 진동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승리했다. 이집트의 전략적 요충지가 그들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역사의 방향이 바뀔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카밀은 화의를 제창하고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의했다. 그의 제안은 놀라웠다. 다미에타를 반환하는 대신 예루살렘과 그 주변 영토를 넘겨주고, 30년간의 휴전을 약속하겠다는 것이었다. 십자군의 최종 목표가 바로 예루살렘 수복이 아니었던가? 전투 없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였다.


알카밀의 제안 뒤에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1218년 알카밀의 아버지 알아딜이 사망한 후 형제들 사이에 후계 다툼이 일어났다. 1219년 카이로에서 정변이 일어나 알카밀의 동생을 술탄으로 옹립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알카밀은 병력을 카이로로 돌려야 했다. 다미에타를 잃고 내부의 적들과 시리아의 경쟁자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그에게는 십자군과의 평화가 절실했다.


더욱이 십자군이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이미 파괴되어 방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슬람 측이 미리 겁을 먹고 도시를 비우고 허물어버린 탓이었다. 알카밀은 사실상 방어할 수 없는 도시를 넘겨주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집트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만약 십자군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협상은 더욱 유리하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십자군 진영은 분열되었다. 장 드 브리엔을 비롯한 대부분의 제후들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되찾으러 왔고, 이제 그 목표가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단호히 반대했다. 교황 호노리오 3세가 1218년에 파견한 교황 사절 펠라기우스 추기경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스페인 레온 출신으로 1213년 알바노의 주교 추기경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이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되어 동방 정교회와의 통합을 추진했지만, 그의 강압적 태도는 오히려 동서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제 다미에타에서 그는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게 되었다. 십자군 자금을 관리하고, 교황의 함대를 지휘하며, 군대의 규율을 제정하고 불복종하는 자를 파문하거나 면죄부를 주는 등 모든 주요 결정권을 가진 그는 사실상 십자군의 지배자였다.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권위가 예루살렘 왕 장 드 브리엔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그는 알카밀의 제안을 거부했다. 왜? 그에게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 교황의 권위가 세속 군주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이 있었다. 예루살렘 왕 존이 승리하면 이집트가 그의 통치 아래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교황은 이집트를 자신의 것으로 의도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가 점진적으로 존보다 우위를 점했다.

둘째, 신의 뜻이라면 더 큰 승리가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증원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1215년 프리드리히 2세는 아헨에서 정식으로 독일 왕으로 대관식을 치르며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와 함께 십자군 종군을 서약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계속 참가를 미뤘다. 1217년 5차 십자군이 출정하자 프리드리히 2세는 바이에른 공 루트비히 1세를 포함한 귀족들을 파견했지만 정작 본인은 참가하지 않았다. 독일 내부의 정치적 문제, 시칠리아 왕국의 통치, 그리고 교황과의 복잡한 관계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계속 지연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입장에서는 가는 길도 멀면서 무려 5회나 파병했으면서도 한 번 빼고 시원찮은 결과 혹은 안 간 것만 못한 결과만 내는 십자군 원정에 자신의 물자와 군사들을 희생시킬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황제의 증원이 곧 올 것이라 믿었고, 그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알카밀은 두 번째 제안을 했다. 성채에 대한 금전 보상을 추가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여전히 거부했다. 1219년 2월에는 성십자가의 반환과 포로 석방까지 포함된 제안이 들어왔지만, 프리드리히 황제의 군대를 기다리며 또다시 거절했다. 레오폴트 6세를 비롯한 일부 십자군은 실망하여 귀국했다. 이때 놀라운 인물이 등장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직접 술탄을 만나러 갔다. 그는 평화를 중재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십자군은 다미에타에 머물며 프리드리히 2세의 도착을 기다렸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승리의 열기는 식었고, 다미에타를 점령한 십자군은 조직력을 잃었다.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한편 알카밀은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군대를 재정비했다. 만수라에 진지를 구축한 그는 십자군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1221년 5월, 드디어 증원군이 도착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지 않았다.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1세가 지휘하는 병력만 보냈을 뿐이다. 황제는 또다시 약속을 어겼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증원군의 도착은 그에게 카이로 진격의 명분을 주었다.


장 드 브리엔이 돌아와 신중함을 권고했지만 무시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1221년 7월 17일, 5천 명의 기사와 4만 명의 보병, 궁수들과 무장하지 않은 순례자들을 포함한 대군이 출발했다. 무슬림군은 십자군의 규모를 보고 후퇴했고, 펠라기우스는 이를 승리의 징조로 여기며 추격했다. 그는 나일강 지류 근처에 진을 쳤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펠라기우스의 오만은 기본적인 전술적 판단마저 흐리게 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여 나일강을 통해 보급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겨 충분한 식량과 보급품을 준비하지 않았다. 제후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무모하게 진격한 것이다. 8월, 우기가 시작되었다. 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알카밀은 계획대로 댐을 열어 나일강을 범람시켰다.


8월 26일 밤, 후퇴하던 십자군이 공격받았다. 병사들은 가져갈 수 없는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 만취 상태였고, 튜튼 기사단이 보급품에 불을 지르는 바람에 무슬림군에게 후퇴 사실이 알려졌다. 장 드 브리엔은 취한 병사들을 이끌고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늦었다. 십자군은 범람한 나일강을 헤치며 후퇴했고, 무슬림군의 공격을 받았다. 보급품이 불타버린 진영으로 돌아간 그들을 기다린 것은 굶주림뿐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범람으로 자유로워진 배에 올라 8월 26일 다미에타로 도망쳤다. 지도자는 군대를 버렸다. 남겨진 병사들은 절망했다. 그들은 포위되었고, 굶주렸으며,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장 드 브리엔은 협상을 시도했다.


알카밀은 승리했지만 관대했다. 8월 28일 평화조약이 제안되었고 8월 30일 수락되었다. 알카밀은 장 드 브리엔과 그의 숙취에 시달리는 군대를 석방될 때까지 먹이고 대접했다. 조건은 간단했다. 모든 포로의 석방, 다미에타의 반환, 그리고 8년간의 휴전. 십자군은 성십자가를 받고 떠나기로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알카밀은 그것을 찾을 수 없었다. 1221년 9월 8일, 십자군은 배에 올라 고향으로 향했다. 서로를 비난하며.


5차 십자군의 실패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회의 상실이었고, 오만의 대가였으며, 분열의 결과였다. 역사가들은 종종 펠라기우스의 무능과 고집을 비난한다. 실제로 그의 역할은 파괴적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불참과 펠라기우스의 무능한 지휘가 비판받았다. 그러나 더 깊은 문제는 십자군 자체의 구조적 결함이었다.


교황의 권위와 세속 군주의 권력 사이의 갈등, 통일된 지휘체계의 부재, 현지 상황에 대한 무지, 그리고 무엇보다 승리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모든 것을 망쳤다. 알카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십자군은 전투 없이 예루살렘을 되찾았을 것이고, 수많은 생명이 구해졌을 것이며,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관계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그를 지지한 이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


5차 십자군 이후, 13세기에 이르러 십자군 전쟁의 주도권이 교회에서 세속 군주에게 옮겨가고 있었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교황의 직접적 주도는 더 이상 신뢰받지 못했다. 6차 십자군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두 번이나 파문되고 나서야 의욕 없는 태도로 십자군을 일으켰으며, 본인과 똑같이 싸울 마음이 없었던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 무함마드 빈 알 아딘(살라딘의 조카)과 여러 번 교섭하여 마침내 예루살렘 일부의 통치권을 양도받는 성과를 이루었다. 그것은 펠라기우스가 거부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이었다.


역사는 냉혹한 교훈을 남겼다. 때로는 겸손이 용기보다 중요하고, 협상이 전투보다 현명하며, 작은 승리를 받아들이는 지혜가 큰 야망보다 가치 있다는 것을. 다미에타의 성벽 아래서, 나일강의 범람 속에서, 그리고 만수라로 가는 진흙탕 길에서 죽어간 수천 명의 병사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


그들은 성지 회복이라는 대의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는 그 대의보다 권력을 택했고, 승리보다 자존심을 택했으며, 평화보다 전쟁을 택했다. 그리고 역사는 그 선택의 결과를 정확히 기록했다. 5차 십자군은 승리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패배로 만들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5%EC%B0%A8_%EC%8B%AD%EC%9E%90%EA%B5%B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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