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 십자군-잊혀진 승리

by 레옹
Map_Crusader_states_1240-eng.jpg

1239년에서 1241년 사이, 예루살렘 왕국의 운명은 기묘한 궤적을 그렸다. 십자군 역사에서 '귀족십자군'이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원정은 영토 확보라는 측면에서 보면 1099년 제1차 십자군 이후 가장 성공적인 십자군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성공은 십자군 국가들의 최종적 몰락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승리의 순간이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원정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1229년 2월 프리드리히 2세와 이집트의 술탄 알-카밀이 체결한 10년 휴전 조약이 1239년 7월 만료를 앞두고 있었다. 이 조약은 십자군 역사상 가장 특이한 사례였다. 파문당한 황제가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외교적 수단만으로 예루살렘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이사벨라 2세와의 혼인을 통해 예루살렘 왕위를 요구했고, 술탄 알-카밀은 몽골의 위협과 아이유브 왕조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서방과의 평화가 필요했다. 협상의 결과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그리고 해안 회랑이 기독교인의 손에 돌아왔다. 그러나 현지 귀족들은 이 조약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방어할 수 없는 영토들을 확보했고, 예루살렘의 성벽은 재건되지 않았으며, 무슬림 적들과 동맹을 맺으면서도 성지를 현지 귀족들에게 돌려주는 대신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위해 통제하려 했다. 더욱이 조약으로 확보한 영토들은 방어하기 어려운 고립된 회랑이었다. 이러한 취약성이 새로운 십자군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만들었다.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이미 다가올 위기를 예견하고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했다. 교황은 전 기독교 세계에 설교단을 보내 십자가를 들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왕들은 자국 문제에 얽매여 개인적으로 십자군에 참여할 입장이 아니었다. 대신 응답한 것은 유럽 귀족들이었다. 특히 12세기 초부터 십자군의 전통적 발원지였던 샹파뉴에서 강력한 반응이 나왔다.


샹파뉴 백작이자 나바라 왕인 티보 4세가 주도권을 잡았다. 1201년 5월 30일 트루아에서 태어난 티보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태어났기 때문에 '유복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어머니 블랑슈 드 나바라는 1222년까지 섭정으로서 샹파뉴를 통치했다. 티보의 혈통은 십자군 역사의 정수였다. 그의 할머니 마리 드 샹파뉴는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손녀였고, 12세기 후반 트루아 궁정에서 크레티앵 드 트루아를 비롯한 트루바두르들을 후원하며 기사도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다. 티보는 리처드 사자심왕의 조카딸과 혼인 관계로 연결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티보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삼촌 앙리 2세는 막대한 빚을 남기고 죽었고, 앙리의 딸 필리파와 그녀의 남편 에라르 드 브리엔느는 티보의 계승권에 도전했다. 1215년부터 1222년까지 샹파뉴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티보는 성년이 된 후에야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 그들의 권리를 사들일 수 있었다. 1226년 알비주아 십자군에 참여했을 때, 티보는 루이 8세와의 불화로 인해 최소 복무 기간인 40일만 채우고 돌아왔다. 루이 8세가 곧 이질로 사망하자 일부는 티보를 배신자로 비난했다. 1229년 샹파뉴 침공과 어머니의 사망, 1231년 두 번째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티보에게 더욱 큰 타격이었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티보는 트루바두르로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약 60편의 가사를 남겼는데, 대부분은 궁정 사랑의 노래와 운문 논쟁이었다. 그의 시는 블랑슈 드 카스티유, 루이 8세의 왕비에게 바쳐졌으며, 티보와 그녀의 관계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시는 단순한 연습이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고, 우아함과 감미로움으로 특징지어졌으며, 남부 트루바두르들과의 교류 덕분에 음악적 품질을 지녔다. 단테조차 그의 시를 찬양했다. 1234년 티보는 삼촌 산초 7세의 사망으로 나바라 왕위를 계승하여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초로 나바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티보의 주변으로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바르 백작 앙리 2세, 느베르 백작 기욤, 몽포르 백작 아모리 등 십자군 가문의 후예들이 모여들었다. 아모리 드 몽포르는 시몽 드 몽포르 5세의 아들이자 훗날 영국 의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몽 드 몽포르 6세의 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비주아 십자군을 이끌었고 1218년 툴루즈 포위전에서 전사했다. 아모리는 아버지가 레이몽 6세로부터 빼앗은 툴루즈 백작령을 상속받았지만 1224년 루이 8세에게 양도해야 했다. 1230년 아모리는 프랑스의 대원수가 되었고, 이는 이전에 그의 삼촌 마티유 2세 드 몽모랑시가 맡았던 직책이었다. 1239년 4월 11일, 아모리는 영국에서의 모든 권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했고, 헨리 3세는 시몽을 레스터 백작으로 인정했다. 루이 9세는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아모리가 백합 문장을 휴대할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써 원정에 왕실의 성격을 부여했다.


1239년 8월 프랑스를 떠난 십자군 군대는 약 1,000명에서 1,500명의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3차에서 5차 십자군의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상당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출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예루살렘의 왕이자 섭정으로서 어린 아들 콘라트가 1243년 성년이 될 때까지 통치권을 가진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및 교황청과의 분쟁에 휘말려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권위 없이 성지를 돕는 원정을 반대했고, 특히 1229-1233년 내전에서 자신에게 반대했던 현지 귀족 세력을 도울 프랑스 귀족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결국 브린디시 항구 사용이 거부되면서 십자군은 엑그모르트와 마르세유에서 출항해야 했다.


1239년 9월 1일 티보가 아크레에 도착했을 때, 그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으로 뛰어들었다. 알-카밀의 사망(1238년) 이후 아이유브 왕조 후계 전쟁이 격렬하게 진행 중이었다. 알-카밀의 아들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에서 숙부 이스마일에게 쫓겨났고, 이스마일은 다시 이집트의 동생 알-아딜 2세를 술탄으로 인정했다. 한편 아이유브는 케라크의 사촌 다우드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이집트로 돌아왔다. 이집트로 돌아온 아이유브는 알-아딜 2세를 폐위시키고 1240년 술탄으로 즉위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십자군에게 기회이자 위험이었다.


11월 2일 십자군은 아스칼론으로 이동하여 약 4,000명의 군사가 모였는데, 절반 이상은 현지 귀족들과 세 군사 기사단 소속이었다.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튜튼 기사단은 십자군 국가들의 핵심 방어 세력이었다. 템플 기사단은 1119년 위그 드 파옝이 예루살렘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했으며, 1129년 트루아 공의회에서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그들은 솔로몬 성전이 있었다고 믿어지는 장소에 본부를 두었기 때문에 '성전 기사단'이라고 불렸다. 1139년 교황 인노첸시오 2세의 칙서를 통해 그들은 지역 주교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교황에게만 직접 보고하는 특권을 얻었다. 성 요한 기사단은 원래 1070년경 예루살렘에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설립되었다가 1120년대에 군사 조직으로 전환되었다. 튜튼 기사단은 1190년 아크레 포위전 중 설립되어 1199년 교황의 인정을 받았다.


이 세 기사단은 십자군 국가들의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대부분의 십자군이 성지에 몇 년만 머무르고 돌아간 반면, 군사 기사단은 영구적인 방어 세력을 제공했다. 그들은 전문적인 전사들로서 수도사의 서약을 하고 엄격한 규율을 따랐다. 그러나 전투원은 소수에 불과했다. 템플 기사단의 경우 전체 회원의 10%만이 기사였고, 나머지 90%는 행정, 재정, 농업 등 비전투 업무를 담당했다. 1239년 귀족십자군이 도착했을 때, 이 세 기사단은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대표했다.


11월 초 피에르 드뢰의 정찰대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대규모 가축 무리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것은 이집트군이 다마스쿠스에 보급품을 보내는 것이었다. 일부 지휘관들, 특히 몽포르의 아모리와 바르의 앙리는 즉각 공격을 주장했다. 부르고뉴의 위그, 자파의 발터, 시돈의 발리앙, 아르수프의 장, 몽벨리아르의 오도 등이 이들을 지지했다. 피에르는 200명의 병력과 함께 야영지를 떠나 다음 날 아침 호송대를 기습했다. 짧은 전투 후 호송대의 호위병이 패배했고 그는 노획한 가축 떼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신선한 식량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작은 성공은 일부 지휘관들의 자신감을 키웠다.


11월 12일 자파를 지나갈 때 술탄 아스-살리 아이유브가 가자로 군대를 보내 이집트 국경을 보호한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도달했다. 총 400명에서 600명의 병력이 이 작전에 동참하기로 했다. 티보와 피에르 드뢰, 그리고 세 군사 기사단의 단장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튜튼 기사단은 일부 프랑스 십자군이 가자로 가는 원정에 동행하기를 거부했는데, 그들은 이 원정이 무모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중에 정확한 판단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군대가 온전히 아스칼론으로 이동하여 적과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티보는 십자군 서약을 상기시키며 경고했지만 반대파는 듣지 않았다. 그들은 티보를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밤을 틈타 가자로 향했다.


11월 13일 새벽, 가자 전투가 벌어졌다. 십자군은 강을 건너 평평하고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인 지형에 진을 쳤다. 그들은 필수적인 경계 배치를 하지 않았고, 주변 언덕에 초소나 순찰대를 두지 않았다. 이집트 지휘관 루크누딘 알-히자위는 더욱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의 정찰대가 십자군 진영을 발견하자 이집트 궁수들과 투석병들이 주변 언덕을 점령했다. 자파의 발터가 가장 먼저 적을 발견하고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발터와 위그는 아스칼론으로 후퇴하자고 제안했지만, 아모리와 바르의 앙리는 매복을 우려해 반대했다. 결국 발터, 위그와 대부분의 다른 지휘관들은 아스칼론으로 떠났다.


남은 십자군은 이집트군과 전투를 벌였다. 아모리는 석궁수들에게 사격을 명령했지만 곧 석궁 화살이 떨어졌다. 두 언덕 사이의 깊고 좁은 통로를 발견한 기사들은 그곳으로 돌진했다. 그 사이 이집트 기병대도 도착했다. 좁은 통로에서 중무장 기사들을 공격하는 대신, 그들은 위장 공격과 가짜 후퇴를 시작했다. 십자군 기사들은 함정에 빠져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고, 통로를 벗어나자마자 피난처가 폐쇄되었고 이집트 기병이 기사들을 포위했다. 바르의 앙리를 포함해 많은 이들이 전사했고, 아모리와 수십 명의 다른 귀족들, 그리고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그들은 17개월 이상 억류되었다. 주력군이 아스칼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발터와 위그를 만났고 그들은 가자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튜튼 기사단이 이끄는 주력군은 가자로 진격했다. 곧 그들은 도망치는 난민들과 그들의 무슬림 추격자들을 만났다. 이집트군은 전체 십자군을 상대할 만큼 강하지 않았고 가자로 후퇴했으며 프랑크인들은 시체로 뒤덮인 전장을 점령했다. 티보는 적군을 추격하려 했지만, 아르망 드 라부아가 공격 시 무슬림들이 포로들을 죽일 것이라고 지적하자 그만두었다.


아모리는 카이로의 지하 감옥에서 다음 18개월을 보냈는데, 다른 포로들보다 더 가혹하게 대우받았다. 그 이유는 술탄에게 다른 포로들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자의 패배는 티보의 원정에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러나 아이유브 왕조의 내분은 계속되었고, 이는 십자군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티보는 다마스쿠스의 술탄 이스마일과 협상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기독교인의 접근권을 회복하는 휴전을 체결했다. 이 협상의 대가로 갈릴리와 그 요새들인 티베리아스, 타보르 산, 벨부아르가 반환되었고, 사페드, 토론, 시돈 등의 성채들도 십자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러나 티보는 점점 더 현지 귀족들과 군사 기사단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어갔다. 가자의 패배에 대한 책임, 동맹의 선택, 그리고 무모한 공격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1240년 가을, 그는 예루살렘 순례를 마친 후 아크레에서 출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티보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240년 10월, 새로운 십자군이 도착했다. 영국 왕 헨리 3세의 동생이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하나인 콘월의 리처드였다. 1209년 1월 5일 윈체스터 성에서 태어난 리처드는 영국 왕 존과 앙굴렘의 이사벨라의 차남이었다. 그는 사자심왕 리처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여덟 살에 버크셔의 고위 보안관이 되었고, 1225년 열여섯 살에 형 헨리 3세로부터 콘월을 생일 선물로 받아 콘월 백작이 되었다. 콘월의 주석 광산에서 나오는 수입은 연간 약 1,000마르크로 농간되어 이 부문만으로 연간 약 2,000파운드의 이익을 창출했다. 농업, 어업, 관습세를 합친 총 연간 수입은 13세기 중반까지 약 5,000파운드에 달했으며, 이는 그를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신하이자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제후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그는 약 100명의 기사들과 함께 왔지만, 그의 재력과 외교적 능력이 더 중요했다. 더욱이 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처남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이름으로 행동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리처드는 티보와는 매우 다른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는 어떤 전투도 치르지 않고 순전히 외교에 의존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가자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 귀족들을 석방하는 것이었다. 1241년 초 리처드는 이집트의 술탄 아스-살리 아이유브와 협상을 시작했다.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싶어했고, 십자군과의 중립적 관계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더욱이 1240년대 초반 몽골의 서진은 모든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1240년 키예프를 함락시켰고, 1241년에는 폴란드와 헝가리를 침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유브는 서방과의 평화가 절실했다.


1241년 2월 8일까지 협정이 비준되었다. 조약의 조건은 인상적이었다. 아이유브는 이스마일이 약속한 영토 양보를 인정했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자, 헤브론, 나블루스는 자신이 보유하기로 했다. 십자군이 다마스쿠스와의 동맹을 포기하고 '호의적 중립'을 유지한다면, 프랑스 포로들을 석방하겠다는 것이었다. 리처드는 동의했고, 4월 23일 포로들이 석방되었다. 이는 리처드에게 엄청난 외교적 승리였다. 아모리는 석방된 후 같은 해 오트란토에서 귀환 중 사망했고, 교황의 명령에 따라 성 베드로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심장은 그의 임종 시 소원에 따라 몽포르 라모리 근처의 오트-브뤼에르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샤르트르의 주교 오브리 르 코르뉘가 그것을 조상에 봉안했다.


한편 리처드의 군대는 아스칼론 요새 재건을 도왔다. 살라딘이 1191년 파괴한 이 요새는 예루살렘 왕국의 남부 방어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리처드는 아스칼론의 재건과 요새화를 지휘했는데, 이 전략적 해안 요새는 1191년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파괴되어 미래 침공의 기지로 사용되는 것을 막았다. 성벽과 탑의 수리를 포함한 이 작업은 잠재적인 무슬림 침공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고 십자군 이전 단계에서 얻은 성과를 공고히 하려는 광범위한 프랑크인의 목표와 일치했다. 요새는 1241년 3월까지 완성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처남이었던 리처드는 완성된 요새를 황제의 대리인인 발터 페넨피에에게 맡겼다. 5월 3일, 리처드는 서방으로 출항했다. 그의 8개월간의 원정은 지속 가능한 외교를 우선시했고, 무모한 확장보다는 안정적인 국경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귀족십자군의 성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리처드가 떠난 후 예루살렘 왕국은 1187년 이후 가장 큰 영토를 되찾았다. 갈릴리와 그 요새들인 티베리아스, 타보르 산, 벨부아르가 반환되었고, 살라딘이 1187-1189년에 빼앗은 가자 이남의 모든 영토가 다시 기독교 수중에 들어왔다. 사페드, 토론, 보포르, 시돈의 성채들도 십자군 통제로 돌아왔다. 이는 제1차 십자군 이후 가장 성공적인 영토 회복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해안 회랑을 확보했고, 갈릴리의 농업 지대를 되찾았으며, 전략적 요새들을 재건했다. 그러나 이 성공은 깊은 구조적 취약성을 숨기고 있었다.


귀족십자군이 드러낸 것은 십자군 국가들이 오직 무슬림 세력이 분열되어 있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내분은 십자군에게 협상의 여지를 주었다. 술탄들은 서로 경쟁하는 데 바빴고, 유럽과의 휴전 조약은 그들에게 한 전선을 닫아주는 전략적 이점이 있었다. 다마스쿠스의 이스마일은 이집트의 아이유브에 대항하기 위해 십자군의 중립이 필요했고,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십자군과의 평화를 원했다. 케라크의 다우드, 알레포의 지배자들, 호무스의 에미르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분열이 십자군에게 공간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바뀐다면, 십자군 사업은 극적으로 변화할 것이었다.


1239년과 1241년의 십자군들은 마치 안식년을 떠나는 것처럼 쉽게 성지로 갔다. 마르세유에서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아크레에서 연회에 참석하고, 힘을 과시한 후 건축 프로젝트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몇 번의 소규모 전투를 치르고, 술탄에게 위협적인 편지를 보내면, 몇 차례의 교환 끝에 원하는 도시들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아름다운 기념품을 닦으며 보낼 수 있었다. 십자군 사업이 이처럼 쉬워 보인 적은 없었다. 1240년대 초반 성지는 상대적 평화를 누렸다.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고, 성묘교회에서 기도했으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현지 프랑크 귀족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했고, 상인들은 무역로를 따라 이동했다. 군사 기사단은 요새를 재건했고, 농민들은 갈릴리의 비옥한 땅을 경작했다.


그러나 이 안이함 뒤에는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성공이 전적으로 적의 분열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했을까? 1244년 7월과 10월에 벌어진 사건들은 이 질문에 대한 무시무시한 답변을 제공했다.


1244년 7월 11일, 호라즘 용병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이들은 몽골의 침공을 피해 북부 시리아에서 온 전사들로, 이집트 술탄 아스-살리 아이유브의 새로운 동맹이었다. 호라즘인들은 1231년 몽골군에게 패배한 후 고향인 중앙아시아를 떠나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약 1만 명의 전사로 구성된 유목민 부족이었고, 빠른 기동력과 잔인함으로 악명 높았다. 1242년 아이유브는 다마스쿠스와 동맹한 십자군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호라즘인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를 이동하며 약탈하고 파괴했다.


예루살렘의 방어는 취약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1229년 조약 이후 성벽은 재건되지 않았고, 도시에는 소규모 수비대만 남아 있었다. 7월 11일 호라즘인들이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은 협상을 시도했다. 그들은 도시를 포기하는 대가로 안전한 통행을 요구했다. 호라즘인들은 동의하는 척했다. 7월 15일, 약 6,000명의 기독교인들이 도시를 떠나 자파로 향했다. 그러나 호라즘인들은 약속을 어겼다. 그들은 피난민들을 공격했고, 남성들을 학살했으며, 여성과 어린이들을 노예로 팔았다. 약 2,000명의 기독교인들만이 자파에 도착했다.


호라즘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도시를 약탈했다. 그들은 성묘교회에 난입하여 제단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들의 목을 베었다. 예루살렘 왕들의 무덤을 훼손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무덤을 파헤쳤지만 뼈만 발견했다. 그들은 이 뼈들을 꺼내 불에 던졌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무덤, 볼드윈 1세의 무덤, 그리고 다른 초기 십자군 왕들의 유해가 모두 불타버렸다. 교회의 보물들이 약탈되었고, 성화들이 파괴되었으며, 성유물들이 흩어졌다. 서방 연대기 작가들은 이 사건을 1099년 제1차 십자군의 승리 이후 가장 큰 재앙으로 묘사했다.


이 재앙에 대응하여 예루살렘 왕국은 필사적으로 동맹을 구축했다.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튜튼 기사단, 그리고 현지 귀족들은 호무스의 에미르 알-만수르, 트란스요르단의 에미르 안-나시르 다우드와 동맹하여 이집트에 맞섰다. 이는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다른 무슬림에 맞서 싸우는 기이한 연합이었다. 호무스의 알-만수르는 다마스쿠스의 숙부이자 동맹자인 이스마일을 돕기 위해 참전했다. 트란스요르단의 다우드는 자신의 영토를 이집트의 확장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어했다. 십자군 국가들은 예루살렘을 되찾고 호라즘인들을 몰아내기를 원했다. 이 세 세력은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공통의 적인 아이유브와 호라즘인들에 맞서 연합했다.


연합군은 약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사이로 추산되었다. 십자군 측에서는 템플 기사단이 약 300명의 기사를 동원했고, 성 요한 기사단도 비슷한 숫자를 제공했으며, 튜튼 기사단은 약 100명을 보냈다. 현지 귀족들과 그들의 가신들, 그리고 보병들이 나머지를 구성했다. 호무스와 트란스요르단의 무슬림 동맹군은 약 5,000명에서 7,000명 사이였다. 이집트군은 호라즘 용병 약 1만 명과 맘루크 기병대 약 5,000명을 포함하여 총 1만 5,000명에서 2만 명 사이였다. 양측의 병력은 거의 균형을 이루었지만, 이집트군은 더 나은 조직과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두 군대는 가자 북동쪽의 작은 마을 라 포르비 근처에서 조우했다. 이 마을은 아랍어로 히르바트 포르바이야라고 불렸고, 고대에는 가자와 아스칼론 사이의 교역로상에 위치한 작은 정착지였다. 1244년 10월 중순, 연합군은 이곳에서 야영을 했다. 그들은 이집트군을 차단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이집트군은 더 신속하게 이동했다.


1244년 10월 17일 새벽,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집트 지휘관 바이바르스 분두크다리는 아직 맘루크 장교였지만 이미 전략적 재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훗날 1260년 술탄이 되어 십자군 국가들을 거의 파괴할 인물이었다. 이날 그는 맘루크 기병대를 지휘하며 연합군의 측면을 위협했다. 호라즘인들은 연합군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해 우회했다.


십자군과 그들의 무슬림 동맹은 정면의 이집트군과 측면의 호라즘인들 사이에 끼었다. 템플 기사단장 아르망 드 페리고르가 중장 기병 돌격을 이끌었다. 기사들은 맘루크를 향해 돌격했지만 점차 추진력을 잃었다. 호라즘 전사들이 기독교군의 후방과 측면을 공격하면서 무질서한 보병으로 방어되던 진형이 무너졌다. 성 요한 기사단의 마샬 위그 드 르벨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맘루크 궁수들의 화살 세례가 기사들의 말을 쓰러뜨렸다.


전투는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중무장 기사들은 완강히 싸웠지만 포위당한 상태에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었다. 호라즘인들의 빠른 기병대는 십자군의 측면을 끊임없이 괴롭혔고, 맘루크의 중장 기병은 정면에서 압박했다. 저녁 무렵 연합군의 저항이 붕괴되었다. 5,000명 이상의 십자군과 동맹군이 전사했고 8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군사 기사단은 거의 전멸했다. 템플 기사 33명, 성 요한 기사 27명, 튜튼 기사 3명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각 기사단이 동원한 병력의 약 10%에 불과했다.


템플 기사단장 아르망 드 페리고르는 전장에서 전사했다. 그는 1232년부터 기사단을 이끌었고, 1239년 귀족십자군이 도착했을 때 티보 4세에게 가자로의 무모한 공격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라 포르비에서 자신이 예견했던 재앙 속에서 죽었다. 마샬 위그 드 몽로르도 전사했다. 티르 대주교가 전사했고, 리다 주교도 죽었다. 현지 귀족들 중 자파의 발터 4세, 시돈의 발리앙, 아르수프의 장이 전사했다. 호무스의 알-만수르도 전장에서 죽었다. 트란스요르단의 다우드는 간신히 탈출했다.


라 포르비의 여파는 참담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하틴 전투 이후 그렇게 큰 군대를 동원할 수 없었고, 다시는 공세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세 군사 기사단은 전투력의 90% 이상을 잃었고, 재건에 수십 년이 걸렸다. 현지 귀족 가문들은 가장 경험 많은 전사들을 잃었다. 귀족십자군이 3년 만에 회복한 모든 영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1244년 11월 호라즘인들과 이집트군은 티베리아스를 점령했다. 12월에는 아스칼론이 포위되었다. 갈릴리의 요새들이 하나씩 함락되었다.


1239-1241년의 외교적 승리는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십자군 국가들의 군사력은 라 포르비에서 피를 모두 흘렸고, 정치 체제는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아 멍한 상태, 지친 상태, 의지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예루살렘은 다시는 기독교인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1187년 살라딘이 점령한 이후 잠깐 동안 1229년부터 1244년까지 기독교인들이 접근할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영원히 잃어버렸다.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십자군 국가들은 완전히 소멸했다.


귀족십자군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토적 성공이라는 측면에서는 제1차 십자군 이후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성공의 기반은 모래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티보와 리처드는 아이유브 왕조의 분열이라는 일시적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들은 전쟁이 아닌 협상으로, 피가 아닌 외교로 예루살렘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혹은 이해했더라도 막을 수 없었다.


티보는 1241년 샹파뉴로 돌아간 후 나머지 인생을 시를 쓰고 통치하는 데 보냈다. 그는 1253년 7월 8일 사망했고, 프루방에 묻혔다. 그의 십자군 경험은 그의 후기 시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성지에서의 실망과 좌절을 노래했고, 십자군 사업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십자군 이상을 믿었고, 성지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리처드는 125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지만 실제로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그는 1272년 4월 2일 버크셔의 버크햄스테드 성에서 사망했다. 그의 심장은 해일스 수도원에, 몸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두 지도자 모두 십자군 원정을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여겼다. 티보의 시와 리처드의 후원 사업은 그들의 십자군 경험을 기념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을 다르게 기억한다. 귀족십자군은 번호도 부여받지 못했다. 후대 역사가들은 프리드리히 2세의 평화적 협상을 제6차 십자군으로 계산했지만, 실제로 싸우고 영토를 되찾은 귀족십자군은 단지 '1239년의 십자군' 정도로만 기억되었다. 이는 십자군 전통이 왕들의 전쟁으로만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귀족십자군의 진정한 의미는 그 성공이 아니라 그 성공의 허약함에 있다. 티보와 리처드가 달성한 것은 지속 가능한 평화가 아니라 일시적 휴전이었고, 영토 확보가 아니라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외교적 양보였다. 라 포르비 전투는 십자군 사업의 근본적 한계를 잔인하게 드러냈다. 유럽의 기사들은 용감했고, 군사 기사단은 헌신적이었으며, 외교관들은 능숙했다. 그러나 무슬림 세계가 단결하면, 십자군 국가들의 생존은 불가능했다. 호라즘인들과 맘루크의 연합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했다. 1260년 바이바르스가 이집트를 장악하고 십자군 국가들을 향해 돌아섰을 때, 라 포르비에서 피를 흘린 왕국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하틴 전투는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이어진 상징적 중요성을 지니지만, 진정으로 우트르메르에서 기독교 세력의 붕괴를 의미한 것은 라 포르비였다. 하틴에서 십자군은 살라딘이라는 단일하고 강력한 적에게 패배했다. 그러나 그 후 제3차 십자군이 도착하여 해안 도시들을 되찾았고, 왕국은 또 다른 백 년을 생존했다. 라 포르비에서는 회복의 기회가 없었다. 유럽은 더 이상 대규모 십자군을 보낼 의지가 없었고, 현지 자원은 고갈되었으며, 무슬림 세력은 계속 강화되었다.


귀족십자군은 그 붕괴 직전의 마지막 섬광이었다. 1239년부터 1241년까지 십자군들은 성공이 쉽다고 믿었다. 그들은 외교가 무력을 대체할 수 있다고, 협상이 정복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244년 7월과 10월, 그 환상은 호라즘인의 칼날과 맘루크의 창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서 타오르던 왕들의 뼈, 라 포르비의 전장을 뒤덮은 시체들, 노예 시장으로 끌려가는 기독교인 포로들이 귀족십자군의 진정한 유산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것이다. 가장 성공적인 십자군 중 하나가 동시에 십자군 운동의 최종적 실패를 가장 명확하게 예고했다는 사실. 1241년 5월 리처드가 아크레를 떠날 때 예루살렘 왕국은 1187년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갈릴리의 밀밭이 펼쳐져 있었고, 티베리아스 호수의 어부들이 그물을 던졌으며, 아스칼론의 새로운 탑에서 파수꾼들이 경계를 섰다. 그러나 불과 3년 후,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밀밭은 불타고, 어부들은 죽었으며, 탑은 무너졌다.


귀족십자군은 잊혀진 승리이자, 오래 기억될 몰락의 서곡이었다. 그것은 십자군 운동이 더 이상 정복의 사업이 아니라 생존의 투쟁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외교가 일시적 완화를 제공할 수 있지만 구조적 취약성을 해결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유럽의 귀족들이 성지를 위해 싸우려 했지만, 그들의 용기와 헌신만으로는 역사의 조류를 막을 수 없음을 드러냈다. 1244년 이후, 십자군 국가들은 천천히 죽어가는 환자였다. 때때로 회복의 징후를 보였지만, 근본적 질병은 치유되지 않았다. 1291년 아크레의 함락은 이미 라 포르비에서 예고된 결말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Barons%27_Crusade)

작가의 이전글6차 십자군-피 없는 승리와 영광 없는 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