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년 초봄, 450명의 대상이 비단과 옥,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낙타 행렬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 오트라르에 도착했다. 이들은 동쪽의 새로운 강자, 몽골 제국의 사절단이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와의 긴 전쟁으로 바쁜 와중에도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가 원한 것은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 유목민에게 도시 문명과의 교역은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생존의 문제였다. 몽골 초원에서 생산할 수 없는 곡물, 철제 무기, 비단, 도자기는 모두 정주 문명과의 교역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다. 칭기즈칸은 호라즘 술탄 무함마드 2세에게 이렇게 전했다.
"나는 해 뜨는 땅의 지배자이고 당신은 해 지는 땅의 통치자이니 우애롭게 지내자. 우리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진다면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페르시아 역사가 민하즈 시라지가 기록한 이 서신은 칭기즈칸의 실용주의적 외교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오트라르의 성주 이날추크는 이 상단을 스파이로 몰아 전원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몽골 상인들이 정말로 첩보 활동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3세기 유라시아에서 상인과 외교관, 첩자의 경계는 모호했고, 상인들이 여행 중 본 것을 귀국 후 보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학살의 구실이 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이날추크는 무함마드 2세의 외삼촌이었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지방 관리의 독단이 아니라 술탄의 묵인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피로 물들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즉각 보복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고 다시 사절을 보냈다. 무슬림 한 명과 몽골인 두 명으로 구성된 이 사절단은 오트라르 성주의 처벌과 몰수된 재산의 반환을 요구했다. 칭기즈칸은 여전히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2세의 반응은 칭기즈칸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술탄은 무슬림 사절의 목을 베고, 몽골 사절 두 명의 수염을 태워 돌려보냈다. 수염을 태우는 행위는 유목민 문화에서 가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이것은 개인에 대한 모욕을 넘어 칭기즈칸 자신과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무함마드 2세가 왜 이런 무모한 결정을 내렸는지는 역사의 수수께끼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몽골의 위협을 과소평가했다고 본다. 무함마드 2세는 1218년에 몽골군 소규모 부대와 조우한 적이 있었고, 그들의 빠른 기동력에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경험이 그를 더욱 경계하게 만들었을 수 있다. 그는 칭기즈칸의 교역 제안을 침략을 위한 사전 정찰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는 바그다드의 칼리프 알나시르와 격렬한 분쟁 중이었고, 일부 학자들은 칼리프가 칭기즈칸과 동맹을 모색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무함마드 2세는 내부와 외부의 적에 둘러싸여 극도의 편집증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칭기즈칸은 모자를 벗고 홀로 언덕에 올라 사흘 낮 사흘 밤을 하늘에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몽골의 샤머니즘 전통에서 이것은 텡그리(하늘 신)의 뜻을 구하는 의식이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금나라와의 전쟁을 부장 무칼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직접 호라즘 원정에 나서기로 했다. 이것은 단순한 응징을 넘어선 결정이었다. 칭기즈칸은 호라즘 정복을 통해 실크로드 전체를 장악하고, 동서 교역의 중심축을 몽골의 손에 넣으려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후계자들을 지정했다.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결정은 이 원정이 그에게 마지막 대규모 전역이 될 수 있음을 암시했다.
당시 호라즘 제국은 중앙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였다.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제2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 대리인"으로 불릴 만큼 강력한 정복자였다. 그의 아버지 테키시는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황제를 1194년에 무너뜨리고 이란과 호라산의 술탄으로 인정받았다. 무함마드 2세는 이 유산을 물려받아 더욱 확장했다. 1210년 서요(카라키타이)를 멸망시킨 그는 북으로 카스피해 연안에서 남으로 페르시아만, 동으로 힌두쿠시에서 서로 코카서스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1212년 그는 사마르칸트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1만 명의 주민을 처형했고, 1215년에는 구르 왕조를 무너뜨렸다. 1218년 호라즘 제국의 인구는 약 500만에 달했고, 군사력은 40만을 자랑했다. 반면 칭기즈칸이 이끈 몽골군은 7만 5천에서 15만 사이로 추산된다. 수적으로 호라즘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무함마드 2세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급속한 팽창으로 이룬 제국은 내부가 허약했다. 새로 정복한 지역들은 아직 충성심이 확립되지 않았고, 언제든 반란이 일어날 수 있었다. 무함마드 2세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니샤푸르를 지나가면서 주민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부순 성벽을 다시 쌓으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그가 정복한 도시들조차 믿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부하라는 불과 8년 전인 1212년 그 자신이 공격했던 도시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술탄과 그의 어머니 테르켄 카툰, 그리고 그녀의 친족인 칸그리 투르크 부족 간의 권력 투쟁이었다. 테르켄 카툰은 "세계의 통치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별도의 궁전과 디완(행정기관)을 가지고 있었고, 술탄의 명령도 그녀의 서명 없이는 효력이 없었다. 페르시아 역사가들은 이 상황을 "불안한 이두정치"라고 불렀다. 테르켄 카툰은 무함마드 2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잘랄 웃딘을 싫어했다. 잘랄 웃딘의 어머니 아이 치체크가 투르크멘 출신의 낮은 신분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테르켄 카툰은 자신과 같은 킵차크 부족 출신 귀족 여성이 낳은 이복동생 우즐라그샤를 지지했다.
무함마드 2세는 자신의 어머니와 유목민 부족들이 전선을 이탈하거나 몽골에 투항할 것을 두려워했다. 이 두려움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몽골과 투르크는 모두 초원의 유목민이었고, 문화적 유대감이 있었다. 칭기즈칸은 이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호라즘의 장수들과 귀족들에게 은밀히 투항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다. 특히 테르켄 카툰과 그녀의 군대에게 "배신자 아들"에 맞서 몽골과 손잡자고 제안했다. 동시에 그는 탈영병들을 통해 테르켄 카툰과 일부 장군들이 이미 몽골과 동맹을 맺었다는 허위 문서를 유포했다. 이 심리전은 이미 분열된 호라즘 제국의 지휘 체계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1219년 가을, 칭기즈칸은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진격했다. 장남 주치는 우군을 이끌고 북부 지역으로, 차가타이와 오고타이는 좌군을 이끌고 오트라르로, 막내 툴루이와 칭기즈칸 자신은 중군으로 부하라를 향했고, 제베는 별동대를 지휘했다. 이 분산 작전은 매우 위험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교한 전략이었다. 몽골군은 각 부대가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필요시 신속히 집결할 수 있었다. 그들은 파발마 체계를 통해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를 오가는 정보 전달망을 구축했다. 이 작전은 호라즘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압박을 가하는 전략이었다.
무함마드 2세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의 장군들 대부분은 야전에서 몽골군과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40만 대군을 한곳에 집결시켜 수적 우세를 활용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과의 야전을 피하고 주요 도시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는 방어 전략을 선택했다. 그는 사마르칸트에 11만, 부하라에 2만, 오트라르에 수만을 배치하는 식으로 병력을 나누었다. 이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분산된 수비대는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컸고, 몽골군의 기동성과 포위 전술에 취약했다.
무함마드 2세는 키질쿰 사막이라는 자연 장벽을 믿었다. 460km에 달하는 이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정보전에서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 그는 오아시스의 위치, 수원의 분포, 안전한 경로를 파악한 지역 안내자들을 확보했다. 몽골군은 하루에 100km 이상을 이동할 수 있었다. 각 병사가 4~5마리의 말을 끌고 다니며 교대로 탔고, 소 한 마리를 육포로 만들어 말꼬리에 매달고 다니며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그들은 행군 중에도 우유를 발효시킨 쿠미즈를 마시며 영양을 보충했다.
오트라르 공성전은 1220년 초에 시작되었다. 차가타이와 오고타이가 이끄는 좌군은 5개월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오트라르는 견고한 요새였고, 수비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몽골군은 투석기와 공성 무기를 동원했지만 진전이 더뎠다. 그들은 포로들을 동원해 해자를 메우고 성벽을 파괴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마침내 5월, 도시가 함락되었다. 이날추크는 성이 함락된 후에도 성채에서 항전을 계속했다. 그는 성채 꼭대기에서 기와를 뜯어 몽골군에게 던지며 저항했다. 결국 사로잡힌 그는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야담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그토록 탐했던 금괴와 은괴를 녹여 눈과 귀에 부어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이날추크의 운명이 비참했음은 분명하다. 몽골군은 오트라르를 철저히 파괴했고, 이 도시는 오늘날까지 폐허로 남아있다.
칭기즈칸의 진군은 상상을 초월했다. 1220년 2월, 그는 460km에 달하는 키질쿰 사막을 횡단하여 호라즘의 심장부로 직행했다. 이것은 군사사에서 전례가 없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한니발의 알프스 횡단이나 나폴레옹의 사막 행군과 비교할 만한 업적이었다. 칭기즈칸은 부하라 앞에 나타났다. 이 고대 학문의 도시는 몽골군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충격을 받았다. 부하라의 투르크계 수비대 2만 명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몽골군에게 섬멸당했다. 페르시아인 수비대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함락되었다.
몽골군은 도시를 함락시킨 후 조직적인 약탈을 시작했다. 칭기즈칸은 부하라의 대모스크에 말을 타고 들어가 연단에 올라 이렇게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신이 보낸 채찍이다. 너희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신께서 나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일화는 페르시아 역사가 주베이니가 기록했는데, 칭기즈칸이 자신의 정복을 신의 뜻으로 정당화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몽골군은 종교적 관용을 보였다. 그들은 이맘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을 살려주었다. 장인과 기술자들도 선별하여 몽골로 보냈다. 그러나 저항한 전사들과 일반 주민들에 대한 학살은 무자비했다.
부하라에서 200km 떨어진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의 진주였다. 실크로드의 중계지이자 호라즘 제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11만 명의 수비대로 방어되고 있었다. 무함마드 2세는 사마르칸트에 있었지만, 몽골군이 접근하자 도주를 결심했다. 그는 1220년 3월 초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라즘 왕조는 더 이상 너희를 지킬 수 없으니 스스로를 지켜라." 그리고 소수의 호위병만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쳤다. 역사가들은 이 순간을 호라즘 제국 붕괴의 결정적 전환점으로 본다. 지배자가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것은 제국의 정통성과 사기에 치명타였다.
칭기즈칸의 세 아들이 이끄는 군대가 사마르칸트 앞에서 합류했다. 몽골군은 포위망을 좁혀갔고, 도시 내부에서는 혼란이 일어났다. 일부 귀족과 주민들이 성문을 열었다. 1220년 3월 19일, 도시는 단 5일 만에 함락되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민하즈 시라지는 이 날짜를 명확히 기록했다. 몽골군의 학살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베이니는 수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부하라에서처럼 종교적 관용을 보여 이맘들과 그들의 비호를 받는 사람들은 살려주었다. 장인 3만 명은 몽골로 송환되었고, 젊은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무함마드 2세는 도망자가 되었다. 칭기즈칸은 최정예 장군 제베와 수부타이에게 3만의 기병을 주어 그를 추격하게 했다. 이것은 군사사에서 가장 극적인 추격전 중 하나였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2년 동안 1만 킬로미터 이상을 추격했다. 술탄은 사마르칸트에서 발흐로, 발흐에서 니샤푸르로, 니샤푸르에서 레이로, 레이에서 카즈빈으로 도주했다. 니샤푸르에 3주간 머물렀을 때 그는 재기를 도모하는 대신 연회에 탐닉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이미 정신적으로 붕괴했음을 보여준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추격 과정에서 발흐, 레이, 카즈빈, 하마단을 차례로 점령했다. 그들은 자그로스 산맥에서 테르켄 카툰과 왕족들을 생포했다. 테르켄 카툰은 몽골로 송환되어 1221년 비참하게 죽었다. 궁지에 몰린 무함마드 2세는 소수의 근위병과 함께 카스피해의 작은 섬, 아바스쿤 근처의 한 섬으로 피신했다. 1220년 12월, 한때 "제2의 알렉산더"로 불렸던 술탄은 그 외딴 섬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폐렴으로 죽었다고 보지만, 일부는 제국 붕괴의 충격으로 죽었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 2세의 죽음으로 호라즘 제국은 사실상 붕괴했지만, 그의 아들 잘랄 웃딘은 항전을 계속했다. 그는 우르겐치로 들어가려 했으나 테르켄 카툰의 지지를 받는 귀족들의 암살 시도를 피해 탈출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지역 가즈니로 군대를 모았다. 1221년 여름, 그는 무함마드 2세의 사위이자 유명한 장군인 테무르 말리크와 그의 군대, 장인인 아민 말리크가 다스리는 가즈니 지역 군대,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산악 부족들을 규합하여 6만 명의 군대를 모았다.
1221년 9월, 파르완 전투에서 잘랄 웃딘은 칭기즈칸의 양자이자 최고 재판관인 시기 쿠투쿠가 이끄는 3만~5만 몽골군을 격파했다. 이것은 호라즘 원정에서 몽골이 당한 유일한 패배였다. 파르완은 카불 북쪽 50마일 지점의 좁은 협곡이었다. 이 지형은 몽골 기병의 기동성을 무력화했다. 잘랄 웃딘은 궁기병들을 말에서 내려 보병으로 싸우게 했다. 그들은 유리한 지형에서 몽골군에게 집중 사격을 가했다. 몽골군은 칭기즈칸이 전쟁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대혼란에 빠져 후퇴했다. 잘랄 웃딘은 전군에 추격을 명령했고, 몽골군의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 많은 몽골 병사들이 포로가 되었고, 호라즘군은 그들의 귀에 말뚝을 박아 처형했다.
파르완 전투의 소식은 중앙아시아 전역에 퍼졌다. 메르브와 헤라트, 부하라 등 이미 항복한 도시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쿠슈 테긴 파흘라완은 메르브에서 봉기를 일으켜 몽골 수비대를 축출하고 부하라를 공격했다. 헤라트도 몽골이 세운 괴뢰 정부를 무너뜨렸다. 한 반군 지도자 무함마드 알마르가니는 칭기즈칸이 머물던 바글란의 진지를 두 차례 습격하여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잘랄 웃딘은 승리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전투 직후,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몽골의 백마를 누가 가질 것인가를 두고 장인 아민 말리크와 아프간 부족 지도자 사이프 알딘 이그라크가 충돌했다. 잘랄 웃딘은 장인의 편을 들었고, 이그라크는 모욕을 느꼈다. 그날 밤, 아프간 부족 3만~4만 명이 모닥불만 남겨두고 야음을 틈타 떠났다. 이것은 전쟁사에서 가장 어리석은 내분 중 하나였다. 잘랄 웃딘의 군대는 하루아침에 절반으로 줄었다.
칭기즈칸은 패배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그는 직접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도중에 바미얀에서 그의 손자이자 차가타이의 아들인 무투겐이 독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 사건은 칭기즈칸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했다. 바미얀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주민 전체가 학살되었다. 칭기즈칸은 바미얀을 "침묵의 도시"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개와 고양이까지 모두 죽였다. 오늘날 바미얀의 거대한 불상들은 이 비극의 증인으로 남아있다.
칭기즈칸은 신속하게 이동하여 인더스 강변에서 잘랄 웃딘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1221년 11월, 인더스 전투가 벌어졌다. 잘랄 웃딘은 약 3만의 군대로 칭기즈칸과 그의 세 아들이 이끄는 대군에 맞섰다. 그는 중앙을 직접 지휘하며 5천 명의 정예 부대와 700명의 근위대를 이끌었다. 테무르 말리크는 우익을, 아프간 부대는 좌익을 맡았다. 잘랄 웃딘은 좌익을 강으로 곧장 이어지는 능선에, 우익을 강변에 배치했다. 이 배치로 그는 몽골의 측면 공격 전술을 무력화했다.
칭기즈칸은 군대를 초승달 모양으로 배치하여 호라즘군을 강으로 압박했다. 그는 직접 예비대를 지휘하며 잘랄 웃딘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우익은 차가타이가, 좌익은 오고타이가 지휘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잘랄 웃딘은 여러 차례 돌격을 이끌어 몽골군을 물리쳤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호라즘군의 양익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중앙만 버티고 있었다.
마침내 포위망이 좁혀지자, 잘랄 웃딘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완전 무장한 채 말을 타고 인더스 강으로 뛰어들었다. 인더스 강은 폭우로 수심이 6미터 이상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는 기적적으로 반대편 강변에 도달했다. 칭기즈칸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잘랄 웃딘을 추격하거나 화살로 쏘지 말라고 명령했다. 테무르 말리크는 포로가 되었고, 잘랄 웃딘의 후궁과 자녀들은 학살되었다. 살아남은 호라즘 병사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잘랄 웃딘은 인도로 건너가 펀자브 지역에서 소규모 국가를 세웠다. 그는 1222년부터 1224년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지만, 델리 술탄국의 일투트미시는 그에게 망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투트미시는 아바스 왕조 칼리프와의 관계를 고려했고, 칭기즈칸의 추격을 두려워했다. 잘랄 웃딘은 1225년 이란 북서부로 돌아가 다시 군대를 모았다. 그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하며 세력을 키웠지만,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그는 여러 반란에 직면했고, 몽골군의 압박도 계속되었다. 1231년 8월 15일, 그는 쿠르드 산지에서 한 쿠르드인에게 암살당했다. 그가 모은 군대는 호라즘 용병대로 알려져 레반트 지역을 떠돌다 1246년 완전히 소멸했다.
우르겐치 함락은 호라즘 원정의 마지막 장이었다. 이 도시는 호라즘의 옛 수도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아무다리야 강변의 습지대에 위치한 이 도시는 공성전에 매우 불리한 지형이었다. 1220년 말부터 1221년 4월까지, 칭기즈칸과 그의 세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가 총집결하여 공세를 펼쳤다.
우르겐치 공성전은 몽골이 치른 가장 어려운 전투였다. 부드러운 습지 땅은 공성 무기 배치에 불리했고, 투석기에 쓸 큰 돌도 부족했다. 몽골군은 뽕나무를 잘라 물에 담가 단단하게 만든 후 투석기 탄환으로 사용했다. 도시 방어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성벽이 무너진 후에도 거리마다, 집집마다 전투가 벌어졌다. 몽골군은 도시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평소보다 많은 손실을 입었다. 추산에 따르면 몽골군은 1만~2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주치가 도시를 자신의 영지로 받기로 약속받았기 때문에 사정은 더 복잡했다. 주치는 도시를 최대한 온전하게 확보하고 싶어 했고, 여러 차례 전투를 중단하고 항복을 권유했다. 이것은 동생 차가타이를 격노하게 했다. 두 형제 사이의 갈등은 격화되었고, 칭기즈칸은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상황을 수습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주치와 칭기즈칸 사이에 영구적인 균열을 만들었다. 주치는 이후 아버지와 결별했고, 1227년 칭기즈칸이 죽기 6개월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1221년 4월, 우르겐치가 마침내 함락되었다. 몽골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장인과 기술자 약 10만 명이 노예로 선별되었고, 젊은 여성과 아이들도 노예로 팔렸다. 나머지 주민들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베이니는 칭기즈칸이 5만 명의 병사 각자에게 24명씩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했다. 이 계산대로라면 120만 명이 학살된 것이 되지만, 이는 명백히 과장이다. 당시 우르겐치의 인구는 기껏해야 10만~30만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학살의 규모가 엄청났던 것은 사실이다.
몽골군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강의 둑을 터뜨려 도시를 침수시켰다. 이것이 의도적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일부 학자들은 몽골군이 떠난 후 둑을 관리할 현지인들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붕괴했을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결과는 참혹했다. 아무다리야 강은 북쪽으로 300km나 흐름을 바꾸어 우즈보이 지류를 통해 카스피해로 흘렀다. 이 변화는 16세기까지 약 300년간 지속되었다. 우르겐치 오아시스는 사막화되었고, 한때 비옥했던 지역은 황량한 습지로 변했다. 새로운 도시는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단 두 개의 건축물만이 1221년의 참사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툴루이는 남서쪽으로 진군하여 호라산 지역을 정복했다. 니샤푸르는 특별한 복수의 대상이었다. 1220년 이 도시는 제베와 수부타이의 군대에 항복했지만, 곧 반란을 일으켜 몽골 관리 타가차르를 살해했다. 타가차르는 칭기즈칸의 사위였다. 1221년 4월, 툴루이는 8만 명의 군대로 니샤푸르를 포위했다. 페르시아 연대기는 몽골군이 3천 개의 공성 쇠뇌, 100대의 투석기, 1천 개의 사다리, 4천 개의 계단, 1천 700개의 화염병 투척기를 동원했다고 기록한다.
니샤푸르는 실크로드의 주요 도시이자 학문의 중심지였다. 도서관 10개가 15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고, 천문학자이자 시인인 오마르 하이얌이 천문표를 작성한 곳이었다. 주지사 샤라프 알딘 아미르 마즐리스는 저항을 결의했고, 각 성문에 1만 2천 명의 궁수를 배치하여 총 4만 8천 명의 방어군을 갖추었다. 그러나 3일간의 공성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다. 타가차르의 미망인이 학살을 주관했다고 전해진다. 툴루이는 도시의 모든 생명체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개와 고양이까지 죽였다. 위대한 페르시아 시인이자 수피 신비주의자인 아타르 역시 이 학살에서 죽었다. 그는 약 78세였다. 그의 죽음은 페르시아 문학사에서 큰 손실로 기록되었다.
페르시아 역사가들은 니샤푸르에서 174만 7천 명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과장이며, 실제로는 10만~2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툴루이는 떠나기 전에 한 에미르와 400명의 타지크인을 남겨 폐허를 수색하고 생존자가 있으면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메르브는 "도시들의 여왕"으로 불렸다. 기원전 7세기부터 존재했던 이 도시는 동부 이슬람 세계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였다. 1221년 2월, 툴루이의 군대가 접근하자 도시는 항복 협상을 시도했다. 툴루이는 주민들의 생명을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도시가 문을 열자마자 그는 약속을 깼다. 거의 모든 사람이 학살되었다. 주베이니는 이 학살이 우르겐치보다 더 심했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헤라트는 항복하여 파괴를 면했다. 그러나 1221년 말, 잘랄 웃딘의 파르완 승리 소식에 고무된 헤라트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기 쿠투쿠는 다시 돌아와 1221년 11월 도시를 재정복하고 추가로 10만 명을 학살했다고 한다. 투스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호라즘 원정의 파괴는 상상을 초월했다. 니샤푸르, 메르브, 바미얀 같은 도시들은 완전히 사라졌다. 현대의 니샤푸르와 메르브는 옛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새로 세워진 것이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베이니는 이렇게 기록했다.
"단 한 번의 채찍질로 번영을 자랑했던 세계가 폐허가 되었고, 죽은 사람의 피부와 뼈 가루가 날리는 사막이 되었다. 이제 여우들이 도시의 궁전에서 새끼를 낳고, 뱀들이 보물창고에서 굴을 판다."
물론 기록에는 과장이 섞여있다. 우르겐치와 메르브 함락 후 250만 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호라즘 제국의 전체 인구가 300만~500만 정도였으므로 이는 불가능한 숫자다. 현대 학자들은 실제 사망자가 100만~150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전쟁 중 하나였다. 부하라는 40년 만에 번영하는 도시로 부활했고, 사마르칸트도 결국 재건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정복이 중앙아시아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관개 시설이 파괴되고 농경지가 황폐화되면서 이 지역은 수백 년 동안 회복하지 못했다. 인구 손실은 세대를 거쳐 회복되었지만, 문화적 손실은 영구적이었다. 수많은 필사본, 예술품, 건축물이 영원히 사라졌다. 학자들과 장인들이 대거 몽골로 끌려가면서 중앙아시아의 지적 전통은 큰 타격을 받았다.
제베와 수부타이의 별동대는 술탄 추격을 마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카스피해를 돌아 캅카스로 진군했고, 1221년 조지아 왕국을 격파했다. 이들은 계속 북쪽으로 진군하여 킵차크 초원을 횡단했다. 1223년, 이들은 칼카 강에서 키예프 루스의 연합군 8만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루스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것은 훗날 몽골의 유럽 원정으로 이어지는 전주곡이었다. 제베와 수부타이는 2만 킬로미터를 행군한 후 1224년 몽골로 귀환했다. 이것은 군사사에서 가장 대담한 정찰 작전 중 하나로 평가된다.
호라즘 전쟁은 단순한 정복 전쟁이 아니었다. 이것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몽골은 중앙아시아를 장악함으로써 실크로드 전체를 통제하게 되었다. 동서 교역의 중심축이 몽골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칭기즈칸은 호라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이슬람 세계의 공성 기술, 화약 무기, 투석기 운용법을 습득했다. 페르시아인과 투르크인 기술자들이 몽골군에 편입되어 이후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군의 갑옷 착용 비율이 높아진 것도 이 전쟁 이후였다.
행정 시스템도 발전했다. 칭기즈칸은 정주 문명을 통치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는 야율초재 같은 한인 관료들을 등용하여 점령지 행정을 맡겼다. 야율초재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의 질서를 1223년에 회복시켰다. 파발마 제도가 확립되어 제국 전역에 빠른 통신망이 구축되었다. 칭기즈칸은 또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확립했다. 이슬람 성직자들을 보호하고 조세를 면제한 것은 이후 몽골 제국의 특징이 되었다.
무함마드 2세의 오판은 역사를 바꾸었다. 만약 그가 40만 대군을 집결시켜 몽골군과 결전을 벌였다면 어땠을까? 만약 그가 사마르칸트를 버리지 않고 재기를 도모했다면? 만약 그가 장군들을 믿고 통일된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면?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무함마드 2세의 선택은 호라즘 제국뿐 아니라 이슬람 세계 전체에 재앙을 가져왔다. 빠른 성공에 익숙했던 그는 진정한 위기 앞에서 모든 판단력을 상실했다. 그는 싸우지도, 협상하지도 못하고 도망만 쳤다.
일부 학자들은 무함마드 2세를 무능한 지도자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그는 뛰어난 정복자였고, 20년 동안 제국을 크게 확장했다. 문제는 그가 만든 제국이 너무 빨리, 너무 크게 성장하여 내부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테르켄 카툰과의 권력 투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제국을 파괴했다. 그가 어머니와 칸그리 부족을 억제하고 잘랄 웃딘에게 권력을 위임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다.
칭기즈칸은 1225년 몽골로 귀환했다. 그의 제국은 이제 동중국해에서 카스피해까지, 시베리아에서 페르시아만까지 뻗어있었다. 호라즘 원정은 몽골을 단순한 초원의 제국에서 세계 제국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칭기즈칸 자신은 얼마 후 서하 정벌 도중 1227년 8월 사망했다. 그의 정확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낙마 사고로 인한 부상, 질병, 또는 단순히 노환으로 죽었을 수 있다. 그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고, 무덤의 위치는 오늘날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칭기즈칸이 남긴 유산은 후계자들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다. 오고타이는 1229년 대칸이 되어 유럽 원정을 개시했다. 바투는 1237년부터 1242년까지 러시아와 동유럽을 정복했다. 훌라구는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쿠빌라이는 중국 전역을 정복하여 원나라를 세웠다. 13세기 말,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육상 제국이 되었다. 전성기 몽골 제국의 영토는 240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했다.
호라즘 정복은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이 전쟁은 몽골군에게 이슬람 세계를 정복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심리전, 정보전, 공성전, 행정 관리의 기술을 익혔다. 호라즘 원정이 없었다면, 이후의 바그다드 함락도, 러시아 정복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1220년의 사마르칸트 함락과 호라즘 제국의 붕괴는 중세 세계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한때 번영했던 문명이 불과 2년 만에 잿더미가 되었고, 중앙아시아는 몽골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 사건은 동서 문명의 교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역설적으로, 몽골의 정복은 실크로드를 안정시켰다. 팍스 몽골리카 시대에 마르코 폴로 같은 여행자들이 유럽에서 중국까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가는 엄청났다. 수십만, 어쩌면 백만 명 이상이 죽었다. 찬란한 문화가 파괴되었고, 도시들이 사라졌다. 중앙아시아는 이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오늘날도 니샤푸르, 메르브, 바미얀의 폐허는 그날의 비극을 증언한다. 오트라르의 한 성주가 저지른 학살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결국 세계사의 방향을 바꾼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는 복수심, 야망, 그리고 잘못된 판단이 있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ziksir.com/news/articleView.html?idxno=1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