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8년 2월, 바그다드는 불타고 있었다. 티그리스 강의 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니었다. 5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 중심지였던 이 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고, '지혜의 집'으로 불리던 도서관의 책들이 강물에 던져져 물이 먹물로 검게 변했다고 전해진다.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의 공격으로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처형되었고, 750년부터 이어져온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극적인 종말은 단순히 군사적 충돌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세계관의 충돌이자, 한 문명권의 구조적 취약성이 드러난 순간이었으며, 중세 세계 질서의 근본적인 재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바스 왕조의 몰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어떻게 정점에 올랐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750년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아바스 왕조는 초기 약 100년간 이슬람 세계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우마이야 왕조가 아랍 귀족 중심의 제국이었다면, 아바스 왕조는 보다 보편적인 이슬람 제국을 지향했다.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아랍인 모두가 능력에 따라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개방성은 제국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다.
하룬 알-라시드 칼리프 시대(786-809)의 바그다드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문화적으로 발전한 도시였다. 762년 칼리프 알-만수르가 건설한 이 원형 도시는 완벽한 기하학적 설계를 자랑했다. 중앙의 황금 돔 궁전을 중심으로 동심원 구조로 거리가 뻗어나갔고, 네 개의 주요 문이 사방을 향해 열려 있었다. 인구는 최성기에 100만 명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였다. 바그다드의 시장에서는 중국의 비단, 인도의 향신료, 아프리카의 상아, 북유럽의 모피가 거래되었다. 디나르 금화는 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까지 통용되는 국제 화폐였다.
페르시아 행정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리스 철학을 번역하며, 대수학과 천문학을 발전시킨 이 시기는 인류 지성사의 찬란한 한 장이었다. 칼리프 알-마문(813-833)이 세운 '지혜의 집'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번역원이자 연구소였다. 여기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작들이 아랍어로 옮겨졌다. 페르시아와 인도의 과학 지식도 수집되었다. 알-콰리즈미는 대수학(algebra)을 체계화했고, 이븐 시나는 의학 정전을 저술했다. 이러한 지적 성취는 후에 유럽 르네상스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의 이면에는 구조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바스 왕조의 첫 번째 치명적 약점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정당성 기반 자체에 있었다.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계승자로서 이슬람 공동체 전체의 종교적·정치적 지도자를 자처했다. 이론적으로 칼리프는 '신의 그림자'이자 '믿는 자들의 사령관'(아미르 알-무미닌)이었다. 그의 권위는 코란과 하디스에 근거했고, 움마(이슬람 공동체) 전체를 대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권위 주장은 실제 통치력과 점점 괴리되어 갔다. 제국의 광대함 자체가 문제였다. 대서양에서 인더스 강까지,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예멘 사막까지 뻗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전근대 통신 수단으로는 불가능했다.
9세기 중반부터 각 지역의 총독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왕조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란의 타히르 왕조(821), 이집트의 툴룬 왕조(868), 북아프리카의 아글라브 왕조가 그 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공식적으로 칼리프에게 반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전히 금요 예배에서 칼리프의 이름을 언급했고, 명목상의 조공을 바쳤다. 칼리프는 그들에게 공식적인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것은 일종의 정치적 허구였다. 실질적인 세수와 군사력은 지방 왕조가 장악했지만, 상징적 권위는 칼리프에게 남겨두는 체제였다. 이는 마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유럽 전역에 대한 명목상의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독일의 여러 제후들조차 통제하지 못했던 상황과 유사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중앙의 군사력 약화였다. 초기 아바스 왕조는 호라산 지역의 아랍-페르시아 혼혈 군대에 의존했다. 이들 '아브나 알-다울라'(왕조의 아들들)는 혁명군이자 친위대였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그들의 충성심은 약화되었고, 지역적 이해관계에 더 집착하게 되었다. 칼리프 알-무타심(833-842)은 이 문제를 인식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시도했다. 그는 중앙아시아 투르크 부족들로부터 젊은 노예들을 대규모로 구입하여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들 맘루크(소유된 자)는 가족과 부족에서 분리되어 칼리프에게만 충성하도록 설계되었다.
처음에는 이 시스템이 효과적이었다. 투르크 기병들은 용맹했고, 칼리프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알-무타심은 그들을 위해 바그다드 북쪽에 사마라라는 새로운 군사 도시를 건설했다. 이곳은 순수하게 군영으로 설계되었고, 투르크 병사들과 그들의 지휘관들이 거주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맘루크 장교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중요성을 깨닫고 정치적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칼리프의 하인에서 칼리프의 주인으로 변모했다. 861년 칼리프 알-무타와킬이 투르크 장교들에게 암살당한 사건은 상징적이었다. 역사가 알-타바리의 기록에 따르면, 칼리프는 연회 중에 자신의 친위대에게 칼로 베여 죽었다. 암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고, 대신 그들이 선택한 후계자가 즉위했다.
이후 약 10년간 '사마라의 무정부 시대'로 알려진 혼란기가 이어졌다. 다섯 명의 칼리프가 즉위와 폐위를 반복했고, 모두 투르크 군 지휘관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알-무스타인은 폐위되어 암살당했다. 알-무타즈는 투르크 장교들에게 폭행당해 사흘 후 죽었다. 알-무흐타디는 궁전에 감금되어 굶어 죽었다. 칼리프직은 실권 없는 종교적 상징으로 전락했다. 이것은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제도의 구조적 붕괴였다. 칼리프 제도는 종교적 카리스마와 정치적 권력의 결합을 전제했는데, 이제 둘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945년 이란 북부 카스피해 연안의 데일람 산악 지대에서 기원한 시아파 부와이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이들은 원래 가난한 산악 부족이었지만,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부와이 가문의 세 형제 알리, 하산, 아흐마드는 각각 이란의 다른 지역을 통치하면서도 긴밀히 협력했다. 막내 아흐마드가 바그다드를 점령했을 때, 그는 수니파 칼리프 알-무스타크피를 폐위시킬 수 있었다. 시아파는 본래 칼리프직이 예언자의 사위 알리의 후손에게만 속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부와이 가문은 칼리프를 유지했다. 그들은 '아미르 알-우마라'(대아미르, 군주들의 군주)라는 새로운 칭호를 만들어 실권을 행사했지만, 칼리프의 상징적 권위는 존중했다. 이유는 실용적이었다. 제국의 대다수가 수니파였고, 칼리프의 축복 없이 통치하는 것은 정당성 위기를 초래할 것이었다. 따라서 기묘한 이중 권력 구조가 형성되었다. 칼리프는 금요일 설교를 하고, 종교적 의식을 주재하며, 형식적인 칙령에 서명했다. 아미르 알-우마라는 군대를 지휘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외교 정책을 결정했다. 이것은 후대 일본의 천황과 쇼군 관계를 예시하는 듯했다.
부와이 왕조 시대(945-1055)는 이슬람 문화사에서 흥미로운 시기였다. 정치적으로는 약했지만 지적으로는 풍요로웠다. 시아파 후원 하에 철학과 신학이 번성했다. 철학자 알-파라비와 이븐 시나의 전통이 계승되었다. 페르시아 문학이 부흥했고, 피르다우시가 대서사시 샤나메를 완성했다. 그러나 부와이 왕조 자체는 내분으로 약화되었다. 형제들 간의 단결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여러 지파로 분열된 부와이 가문은 서로 싸웠고, 이것은 그들의 군사력을 소진시켰다.
1055년 동쪽에서 새로운 세력이 도래했다. 셀주크 투르크는 원래 중앙아시아 오구즈 투르크 연맹의 일부였다. 10세기 말 이슬람으로 개종한 그들은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셀주크 가문의 수장 투그릴 베그는 뛰어난 전략가였다. 그는 이란의 혼란을 기회로 삼았다. 한 도시씩 정복하며 서진한 그는 마침내 1055년 바그다드에 도달했다. 부와이 왕조의 마지막 아미르 알-라힘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군대는 이미 해체 상태였고, 백성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투그릴 베그의 입성은 드라마틱하게 연출되었다. 그는 자신을 칼리프의 '해방자'로 포장했다. 수니파 칼리프 알-카임은 시아파 부와이 가문의 '억압'에서 구출된 것으로 선전되었다. 칼리프는 투그릴에게 '술탄'(권력자) 칭호를 수여했고, 그의 통치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이는 한 주인에서 다른 주인으로의 이동일 뿐이었다. 셀주크 술탄들은 칼리프로부터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승인받음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흥미로운 것은 셀주크가 부와이보다 더 칼리프를 존중했다는 점이다. 수니파로서 그들은 칼리프의 종교적 권위를 진심으로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권력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칼리프는 술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의식적 역할을 했지만, 실제 권력은 술탄의 손에 있었다.
셀주크 제국은 처음에는 강력했다. 술탄 알프 아르슬란(1063-1072)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파했다. 이 승리는 소아시아를 투르크화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그의 아들 말리크 샤(1072-1092) 시대에 셀주크 제국은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까지, 아나톨리아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뻗은 광대한 제국이었다. 유능한 재상 니잠 알-물크가 행정을 담당했고, 그는 이크타 제도(군사 봉토)를 통해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는 또한 각 주요 도시에 니자미야 학교를 세워 수니파 정통 신학을 교육했다.
그러나 말리크 샤가 1092년 사망하자 제국은 급속히 분열되었다. 그의 아들들과 조카들이 왕위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제국은 여러 지역 술탄국으로 쪼개졌다. 이라크의 셀주크, 시리아의 셀주크, 룸 셀주크(아나톨리아), 케르만 셀주크 등이 각자의 길을 갔다.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대 술탄'을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이러한 분열은 십자군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무슬림 세계는 분열로 인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취약한 왕조가 500년 이상 존속할 수 있었을까? 답은 이슬람 세계의 독특한 정치 이념에 있다. 수니파 이슬람 전통에서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단일성은 신학적 필수였다. 코란은 "그분의 줄에 모두 함께 매달리라, 분열하지 말라"(3:103)고 명령한다. 칼리프의 존재는 이 단일성의 상징이었다. 이슬람 법학자들은 '선택의 칼리프'보다 '참을 수 있는 폭군'이 낫다는 원칙을 발전시켰다. 즉, 불완전한 질서라도 무질서보다 낫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보수적 정치 이론은 칼리프 제도를 보호했다.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독립적으로 통치하면서도 칼리프의 이름으로 주화를 발행하고, 금요 설교에서 그를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이 정통 이슬람 질서의 일부임을 과시했다. 칼리프의 인정 없이 권력을 장악한 군벌은 단순한 찬탈자였다. 칼리프의 임명장을 받은 술탄은 정당한 통치자였다. 이 차이는 미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요했다. 그것은 합법성과 불법성, 질서와 혼란의 경계를 표시했다. 칼리프는 마치 유럽의 왕들이 교황의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이슬람 통치자들에게 정당성의 원천이었다. 따라서 누구도 아바스 왕조를 완전히 제거할 동기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당성 기반을 파괴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12세기 후반, 셀주크 제국이 분열되면서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은 놀랍게도 일시적인 독립성을 회복했다. 이라크 중부의 여러 술탄국들이 서로 견제하는 사이, 칼리프는 틈새를 발견했다. 칼리프 알-나시르(1180-1225)는 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이라크 중부를 직접 통치하며 실질적인 군대를 재건했다. 그의 군사력은 대제국을 정복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바그다드 주변을 방어하기에는 충분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외교적 영향력이었다.
알-나시르는 '푸투와'(젊은이, 기사도)라는 길드 조직을 재편하여 범이슬람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했다. 푸투와는 원래 도시 청년들의 상호 부조 조직이었는데, 알-나시르는 이것을 정치적 도구로 전환했다. 그는 자신을 최고 푸투와 지도자로 선포하고, 각지의 술탄들을 명목상의 회원으로 가입시키려 했다. 이것은 종교적 카리스마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교묘한 시도였다. 일부 통치자들은 실제로 가입했고, 바그다드에서 의식적인 입회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상징적 권위는 회복할 수 있었지만, 실질적인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알-나시르의 후계자들은 그만한 능력이 없었다. 칼리프 알-무스타심(1242-1258)은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가 되었다. 그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특별히 무능하지도, 특별히 유능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의 불행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정복자와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 동방에서 전례 없는 위협이 다가오고 있었다.
1206년 몽골 고원에서 일어난 사건은 유라시아 전체의 운명을 바꿀 것이었다. 테무진이라는 한 부족장이 여러 몽골 부족들을 통일하고 '칭기즈 칸'(보편적 통치자)을 칭했다. 바그다드에서 이 소식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몽골은 변방의 유목민 땅이었고, 이슬람 세계는 수세기 동안 유목민 침입을 경험했다. 그들은 보통 약탈하고 떠나거나, 아니면 정착하여 이슬람화되었다. 셀주크 투르크가 그러했고, 그 이전의 많은 투르크 부족들이 그러했다. 몽골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몽골 제국은 이전의 어떤 유목 국가와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칭기즈 칸은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조직의 천재였다. 그는 전통적인 부족 구조를 해체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다. 몽골 사회는 십진법 원리로 재조직되었다. 10명의 전사가 하나의 '아르반'을 구성했다. 10개의 아르반이 모여 100명의 '자군'이 되었다. 10개의 자군이 1,000명의 '밍간'을 이루었고, 10개의 밍간이 10,000명의 '투멘'이 되었다. 이러한 조직은 부족 경계를 무시했다. 한 투멘에는 여러 부족 출신이 섞여 있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부족 충성심이 국가 충성심을 압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지휘관은 혈통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선발되었다. 칭기즈 칸의 가장 유능한 장수들 중 일부는 낮은 출신이었다. 수부타이는 대장장이의 아들이었지만, 몽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략가 중 하나가 되었다. 젭 노얀은 노예 출신이었지만, 수만 명을 지휘하는 장군이 되었다. 이러한 능력주의는 몽골군에게 엄청난 효율성을 부여했다. 동시에 칭기즈 칸은 '야사'라는 법전을 공포했다. 이것은 엄격한 군율과 사회 규범을 명시했다. 명령 불복종은 사형이었다. 전투 중 도주는 그 병사뿐 아니라 그가 속한 10인조 전체의 처형을 의미했다. 이러한 가혹한 규율은 몽골군을 철저히 통제된 전쟁 기계로 만들었다.
몽골의 군사 전술도 혁명적이었다. 그들의 기본 전술은 기동성과 기만이었다. 몽골 기병은 한 사람이 여러 마리의 말을 끌고 다녔다. 피곤한 말은 즉시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에 100킬로미터 이상을 이동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였다. 적이 몽골군의 위치를 파악할 때쯤이면, 그들은 이미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몽골군은 또한 '망굴다이'라는 속임수 전술을 완성했다. 소규모 부대가 적을 공격한 후 도주하는 척하면, 적은 추격했다. 그러면 매복해 있던 주력군이 양쪽에서 협공했다. 이 전술로 수많은 적군이 포위 섬멸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진정한 강점은 학습 능력이었다. 초기에 몽골군은 초원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야전에서는 무적이었지만 도시 공성전에는 서툴렀다. 칭기즈 칸은 이 약점을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았다. 중국 정복 과정에서 그들은 중국의 공성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을 강제로 고용하여 공성 무기를 만들게 했다. 거대한 투석기, 공성탑, 화약 병기가 몽골 군대에 추가되었다. 페르시아 정복 후에는 페르시아의 엔지니어들도 채용되었다. 결과적으로 몽골군은 야전과 공성전 모두에서 우월한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되었다.
몽골의 정보 수집 능력도 놀라웠다. 침공 전에 그들은 상인과 스파이를 파견하여 목표 지역을 조사했다. 지리, 도시의 방어 상태, 정치적 분열, 경제 상황 등 모든 것이 수집되었다. 칭기즈 칸은 적의 내분을 이용하는 데 능숙했다. 그는 적국 내의 불만 세력을 지원하거나, 경쟁 관계에 있는 국가들을 차례로 각개 격파했다. 이러한 전략적 사고는 단순한 야만적 정복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몽골 제국은 계산된 효율성의 산물이었다.
1219년 칭기즈 칸이 호라즘 제국을 공격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것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타격이었다. 호라즘 제국은 당시 중앙아시아와 이란 대부분을 지배하는 강대국이었다. 호라즘 샤 알라 알-딘 무함마드는 야심만만한 통치자였다. 그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구르 왕조를 멸망시켰고, 셀주크의 잔존 세력들을 제압했다. 그는 심지어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도전하여 자신의 괴뢰 칼리프를 세우려 했다. 그의 제국은 거대했고, 그의 군대는 4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반면 칭기즈 칸이 서쪽으로 끌고 온 군대는 약 10만 명이었다. 숫자만 보면 호라즘이 우세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일방적인 재앙으로 변했다. 칭기즈 칸의 전략은 교묘했다. 그는 군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호라즘 제국의 여러 도시를 동시에 위협했다. 호라즘 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대군을 집중시키지 않고 여러 도시에 분산 배치했다. 각 도시가 자체적으로 방어하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몽골의 각개 격파 전술에 완벽하게 빠진 것이었다. 몽골군은 한 도시씩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했다.
1220년 2월, 부하라가 첫 목표였다. 칭기즈 칸은 직접 이 도시를 포위했다. 투르크 용병들로 구성된 수비군은 항복하고 싶어했지만, 페르시아인 지휘관들은 저항을 주장했다. 결국 투르크 병사들은 밤에 탈출을 시도했고, 많은 수가 몽골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칭기즈 칸은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투항하여 몽골군에 합류하거나, 죽거나. 대부분은 투항했다. 이들은 즉시 부하라 공격에 투입되었다. 이것은 몽골의 전형적인 전술이었다. 포로를 공성전의 소모용 병력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부하라는 며칠 만에 함락되었다. 칭기즈 칸은 도시의 금요 모스크에 말을 타고 들어가 코란 사본들을 말에게 먹이로 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아마 과장이겠지만, 그가 이슬람의 신성함에 아무런 경외심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사마르칸트는 더 큰 목표였다.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중심지이자 중앙아시아 최대의 문화 도시였다. 수비군은 약 11만 명으로, 몽골 공격군보다 많았다. 그러나 숫자가 전부가 아니었다. 몽골군은 도시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그들은 포로로 잡은 투르크 병사들과 강제 징집된 페르시아 농민들을 앞세워 성벽을 공격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은 방패막이였다. 수비군은 자신의 동포들을 죽여야 했다. 심리적 충격은 엄청났다. 한편 중국식 투석기들이 성벽을 계속 두드렸다. 5일 후 도시는 항복했다. 칭기즈 칸은 도시를 약탈했지만 대규모 학살은 하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은 도시는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대우받았다. 이것도 계산된 것이었다. 항복하면 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메르브는 그 예였다. 이 고대 도시는 호라즘 제국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휘관은 항복을 거부했다. 몽골군은 13일간 포위한 후 성벽을 돌파했다. 그 다음에 벌어진 것은 체계적인 대학살이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바이니는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남자, 여자, 어린이가 모이도록 명령되었다. 그런 다음 각 몽골 병사는 300명에서 400명을 죽이라는 할당량을 받았다." 전체 사망자는 70만에서 100만으로 추산되었다. 이 숫자는 과장일 수 있지만, 도시가 사실상 소멸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메르브는 완전히 파괴되어 이후 수세기 동안 폐허로 남았다.
이러한 공포는 의도적으로 전파되었다. 몽골은 생존자들을 일부러 살려 보내 학살 이야기를 퍼뜨리게 했다. 다음 도시는 메르브의 운명을 들었고, 많은 경우 저항 없이 항복했다. 이것은 심리전이었다. 공포를 무기로 사용하여 실제 전투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호라즘 샤 무함마드는 이 악몽 앞에서 완전히 무력했다. 그는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도망 다녔다. 몽골군은 그를 추적했다. 1220년 말, 그는 카스피해의 한 섬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외롭게 죽었다. 그의 아들 잘랄 알-딘은 용감하게 저항을 계속했지만, 결국 1231년 쿠르드 암살자에게 살해되었다. 호라즘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칭기즈 칸은 1227년 사망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정복을 계속했다. 칭기즈 칸은 제국을 네 아들에게 분할했지만, 전체는 대칸의 지도 하에 통일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대칸이 되었다(1229-1241). 오고타이는 아버지보다 행정가 기질이 강했다. 그는 카라코룸에 수도를 건설하고 제국의 관료 체계를 정비했다. 그러나 정복도 멈추지 않았다. 1230년대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러시아를 침공했다.
러시아 원정은 놀라운 군사적 성취였다. 1237년 겨울, 몽골군은 얼어붙은 볼가 강을 건너 랴잔 공국을 공격했다. 러시아 제후들은 분열되어 있었고 각자 방어했다. 몽골군은 한 공국씩 격파했다. 랴잔, 블라디미르, 수즈달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1240년 키예프가 파괴되었다. 이 도시는 루스의 어머니이자 동슬라브 문명의 중심이었다. 몽골군은 도시를 철저히 파괴했다. 13세기 말 이곳을 방문한 여행자는 수백 개의 해골만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다.
1241년 봄, 몽골군은 유럽 중심부로 진격했다. 바투는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었다. 북쪽 부대는 폴란드로, 남쪽 부대는 헝가리로 향했다. 4월 9일, 폴란드의 레그니차에서 북쪽 몽골군은 폴란드-독일 연합군과 충돌했다. 유럽 기사들은 용감했지만 전술적으로 열등했다. 그들은 중갑 기병 돌격에 의존했다. 몽골 경기병들은 도망치는 척하며 기사들을 유인했다. 지친 기사들이 흩어지자, 몽골군은 돌아서서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그런 다음 측면과 후방을 공격했다. 유럽군은 괴멸되었다.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는 전사했고, 그의 머리는 창에 꽂혀 전시되었다.
이틀 후 4월 11일, 헝가리의 모히 평원에서 더 큰 전투가 벌어졌다. 헝가리 왕 벨라 4세는 약 10만 명의 대군을 집결시켰다. 몽골군 주력은 약 2만 명이었다. 그러나 바투와 수부타이의 전술은 완벽했다. 몽골군은 밤에 몰래 강을 건너 헝가리 진영을 포위했다. 새벽에 갑작스런 공격이 시작되었다. 혼란에 빠진 헝가리군은 제대로 대형도 갖추지 못했다. 몽골군은 의도적으로 한쪽 포위망을 열어두었다. 헝가리군은 그 틈으로 도망쳤다. 이것이 바로 몽골이 원한 것이었다. 조직된 군대를 대적하는 것보다 도망치는 무리를 학살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몽골 기병들은 도주하는 헝가리군을 며칠간 추격하며 학살했다. 헝가리 군대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유럽은 공포에 떨었다. 다음 목표는 빈, 어쩌면 로마일 것 같았다. 그러나 1241년 12월, 놀라운 소식이 왔다. 대칸 오고타이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몽골 전통에 따르면 모든 황족은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대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바투는 서쪽 원정을 중단하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유럽을 구했다. 만약 몽골군이 계속 서진했다면, 분열된 유럽 국가들이 막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역사의 우연이 유럽 문명을 보존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또 다른 정복이 진행 중이었다. 몽케 칸(1251-1259)이 대칸에 즉위하면서 체계적인 세계 정복 계획이 수립되었다. 몽케는 두 개의 주요 전선을 열었다. 그 자신은 남송 공격을 지휘했고, 동생 훌라구에게는 서아시아 정복을 맡겼다. 훌라구는 단순한 군사 지휘관이 아니라 정복 지역을 영구적으로 지배할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독립적인 울루스(영지)를 건설할 권한을 받았다. 이것은 후에 일칸국이 될 것이었다.
1253년부터 훌라구는 철저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소집했다. 몽골 본토에서 투멘들이 왔고, 중국에서 공성전 전문가들이 왔으며, 중앙아시아 투르크 부족들이 징집되었다. 최종적으로 모인 군대는 약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몽골 역사상 가장 큰 서방 원정군이었다. 군대만이 아니었다. 훌라구는 광대한 보급 열차도 조직했다. 수천 대의 수레가 식량, 무기, 공성 장비를 실어 날랐다. 이것은 단순한 약탈 원정이 아니라 영구 정복을 위한 준비였다.
1256년 훌라구의 군대가 페르시아에 도착했다. 첫 번째 목표는 이스마일파 암살단이었다. 이들은 1090년 이래로 이란 북부의 난공불락 산성들에서 독특한 국가를 유지해왔다. 그들의 수도 알라무트 요새는 엘부르즈 산맥의 가파른 바위 위에 세워져 있었다. 역대 술탄들이 이 요새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암살단은 직접적인 군사력보다는 비밀 암살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의 암살자들은 숙련되고 헌신적이었다. 셀주크 재상 니잠 알-물크, 십자군 지도자 콘라드 등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들의 칼에 쓰러졌다.
그러나 몽골은 암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훌라구는 체계적인 접근을 했다. 그는 먼저 암살단의 외곽 요새들을 하나씩 점령했다. 각 요새는 완전히 포위되고 보급이 차단되었다. 투석기들이 성벽을 파괴했다. 몇몇 요새는 짧은 저항 후 항복했다. 저항하는 요새는 함락 후 주민 전체가 학살당했다. 이것은 다른 요새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256년 11월, 훌라구는 마침내 알라무트 자체를 포위했다.
암살단의 지도자 '산의 노인' 루크 알-딘은 젊고 경험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죽은 지 몇 년 안 되었고, 이런 위기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요새는 견고했고 식량 비축도 충분했다. 이론적으로는 수년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루크 알-딘은 몽골의 무자비함을 들었고, 협상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는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훌라구는 거짓으로 관대한 조건을 약속했다. 1256년 11월 19일, 루크 알-딘은 알라무트에서 나와 훌라구를 알현했다.
훌라구는 즉시 루크 알-딘을 인질로 잡고, 그에게 모든 암살단 요새에 항복 명령을 내리도록 강요했다. 대부분의 요새는 복종했다. 그러나 몇몇 요새는 거부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람사르 요새였다. 이곳의 수비대는 루크 알-딘의 명령을 믿지 않았고, 1년 이상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1258년 말 식량이 떨어져 항복했다. 모든 암살단 요새가 함락된 후, 몽골군은 체계적으로 그것들을 파괴했다. 성벽은 무너뜨려지고, 도서관은 불태워졌다. 루크 알-딘 자신은 몽케 칸을 알현하기 위해 카라코룸으로 보내졌다가, 돌아오는 길에 살해되었다. 150년간 중동에 공포를 심었던 암살단 국가는 완전히 소멸했다.
이것은 몽골의 군사적 우월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어떤 무슬림 통치자도 정복하지 못한 것을 몽골은 2년도 안 되어 달성했다. 그리고 이제 훌라구는 최종 목표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였다.
1257년 가을, 몽골 사절단이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사절의 수장은 페르시아 학자이자 역사가인 나시르 알-딘 투시였다. 투시는 원래 암살단 요새에 억류되어 있다가 몽골에 의해 해방된 후 훌라구의 고문이 되었다. 그는 몽골의 힘을 잘 이해했고,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믿었다. 투시가 전달한 훌라구의 요구사항은 명확했다.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직접 훌라구를 알현하고 복종을 맹세해야 한다. 바그다드의 성벽을 허물고 군대를 해산해야 한다. 이것은 사실상 무조건 항복 요구였다.
칼리프의 조정은 심각한 분열에 빠졌다. 대재상 무아야드 알-딘 이븐 알-알카미는 항복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시아파였고, 수니파 중심의 칼리프 조정에서 수년간 차별을 경험했다. 1258년 이전 몇 년간 바그다드에서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폭력적 충돌이 여러 번 있었고, 시아파 지역이 약탈당했다. 이븐 알-알카미는 이러한 대우에 분개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실제로 몽골과 내통하여 바그다드의 방어 준비를 방해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칼리프에게 군대를 축소하라고 조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증거는 불확실하고 모순적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저항의 무익함을 이해했고, 몽골과의 협상이 최선이라고 믿었다는 점이다.
반대편에는 다와다르(비서관) 아이베그 알-다와다르와 젊은 장교들이 있었다. 아이베그는 열렬한 수니파였고 칼리프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그는 바그다드의 역사적 위대함을 믿었다. 이 도시는 5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의 수도였다. 수백만 명의 무슬림들이 매일 칼리프를 위해 기도했다. 아이베그는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원군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집트의 강력한 맘루크 술탄국, 시리아의 제후들, 아나톨리아의 룸 셀주크, 그리고 심지어 멀리 북아프리카와 인도의 무슬림 통치자들이 칼리프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보낼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은 종교적 의무이자 정치적 필연처럼 보였다.
칼리프 알-무스타심 자신은 우유부단했다. 그는 37세의 중년이었지만 결정적인 위기 경험이 없었다. 그의 치세 16년은 비교적 평온했다. 주요 결정들은 대신들이 내렸고, 칼리프는 의례적인 역할에 만족했다. 이제 그는 왕조의 생존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이븐 알-알카미의 현실주의와 아이베그의 이상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최악의 중간 노선을 택했다. 그는 훌라구에게 공손한 답변을 보냈지만 요구사항은 거부했다. 동시에 군대를 동원했지만 진지한 전쟁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양쪽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몽골은 이를 적대 행위로 간주했고, 동시에 바그다드는 실제 전투를 준비하지 못했다.
훌라구는 칼리프의 답변을 받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1257년 11월, 그는 군대를 세 방향으로 나누어 바그다드를 향해 진군시켰다. 동쪽에서 훌라구 자신이 주력군을 이끌고 하마단과 케르만샤를 거쳐 진격했다. 서쪽에서는 투르크 장수 바이주가 모술과 북부 이라크를 통해 접근했다. 남쪽에서는 또 다른 부대가 후제스탄 지역에서 올라왔다. 이것은 전형적인 몽골의 다방향 협공 전략이었다.
1258년 1월 중순, 몽골군이 바그다드 외곽에 도착했다. 훌라구는 먼저 도시 주변의 작은 요새들을 점령했다. 바그다드 북쪽의 카스르 지역이 먼저 함락되었다. 수비군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이것은 바그다드에 경고였다. 1월 18일, 칼리프는 마지막 시도로 2만 명의 군대를 출격시켰다. 이들은 몽골군을 기습하여 초기 이득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재빨리 대응했다. 그들은 티그리스 강의 제방을 파괴하여 이라크군의 배후를 침수시켰다. 물에 갇힌 이라크군은 혼란에 빠졌고, 몽골군은 그들을 포위하여 대부분 학살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도시로 도망쳤다. 이것으로 바그다드의 야전군은 사실상 소멸했다.
1월 29일, 완전한 포위가 완성되었다. 몽골군은 동서남북 모든 방향에서 바그다드를 둘러쌌다. 훌라구는 성 밖에 본영을 설치하고 공성 준비를 시작했다. 중국에서 온 엔지니어들이 거대한 투석기들을 조립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일부 투석기는 수백 킬로그램의 돌을 던질 수 있었다. 이것들이 바그다드의 성벽을 향해 끊임없이 발사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몽골 궁수들이 성벽 위의 수비군을 압박했다. 바그다드 안에서는 공포가 퍼졌다. 주민들은 메르브와 사마르칸트의 운명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탈출하려 했지만, 몽골군은 철저히 포위망을 유지했다.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마침내 현실을 직시했다. 그가 기대했던 원군은 오지 않을 것이었다.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 쿠투즈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느라 바빴다. 그는 전임자를 살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국내 정치가 우선이었다. 시리아의 소국들은 이미 몽골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아나톨리아의 룸 셀주크도 마찬가지였다. 북아프리카와 인도는 너무 멀었다. 바그다드는 고립되어 있었다. 2월 3일, 칼리프는 협상을 요청했다. 그는 대재상 이븐 알-알카미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총대주교를 훌라구에게 보냈다.
협상은 짧았다. 훌라구의 요구는 간단했다. 칼리프는 직접 출성하여 복종해야 하고, 도시는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 이븐 알-알카미는 칼리프를 설득했다. 다른 선택이 없었다. 2월 10일,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아들, 주요 대신들, 그리고 3,000명의 수행원과 함께 바그다드의 문을 나섰다. 그는 훌라구를 만나 무릎을 꿇었다. 이슬람 세계의 최고 종교 지도자가 이교도 정복자 앞에 굴복한 것이다. 훌라구는 칼리프를 정중하게 대우하는 척했다. 그는 칼리프에게 몽골군에게 도시의 모든 보물 위치를 알려주고, 주민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하도록 요구했다. 알-무스타심은 복종했다.
그러나 훌라구는 약속을 지킬 의도가 전혀 없었다. 2월 13일, 몽골군이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처음에는 질서정연했다. 군인들이 체계적으로 거리를 순찰했다. 주민들은 집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보호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날 학살이 시작되었다.
몽골군은 거리마다 집집마다 수색했다. 남자들은 거의 모두 즉결 처형되었다. 페르시아 역사가 라시드 알-딘의 기록에 따르면, 각 몽골 병사는 일정한 할당량의 사람들을 죽이도록 명령받았다. 어떤 자료는 병사당 50명, 다른 자료는 100명 이상을 언급한다. 여자와 어린이들은 대부분 노예로 잡혔다. 그러나 저항하는 사람들, 너무 늙었거나 병든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특정 기술을 가진 사람들만 선별적으로 살려졌다. 장인, 의사, 학자, 엔지니어들은 유용했기 때문이다.
학살은 며칠간 계속되었다. 일주일 후 바그다드는 사실상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 시신들이 거리에 쌓였다. 악취가 너무 심해서 훌라구는 진영을 도시에서 멀리 옮겨야 했다. 전체 사망자 수는 불확실하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바이니는 80만 명, 이븐 카시르는 100만 명, 일부 자료는 200만까지 언급한다. 현대 학자들은 이 숫자들이 과장이라고 본다. 당시 바그다드의 실제 인구는 아마 30만에서 50만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주민이 학살당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 인구의 70-90%가 죽었을 것이다.
도시의 지적 유산도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지혜의 집'과 여러 도서관들이 약탈당했다. 몽골군은 책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기억을 지우려 했을 수 있다. 수십만 권의 필사본이 티그리스 강에 던져졌다. 여기에는 그리스 철학의 아랍어 번역본, 페르시아 역사서, 과학 논문, 의학 서적, 수학 연구, 천문학 자료,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문학 작품들이 포함되었다. 역사가 이븐 카시르는 "먹물 때문에 강물이 검게 변했고, 책들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문학적 과장일 것이다. 그러나 상징적 의미는 명확하다. 이슬람 황금기의 지적 성과가 문자 그대로 소멸하고 있었다. 일부 책들은 살아남았다. 몽골에 협력한 학자들이 일부를 숨겼고, 일부는 우연히 보존되었다. 그러나 전체의 극히 일부만 후대에 전해졌다.
칼리프 알-무스타심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버전이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그가 카펫에 싸여 말에 밟혀 죽었다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고귀한 혈통의 피를 땅에 흘리는 것을 금기시했다고 한다. 따라서 왕족을 처형할 때는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바이니는 칼리프가 카펫에 말려 말들이 그 위를 짓밟았다고 기록했다. 다른 자료들은 그가 목이 졸려 죽었다고 하거나, 아니면 훌라구가 그를 자신의 보물 방에 가두고 "이제 네 금을 먹어라"라고 조롱하며 굶겨 죽였다고 전한다.
정확한 방법은 불확실하다. 각 이야기는 도덕적 교훈을 담고 있다. 카펫 이야기는 몽골의 잔인함을 강조한다. 보물 방 이야기는 물질적 부의 무용함을 가르친다. 어쨌든 결과는 같았다. 2월 20일경, 칼리프 알-무스타심 빌라는 사망했다. 그와 함께 그의 성인 아들들과 주요 아바스 가문 남성들도 대부분 처형되었다. 훌라구는 아바스 가문이 복수할 가능성을 제거하려 했다. 무함마드의 숙부 알-압바스의 후손으로서 750년부터 이어진 칼리프 왕조가 완전히 끝났다. 한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바그다드 함락의 소식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 충격파를 일으켰다. 카이로에서 델리까지, 코르도바에서 사마르칸트까지, 무슬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많은 이들에게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신학적 위기였다. 어떻게 신의 대리인인 칼리프가 이교도에게 살해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언자의 도시가 이렇게 모욕당할 수 있는가? 이슬람 신학은 역사가 정의로운 칼리프의 통치 하에 계속된다고 가정했다. 이제 그 가정이 산산조각 났다.
다양한 신학적 해석이 나타났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최후의 날이 임박했다는 징조라고 주장했다. 하디스(예언자의 언행록)에는 이슬람이 서쪽의 적들에게 시험받을 것이라는 예언들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몽골을 종말론적 적 야주즈와 마주즈(성경의 곡과 마곡)와 동일시했다.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무슬림들의 죄악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해석했다. 칼리프들이 타락했고, 움마가 분열했으며, 진정한 이슬람 정신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신이 몽골을 채찍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시리아의 역사가 이븐 알-아시르는 이렇게 썼다.
"오 무슬림이여, 이 재앙은 너무 커서 나는 침묵하고 싶다. 그러나 미래 세대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실용적인 반응도 있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맘루크 술탄국은 몽골의 위협을 직시했다. 바그다드 함락 후 훌라구는 계속 서진했다. 1259년 그는 시리아를 침공했다. 알레포가 함락되어 약탈당했다. 다마스쿠스는 저항 없이 항복했다. 몽골군은 팔레스타인까지 진출했다. 이제 이집트가 다음 목표처럼 보였다. 그러나 1259년 여름, 또 다시 역사의 우연이 개입했다. 몽케 칸이 중국 전선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왔다.
훌라구는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전통에 따르면 그도 쿠릴타이에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카라코룸까지는 수천 킬로미터였고, 돌아가는 동안 새로 정복한 영토를 잃을 수 있었다. 훌라구는 타협안을 택했다. 그는 직접 가지 않고 대표단을 보냈다. 그러나 군대의 대부분을 이란으로 철수시켰다. 시리아에는 약 2만 명의 몽골군만 남겼다. 지휘관은 키트부카라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다.
이것은 맘루크에게 기회였다. 이집트의 술탄 쿠투즈는 용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였다. 그는 몽골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260년 7월,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군했다. 맘루크 군대는 약 2만 명의 정예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킵차크 투르크 출신의 노예 전사들이었다. 어린 시절 훈련받아 전투에 일생을 바친 전문 군인들이었다.
1260년 9월 3일, 갈릴리의 아인 잘루트(골리앗의 샘) 근처에서 두 군대가 충돌했다. 이것은 몽골의 서진을 결정할 운명적인 전투였다. 맘루크 지휘관 바이바르스는 교묘한 전술을 사용했다. 그는 소규모 선발대로 몽골군을 유인했다. 키트부카는 추격했다. 바이바르스의 부대는 도망치는 척하며 몽골군을 협곡으로 끌어들였다. 그곳에서 매복해 있던 맘루크 주력군이 양쪽에서 공격했다. 몽골군은 포위당했다. 그들의 전형적인 기동 전술이 협곡의 좁은 공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전투는 치열했다. 몽골군은 용감하게 싸웠다. 키트부카는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다. 그러나 맘루크의 숫자와 전술이 우세했다. 날이 저물 때쯤 몽골군은 괴멸되었다. 이것은 몽골군의 첫 번째 결정적 패배였다. 물론 몽골군은 이전에도 전투에서 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소규모 충돌이었다. 아인 잘루트는 주요 몽골 군단이 완전히 파괴된 첫 사례였다.
승리의 영향은 엄청났다. 맘루크군은 계속 북진하여 시리아 전역에서 몽골의 잔존 세력을 몰아냈다. 다마스쿠스, 알레포, 홈스가 재탈환되었다. 몽골의 서진은 저지되었다. 훌라구는 복수를 위해 다시 침공하려 했지만, 다른 문제들이 그를 방해했다. 그의 사촌 베르케가 지배하는 킵차크 칸국(황금 오르다)과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베르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바그다드의 파괴에 분개했다. 두 몽골 울루스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몽골 제국의 단일성이 깨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맘루크 술탄 쿠투즈는 승리를 오래 즐기지 못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 몇 달 후, 그는 부하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했다. 바이바르스가 새로운 술탄이 되었다(1260-1277). 바이바르스는 정치적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는 바그다드에서 탈출한 아바스 가문의 일원을 찾아냈다. 이 사람 아부 알-카심 아흐마드는 칼리프 알-무스타심의 먼 친척이었다. 바이바르스는 그를 카이로로 초대하여 1261년 새로운 칼리프로 즉위시켰다. 그는 알-무스탄시르 2세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카이로 칼리프제'는 기묘한 제도였다. 칼리프는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그는 맘루크 술탄의 통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만 했다. 매주 금요일 카이로의 모스크에서 설교가 있을 때, 칼리프와 술탄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었다. 칼리프는 술탄에게 공식적인 임명장을 수여했다. 술탄은 칼리프에게 존경을 표시했다. 그러나 모든 실제 결정은 술탄이 내렸다. 칼리프는 호화로운 감옥에 살았다. 그들은 궁전에서 편안하게 살았지만,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것은 바그다드 시대의 아바스 칼리프들보다 더 무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중요한 상징적 기능을 했다. 그것은 칼리프 제도가 얼마나 깊이 이슬람 정치 이론에 뿌리박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실권이 전혀 없어도 칼리프의 존재 자체가 정당성을 부여했다. 맘루크 술탄들은 본래 노예 출신이었다. 그들은 왕조적 정당성이 없었다. 권력은 순전히 군사력에서 나왔다. 칼리프의 승인이 이 군사 독재에 종교적 외피를 제공했다. 카이로 칼리프제는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스만 술탄 셀림 1세는 마지막 카이로 칼리프로부터 칭호를 인수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의심스럽다. 오스만의 칼리프 칭호 사용은 주로 16세기 후반 이후에 체계화되었다.
한편 일칸국 자체도 변화하고 있었다. 훌라구는 1265년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처음에는 불교도와 샤머니즘을 따랐다. 그러나 점차 이슬람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295년 일칸 가잔이 공식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것은 상징적인 전환점이었다. 바그다드를 파괴한 정복자의 손자가 이제 무슬림이 된 것이다. 가잔은 수니파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이슬람의 술탄'을 칭했다. 그는 모스크를 건설하고, 학자들을 후원하며, 이슬람 법을 시행했다.
이것은 이슬람 문명의 놀라운 회복력을 증명했다. 정복자들이 피정복자의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역사상 자주 일어나는 패턴이다. 게르만 족은 로마를 정복했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만주족은 중국을 정복했지만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다. 마찬가지로 몽골은 중동을 정복했지만 결국 이슬람화되었다. 그러나 단기적 피해는 엄청났다. 이란과 이라크의 관개 시스템이 몽골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몇몇 세기 동안 발달한 수로와 카나트(지하 수로)가 방치되어 무너졌다. 농업 생산이 급격히 감소했다. 도시 인구가 대폭 줄었다.
경제적 결과도 심각했다. 바그다드는 더 이상 주요 무역 중심지가 아니었다. 실크로드의 주요 경로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타브리즈와 사마르칸트를 거쳤다. 이라크는 주변화되었다. 바그다드의 인구는 몽골 침략 전 수십만 명에서 침략 후 몇만 명으로 줄었다. 도시가 이전 규모를 회복하는 데는 수세기가 걸렸다. 일부 학자들은 중동이 이 충격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슬람 세계의 경제적·인구학적 중심이 점차 서쪽(이집트, 북아프리카)과 동쪽(인도)으로 이동했다.
문화적 영향도 깊었다. 몽골 침략은 이슬람 지적 전통에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12세기까지 이슬람 문명은 자신감이 넘쳤다. 무슬림 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을 흡수하고 넘어서고 있었다. 과학, 수학, 의학이 번창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부터 보수주의가 강화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철학적 탐구가 신앙을 약화시켰고, 그것이 몽골 재앙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아부 하미드 알-가잘리의 보수적 신학이 더욱 영향력을 얻었다. 이성보다 전통, 혁신보다 모방이 강조되었다. 물론 이것은 단순화다.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학문을 생산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정치적으로 몽골 침략은 이슬람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환상을 깨뜨렸다. 바그다드 칼리프제는 이론적으로 모든 무슬림을 하나로 묶는 상징이었다. 그것이 사라지자, 각 지역은 자신의 길을 갔다.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이 등장했다. 이들 각각은 강력했지만, 범이슬람적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스만 술탄들이 후에 칼리프 칭호를 사용했지만, 이것은 고전적 칼리프제와는 다른 개념이었다. 그것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는 도구였지, 보편적 이슬람 공동체의 상징이 아니었다.
아바스 왕조의 멸망이 가진 역사적 의미는 여러 층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중세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구조가 가진 근본적 취약성을 드러냈다. 칼리프 제도는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력의 분리를 제도화했다. 초기에는 이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칼리프들이 실제 권력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세기부터 권력이 분산되면서 구조적 모순이 드러났다. 칼리프는 상징적 권위만 가졌고, 실제 권력은 술탄, 아미르, 맘루크들이 장악했다. 이러한 체제는 평화 시에는 작동할 수 있었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실존적 위협 앞에서는 무너졌다. 아무도 제국 전체를 방어할 책임을 지지 않았다.
둘째, 몽골 침략은 유라시아 대륙의 권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중세 초기에 이슬람 세계는 가장 발달된 문명이었다.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월했다. 유럽은 비교적 후진적이었고, 중국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몽골의 등장은 이 질서를 뒤집었다. 13세기 후반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연속된 육지 제국이었다. 그들은 태평양에서 지중해까지 지배했다. 이슬람 세계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권력 중심 중 하나가 되었다.
셋째, 이 사건은 역사 발전의 비선형성을 보여준다. 진보는 필연적이지 않다. 더 '문명화된' 사회가 반드시 '야만적인' 침략자를 물리치는 것은 아니다. 바그다드는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도시였다. 그곳에는 도서관, 병원, 학교, 천문대가 있었다. 시인, 철학자, 과학자들이 모였다. 반면 몽골은 유목민이었다. 그들은 문자도 없었고 영구적인 건축물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직력, 군사적 혁신, 전략적 유연성이 문화적 세련됨보다 전쟁에서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도덕적 진보나 문명의 우월성을 자동으로 보상하지 않는다. 때로는 잔인한 효율성이 승리한다.
넷째, 몽골 침략은 기술과 지식 이전의 역설적 채널이 되었다. 몽골 제국은 파괴적이었지만 동시에 유라시아 대륙을 연결했다. '팍스 몽골리카'(몽골의 평화) 시대에 상인, 선교사, 외교관, 학자들이 전례 없는 규모로 대륙을 횡단했다. 중국의 기술이 중동으로, 이슬람의 과학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화약, 인쇄술, 나침반의 서방 전파가 가속화되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은 이 시대를 상징한다. 역설적이게도 몽골의 정복이 후에 유럽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의 간접적 촉매가 되었다.
다섯째, 이 사건은 제국의 취약성과 문명의 회복력이라는 이중적 교훈을 준다. 아바스 왕조라는 정치적 실체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500년의 역사가 일주일 만에 끝났다. 그러나 이슬람 문명 자체는 살아남았다. 오히려 다양화되고 확장되었다. 14세기 이븐 바투타가 모로코에서 중국까지 여행했을 때, 그는 어디서나 이슬람 공동체를 발견했다. 모스크, 마드라사, 수피 수도원들이 번성하고 있었다. 티무르 제국,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이 웅장한 건축물과 문화적 성취를 이루었다. 정치적 중심은 파괴되었지만, 문화적·종교적 전통은 계속되었다.
여섯째, 바그다드 함락은 권력과 정당성의 복잡한 관계를 조명한다. 아바스 칼리프들은 실질적 권력이 거의 없었지만 500년간 존속했다. 이유는 그들이 정당성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몽골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졌지만 결국 피정복민의 종교와 문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순수한 힘만으로는 지속적인 통치가 불가능하다. 문화적 정당성 없이 제국은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은 현대 국제 관계에도 적용되는 원칙이다. '하드 파워'는 단기적 성과를 낼 수 있지만, '소프트 파워' 없이는 장기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없다.
일곱째, 이 사건은 역사적 트라우마가 집단 기억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바그다드의 파괴는 이슬람 세계의 집단 의식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오늘날까지도 아랍과 페르시아 문학에서 1258년은 재앙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된다. 이것은 9/11이나 홀로코스트가 현대 집단 기억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유사하다. 트라우마적 사건은 단순히 과거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정체성, 세계관, 정치적 태도를 형성한다. 이슬람 세계의 일부 보수주의와 외부 위협에 대한 경계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여덟째, 몽골 침략은 환경사적 의미도 가진다. 몽골의 정복 전쟁은 엄청난 인구 감소를 초래했다. 일부 추산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와 중동에서 수백만 명이 죽었다. 도시들이 파괴되고 농촌이 황폐화되었다. 관개 시스템의 붕괴는 사막화를 가속화했다. 이란의 일부 지역은 몽골 이전 인구 수준을 20세기까지 회복하지 못했다. 이것은 전쟁이 자연 환경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의 사례다. 인간 활동은 생태계를 돌이킬 수 없게 변화시킬 수 있다.
아홉째, 이 사건은 역사 서술의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그다드 함락의 이야기는 대부분 페르시아 역사가들의 기록에서 나온다. 주바이니, 라시드 알-딘, 바사프 같은 인물들은 모두 몽골 궁정에서 일했다. 그들의 기록은 상세하지만, 동시에 편향되어 있다. 그들은 몽골의 힘을 과장하여 저항의 무익함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사망자 수의 과장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아랍 역사가들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고 감정적이다. 중립적인 관찰자는 없었다. 모든 역사 서술은 특정 관점을 반영한다. 우리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열째, 바그다드 함락은 종교 간 관계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몽골군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 불교도, 샤머니스트가 포함되어 있었다. 훌라구의 아내 도쿠즈 카툰은 기독교인이었고, 그녀는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했다. 몽골 침략 중 바그다드의 기독교인들은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대우받았다. 이것은 일부 무슬림 작가들에게 기독교인들이 몽골과 협력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현실은 더 복잡했다. 몽골은 초기에는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다. 그들은 각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다. 기독교인을 우대한 것은 신학적 선호가 아니라 전략적 계산이었다. 중동의 기독교 공동체를 이용하여 무슬림 저항을 분열시키려 한 것이다.
열한째, 이 사건은 리더십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칭기즈 칸, 훌라구, 바이바르스 같은 인물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다. 반면 칼리프 알-무스타심의 우유부단함은 재앙을 초래했다. 만약 그가 조기에 단호하게 항복했다면, 바그다드는 덜 파괴되었을 수 있다. 또는 만약 그가 결연하게 방어를 준비했다면, 적어도 명예롭게 저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위기의 순간에 리더의 자질이 수백만 명의 운명을 결정한다.
열두째, 몽골 침략은 군사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몽골의 성공은 우수한 전술, 조직, 기술에 기반했다. 그들은 적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국의 공성술, 페르시아의 행정 기술, 이슬람의 과학을 채택했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상대적으로 정체되어 있었다. 군사 기술과 전술이 수세기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혁신의 부족이 패배의 한 원인이었다. 이것은 현대에도 적용된다. 기술과 전략의 정체는 쇠퇴로 이어진다.
열세째, 이 사건은 국제 체계의 무정부적 성격을 보여준다. 중세에는 국제법이나 국제 기구가 없었다. 각 국가는 자력으로 생존해야 했다. 동맹은 일시적이고 신뢰할 수 없었다. 바그다드는 다른 무슬림 국가들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각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이것은 국제 관계의 현실주의적 관점을 지지한다. 이념이나 종교적 연대보다 권력과 이익이 국가 행동을 결정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아인 잘루트에서 맘루크가 싸운 것은 이집트 방어라는 자국 이익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슬람 세계 전체를 구했다. 때로는 국가 이익과 집단 이익이 일치한다.
열네째, 바그다드 함락은 도시 생활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고대와 중세에 도시는 문명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에 매우 취약했다. 인구 밀집은 질병과 학살에 노출되었다. 식량 의존은 포위 전략에 약했다. 유목민은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한 번에 파괴될 수 없었다. 몽골이 정주 문명을 쉽게 정복한 이유 중 하나다. 그들은 기동성이 있었고, 적은 고정되어 있었다. 현대 도시도 마찬가지 취약성을 가진다. 핵무기나 생화학 공격에 매우 민감하다. 도시화의 이점은 명백하지만, 위험도 함께 증가한다.
열다섯째, 이 사건은 문화 유산 파괴의 비극을 보여준다. '지혜의 집'의 책들은 회복 불가능하게 사라졌다.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고대 세계의 잃어버린 지식, 독창적인 이슬람 사상, 번역된 그리스 철학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파괴와 비교된다. 인류의 집단 지식이 한순간에 소실되었다. 문화 유산은 재생 불가능하다. 한 번 파괴되면 영원히 사라진다. 이것이 현대 문화재 보호가 중요한 이유다. 전쟁 중에도 문화 유산은 보호되어야 한다. UNESCO 같은 국제 노력이 필요하다.
열여섯째, 몽골 침략은 역사적 연속성과 단절의 문제를 제기한다. 1258년은 명백한 단절이었다. 아바스 왕조가 끝났고, 바그다드가 파괴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연속성도 있었다. 이슬람 종교는 계속되었고, 아랍어는 여전히 사용되었으며, 많은 사회 구조가 유지되었다. 역사는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변형의 과정이다. 새로운 것은 항상 오래된 것의 요소를 포함한다. 몽골 일칸국도 페르시아 행정 전통을 채택했다. 그들은 정복자였지만 동시에 계승자이기도 했다.
열일곱째, 이 사건은 역사적 '만약'의 흥미로운 사례다. 만약 오고타이 칸이 1241년에 죽지 않았다면? 몽골은 유럽을 정복했을까? 만약 몽케 칸이 1259년에 죽지 않았다면? 훌라구는 이집트를 정복했을까? 만약 아인 잘루트에서 몽골이 승리했다면? 이슬람 세계는 완전히 몽골화되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들은 역사의 우연성을 상기시킨다. 역사는 필연적이지 않다. 작은 사건들이 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대륙의 운명을 바꾼다.
열여덟째, 바그다드 함락은 기억과 역사의 차이를 보여준다. 역사적 사실로서 바그다드는 1258년에 함락되었다. 그러나 집단 기억 속에서 이 사건은 신화적 차원을 획득했다. 학살 규모는 과장되었고, 파괴의 완전성은 극대화되었다. 티그리스 강이 붉은 피와 검은 먹물로 변했다는 이미지는 문학적 상징이다. 그러나 이 상징이 역사적 사실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상징을 기억하고, 그것이 그들의 세계관을 형성한다. 역사가는 사실을 재구성하려 하지만, 집단은 의미를 추구한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다.
열아홉째, 이 사건은 제국의 수명 주기를 보여준다. 아바스 왕조는 750년에 탄생하여 약 100년간 황금기를 누렸다. 그 후 약 200년간 쇠퇴했고, 마지막 200년은 명목상의 존재였다. 이것은 이븐 할둔의 역사 이론과 일치한다. 14세기 역사가 이븐 할둔은 왕조가 탄생, 성장, 쇠퇴, 몰락의 주기를 거친다고 주장했다. 초기 세대는 강한 '아사비야'(집단 연대)를 가진다. 그러나 번영이 오면 사치와 분열이 생긴다. 군사적 활력이 약화되고, 결국 새로운 세력에게 정복당한다. 이것은 비단 아바스 왕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로마, 한, 오스만 등 많은 제국이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스무째, 바그다드 함락은 역사적 정의의 문제를 제기한다. 무고한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 이것은 정의로운가? 피해자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 역사는 정의롭지 않다. 고통은 무작위로 분배된다. 선한 사람들이 죽고, 악한 사람들이 번성한다. 이것은 신정론(theodicy)의 문제다. 만약 신이 정의롭고 전능하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중세 무슬림 학자들은 이 질문과 씨름했다. 일부는 이것을 신의 섭리로, 다른 이들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결과로 해석했다. 현대적 관점에서 우리는 역사에 내재적 의미나 정의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역사는 그저 일어난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 노력할 뿐이다.
이 모든 층위의 의미를 종합하면, 바그다드 함락은 단순한 군사적 사건이 아니라 문명사적 전환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종말과 다른 시대의 시작을 표시했다. 중세 이슬람 세계의 통일된 칼리프제라는 이상은 끝났다. 대신 다양하고 경쟁적인 이슬람 국가들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바그다드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권력의 중심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다. 카이로, 이스탄불, 사마르칸트, 델리가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1258년은 중세 세계 질서의 재편을 나타낸다. 이슬람 세계는 더 이상 유일한 초강대국이 아니었다. 몽골 제국이 일시적으로 지배했고, 그 후 권력이 더욱 분산되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유럽의 부상에 기여했다. 15-16세기 오스만 제국이 강력했지만, 이슬람 세계는 더 이상 압도적 우위를 누리지 못했다. 대항해 시대와 과학 혁명을 통해 유럽이 점차 추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몽골 침략의 직접적 결과는 아니지만, 장기적 트렌드의 일부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슬람 문명의 회복력도 인정해야 한다. 바그다드의 파괴는 끝이 아니었다. 이슬람은 계속 확장되었다. 14-16세기 동안 이슬람은 동남아시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동유럽으로 퍼졌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 웅장한 건축물을 세웠다.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었다. 사파비는 이스파한을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다. 무굴은 타지마할을 건설했다. 이슬람 예술, 건축, 문학, 과학은 계속 발전했다. 정치적 중심의 파괴가 문명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21세기 관점에서 바그다드 함락을 돌아보면, 여러 현대적 공명을 발견한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후 바그다드 박물관과 도서관이 약탈당했을 때, 많은 이라크인들은 1258년을 떠올렸다. 역사적 트라우마가 재활성화되었다. ISIS가 고대 유적을 파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경험을 통해 재해석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기억이다.
또한 이 사건은 문명 간 충돌에 대한 성찰을 제공한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논제는 이슬람과 서양의 근본적 대립을 주장한다. 그러나 바그다드 함락은 충돌이 문명 간보다 문명 내에서도 일어남을 보여준다. 몽골은 이슬람이 아니었지만 기독교나 다른 특정 문명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유목 문화를 가졌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이슬람에 동화되었다. 문명의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유동적이다. 충돌보다는 교류와 혼종화가 더 일반적이다.
이 사건은 또한 역사적 결정론에 대한 경고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은 역사가 필연적인 단계를 거쳐 진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그다드 함락은 진보가 선형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문명은 발전할 수도 있지만 후퇴할 수도 있다. 지식은 축적될 수도 있지만 소실될 수도 있다. 역사에는 자동적인 진보 메커니즘이 없다. 인간의 노력과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그리고 때로는 운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은 역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지 못하면, 현재를 이해할 수 없다. 중동의 현재 복잡성은 부분적으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다. 왜 이슬람 세계의 일부가 서양에 대해 의심적인가? 왜 강력한 중앙 권위에 대한 향수가 있는가? 왜 외부 간섭에 민감한가?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적 맥락 없이 대답할 수 없다. 바그다드 함락 같은 사건들이 집단 심리를 형성했다. 역사가 현재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오늘날 바그다드를 방문하면, 몇 가지 몽골 시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은 후대의 것이다. 몽골의 파괴가 너무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그리스 강은 여전히 흐르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 유역에 산다. 도시는 여러 번 재건되었다. 오스만 시대, 영국 위임 통치 시대, 이라크 왕국 시대, 사담 후세인 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각 시대가 층층이 쌓여 있다.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변형되고 재해석되며 계속된다.
티그리스 강변에서 일어난 그 끔찍한 일주일은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무함마드의 계승자들이 통치하던 칼리프제의 시대가 끝났다. 바그다드가 세계의 지적·문화적 중심이던 시대가 끝났다. 이슬람 세계가 통일된 정치체를 꿈꿀 수 있던 시대가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했다. 다원적 이슬람 세계의 시작, 새로운 권력 중심들의 등장, 문화적 혼종성의 증대. 아바스 왕조의 불은 꺼졌지만, 이슬람 문명은 다른 형태로 계속되었다.
역사는 파괴와 재생의 끝없는 순환이다. 바그다드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도시들이 일어났다. 사마르칸트, 이스탄불, 카이로, 이스파한이 번성했다. 새로운 왕조들이 등장하여 자신만의 황금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사상가들이 나타나 철학, 신학, 과학을 발전시켰다. 이븐 할둔, 루미, 하페즈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몽골 이후 시대에 나타났다. 1258년의 비극은 끝이 아니라 변형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역사의 가장 깊은 교훈이 있다. 어떤 제국도 영원하지 않다. 가장 강력한 왕조도 결국 무너진다. 가장 웅장한 도시도 폐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문명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살아남는다. 인간의 창조성, 회복력, 적응 능력은 어떤 파괴보다 강하다. 바그다드는 함락했지만, 이슬람은 계속되었다. 아바스 왕조는 끝났지만, 이슬람 문명은 살아남았다.
이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현재의 위기가 아무리 심각해 보여도, 인류는 살아남고 적응하고 재건할 것이다. 개별 문명은 부침을 겪지만, 인류 문명 전체는 계속 진화한다. 각 시대는 이전 시대의 성취 위에 세워진다.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이 파괴되었지만, 그곳에서 번역된 지식의 일부는 살아남아 유럽 르네상스에 영감을 주었다. 몽골의 파괴는 끔찍했지만, 몽골 제국은 또한 동서 교류를 촉진했다. 역사는 복잡하고 역설적이다.
1258년 2월, 바그다드에서 불길이 치솟고 피가 흘렀다. 수백 년의 문명이 일주일 만에 무너졌다. 그러나 그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인간 정신은 소멸하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 재건하고,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역사를 쓴다. 바그다드는 여러 번 파괴되었고 여러 번 재건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도시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계속 살고, 꿈꾸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몽골 제국에 의한 아바스 왕조 멸망의 이야기다. 그것은 파괴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생존의 이야기다. 종말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시작의 이야기다. 절망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희망의 이야기다. 역사는 언제나 이중적이다. 우리는 과거의 비극에서 배우고, 동시에 과거의 회복력에서 영감을 받는다. 바그다드는 함락했지만, 그 정신은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