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6년 9월 20일, 볼가 강변의 몽골 진영 사라이에서 한 루시 공작이 처형당했다. 그의 죄목은 단 하나, 칭기즈 칸의 우상에 절하기를 거부한 것이었다. 체르니고프의 미하일 브세볼로도비치는 그렇게 죽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단순한 순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키예프 루시라는 문명이 몽골의 침략 앞에서 마지막으로 보여준 존엄의 표현이었고, 동시에 중세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복잡한 정치적 선택의 결과였다.
미하일은 1179년 또는 1185년경, 브세볼로드 올고비치 체르므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키예프 대공 스뱌토슬라브 3세였고, 어머니는 폴란드 대공 카지미에시 2세의 딸 아나스타샤였다. 루리크 왕조의 체르니고프 분파에 속한 그는 출생부터 권력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건강 문제로 얼룩져 있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몸이 매우 약했고, 할아버지는 손자를 치료하기 위해 여러 교회에 막대한 재산을 기부했다고 한다.
1186년, 기적 같은 치유가 일어났다. 페레야슬라블의 성 니키타 스틸리테스라는 기둥 수도자의 명성을 듣고 찾아간 미하일은 그로부터 나무 지팡이를 받았고, 즉시 병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이 경험은 그의 평생에 걸친 깊은 신앙심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후대 성인전에서 그를 "어린 시절부터 경건함과 온화함으로 알려진" 인물로 묘사하는 것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13세기 루시의 공작으로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심만이 아니었다.
1223년, 미하일의 삶에 첫 번째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해 5월, 칼카 강에서 루시 공작들과 폴로베츠 연합군이 몽골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그의 삼촌인 체르니고프의 므스티슬라프가 전사했고, 미하일은 체르니고프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당시 그는 이미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이제 막 정치 무대의 중심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칼카 강 전투는 몽골의 위협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주는 전조였지만, 당시 루시의 공작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몽골군은 승리 후 동쪽으로 물러갔고, 루시는 다시 내분에 빠져들었다.
미하일은 곧 루시 정치의 복잡한 권력 게임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1225년, 그는 노브고로드 시민들의 초청을 받아 그들의 공작이 되었다. 이것은 블라디미르-수즈달의 유리 브세볼로도비치가 자신의 매형인 미하일을 타협 후보로 제안한 결과였다. 노브고로드는 루시에서 가장 독특한 도시국가였다. 그곳에서 공작은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 의회인 베체의 선택을 받는 일종의 고용된 지도자였다. 미하일은 이 특수한 정치 환경에 잘 적응했다. 그는 상인들로부터 몰수된 물건들을 돌려주고, 노브고로드인들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며, 귀족들에게 더 큰 정치적 자유를 허용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노브고로드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곧 고향 체르니고프로 돌아갔는데, 노브고로드인들의 잔류 요청에 대해 그는 독특한 답변을 내놓았다. 체르니고프와 노브고로드는 "친족의 땅"이 되어야 하며, 그들의 주민들은 형제처럼 지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는 두 도시 사이의 우호적 유대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미하일은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대하면서도 지역 간 협력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체르니고프의 도시들은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렸다. 이는 그가 무역 진흥을 우선시했음을 시사한다.
1235년, 미하일은 마침내 키예프 대공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명예로운 칭호가 아니라 붕괴 직전의 제국이었다. 키예프 루시는 이미 오래전부터 분열되어 있었다. 1054년 현명한 야로슬라브의 죽음 이후, 권력은 점점 더 작은 공국들로 분산되었고, 공작들 사이의 끊임없는 내전은 국가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다. 비잔틴 제국 역시 쇠퇴하고 있었고, 이는 루시의 중요한 동맹이자 무역 파트너의 상실을 의미했다. 미하일이 키예프를 차지한 것은 이런 혼란 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1237년, 폭풍이 왔다.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 칸이 이끄는 약 15만 명의 몽골군이 볼가 강을 건넜다. 그들은 먼저 불가르족과 킵차크족, 알란족의 저항을 1년에 걸쳐 분쇄했다. 1237년 11월, 바투는 블라디미르의 유리 2세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을 요구했다. 한 달 후, 몽골군은 랴잔을 포위했다. 6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도시는 완전히 전멸했고,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다. 연대기 작가는 "우리의 죄 때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민족이 도착했다.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종교를 믿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신다"고 기록했다.
1238년 2월, 블라디미르가 함락되었다. 몽골군은 군대를 여러 부대로 나누어 로스토프, 우글리치, 야로슬라블, 코스트로마, 드미트로프, 트베리, 토르조크 등 14개 도시를 약탈했다. 가장 완강하게 저항한 곳은 코젤스크라는 작은 도시였다. 티투스의 아들인 소년 공작 바실리와 주민들은 7주 동안 몽골군에 맞서 싸우며 4천 명을 죽였다. 전설에 따르면 몽골군이 다가오자 키테시라는 도시 전체가 주민들과 함께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고, 오늘날까지도 그곳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다행히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는 파괴를 면했다.
1239년 겨울, 바투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크림반도를 황폐화시키고 모르도비아를 평정했다. 1239년 겨울, 체르니고프와 페레야슬라블이 함락되었다. 그리고 1240년 가을, 몽골군은 마침내 키예프로 진격했다. 미하일은 그해 초에 이미 몽골 사절들을 처형했다. 이것은 명백한 도전이었고, 그 대가는 피할 수 없었다. 바투가 키예프 성문 앞에 진을 쳤을 때, 연대기 작가는 이렇게 썼다. "수레가 삐걱거리는 소리, 무수히 많은 낙타의 울음소리, 말 떼의 울부짖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루시의 땅은 적으로 가득 찼다."
미하일은 키예프가 포위되기 전에 도망쳤다. 그는 헝가리로 향했다. 그의 목표는 헝가리 왕 벨라 4세를 설득하여 몽골에 맞서는 연합군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는 폴란드와 신성로마제국까지 접촉하며 기독교 유럽의 연합된 저항을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전쟁 중이었고, 독일인들은 몽골 침공을 이용해 루시를 공격하고 있었다. 1240년 12월, 몽골군은 9일간의 포위 끝에 키예프를 함락시켰다. 5만 명의 주민 중 약 2천 명만이 살아남았다. 도시의 40개 주요 건물 중 6개만이 남았다.
1246년, 몽골 사절들이 루시 전역에 나타났다. 그들은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왔다. 각 공작들은 황금 호드의 수도 사라이로 가서 바투 칸에게 복종하고, 자신의 영지를 통치할 수 있는 야를릭, 즉 특허장을 받아야 했다. 미하일은 난처한 선택에 직면했다. 루시의 비참한 상황을 보면서 그는 칸에게 복종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경건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이교도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진영에 오는 모든 외국인에게 정화 의식을 요구했다. 방문객들은 두 개의 불 사이를 지나가야 했고, 칭기즈 칸의 우상에 절해야 했다. 이것은 고대 투르크-몽골의 전통이었다. 미하일은 영적 아버지인 요한 주교로부터 축복을 받고 호드로 향했다. 그는 바투에게 정치적 경의를 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종교적 의식은 기독교 신앙의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진정한 신앙 고백자가 될 각오를 하고 떠났다.
미하일이 사라이에 도착했을 때, 그는 불 사이를 지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후 그들은 그에게 칭기즈 칸의 우상에 절하라고 말했다. 미하일은 답했다. "나는 기꺼이 바투와 그의 신하들에게 절하겠지만, 죽은 자의 형상에는 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에게 부적절한 일입니다." 그의 아들 야로슬라브를 통해 반복적으로 절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그는 거부했다. 바투는 명령했다. 만약 미하일이 절하지 않는다면 죽이라고.
동행했던 보야르 표도르도 그의 주인을 따랐다. 미하일은 다양한 고문을 받았다. 바투의 신하 엘데가는 공작을 땅에 눕히고 그의 가슴을 부츠로 짓밟았다. 미하일은 "잘못된 일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표도르도 같은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개들의 먹이가 되도록 버려졌다. 그러나 연대기에 따르면, 신의 은총의 표시로 며칠 동안 개들은 시신을 건드리지 않았고, 불기둥이 그 위를 떠다녔다고 한다. 충실한 기독교인들이 몰래 그들을 경건하게 매장할 수 있었다.
미하일의 죽음은 루시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한 공작의 순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치적 항의의 행위였다. 미하일이 거부한 것은 종교적 의식일 뿐만 아니라, 몽골 제국의 우주론적 질서 속에서 루시의 완전한 종속을 상징하는 행위였다. 칭기즈 칸은 신성한 존재로 숭배되었고, 그에게 절한다는 것은 그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미하일은 바투 개인에게 정치적으로 복종할 용의가 있었지만, 몽골 제국의 종교적-정치적 질서에 완전히 편입되는 것은 거부했던 것이다.
그의 순교는 몽골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표도르의 순교는 처형자들조차 감동시켰다. 러시아 민족이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확신을 얻은 타타르 칸들은, 이전처럼 러시아인들에게 이교 의식을 강요하는 것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하일의 죽음은 실제로 다른 루시 공작들에게 더 나은 조건을 확보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의 선택이 얼마나 현명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른 두 명의 영향력 있는 루시 공작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블라디미르의 야로슬라브 브세볼로도비치는 몽골로 가서 9월 30일 독살되었다고 전해진다. 갈리치의 다닐로 로마노비치는 바투를 직접 방문하여 칸에 대한 복종을 인정했다. 다닐로는 살아남아 자신의 공국을 보존했고, 나중에 교황으로부터 왕관까지 받았다. 미하일의 손자인 보리스와 글렙 바실코비치도 결국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살아남았다.
미하일의 성인전은 그의 죽음 직후에 작성되기 시작했다. 가장 초기의 형태는 1263년경 로스토프에서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짧은 서문 형식의 성인전은 이미 추상적인 신앙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호드에서 종교적 신념 때문에 죽은 러시아 공작의 이야기로 제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항의였다. 후대의 확장된 판본들, 특히 13세기 말이나 14세기 초에 안드레이 신부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판본은 더 많은 극적이고 심리적인 세부 사항을 추가하여 경건한 묘사를 강화했다.
성인전은 정복자들의 잔인함과 조국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친 러시아 공작의 단호한 자부심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발전했다. 이런 이야기는 큰 애국적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몽골 침략자들과 타협하지 말 것을 촉구했고, 적과 타협을 거부한 사람들을 성인의 반열로 올렸다. 미하일 이후에도 러시아 민족과 러시아 정교회의 몽골 멍에에 대한 투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블라디미르 대공 표도르는 몽골인들에게 독살당했다. 랴잔의 성 로만(1270년 사망), 트베리의 성 미하일(1318년 사망)과 그의 아들 드미트리(1325년 사망), 알렉산드르(1339년 사망)도 순교했다.
이들 모두는 호드의 러시아 원순교자인 체르니고프의 성 미하일의 모범과 성스러운 기도로부터 용기를 얻었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오래 살아남아 그의 숭배를 장려했다. 그의 딸 마리아와 그녀의 아들들인 보리스와 글렙 바실코비치는 9월 20일 체르니고프 기적행자들의 축일을 제정하고 그들을 기리는 교회를 지었다. 그의 또 다른 딸 페오둘라는 수녀 에프로시네가 되어 그의 숭배를 촉진했다. 17세기 기록에 따르면 수즈달에는 그들을 위한 목조 예배당이 있었다고 한다.
1547년, 그의 숭배는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1572년 2월 14일, 이반 뇌제의 소원과 메트로폴리탄 안토니의 축복으로 성 순교자들의 유해가 체르니고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져 그들에게 헌정된 성전에 안치되었다. 1770년에 유해는 수태고지 대성당으로, 1774년 11월 21일에는 모스크바 크렘린의 대천사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1812년 나폴레옹 침공 때 은 관이 도난당했고, 후에 청동 관으로 교체되었다. 1987년에는 툴라 성인들의 모임에 포함되었다.
미하일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영웅인가, 아니면 순진한 순교자인가? 그의 죽음은 루시를 구했는가, 아니면 불필요한 희생이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간단하지 않다. 미하일은 자신이 직면한 선택의 복잡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몽골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했고, 정치적 복종의 필요성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어떤 타협에는 한계가 있다고 믿었다.
13세기 중반의 루시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고, 인구는 크게 줄었으며, 경제는 붕괴했다. 몽골 침공은 약 5%의 인구, 즉 7-8백만 명 중 수십만 명을 죽였다. 도시 인구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키예프는 5만 명에서 2천 명으로 줄었다. 농업은 파괴되었고, 무역로는 끊겼다. 생존자들은 몽골 기병대의 공격에 덜 취약한 북쪽 숲 지대로 이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용적인 선택은 명확해 보였다.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가능한 한 좋은 조건을 확보하며, 재건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다른 것을 보았다. 그는 단순한 정치적 복종과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의 포기 사이의 차이를 구분했다. 바투에게 절하는 것은 정치적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우상에 절하는 것은 몽골 제국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칸을 하늘의 명령을 받은 우주의 통치자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하일에게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하일의 선택은 또한 매우 의식적인 정치적 성명이기도 했다. 1245년, 리옹 공의회에서 그의 협력자인 메트로폴리탄 페트로는 미하일의 사절로서 이교도 호드에 맞서는 십자군을 요청했다. 가톨릭 유럽은 기독교의 이익을 배신했다. 교황은 독일 황제와 전쟁 중이었고, 독일인들은 몽골 침공을 이용해 루시를 공격했다. 이런 상황은 기독교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이교도 호드 한가운데서 정교회 공작 성 미하일의 순교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했다.
미하일이 죽은 지 6년 후인 1246년 2월, 프란치스코회 수사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가 키예프를 지나갔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사절로 몽골 제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가 본 키예프는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그 땅을 여행할 때, 우리는 땅에 흩어진 무수히 많은 해골과 죽은 자들의 뼈를 발견했다"고 그는 기록했다. 카르피네 자신도 바투를 만나기 위해 두 불 사이를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수사였지, 공작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었다.
미하일의 죽음 이후, 몽골의 통치는 역설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가져왔다. 황금 호드는 직접 통치보다는 원거리 지배를 선호했다. 루시 공작들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몽골 칸에게 종속되었다. 약 1259년부터 공물은 조직적인 인구 조사를 통해 징수되었고, 지역 루시 공작들이 정기적으로 수집하여 사라이의 몽골 지도자들에게 가져갔다. 이 체제는 1480년까지 지속되었고, 현대 러시아의 형성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골 지배의 유산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있다. 일부 러시아 역사가들은 침공을 러시아 역사상 거대한 재앙으로 간주하며, 그것이 러시아를 유럽으로부터 고립시키고, 고대 루시 민족을 세 구성요소로 분열시켰으며, "동방 전제주의"의 개념을 러시아에 도입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역사가들은 그것을 긍정적인 발전으로 보며, 러시아를 로마 가톨릭 교회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면역시키고, 정교 신앙을 핵심으로 하는 고유한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경제적 체제를 확립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본다.
유라시아 학파는 몽골 통치가 제정 러시아 국가의 기초를 강화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정교, 정치권력의 중앙집중화, 전제주의, 농노제가 그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몽골의 억압을 "동서 격차"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한다. 즉, 서유럽에 비해 러시아에서 주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개혁과 과학적 혁신의 도입이 약 200년 지연된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몽골 파괴가 없었다면 모스크바, 그리고 이후의 러시아 제국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키예프가 황폐화되면서 권력의 중심은 북쪽으로 이동했다. 블라디미르, 그리고 나중에는 모스크바가 부상했다. 동쪽으로부터의 무역로가 루시 땅을 통과하면서 그곳은 두 세계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몽골의 영향은 파괴적이었지만, 현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부상에 중대한 장기적 영향을 미쳤다.
이런 맥락에서 미하일의 선택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의 순교는 실용적 관점에서 보면 불필요해 보일 수 있다. 그가 살았다면 체르니고프를 더 잘 재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다른 것을 보존했다. 그것은 루시가 단순히 몽골 제국의 지방이 아니라, 자신만의 정체성과 가치를 가진 기독교 문명이라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모든 정치적 복종에도 한계가 있으며, 어떤 것들은 타협할 수 없다는 원칙이었다.
미하일의 유산은 러시아 정교회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호드의 첫 번째 러시아 순교자가 되었고, 그의 모범은 이후 수세기 동안 러시아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4세기와 15세기의 상부 오카 공국들은 모두 미하일 브세볼로도비치의 후손인 "상부 공작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의 혈통은 계속되었고, 그의 기억은 살아남았다.
1380년 쿨리코보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몽골을 처음으로 격퇴했을 때, 그들은 미하일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완전한 독립은 1480년 우그라 강의 대치에서야 이루어졌지만, 그 길고 고통스러운 투쟁 내내 미하일의 이야기는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외세의 압력 앞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었다.
오늘날 미하일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는 복잡한 인물이다. 그는 성인이자 정치가였고, 신비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타협의 필요성을 이해했지만 타협의 한계도 알았다. 그의 삶은 13세기 루시의 모든 모순을 담고 있다. 분열된 공국들, 끊임없는 내전,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유지되려 애쓰는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
미하일의 이야기는 또한 보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개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생존이 최우선인가, 아니면 어떤 원칙들은 목숨보다 더 중요한가? 실용적 타협과 근본적 배신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 질문들은 미하일의 시대만큼이나 오늘날에도 관련이 있다.
미하일은 자신의 선택이 루시를 구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는 환상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것들은 군사력이나 정치적 계산으로 측정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인간의 존엄성, 신앙의 진실성, 정체성의 보존 - 이것들은 때로 가장 비실용적인 순간에 가장 중요해진다. 미하일은 루시를 몽골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루시가 무엇을 위해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사라이의 먼지 속에서 죽어가던 그 순간, 미하일은 키예프 루시의 마지막 숨결이자 러시아 정교회 저항의 첫 번째 외침이었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것은 240년의 몽골 지배 동안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도록 도와준 기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가 왔을 때, 그들은 미하일이 지켰던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정치가도 성인도 완벽하지 않았던 한 인간을,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옳은 선택을 한 사람을. 체르니고프의 미하일 브세볼로도비치, 키예프 대공, 호드의 순교자, 러시아의 성인. 그는 제국들이 무너지는 시대에 살았지만, 그가 지킨 것은 제국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어떤 강요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을 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