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충격 이후-유럽의 재편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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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1년 4월 9일 새벽, 레그니차(Legnica) 평원에 거대한 연기 기둥이 피어올랐다. 폴란드와 독일 기사단의 연합군이 바투 칸(Batu Khan)의 서정군에게 궤멸되던 그날, 살아남은 자들은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몽골 병사들은 쓰러진 적군의 귀를 잘라 자루에 담아 세었고, 그 수가 아홉 자루에 달했다고 한다. 실레시아(Silesia)의 공작 하인리히 2세—경건공(敬虔公)이라 불리던 바로 그 인물—의 목은 창끝에 꽂혀 성벽 앞에서 흔들렸다. 이틀 후인 4월 11일, 헝가리 왕 벨러 4세(Béla IV)의 군대는 사죠강(Sajó) 유역 모히(Mohi) 평원에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수부타이(Subutai) 장군이 지휘한 몽골군은 야간에 강을 건너 헝가리 진영을 남북에서 동시에 포위했다. 벨러 왕은 가까스로 탈출했지만 그가 두고 온 군대의 7만 명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 두 전투 사이의 이틀이라는 시간 간격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수베이의 전략적 천재성은 서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두 전선을 거의 동시에 타격함으로써 유럽 측의 상호 구원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 데 있었다. 이후 몽골군은 모라비아를 거쳐 아드리아해까지 전선을 확장했고, 스플리트(Split)와 트로기르(Trogir) 앞바다까지 기병이 출몰했다. 유럽 문명의 심장부로 통하는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런데 1242년 봄, 몽골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동쪽으로 사라졌다. 유럽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다—혹은 그들 자신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몽골의 철수가 유럽에 남긴 것은 안도의 한숨만이 아니었다. 충격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쳐 유럽의 정치 구조, 경제 회로, 사회 질서, 그리고 인간의 심리 깊숙이 파고들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이 그의 저작 『몽골인(The Mongols)』에서 지적했듯, 몽골은 유럽을 정복하지 않았지만 유럽을 근본적으로 변형시켰다. 어쩌면 정복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직접 지배는 제도적 저항을 낳지만, 간접적 충격은 사회의 내부 구조를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바꾸어 놓는다. 그 변형의 흔적을 추적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것이 아니라 현대 유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투 칸의 군대가 돌연 동쪽으로 물러선 이유에 대해 학계는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가장 오래된 해석은 정치적 공백론이다. 1241년 12월 11일 오고타이 칸(Ögedei Khan)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제국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쿠릴타이(Khuriltai)에 참석해야 했던 바투는 서방 원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바투 자신이 쿠릴타이 참석에 실제로 적극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이미 오고타이 가문과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고, 이후로도 카라코룸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단지 대칸의 죽음이 그를 유럽 정복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들었다는 설명은 너무 단순하다.


최근의 고기후학(paleoclimatology) 연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설명을 제시한다. 2016년 과학 저널 『사이언티픽 리포츠(Scientific Reports)』에 발표된 니콜라 디 코스모(Nicola Di Cosmo)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는 나이테 데이터와 꽃가루 분석, 역사 기록을 교차 검토하여 1242년 봄 카르파티아 분지의 기후 조건을 재구성했다.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그해 봄, 해당 지역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강수량이 기록되었고, 평소 건조한 초원 지대가 거대한 늪지로 변해 있었다. 몽골군의 전쟁 기계를 움직이는 핵심 자원은 다름 아닌 말이었다. 병사 한 명당 평균 세다섯 필의 말을 이끌고 이동하는 몽골군은 대규모 방목지와 건조한 지형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진창으로 변한 카르파티아 평원은 몽골 기병대의 기동력을 현저히 제약했을 것이다. 이 연구는 몽골의 철수가 정치적 결정인 동시에 환경적 강제의 산물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요인을 덧붙여야 한다. 유럽의 저항이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올로무크(Olomouc) 요새에서 야로슬라프 데 스테른베르크(Jaroslav of Sternberg)가 이끈 수비대는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고, 아드리아해 연안의 트로기르는 험준한 지형 덕에 몽골 기병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석조 성곽들은 예상보다 강한 저항을 제공했다. 헝가리의 임시 요새화 거점들도 몽골군에게 적지 않은 출혈을 강요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몽골의 철수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 기후적 제약, 그리고 예상보다 끈질긴 저항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때, 이미 수천 킬로미터를 원정한 군대가 굳이 더 깊숙이 전진할 이유는 줄어든다. 몽골의 공포가 신의 섭리인지, 기후의 우연인지, 아니면 복합적 계산의 산물인지는 여전히 열린 질문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유럽이 그 경험에서 배운 것—그리고 배우지 못한 것—은 이후 역사의 궤적을 결정지었다.


가장 직접적인 충격은 인구와 지리의 황폐화였다. 티모시 메이(Timothy May)가 그의 저작 『몽골의 정복(The Mongol Conquests in World History)』에서 집계한 바에 따르면,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일대에서 전쟁과 기근, 역병으로 사망한 인구는 수십만에서 많게는 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헝가리 단독으로도 전체 인구의 15~25퍼센트가 몽골 침공의 직접적 여파로 사라졌다는 추정이 있다. 이 수치는 그 자체로도 충격적이지만, 피해의 분포가 훨씬 더 불균등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몽골군의 주요 진격로에 위치한 평야 지대와 개방 도시들은 철저히 유린된 반면, 산악 지역과 견고한 석조 성곽을 갖춘 요새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온전히 살아남았다. 이 불균등한 생존이 이후의 정착 패턴과 인구 구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헝가리의 정치적 변화는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례를 제공한다. 침공 이전의 벨러 4세는 만만치 않은 군주였다. 즉위 초반 그는 귀족들이 왕실로부터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몰수하고, 고문단에서 귀족 대신 외국인 학자와 성직자를 등용하며 왕권 강화에 나섰다. 마자르 귀족들은 이 왕을 증오했다. 그런데 1241년 몽골이 침입했을 때 왕은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고, 귀족들은 그 위기를 자신들의 지위를 회복할 기회로 삼았다. 모히 전투의 패배 이후 벨러는 달마티아 해안까지 도망치는 굴욕을 겪었다. 왕국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그는 귀족들에게 광범위한 토지와 특권을 양도해야 했고, 이는 헝가리 봉건제의 구조적 분권화를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가속시켰다. 역설적이게도, 몽골의 침공은 헝가리를 거의 소멸시킬 뻔했지만, 동시에 왕권을 제한하고 귀족의 힘을 전례 없이 강화하는 헌정적 변화를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 1222년의 황금 칙서(Aranybulla)로 시작된 헝가리 귀족 권리 확장의 흐름은 몽골 침공 이후 더욱 거세졌다.


재건 과정에서 벨러는 방어 인프라 구축에 열을 올렸다. 그는 귀족들과 교회에 광범위한 토지를 하사하는 대신 석조 성채를 의무적으로 건설하도록 규정했다. 침공 이전 헝가리의 석조 성채 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벨러 치세가 끝날 무렵에는 수십 개의 성채가 전국에 분산되어 있었다. 역사가들은 벨러 4세를 가리켜 '헝가리의 재건자(second founder of Hungary)'라 부르는데, 이 칭호는 파괴의 역설적 결과물이다. 몽골 없이는 이 재건도 없었다.


폴란드의 상황은 헝가리와는 달리 분열의 혼돈 속에서 독특한 적응의 경로를 걸었다. 당시 폴란드는 피아스트(Piast) 왕조의 공국들로 분열되어 있었고, 몽골의 침입에 통일된 대응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레그니차의 하인리히 2세가 이끈 연합군은 각 공국이 모을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이었지만, 분열된 정치 구조 아래서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분열이 역설적으로 폴란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각 공국들은 독자적인 생존 전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연성을 발휘했다. 크라쿠프(Kraków)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몽골의 침입으로 파괴된 이후 독일인 정착민—이른바 '오스트지들룽(Ostsiedlung)', 즉 동방 식민화 운동의 일환—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인구를 보충하고 도시를 재건했다. 이 과정에서 도시들은 마그데부르크(Magdeburg) 법 혹은 뤼베크(Lübeck) 법에 기반한 자치 헌장을 부여받았고, 이것은 폴란드 도시 문화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재앙은 동시에 재건의 계기가 되었고, 침공 이후의 폴란드 도시들은 이전보다 오히려 더 조직적이고 방어적인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중세 유럽의 군사적 학습 능력—혹은 그 뚜렷한 한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레그니차와 모히 전투는 당시 유럽 군사 전통의 근본적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몽골군의 전술 체계는 유럽인에게 완전히 낯선 것이었다. 그들은 거짓 후퇴(feigned retreat)를 통해 적의 대형을 무너뜨린 뒤, 사방으로 포위하여 섬멸하는 '망구다이(mangudai)' 전술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경기병과 중기병을 유기적으로 운용하며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략했고, 중국과 페르시아에서 흡수한 공성 기술과 화약 무기를 유럽의 방어선을 허무는 데 적극 활용했다. 무엇보다 몽골군은 이미 수십 년에 걸친 원정으로 다져진 전투 경험과 실용적 병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레그니차에서 하인리히 2세의 기사단이 패배한 과정은 이 전술의 효력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몽골 경기병이 후퇴하는 척 돌아서자, 유럽 기사들은 승리를 확신하며 추격에 나섰다. 그 순간이 함정이었다. 기사단의 밀집 대형은 순식간에 분산되었고, 그 틈을 파고든 몽골 중기병이 포위를 완성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기동력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였고, 이미 달아나기에도 늦어 있었다.


그렇다면 유럽은 이 처참한 패배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솔직하게 답하자면, 전술적 차원에서의 학습은 놀라울 만큼 제한적이었다. 기사 중심의 중장갑 기병 전술은 레그니차 이후에도 수세기 동안 유럽 전장의 주류를 이루었다. 크레시(Crécy, 1346년)와 아쟁쿠르(Agincourt, 1415년)에서 프랑스 기사단이 영국 장궁병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무너지는 광경은, 유럽 귀족 계층이 새로운 전술 환경에 얼마나 느리게 적응했는지를 보여주는 연장선에 있다.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가 그의 불후의 저작 『봉건 사회(La Société féodale)』에서 분석했듯, 기사도 이념은 단순한 전술 체계가 아니라 중세 귀족 계층의 정체성과 존재 방식 그 자체였다.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군사적 개혁이 아니라 사회적 혁명을 의미했고, 그런 혁명은 결코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방어 공학의 영역에서만큼은 몽골의 충격이 분명한 학습을 이끌어냈다. 동유럽 전역에 걸쳐 목조 요새가 석조 성채로 빠르게 교체되기 시작했다. 체코의 왕 오타카르 2세(Otakar II)는 침공 이후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 일대에 석조 성채 건설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었다. 몽골의 공포가 돌과 석회 속에 새겨진 건축적 기억이었으며, 이 기억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럽 방어 건축의 방향을 결정했다.


공포는 때로 호기심을 낳는다. 몽골 침공이 남긴 충격이 아직 채 가시기도 전인 1245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 IV)는 리옹 공의회(Council of Lyon)를 소집하여 몽골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그리고 같은 해 두 갈래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 중 하나를 이끈 것이 예순 중반의 노(老) 프란체스코회 수사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Giovanni da Pian del Carpine)였다. 뚱뚱하고 노쇠한 이 수사는 폴란드를 거쳐 킵차크 초원을 가로질러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Karakorum)까지 1만 5천 킬로미터가 넘는 여정을 불과 18개월 만에 완주했다. 그가 1247년 돌아와 집필한 『몽골인의 역사(Historia Mongalorum)』는 몽골 제국의 내부 구조, 행정 체계, 군사 전술, 풍습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유럽 문헌 중 하나다. 그 정보의 정확성은 현대 학자들이 검토한 결과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얼마 후인 1253년에는 루브루크의 빌헬름(William of Rubruck)이 프랑스 왕 루이 9세(Louis IX)의 파견으로 같은 여정에 나섰다. 그가 남긴 여행기 『동방 여행기(Itinerarium)』는 카르피네의 보고서보다 더욱 상세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빌헬름은 카라코룸의 국제적 성격에 경탄했다. 그곳에는 중국인,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심지어 파리 출신 금세공사 기욤 부세(Guillaume Boucher)까지 있었다. 몽골 제국은 단순한 정복 국가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다양한 문명이 교차하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크리스토퍼 앳우드(Christopher Atwood)가 그의 백과사전적 저작에서 강조하듯, 이 여행들은 유럽 지식인들에게 아시아의 존재를 추상적 공포의 대상이 아닌 구체적이고 연구 가능한 실체로 인식하게 만든 인식론적 전환점이었다. 중세 유럽인의 세계관은 이 탐험 여행들을 통해 처음으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지리'를 향해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 외교적 접촉들은 또한 중세 유럽의 종말론적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켰다. 처음에 많은 서유럽 연대기 작가들은 몽골인을 성경의 '곡과 마곡(Gog and Magog)'—종말 직전 세상에 쏟아져 나올 야만의 무리—과 동일시했다. 영국 수도사 매튜 패리스(Matthew Paris)가 그의 『대연대기(Chronica Majora)』에 기록한 몽골인의 묘사는 공포와 경이가 뒤섞인 중세인의 상상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는 몽골인들이 인육을 먹고, 죽은 자의 피를 마시며, 마치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과 같다고 썼다. 그러나 카르피네와 빌헬름이 실제로 목격하고 돌아온 것은 그런 괴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난 것은 고도로 조직된 제국, 종교적 관용을 실천하는 통치자들, 그리고 복잡한 외교 언어를 구사하는 관료들이었다. 이 현실과 상상의 간극이 유럽 지식인들의 타자 인식을 근본적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몽골이 구축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는 유럽에 가장 복잡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 유산이다. 태평양에서 흑해까지 뻗은 이 거대한 안전망 아래서 유라시아 대륙의 교역로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연결성을 확보했다. 잠(yam)이라 불리는 역참 시스템—수백 킬로미터 간격으로 설치된 말과 숙박 시설을 갖춘 중계소—은 상인, 외교관, 정보가 대륙을 가로지르는 속도를 혁명적으로 높였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여행(1271~1295년)이 가능했던 것은 이 인프라 덕분이었다. 그의 여행기 『동방견문록(Il Milione)』은 유럽인들에게 중국의 도자기, 인도의 향신료, 페르시아의 비단에 대한 구체적이고 탐욕스러운 상상력을 심어주었다. 이 상상력이 이후 대항해 시대의 심리적 원동력 중 하나가 된다는 사실은 역사의 긴 인과관계를 보여준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의 상인들은 팍스 몽골리카가 열어준 교역로를 발 빠르게 장악했다. 크림반도의 카파(Kaffa)와 타나(Tana), 흑해 연안의 항구들은 이 상인들이 유라시아 교역망에 접속하는 관문이 되었다. 중국 비단과 도자기, 인도 향신료, 중앙아시아 보석이 이 경로를 통해 서방으로 흘러들었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금융 기관—피렌체의 바르디(Bardi)와 페루치(Peruzzi) 가문의 은행들—은 이 교역에서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이윤을 자본화하는 메커니즘을 발전시켰다. 재닛 아부-루고드(Janet Abu-Lughod)가 그의 기념비적 저작 『유럽 패권 이전(Before European Hegemony)』에서 분석했듯, 13~14세기 유라시아의 세계 체제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누린 번영은 몽골이 만들어준 구조적 조건 위에서 성장한 것이었다. 유럽의 상업 자본주의는 몽골의 지정학적 선물 위에서 발아했다.


그러나 이 같은 연결성이 얼마나 위험한 양날의 검인지는 머지않아 드러났다. 동일한 교역로, 동일한 상인, 동일한 역참 시스템이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을 유럽의 심장부로 실어 날랐다.


흑사병(Black Death)은 몽골 침공보다 한 세기 뒤에 유럽을 강타했지만, 그 연결고리를 추적하면 반드시 몽골 세계와 만나게 된다. 2022년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된 마리아 스팔로(Maria Spyrou)와 그의 동료들의 연구는 이 연결성을 유전자 수준에서 확인했다. 연구팀은 키르기스스탄 천산(天山) 산맥 기슭의 이식쿨(Issyk-Kul) 호수 인근 중세 묘지에서 발굴된 유골을 분석했다. 1338~1339년에 집중적으로 매장된 이 무덤들의 비문에는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유골에서 추출한 고대 DNA를 분석한 결과, 이 묘지에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의 유전자가 검출되었으며, 그 계통수는 이후 유럽 전역을 휩쓴 14세기 흑사병 균주의 직계 선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흑사병은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부, 몽골의 교역로가 교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원했다.


병원체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이동한 경로는 몽골이 구축한 교역 네트워크를 그대로 따른다. 페스트균을 옮기는 쥐와 벼룩은 상인들의 짐보따리와 수레에 실려 역참에서 역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1347년,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제노바 상인들의 식민지 카파(Kaffa)를 포위했을 때 역사적으로 가장 기이한 전쟁 범죄가 발생했다. 역병으로 죽은 자신들의 병사 시신을 투석기로 성벽 안에 던져 넣은 것이다. 이탈리아 법학자 가브리엘레 데 무시(Gabriele de' Mussi)의 기록에 의하면, 시신이 성 안으로 날아들면서 악취와 함께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고, 공포에 질린 제노바 상인들은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 배들이 1347년 10월 시칠리아 메시나(Messina)에 도착했을 때, 항구 사람들은 선원 대부분이 죽거나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유럽 흑사병의 시작이었다.


1347년부터 1353년 사이,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최소 3분의 1에서 절반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윌리엄 맥닐(William McNeill)이 그의 선구적 저작 『역병과 민족(Plagues and Peoples)』에서 분석했듯, 이 규모의 인구 감소는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플로렌스는 1338년 약 1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이탈리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지만, 1351년에는 5만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영국 동부의 일부 마을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도 그 터는 '유령 마을(deserted medieval villages)'로 남아 있다. 성직자들은 죽어가는 환자의 종부성사를 집전하러 갔다가 자신도 죽었다. 부모는 자식을 버리고 도망쳤고, 보카치오(Boccaccio)는 『데카메론(Decameron)』의 서문에서 이 시대의 도덕적 붕괴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것은 단순한 역병이 아니라 중세 문명의 심리적, 도덕적 기반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다.


흑사병이 몽골 침공의 직접적 결과라고 단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구축한 유라시아 연결성이 없었다면, 중앙아시아의 풍토병이 그처럼 빠르고 광범위하게 유럽으로 전파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몽골은 유럽을 직접 정복하지 않았지만, 유라시아를 하나의 생태적·역학적 공간으로 통합함으로써 유럽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리고 훨씬 더 심대하게 파괴했다.

대재앙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


역사의 아이러니 중에 흑사병보다 더 극적인 사례는 드물다. 전대미문의 인구 재앙은 동시에 전대미문의 사회적 변동을 가능케 했다. 인구의 급감은 즉각적으로 노동력 부족을 낳았고, 이 희소성은 수백 년 동안 불변처럼 여겨진 사회 관계들을 재조정하도록 강제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농민층의 경제적 지위 상승이었다. 흑사병 이전까지 서유럽의 농민 대부분은 법적으로 영주에게 종속된 농노였거나, 사실상 이동의 자유가 없는 의존 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노동력이 절반으로 줄자, 살아남은 농민들은 전례 없는 협상력을 갖게 되었다. 영주들은 농민들이 다른 영지로 달아나지 않도록 임금과 처우를 개선해야 했다. 임금이 오르고 이동의 자유가 확대되었으며, 봉건적 부역이 화폐 지대로 교체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것이 서유럽 농노제의 실질적 해체를 가속화한 구조적 동력이었다.


그러나 지배 계급은 이 변화를 곧장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주들과 국가 권력은 오히려 법제를 통해 변화를 억압하려 했다. 영국의 '노동자 조례(Statute of Laborers, 1351년)'는 임금을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동결하려는 시도였다. 프랑스에서도 비슷한 법령들이 쏟아졌다. 사무엘 코흔(Samuel Cohn Jr.)이 『자유에의 열망(Lust for Liberty)』에서 정밀하게 분석했듯, 이 억압적 법제들이 오히려 중세 후기 농민 반란의 직접적 촉매가 되었다. 1358년의 프랑스 자크리(Jacquerie), 1381년의 영국 농민 반란, 1382년의 플랑드르 반란, 1382년의 파리 마이요탱(Maillotins) 봉기—이 일련의 격변들은 흑사병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회적 기대와 기존 지배 체제 사이의 충돌에서 폭발했다. 농민들은 이제 자신의 노동이 가진 가치를 알았고, 그 가치에 걸맞은 자유를 요구했다.


지적, 신학적 차원에서도 흑사병이 남긴 충격은 심대했다. 수백만 명의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무런 죄 없이 끔찍하게 죽어갔다. 기도도, 성유물도, 사제의 축복도 역병을 막지 못했다. 교회는 이 재앙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제공해야 했지만, 어떤 설명도 완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신은 왜 이런 재앙을 허락했는가? 교회는 무력했고, 성직자들 자신도 대거 사망했다. 페스트 이후의 유럽에서 교회 권위에 대한 회의가 깊어지고, 개인적 신앙과 신과의 직접적 관계를 강조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확산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바르바라 터크만(Barbara Tuchman)이 그의 명저 『14세기의 거울, 먼 거울(A Distant Mirror)』에서 묘사했듯, 14세기는 기독교 문명이 스스로의 근거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의심하기 시작한 세기였다. 그 의심의 씨앗 중 하나를 뿌린 것이 몽골의 연결성이 실어 온 역병이었다.


서유럽이 흑사병의 충격 속에서도 상업 자본주의와 르네상스로 나아가는 동안, 동유럽은 전혀 다른 역사적 궤적을 걸었다. 그리고 그 분기의 뿌리에는 몽골 침공의 직접적 충격이 있었다.


1237~1240년 동안 바투 칸의 군대는 러시아 공국들을 차례로 유린했다. 랴잔(Ryazan), 블라디미르(Vladimir), 수즈달(Suzdal), 체르니고프(Chernigov)가 불탔고, 1240년에는 한때 동슬라브 문명의 중심이었던 키예프(Kiev)마저 잿더미가 되었다. 이탈리아 여행가 조반니 카르피네가 1246년 키예프를 방문했을 때, 그가 목격한 것은 무한히 펼쳐진 해골의 들판이었다. 도시는 사실상 소멸해 있었다. 이후 약 240년에 걸쳐 러시아의 공국들—이제는 공국이라는 이름만 남은, 실질적으로 킵차크 칸국(Golden Horde)의 봉신 집단들—은 매년 칸국에 공물을 바치고 인구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 '몽골의 멍에(Tatarskoe igo)'가 러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학술적 논쟁은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니콜라스 리아사노프스키(Nicholas Riasanovsky)와 마르크 스타인버그(Mark Steinberg)가 그들의 『러시아사』에서 정리한 논쟁의 구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입장—주로 19세기 러시아 민족주의 역사학에서 발전한—은 몽골 지배가 러시아를 서유럽의 발전 경로로부터 단절시켜 후진성을 초래했다는 '부정적 유산론'이다. 이 관점에서 러시아의 전제주의, 국가 권력의 집중, 시민 사회의 미발전은 모두 몽골의 유산으로 해석된다. 두 번째 입장은 더욱 미묘하다. 찰스 할페린(Charles Halperin)의 연구『러시아와 황금 호르드(Russia and the Golden Horde)』에서 대표적으로 제시된 이 관점은, 러시아 공국들—특히 모스크바 공국—이 몽골의 행정 기술, 과세 제도, 우편 시스템을 실용적으로 흡수하여 자신들의 집권화에 활용했다고 본다. 몽골의 지배는 파괴이자 동시에 제도적 이식이었다는 것이다.


진실은 아마도 두 해석의 단순한 중간 지점이 아니라 둘을 동시에 포함하는 복잡한 실체일 것이다. 몽골의 지배는 실제로 러시아의 서방과의 접촉을 제한하고, 가톨릭 유럽과의 문화적 교류를 차단했다. 르네상스의 빛이 플로렌스와 베네치아를 밝히고 있던 15세기, 모스크바는 여전히 칸의 허가를 받아야 대공을 즉위시킬 수 있는 봉신 국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모스크바 공국이 다른 러시아 공국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행정적 효율성과 군사 조직력은, 부분적으로 몽골의 제도에서 배운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몽골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이반 3세(Ivan III)의 러시아는 이미 몽골의 통치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모스크바 공국의 부상 자체가 몽골 지배의 부산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몽골은 복종적인 공국에게 세금 징수의 권한을 위탁했는데, 모스크바 공국의 지배자들은 이 기회를 탁월하게 활용했다. 그들은 몽골 칸의 총애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이웃 공국들을 흡수했다. 몽골의 지배 구조 자체가 모스크바의 팽창을 가능케 한 제도적 사다리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러시아 제국의 정치적 뿌리를 추적할 때, 그 한쪽 축에 반드시 몽골이 있다.


몽골의 충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지정학적 상상력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가장 극적인 예는 '프레스터 존(Prester John)'의 전설과 몽골이 만나는 방식이다. 프레스터 존은 동방 어딘가에 강력한 기독교 왕국을 건설한 전설적인 왕으로, 12세기부터 유럽에 광범위하게 퍼진 환상이었다. 십자군이 이슬람 세계와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이 동방의 기독교 왕이 배후에서 협공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더욱 강렬해졌다. 1241년 몽골이 출현했을 때, 일부 유럽인들은 처음에 이들을 프레스터 존의 군대로 오해했다.


사실 이 오해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몽골 제국에는 상당수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 있었다. 징기스 칸의 며느리 소르각타니 베키(Sorghaghtani Beki)는 독실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었고, 그녀의 아들들—훌레구, 쿠빌라이, 몽케—은 모두 그녀의 영향 아래 성장했다. 아바가 칸(Abaqa Khan)의 아내는 비잔틴 황제의 서녀였다. 이 배경 위에서 유럽과 몽골 일 칸국 사이의 연합 구상이 실제로 추진되었다. 역사학자 샤론 터너(Shaylon Turner)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분석한 '프랑코-몽골 동맹(Franco-Mongol Alliance)'의 시도는 외교적으로는 상당한 진지함을 보였다. 교황과 프랑스 왕은 몽골 일 칸국에 사절을 파견했고, 일 칸국의 군대와 아르메니아, 십자군이 협력하여 이슬람 세력을 공격하는 전역이 실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동맹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엇박자를 냈다. 1260년 훌레구의 군대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아바스 칸국의 잔존 세력과 시리아의 이슬람 지배자들을 몰아낼 때, 유럽 십자군은 결정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았다. 같은 해 아인 잘루트(Ain Jalut) 전투에서 이집트 맘루크 술탄국의 군대가 몽골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몽골의 서방 팽창이 멈춘 결정적 지점으로 기록된다.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가 그의 저작 『스텝의 제국(L'Empire des steppes)』에서 분석했듯, 만약 이 시점에 유럽 십자군이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몽골-기독교 연합이 이집트까지 진군했더라면, 중동의 지정학적 지형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세계의 손에 남았을 것이고,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 이집트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재편되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서 이처럼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이는 '스쳐 지나간 가능성'의 순간은 드물다.


그 가능성이 닫힌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십자군 국가들 내부의 정치적 분열, 몽골의 의도에 대한 유럽 측의 근본적 불신, 그리고 몽골이 실제로 기독교의 동맹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자임을 점차 인식하게 된 현실적 계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프랑코-몽골 동맹의 실패는 십자군 운동의 마지막 가능성을 소진시키는 데 기여했다. 1291년 아크레(Acre)의 함락과 함께 팔레스타인에서의 십자군 국가들이 최종적으로 소멸했을 때, 그 배경에는 몽골이라는 변수가 만들어낸 지정학적 복잡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인 잘루트 전투의 결과는 몽골뿐 아니라 유럽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역학 관계를 재편하는 데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몽골이 1258년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압바스 칼리프를 처형했을 때, 이슬람 세계는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문명적 중심을 잃었다. 이 충격은 이슬람 문명의 주도권이 아랍에서 튀르크와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이동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맘루크 이집트가 아인 잘루트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슬람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떠맡았고, 이 역할이 맘루크 왕조의 정통성 기반을 강화했다. 동시에 맘루크는 십자군 국가들을 최종적으로 청산하는 데도 힘을 집중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몽골의 충격은 이슬람 세계에 내부적 변용을 강제했다. 이본 할둔(Ibn Khaldun)—14세기 아랍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은 몽골의 파괴가 도시 문명과 유목 사이의 순환적 역학을 그 어느 때보다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그의 『무캇디마(Muqaddimah)』에 담긴 역사 이론은 부분적으로 몽골의 충격이 이슬람 세계에 가한 대혼란을 관찰한 산물이었다. 한 역사가의 이론적 혁신이 문명의 붕괴를 목격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은, 재앙과 지적 창조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유럽의 관점에서 이슬람 세계의 재배치는 장기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몽골의 팽창이 중앙아시아와 중동의 이슬람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안, 유럽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환경에서 내부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단기적으로는 전혀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15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유럽에 새로운 위협이 되었을 때, 이미 상업 자본주의와 군사 기술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룬 서유럽은 그 도전에 대응할 자원을 갖추고 있었다. 이 자원의 일부는, 몽골이 만들어준 교역 환경과 흑사병이 강제한 사회적 재편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이 모든 층위의 영향들을 종합할 때, 우리는 몽골의 유럽 침공이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복수의 시간대에 걸쳐 작동한 역사적 힘의 집합체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1241~1242년의 물리적 침공은 동유럽의 정치 지형과 방어 건축을 바꾸었다. 팍스 몽골리카가 구축한 유라시아 연결망은 상업 자본주의의 팽창을 가능케 했고, 동시에 한 세기 후 흑사병의 전달 경로가 되었다. 흑사병이 야기한 인구 붕괴는 봉건제의 해체를 가속화하고 농민층의 지위를 변화시켰으며, 교회 권위에 대한 의심을 심화시켰다. 러시아에서는 몽골의 지배가 240년에 걸쳐 정치 문화의 깊은 층위를 형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들이 쌓이고 상호작용하면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Robert Allen)과 그레고리 클라크(Gregory Clark) 등이 분석했듯, 흑사병 이후의 임금 상승과 노동 절약적 기술 혁신 사이의 연관성은 서유럽—특히 영국—이 최초의 산업혁명 국가가 된 것과 장기적으로 연결된다. 흑사병이 없었다면 14~15세기 서유럽의 노동 시장이 이처럼 구조적으로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기계화를 향한 경제적 유인도 달랐을 것이다. 몽골-흑사병-봉건제 해체-근대화라는 연쇄는 지나치게 단선적으로 그려져서는 안 되지만, 그 연결의 고리들이 실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 역시 이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가 동방에 대한 유럽인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팍스 몽골리카의 붕괴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이 전통적 육상 교역로를 막으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해상 경로를 개척해야 하는 압력에 놓였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떠나기 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탐독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방을 향한 항로를 서쪽으로 돌아서 가려는 그의 계획 자체가, 몽골이 열어준 세계 인식의 지평 위에서 자라난 것이었다. 레그니차의 연기가 아직 피어오르던 시절로부터 250년 후, 그 연기가 촉발한 변화들의 누적 위에서 유럽은 대서양을 건넜다.


몽골은 유럽을 정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정복하지 않음'이 오히려 더 깊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유럽을 변형시켰다. 직접 지배 없이 간접적 충격만으로 한 문명의 정치 구조, 경제 체계, 사회 질서, 심리적 기반을 흔들어 놓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몽골의 역사는 그 대답이 '그렇다'임을 보여준다.


1241년 레그니차 평원의 연기가 걷힌 자리에서, 유럽은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동유럽의 왕국들은 전쟁의 폐허 위에 더욱 견고한 성채와 더욱 복잡한 봉건적 타협을 쌓았다. 러시아는 수백 년의 종속 경험을 내면화하여 독특한 제국적 기질을 키워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몽골이 열어준 교역로를 따라 세계 상업의 중심으로 부상했고, 그 번영의 그림자 속에서 역병의 씨앗이 자랐다. 역병은 봉건제를 흔들었고, 흔들린 봉건제의 잔해 위에서 새로운 사회 계약과 새로운 경제 질서가 싹텄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의 종착점에, 유럽은 세계를 향해 팽창하기 시작했다.


몽골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은 유럽이 결국 세계 패권을 향해 나아갔다는 사실은, 역사가 얼마나 비선형적이고 때로는 잔인하게 아이러니한지를 보여준다. 재앙은 해체를 낳고, 해체는 새로운 구조를 가능케 한다. 그 구조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하느냐는 수없이 많은 변수들—기후, 제도, 우연, 그리고 인간의 선택—이 복합적으로 결정한다. 레그니차의 연기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닫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의 첫 문장이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읽는 일이 곧 우리 자신의 세계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며, 그 기원의 한 축에는 언제나 몽골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A%BD%EA%B3%A8_%EC%A0%9C%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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