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정복의 문법

by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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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정복이란 단순히 영토를 빼앗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한 문명이 다른 문명을 압도하는 방식, 즉 기술과 조직과 이념이 만나는 복잡한 방정식이다. 어떤 제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상대를 분쇄했고, 어떤 제국은 정교한 행정망으로 정복지를 내면화했으며, 또 어떤 제국은 이념의 힘으로 피정복민이 스스로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제국도 몽골이 13세기에 보여준 것만큼 짧은 시간 안에, 그토록 광대한 공간에, 그토록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례는 없다. 역사학자들이 몽골을 "역사의 이상값(outlier)"이라 부르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13세기 초, 테무진이라는 이름의 한 유목민이 분열된 초원의 부족들을 통합하고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을 때, 세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육상 제국의 탄생을 목도하게 된다. 그러나 몽골 제국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단순한 찬탄이나 공포의 서사를 넘어서야 한다. 찬탄은 파괴된 도시들의 폐허를 지우고, 공포는 그 폐허 위에서 피어난 문명 교류의 흔적을 덮는다. 로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 오스만, 그리고 대영제국과 같은 역사 속 정복 제국들과 나란히 놓을 때 비로소 몽골의 정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선명해진다. 비교는 단순히 크기와 수명을 나열하는 작업이 아니다. 각 제국이 어떤 조건 위에서 성립했고, 어떤 방식으로 지속되었으며, 무엇을 남기고 소멸했는가를 탐문하는 일이다. 그 탐문의 끝에서 우리는 인간이 권력을 조직하고 세계를 재편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몽골 제국의 규모는 여전히 경이롭다. 최전성기에 몽골의 영토는 약 2,40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했으며, 이는 현재 러시아 연방의 면적과 거의 같다. 동쪽으로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서쪽으로는 폴란드 국경과 헝가리 평원, 남쪽으로는 이란 고원과 베트남 북부까지 하나의 정치 체계가 실 오라기처럼 이어졌다. 역사학자 모리스 로사비(Morris Rossabi)는 그의 저서 『Khubilai Khan: His Life and Times』(1988)에서 몽골 지배하의 세계를 "역사상 가장 광대한 단일 육상 정치체"로 규정한다. 그러나 로사비 자신도 인정하듯, 이 규모는 곧 이 제국이 직면한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거대함은 힘의 원천이지만 동시에 해체의 씨앗이다.


반면 대영제국은 해상 패권을 바탕으로 약 3,500만 제곱킬로미터를 지배했다. 숫자만 보면 몽골을 능가한다. 그러나 영국의 지배는 대양을 건너는 간헐적 통제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도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와 남아프리카 사이에는 광활한 바다가 놓여 있었고, 영국의 권력은 그 바다 위를 항해하는 증기선과 해저 전신 케이블 덕에 가까스로 연결되었다. 반면 몽골의 지배는 연속적이고 직접적인 육로 지배였다. 카라코룸에서 베이징까지, 사마르칸트에서 바그다드까지, 그리고 다시 키예프와 크라쿠프의 문 앞까지 단일한 행정망과 역참 시스템이 이어졌다. 몽골이 구축한 역참 제도인 잠(Yam)은 오늘날의 고속도로와 통신망을 합친 것에 비견된다. 역사학자 아담 레인(Adam Lane)은 잠 시스템이 최전성기에 하루 400킬로미터 이상의 정보 전달을 가능하게 했다고 추산한다. 이는 당시 그 어떤 문명도 갖추지 못한 인프라였다.


로마와의 비교도 흥미롭다. 로마의 영토는 최전성기에 약 500만 제곱킬로미터였으니, 몽골의 5분의 1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나 로마가 지배한 공간의 밀도는 몽골과 달랐다. 로마의 제국은 지중해를 내해(Mare Nostrum, 우리의 바다)로 만드는 방식으로 구성되었고, 그 주변에 도시와 도로와 수도교가 촘촘하게 박혔다. 영토의 크기보다 통제의 깊이가 달랐다. 이 차이가 왜 중요한가. 로마는 속주민을 로마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몽골은 피정복민을 몽골화하는 데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규모와 밀도, 수평적 팽창과 수직적 통합이라는 두 가지 정복의 문법이 여기서 갈린다.


몽골 정복의 진정한 독특함은 그 속도와 방법에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4년부터 기원전 323년까지 약 11년간 동방 원정을 수행하며 소아시아와 이집트,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가로질러 인도 서북부까지 진출했다. 그가 이동한 거리는 약 3만 2천 킬로미터로, 현대의 마라톤 선수가 지구 두 바퀴를 돌아야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다. 그 거리는 놀랍지만,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채택한 전술의 핵심은 마케도니아-그리스 전통의 밀집대형인 팔랑크스와, 이를 기병 돌격으로 보완하는 복합 기동이었다. 적의 정면을 팔랑크스로 고정하고 알렉산드로스가 직접 이끄는 기병대가 측면과 후면을 강타하는 이 전법은 이소스 전투(기원전 333년)와 가우가멜라 전투(기원전 331년)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그러나 역사학자 피터 그린(Peter Green)이 『Alexander of Macedon, 356–323 B.C.: A Historical Biography』(1991)에서 지적하듯, 이 전법은 알렉산드로스 본인의 카리스마와 직관에 크게 의존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마자 제국은 후계자들(디아도코이) 사이에서 분열되었고, 그것은 한 인물의 천재성 위에 세워진 제국이 얼마나 허약한 구조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몽골은 달랐다. 칭기즈 칸이 1227년 사망했을 때, 그가 만든 제도와 구조는 계속 작동했다. 정복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가속되었다. 칭기즈 칸의 사후에도 몽골군은 러시아와 폴란드를 유린했고(1241년), 압바스 왕조의 바그다드를 무너뜨렸으며(1258년), 마침내 중국 전역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1279년).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야사(Yasa)라 불리는 몽골의 법전은 행동 규범을 제공했고, 천호제(千戶制, Arban, Zuun, Myangad, Tümen)로 불리는 십진법적 군사 행정 조직은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계속 기능할 수 있었다. 10명, 100명, 1천 명, 1만 명 단위로 구성된 이 군사 행정 단위는 부족적 연대가 아닌 순수한 기능적 연대 위에 세워졌다. 과거의 부족 구성원이 함께 복무하지 않아도 되었다. 칭기즈 칸은 부족 구조를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개인 충성심의 네트워크로 대체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은 『The Mongols』(2007)에서 이 조직적 혁신이야말로 몽골 팽창의 진정한 엔진이었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시스템이 정복을 지속시켰다는 것이다.


몽골 군사 전략의 또 다른 핵심은 첩보와 심리전이었다. 몽골군은 적진에 첩자를 침투시키고, 상인들을 통해 지리와 정치 정보를 수집했으며, 잔혹한 학살과 너그러운 항복 조건을 전략적으로 배합하여 적의 의지를 미리 꺾었다. 어느 도시가 항복하면 상인과 장인들은 보호받았고, 저항하면 주민 전체가 도륙되었다. 이 정보는 빠르게 퍼졌고, 다음 목표의 성문은 종종 전투 없이 열렸다. 군사학자 스티븐 턴불(Stephen Turnbull)은 『The Mongol Invasions of Japan 1274 and 1281』(2010)에서 몽골군의 전략이 "공포의 사전 마케팅"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의 정교함을 갖추었다고 분석한다. 이 점에서 몽골의 정복은 단순한 유목민의 약탈과는 차원이 달랐다.


로마 공화정과 제국의 팽창은 몽골과 대비되면서도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로마는 수백 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에서 지중해 세계 전체로 팽창했다. 이 팽창은 결코 선형적이지 않았다.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에게 연거푸 패배하면서도 로마는 무너지지 않았다. 칸나에 전투(기원전 216년)에서 로마는 단 하루 만에 5만에서 7만 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다. 이는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여전히 경탄하는 규모의 참사다. 그런데도 로마는 버텼다. 왜인가. 핵심은 군단(Legion)이라는 표준화된 군사 조직과, 정복된 민족들을 로마 시민권이라는 유인으로 통합하는 유연한 제도였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로마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지적했듯, 로마의 힘은 단순한 군사력이 아니라 정복민들을 로마화(Romanization)하는 능력에서 나왔다. 켈트인도, 이베리아인도, 북아프리카인도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를 로마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라틴어는 지배자의 언어에서 피지배자 스스로 선택한 언어가 되었다. 로마의 도로는 군사 이동의 수단이었지만 동시에 상업과 문화의 동맥이 되었다. 역사학자 에이드리언 골드워시(Adrian Goldsworthy)는 『Caesar: Life of a Colossus』(2006)에서 로마가 갈리아를 정복한 방식을 분석하면서, 카이사르의 군사 작전이 실은 갈리아 귀족들을 로마 체계에 편입시키는 정치적 과정과 병행되었음을 강조한다. 전쟁은 협상의 다른 방식이었다.


그러나 로마의 통합 전략도 한계가 있었다. 로마화는 도시 지역과 엘리트 계층에서는 강력하게 작동했지만, 농촌과 하층민 사이에서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브리타니아의 켈트 문화는 로마가 물러난 뒤 다시 살아났고,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는 로마와 이후 비잔티움 지배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역사학자 피터 헤더(Peter Heather)는 『The Fall of the Roman Empire』(2006)에서 로마 제국의 붕괴를 단순히 내부 부패나 군사적 패배의 결과가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로마화에 저항한 주변부 문화들의 반격으로 해석한다. 통합의 깊이가 깊어 보일수록, 그 아래서 용암처럼 끓고 있는 저항의 열기도 강렬했다.


몽골의 정복이 항상 통합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 그것은 그냥 소멸이었다. 1258년 2월,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이 바그다드의 성벽을 무너뜨렸을 때, 5백 년을 이어온 압바스 왕조는 단 2주 만에 종말을 맞이했다. 마지막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처형되었다. 방식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엇갈린다. 어떤 사료는 그가 카펫에 말아져 짓밟혀 죽었다고 하고(왕족의 피를 땅에 흘리지 않는다는 몽골의 관례에 따라), 다른 사료는 굶겨 죽였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고, 그와 함께 이슬람 세계의 상징적 중심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세계 최대의 지식 기관 중 하나였던 바이트 알-히크마(Bayt al-Hikmah, '지혜의 집')도 불길 속에서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이슬람 사가들은 티그리스 강이 서적의 잉크로 검게 물들었다고 기록했다. 물론 현대 학자들은 이 서술의 과장성을 지적한다. 역사학자 휴 케네디(Hugh Kennedy)는 『Mongols, Huns and Vikings』(2002)에서 바이트 알-히크마가 10세기 이후 이미 전성기를 지나 쇠퇴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지식 생산은 분산된 사설 도서관들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논한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의 파괴가 광범위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바그다드의 인구는 침략 전 약 100만 명 내외로 추산되었으나, 이후 수십 년간 극도로 감소했다.


역사학자 존 맨(John Man)은 『Genghis Khan: Life, Death, and Resurrection』(2004)에서 몽골의 전쟁 방식이 "항복하면 관대함, 저항하면 절멸"이라는 이분법적 논리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분석한다. 공포는 하나의 전략적 도구였다. 메르브 함락(1221년)은 그 논리의 극단을 보여준다. 당시 중앙아시아 최대 도시 중 하나였던 메르브의 주민 수십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페르시아 역사가 주바이니(Juvayni)는 그의 저작 『세계 정복자의 역사(Tarikh-i Jahangushay)』에서 이 사건을 목격자에 준하는 생생함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주바이니 자신이 몽골 지배하의 관료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서술도 이중의 비판적 독해를 요구한다. 그는 몽골을 두려워하면서도 섬겨야 했고, 그것이 그의 펜에 복잡한 색조를 입혔다.


오스만 제국과의 비교는 몽골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1453년 5월 29일, 21세의 젊은 술탄 메흐메트 2세가 1천 년의 방벽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무너뜨렸을 때, 그는 단순히 한 도시를 점령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로마 제국과 그리스도교 세계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 이슬람 세계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유럽 전역이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메흐메트는 뒤이어 놀라운 조치를 취했다. 그는 도시의 약탈을 짧은 시간으로 제한한 뒤, 동방 정교회 총대주교를 다시 임명하고,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법률과 종교를 유지할 수 있는 밀레트(Millet) 제도를 공식화했다.


역사학자 할릴 이날즈크(Halil İnalcık)는 『The Ottoman Empire: The Classical Age 1300–1600』(1973)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종교적, 문화적 관용 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 밀레트 제도는 종교 공동체별로 자치적인 사법권과 교육권을 허용하는 시스템으로, 다종교, 다민족 제국을 하나의 정치 체계 안에 묶어두는 강력한 접착제 역할을 했다.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유대인, 시리아 기독교인들이 각자의 공동체 수장을 두고 내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은 피정복민에게 어느 정도의 실질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대신 납세와 충성이라는 조건을 요구하는 교환이었다.


오스만은 약 600년이라는 긴 수명을 유지했다. 이것은 단순히 군사력의 결과가 아니다. 오스만의 관료 제도, 특히 데브쉬르메(Devşirme) 제도라 불리는 기독교 소년 징집 시스템은 기이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제국의 능력주의 관료제를 공급하는 인재 파이프라인이었다. 발칸 반도의 기독교 가정에서 징집된 소년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예니체리(Janissary) 부대나 고위 행정직으로 성장했고, 그 중 일부는 재상 자리에까지 올랐다. 가족도 토지도 없는 이들은 오직 술탄에게만 충성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권력 도전을 견제하는 균형추 역할도 했다. 몽골의 천호제가 부족 충성을 해체하고 기능적 충성으로 대체했듯, 오스만의 데브쉬르메도 혈통적 귀족주의를 해체하고 능력과 충성심에 기반한 엘리트를 만들었다. 두 제국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출발했지만, 권력 구조의 논리는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반면 몽골 제국은 칭기즈 칸 사후 50년도 지나지 않아 사실상 네 개의 울루스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의 씨앗은 몽골의 권력 구조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몽골의 쿠릴타이(Quriltai), 즉 귀족 회의를 통한 대칸 선출 방식은 강력한 지도자가 있을 때는 효율적이었지만, 후계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칭기즈 칸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고, 각자는 서로 다른 울루스를 상속받았다. 이 분배 자체가 이미 분열의 예약이었다. 역사학자 잭 웨더포드(Jack Weatherford)는 『Genghis Khan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2004)에서 오고타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로 이어지는 대칸의 계보가 점점 더 경쟁적이고 폭력적인 계승 분쟁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뭉케 칸이 1259년 사망했을 때 벌어진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사이의 내전은 제국의 통합을 돌이킬 수 없이 약화시켰다.


대영제국은 이 후계 문제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다. 의회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라는 제도적 틀 안에서 제국을 운영했기 때문에, 개별 지도자의 역량보다는 체계적인 식민지 행정 시스템이 제국을 유지했다. 빅토리아 여왕 한 명이 바뀌어도 인도 총독부는 계속 돌아갔고, 아프리카의 영국령 회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몽골이 끝내 구현하지 못한 제도적 연속성이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지속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동시에 그것의 가장 큰 모순을 배태하고 있었다. 자유와 법치를 표방하면서 식민지에서는 인종적 위계와 체계적 착취를 자행했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은 『Empire: How Britain Made the Modern World』(2003)에서 대영제국이 자본주의, 법치, 의회 민주주의, 영어를 세계에 전파한 근대화의 역군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이 없었다면 미국도, 오스트레일리아도, 싱가포르도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논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강렬한 반론에 직면한다. 경제사학자 우트사 파트나이크(Utsa Patnaik)는 2018년 컬럼비아대 출판부에서 발간한 연구에서, 영국이 1765년부터 1938년까지 인도에서 착취한 부의 규모를 약 45조 달러로 추산한다. 이는 현재 영국 GDP의 17배에 달하는 천문학적 수치다. 인도는 영국 지배 이전까지 세계 GDP의 약 23%를 차지하는 최대 경제권이었으나, 영국이 떠날 무렵에는 3~4%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법의 지배는 착취를 합법화하는 형식이 되었고, 의회 민주주의는 식민지 주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 모순은 역사 속 모든 제국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로마는 문명을 전파했지만 노예 경제 위에 그 문명을 세웠다. 오스만은 종교적 관용을 실천했지만 디브쉬르메로 아이들을 빼앗았다. 몽골은 실크로드의 황금 시대를 열었지만 그 길을 내기 위해 수백만 명을 죽였다. 제국의 역사는 항상 빛과 그림자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 노출 사진이다. 문제는 누가 카메라를 들고 있느냐다.


몽골도 수탈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정복 초기의 몽골군은 중앙아시아와 이란 동부의 주요 농업 도시들을 초토화했고, 관개 시스템을 파괴하여 해당 지역의 농업 생산성이 수 세기 동안 회복되지 못했다. 이란 동부의 카나트(qanat, 지하 수로) 시스템은 몽골 침략 이전까지 수 세기에 걸쳐 구축된 정교한 농업 인프라였다. 몽골군이 이를 의도적으로 파괴했는지, 아니면 전쟁의 부수적 피해였는지는 여전히 학술적 논쟁이 있지만, 결과는 분명하다. 한때 번성했던 지역들이 사막화되었다.


인구 데이터는 가장 냉정한 증인이다. 역사인구학자 매튜 화이트(Matthew White)는 『The Great Big Book of Horrible Things』(2011)에서 몽골 침략으로 인한 총 사망자를 약 4천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는 당시 세계 인구의 약 10%에 해당한다. 이란 고원의 경우, 몽골 침략 전후의 고고학적 정착지 수를 비교한 연구들은 정착지의 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역사학자 J. R. 맥닐(J. R. McNeill)과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l)의 연구에 따르면 이란 고원의 인구는 최소 30% 이상 감소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 감소폭이 60%에 달했다고 추정한다. 이라크의 경우, 압바스 왕조 시절 15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던 메소포타미아의 인구는 14세기 중반까지 약 2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는 연구도 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도, 오스만의 정복도, 로마의 팽창도 필적하기 어려운 규모의 인구 붕괴였다.


북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금(金) 왕조 지배하의 화북 인구는 몽골 정복 전후에 극적으로 감소했다. 중국의 역사인구학자 갈렌 로스(Galen Rowe)와 로버트 로(Robert Lowe)의 추산에 따르면, 13세기 초 약 4천만 명에서 5천만 명이었던 화북의 인구는 50년 뒤 약 1천만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숫자들이 논쟁적이고 불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제시하는 방향성은 명확하다. 몽골의 정복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단일 사건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이 파괴로부터 몽골 제국의 역설적인 유산이 탄생한다. 일단 정복이 완료되면, 몽골의 지배는 당시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상업적 자유와 이동의 안전을 보장했다. 이것이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즉 몽골의 평화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00년 동안, 카스피 해에서 황해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공간이 단일한 정치 질서 아래 놓였다. 상인들은 여러 나라의 국경을 통과하지 않아도 되었다. 화폐 시스템은 아직 완전히 통일되지 않았지만, 몽골의 잠 시스템이 제공하는 역참과 도로가 이동을 가능하게 했다.


역사학자 토머스 올슨(Thomas Allsen)은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2001)에서 몽골 제국을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문화 중개자"로 묘사한다. 중국의 도자기 기술과 화약이 서쪽으로 전해졌고, 이슬람의 천문학과 의학이 동쪽으로 흘러들었다. 올슨은 특히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의학 전통들의 교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중국과 이란 사이에 의학 전문가들이 교환되었고, 각자의 처방전과 약재 지식이 제국의 네트워크를 타고 이동했다. 이것은 군사 정복이 의도치 않게, 혹은 부분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지식 전달의 기적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은 이 연결성의 상징이다. 그가 1271년 베네치아를 떠나 중국까지 여행하고, 쿠빌라이 칸의 궁정에서 수년간 봉사하다 1295년 귀환할 수 있었던 것은 팍스 몽골리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마르코 폴로의 서술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다는 학술적 논쟁이 있지만, 그가 실제로 대륙 동서를 횡단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역사학자 티머시 메이(Timothy May)는 『The Mongol Conquests in World History』(2012)에서 몽골 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의 상업 네트워크를 재편하여 근대 세계경제의 전사(前史)를 형성했다고 논한다. 몽골이 없었다면 동서 교역의 활성화는 훨씬 나중에, 훨씬 느리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팍스 몽골리카는 한 가지 끔찍한 부산물을 낳았다. 흑사병이다. 역사학자 윌리엄 맥닐(William H. McNeill)은 그의 선구적 저작 『역병과 인민(Plagues and Peoples)』(1976)에서, 몽골이 연결한 유라시아 네트워크가 14세기 중반 흑사병의 전지구적 전파를 가능하게 했다고 논한다. 중앙아시아 어딘가에서 발원한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진하여 1347년 크림 반도를 거쳐 지중해 세계로 진입했고, 이후 7년간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을 쓸어버렸다. 연결은 번영과 재앙을 동시에 운반했다. 몽골의 정복이 만들어낸 세계는 더 빠르게 교역하고, 더 빠르게 배우고, 그리고 더 빠르게 죽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도 유사한 역설을 품고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은 헬레니즘 문화가 중동과 중앙아시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고, 박트리아와 인도 서북부에서는 그리스-인도 혼합 문화권인 헬레니즘 왕국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문화적 개방성은 알렉산드로스의 의도적인 정책이기도 했다. 그는 페르시아 귀족들을 마케도니아 군에 편입시켰고, 스스로 페르시아 왕의 복식을 채용했으며, 페르시아 공주 록사나와 결혼했다. 부하들에게는 집단 결혼 예식에서 페르시아 여성과 결혼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 수사에서 거행된 이 집단 결혼식에서 1만 명의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페르시아 여성과 짝을 이루었다고 고대 사가들은 전한다.


이는 순수한 그리스 정체성을 고집한 마케도니아 귀족들의 강한 저항을 불렀다. 부하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페르시아화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다 술자리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직접 살해되었고, 이 사건은 알렉산드로스의 심리와 권력의 성격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일화로 남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제국을 단일 민족의 지배가 아닌 혼합된 엘리트의 협력으로 운영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비전은 그의 죽음과 함께 실현되지 못했지만, 씨앗은 이미 뿌려져 있었다.


헬레니즘 왕국들은 그 씨앗이 발아한 결과물이었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그리스인과 이집트인의 문화를 혼합하여 알렉산드리아라는 전례 없는 지식의 수도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과 도서관은 유클리드와 에라토스테네스와 아르키메데스를 배출했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는 바빌론의 천문학 전통과 그리스 과학을 결합시켰다. 인도 서북부에서는 그리스 조각의 양식이 불상 제작에 영향을 주어, 헬레니즘적 면모를 지닌 간다라 불교 미술이 탄생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은 파괴하면서 동시에 혼합하고, 혼합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


이 알렉산드로스의 비전은 몽골의 실용주의와 놀랍도록 닮아있다. 몽골은 어떤 특정 종교나 문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불교, 이슬람, 기독교, 도교, 샤머니즘 모두 몽골의 지배 아래서 공존할 수 있었다. 칭기즈 칸 본인은 텡그리즘(Tengriism), 즉 하늘 신 텡그리를 섬기는 중앙아시아 샤머니즘적 신앙을 가졌지만, 이슬람 학자들과도 논쟁을 나누었고, 기독교 수도사들과도 대화를 나눴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앳우드(Christopher Atwood)는 『Encyclopedia of Mongolia and the Mongol Empire』(2004)에서 이 종교적 다원주의가 다양한 피정복민들을 제국 안으로 통합하는 핵심 기제였다고 분석한다. 오스만 제국의 밀레트 제도와 유사하지만, 몽골의 관용은 보다 즉흥적이고 비이념적이었다. 오스만은 이슬람의 우월성을 전제하면서도 타 종교를 용인했지만, 몽골은 처음부터 특별히 우월한 신이 없었다.


이 종교적 유연성이 낳은 가장 흥미로운 역사적 결과 중 하나는 이후 울루스들의 개종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들 중 일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또 다른 이들은 불교를 받아들였다. 이르칸 국의 가잔 칸(Ghazan Khan)은 1295년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이란의 몽골 지배를 이슬람 제국의 언어로 재정의했다. 쿠빌라이 칸은 티베트 불교의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고, 파스파(Phags-pa) 라마에게 전 제국에서 사용할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했다. 정복자들이 피정복지의 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역설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몽골 실용주의의 가장 탁월한 측면이었다. 그들은 통치하기 위해 현지화했다.


프랑스의 선교사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ouck)이 1254년 몽케 칸의 궁정을 방문했을 때 목격한 장면은 이 다종교 공존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여행기에 따르면, 칸의 궁정에는 기독교 수사, 이슬람 학자, 불교 승려가 함께 거하며 각자의 의례를 수행하고 있었다. 칸은 때로 각 종교의 대표를 불러 논쟁을 시키고는 그 과정을 흥미롭게 관람했다고 한다. 이것이 진정한 관용이었는지, 아니면 모든 초월적 주장에 대한 냉소적 무관심이었는지는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 공간 안에서 다양한 종교가 서로를 말살하지 않고 공존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역사 속 정복 제국들을 비교할 때 우리가 놓치기 쉬운 질문이 있다. 정복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각 제국의 성격을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드러낸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은 호메로스가 노래한 영웅들의 영광(kleos)을 향한 개인적 탐구였다. 그는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찾아가 예를 올렸고, 죽을 때까지 일리아드를 베개 밑에 두고 잤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페르시아 침략에 대한 그리스의 응징이자, 동방에 그리스 문명을 전파한다는 이념적 사명이기도 했다. 로마에게 정복은 안보와 자원 확보라는 실용적 동기 위에 '로마 평화(Pax Romana)'라는 보편 문명의 이상이 덧씌워진 복합적 기획이었다. 오스만에게는 이슬람 세계의 패권이라는 종교적, 정치적 정당성이 작동했다. 대영제국에는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는 이념적 포장이 있었다.


몽골은 어떠했는가. 이것이 가장 난감한 질문이다. 웨더포드는 몽골의 정복에서 자유 무역, 종교적 관용, 법의 지배 같은 근대적 가치의 원형을 발견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는 낭만화된 시각이다. 칭기즈 칸의 전기를 재구성하는 데 핵심적인 사료인 『몽골비사(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는 정복의 이유를 영광과 부, 그리고 유목민의 생존 논리 안에서 설명한다. 초원의 유목민에게 세계는 단순하게 이분되었다. 우리 편과 적이 있을 뿐이다. 칸은 텡그리(하늘 신)의 뜻에 따라 세계를 정복할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이념적 서사가 있었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완성된 이데올로기였는지, 아니면 성공 이후에 사후적으로 구성된 정당화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학자들은 몽골 팽창의 초기 동력을 유목민 경제의 구조적 필요에서 찾기도 한다. 유목민은 농경 세계로부터의 안정적인 물자 공급을 필요로 한다. 병기, 비단, 곡물, 직물이 필요하다. 이를 교역으로 얻을 수도 있지만, 교역이 막힐 때 대안은 약탈이다. 그러나 약탈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더 체계적인 해법은 농경 도시들을 직접 지배하고 세금을 걷는 것이다. 이 구조적 논리가 몽골 팽창의 동력 중 하나였다는 것은 역사학자 토머스 바필드(Thomas Barfield)가 『The Perilous Frontier: Nomadic Empires and China』(1989)에서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이고르 드 라체비스키(Igor de Rachewiltz)의 『몽골비사』 주석판(2004)은 이 사료의 복잡한 층위를 탁월하게 분석하며, 그것이 승리자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동시에 몽골 내부의 권력 투쟁과 가치 갈등을 노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텍스트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정복 제국들의 지속 기간도 비교의 중요한 축이다. 로마는 서로마 기준으로 약 500년, 동로마(비잔티움)를 포함하면 약 1500년간 지속되었다. 오스만은 약 600년, 대영제국은 약 300년이다. 몽골 제국은 통일 체제로서는 불과 수십 년간 지속되다 분열되었지만, 각 울루스인 이르칸 국, 차가타이 칸국, 킵차크 칸국, 원 왕조는 이후 수백 년간 다양한 형태로 존속했다. 이 분열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역사학자 르네 그루세(René Grousset)는 『The Empire of the Steppes: A History of Central Asia』(1970)에서 몽골 제국의 분열을 제국의 실패가 아니라, 유라시아 정치 지형의 근본적 재편으로 해석한다. 몽골이 뿌린 씨앗은 형태를 달리하면서 계속 자랐다.


킵차크 칸국은 러시아에 240년 이상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러시아의 중앙집권적 전제 정치가 몽골 지배의 유산이라고 주장하며, 또 다른 학자들은 이 해석을 '몽골 멍에(Mongol Yoke)' 담론으로 비판한다. 역사학자 찰스 할퍼린(Charles Halperin)은 『Russia and the Golden Horde: The Mongol Impact on Medieval Russian History』(1985)에서 러시아의 몽골 유산이 단순한 지배와 저항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는 복잡한 문화적, 제도적 상호작용이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어에는 몽골어에서 유래한 단어들이 수십 개 남아있고, 러시아의 조세 및 우편 제도는 몽골의 체계를 기초로 구축되었다. 지배자의 언어가 피지배자의 언어 안에 남는 것, 그것이 제국 유산의 가장 은밀한 형태다.


특히 무굴 제국은 몽골 유산의 가장 성숙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바부르(Babur)는 티무르의 후손이자 칭기즈 칸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델리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인도 아대륙을 정복했다. 그 손자 아크바르 대제(Akbar the Great, 재위 1556~1605년)는 역사상 가장 야심찬 종교 통합 실험 중 하나를 추진했다. 힌두교,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기독교를 아우르는 '딘-이-일라히(Din-i-Ilahi, 신성한 신앙)'가 그것이다. 아크바르는 이슬람 신학자들과 힌두 성인들,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들을 같은 자리에 불러 신학 토론을 주재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종교적 종합의 시도였다.


역사학자 아불 파즐(Abu'l-Fazl)이 기록한 무굴 왕조의 행정과 문화는, 몽골 특유의 실용적 관용주의가 인도의 다원적 맥락 안에서 어떻게 변용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무굴의 미니어처 회화는 이란 페르시아 전통과 인도 힌두 전통, 그리고 중국 회화의 영향이 뒤섞인 혼혈의 예술이었다. 타지마할은 이슬람 건축의 형식 위에 힌두 장식 전통이 세공된 혼합의 극치다. 칭기즈 칸이 뿌린 씨앗이 300년 뒤 인도의 땅에서 타지마할로 피어났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러나 계보를 따라가면 그 연결은 실재한다.


모든 정복 제국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 질문이 있다. 폭력과 창조는 함께 올 수 있는가. 역사는 불편하게도 그 답이 "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렉산드로스의 파괴 위에서 헬레니즘이 꽃피었고, 로마의 군단 발자국을 따라 도로와 법과 라틴어가 세계에 퍼졌으며, 몽골의 말발굽 소리가 잦아든 뒤 실크로드는 전례 없는 활황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 창조의 서사를 피정복민의 시각에서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메르브, 니샤푸르, 헤라트의 주민들에게 몽골의 정복은 세계사의 의미있는 전환점이 아니라 그냥 세상의 끝이었다. 페르시아의 시인 잘랄 앗딘 루미(Jalal al-Din Rumi)의 가족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중앙아시아에서 아나톨리아로 도망쳤다. 그 피란 길에서 루미는 자신의 사유를 벼리고, 결국 수피즘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종종 루미의 예를 들어 몽골의 파괴가 오히려 창조를 자극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논리의 잔인함을 보라. 그것은 피해자의 고통을 창작의 재료로 환원하는 것이다. 루미의 시가 아름답다고 해서 그의 도망이 덜 비참해지지 않는다.


역사의 서술은 항상 누구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주바이니가 기록한 몽골의 역사는 몽골 지배하에서 살아남아 출세한 이란 관료의 눈으로 쓰인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이윤을 좇는 베네치아 상인의 시각에서 쓰인 것이다. 『몽골비사』는 정복자들 자신의 자기 서사다. 그렇다면 정복당한 자들의 목소리는 어디 있는가. 그것은 대부분 침묵 속에 묻혔다. 죽은 자는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살아남은 자는 지배자의 언어로 말해야 했다. 역사학자 수발 칸(Subal Khan)과 같은 탈식민주의 사학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침묵이다. 제국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그 침묵의 무게를 인식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몽골 제국을 역사 속 정복 제국들 사이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인가. 규모와 속도라는 기준에서 몽골은 단연 독보적이다. 단 75년 만에 유라시아의 절반을 통일한 것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조직적 혁신의 측면에서 몽골의 천호제와 잠 시스템은 로마의 군단 제도와 비견될 수 있고,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더 유연했다. 문화적 관용이라는 면에서 몽골은 오스만과 공명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제도 구축과 정복지의 내면화라는 기준에서는 로마와 오스만에 미치지 못한다. 로마는 속주민을 로마인으로 만들었고, 오스만은 600년간 지속 가능한 다종교 제국을 운영했다. 몽골은 통일 제국으로서의 수명이 짧았고, 이후 울루스들은 각자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의 문화에 흡수되어 갔다.


무엇보다 몽골은, 다른 어떤 제국도 이룩하지 못한 방식으로 유라시아 전체를 하나의 연결된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그 연결은 폭력 위에서 탄생했지만, 인류 역사의 경로를 바꾸어 놓았다. 팍스 몽골리카 없이 르네상스를 상상할 수 있을까. 중국의 제지 기술, 나침반, 화약이 서쪽으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와 유럽 항해 시대의 개막은 얼마나 늦어졌을까. 역사의 가정법은 위험한 놀이지만, 몽골이 만든 연결의 세계가 이후 인류사의 가속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바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이 불편한 복잡성을 직면하는 일이다. 영웅과 악당의 이분법으로 정복의 역사를 재단할 수 없다. 칭기즈 칸은 동시대의 어느 정복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 수 있지만, 동시에 유라시아의 통합이라는 전대미문의 역사적 실험을 가능하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는 천재적인 정복자였지만, 그의 꿈은 그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부분적으로 실현되었다. 로마는 법과 평화를 주었지만 수백만을 노예로 삼았다. 오스만은 관용을 제도화했지만 그 관용의 한계는 엄격했다. 대영제국은 근대 세계의 기반을 닦았지만 그 대가를 식민지 민중이 치렀다.


역사가의 임무는 이 모순들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면을 동시에 응시하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권력과 폭력과 문명의 복잡한 얽힘을 가능한 한 정직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몽골 제국은, 그 응시를 위한 가장 도전적이고 풍요로운 텍스트다. 단순한 야만의 역사도, 단순한 영광의 역사도 아닌,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능력들, 즉 조직하고 파괴하고 연결하고 창조하는 능력이 동시에 발휘된 역사로서. 그것이 우리가 몽골을 계속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AA%BD%EA%B3%A8_%EC%A0%9C%EA%B5%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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